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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같은 동화로 교감하며 살기 위하여-
1. 밥 같은 글쓰기(독서광이었던 학창시절)
글쓰기는 내게 밥이었다. 선생의 칭찬 한 마디 밥으로 글쓰기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으니.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전학을 가서 외로운 내 마음을 써낸 글을 선생님이 칭찬해주셨다. 그때부터 글을 즐겨 쓰게 되었고 미국에서 ‘옥수수 가루’를 보내주어 ‘맛있는 옥수수죽’을 먹게 되어 고맙다는 죽에 대한 감사편지도 학교 대표로 쓰고, 백일장이 열릴 때마다 학교대표선수로 뽑혀나갔다. 1965년 6학년 때는 청년회의소 백일장 대회에 뽑혀 3박 4일 비행기 여행으로 서울 방송국들, 신문사, 워커힐, 청와대까지 방문해 밥을 얻어먹고 왔다. 어린 날 가장 잘한 일이 남들보다 책밥을 많이 먹은 일 같다. 집에는 읽을 책이 없었지만, 도서 당번 일을 끝내면 도서실 선생님은 책을 한 권씩 빌려주셨기에 도서실 당번을 자청했다. 우리 집은 호롱불을 썼는데 아버지는 기름이 닳는다고 일찍 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골방에서 이불 속에 (유리관이 덮힌) 호롱불을 넣고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학교 도서실 조무원으로 일했다. 목표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서실의 책을 다 읽어버리는 것이었다. 요즈음도 하루 한 권 정도는 읽어야 하루를 제대로 산 것처럼 배가 부르다고 느끼지만, 초등학교 때는 동화책을 즐겨 읽고 중학교 때는 성경을 위시해 "나는 누구인가?"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철학서를 즐겨 읽었다. 고등학교 때는 국내외 수필집을 비롯하여 '독심술' '체면술' '성명철학' '관상학' 같은 책들을 읽느라 밤을 세우고 헬만 헷세와 루이제 린저의 글을 사랑하고 소설을 즐겨 썼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쓴 단편소설이 해마다 학교 교지에 내 작품만 실린 기억이 난다.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와 조회시간 때 마다 이름이 불리고 단상 위에 올라가도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은 없었다. 내 꿈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칭찬해주던 그런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대학을 갔고 교단에 서면서부터 학급문집을 만들고 아이들과 한 마음으로 사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늘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걷지 못하거나 동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부모가 없는 아이, 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아픔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그런 아픈 마음이 쌓여 앓다가 곪으면 동화를 썼다.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 아이들에게 울면서 읽어주면 아이들도 울면서 들었다. 들으면서 모두 소중한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모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초창기 내 글감은 대부분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밥해 먹으면서 얻은 것이다. 더러는 내 둘레의 불우한 이웃들한테서도 글감을 얻었다. 동화 속 사람들은 절망의 벼랑에 섰다가 작은 빛살 한 줄기 보듬으며 돌아서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모자라도 감싸 안고 보듬으며 사는 사람들 이야기. 말소리를 죽이고, 내가 가진 조금의 넉넉함을 나누며 사는 사람들! 가진 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으로 따스한 마음 한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자신일 때는 위로가 되고, 남의 이야기일 때는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면서 썼다. 소위, 작가로 불리면서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글을 써야한다는 사명감을 느끼며 글을 썼다. 그러나 기껏해야, 집단 따돌림을 풍자와 반어법으로 유쾌하고 따스하게 되돌리는 동화 <왕따>, 소상공인들의 서민 생활을 되짚어보게 하는 <하늘 아저씨네 구멍가게>, 북한 어린이 돕기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그린 <옥순이의 옥수수여행>, 통일을 염원하며 쓴 <대문>정도로 머물렀다. 2010년부터 대구교대대학원에서 아동문학과 시간 강사로 나가면서부터 판타지 동화 쓰기에 심취해갔다. 계절제 수강생과 야간제 수강생 선생님들과 함께 논문집과 평론집도 읽고 고전과 신춘문예 작품들을 분석해가며 창작 활동을 하고 합평을 해왔다.
2. 책을 낸 까닭과 문단 데뷔를 한 까닭
제자들과 헤어지면서 따스하게 산 우리들의 이야기를 구성한 동화책을 밥처럼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러자면 문단 데뷔부터 해야 해서 아동문학 평론사에 글을 보내 『동전 두 개』라는 단편동화로 추천을 받았다. 그때, 조대현 선생님은 '심리 묘사와 대화 구사에 장기를 보인다.'는 평을 해주셨다. 그 다음에 이때껏 써놓은 글들을 이오덕 교장선생님께 소포로 보내보았는데 선뜻, 지식산업사에 추천해주시고 책 머리에 추천사까지 써주셨다. 그래서 처음 낸 동화책 『너는 왜 큰 소리로 말하지 않니』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매천학교를 떠나왔다. 그 다음 해에 『신라 할아버지』 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가르친 매천 아이들의 졸업선물과 대명 아이들의 졸업선물로 밥처럼 나눠주고 싶어서였다. 기다리던 책이 나왔지만 매천학교 졸업식장에는 가지 못하고 책만 한 박스 맡겨두고 왔다. 공교롭게도 재직했던 매천학교와 담임하고 있는 대명학교 아이들 졸업식 날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3. 내 책에 대한 평들과 나의 문학수업
『너는 왜 큰 소리로 말하지 않니』에 대한 평을 처음 읽은 기억은 『아동문학 평론』지 1994년 여름호에서 권오삼 선생님이 쓴 글이었다. '줌렌즈가 달린 카메라 이상으로 현장감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여성 작가답게 꼼꼼한 심리 파악에다 그것을 담아내는 솜씨가 능란하여 치밀한 묘사에 구성도 빈틈없을 정도로 깔끔하다. 이런 것은 겉모양에 불과할 뿐 정작 높이 사고 싶은 것은 세상 보는 눈과 생각이 따뜻한 마음이다.'는 평이었는데 신랄한 비평가로 알려진 분에게서 후한 평을 받고 보니 더 겁나는 채찍이 되었다. 선생님은 동시, 수필, 동화를 마구 쓰는 내게, 한 장르만 택하여 집중하라고 조언을 주셨다. 그래서 동화를 택하였다. 방송국 인터뷰도 하고 벼룩시장(신문)에서도 취재를 나왔다. 그것을 계기로 벼룩시장 신문에 2년간 동화를 게재하였다. 후에 그 동화를 책으로 엮어 어린이날 맞이 사은품으로 나누어주고 싶다고 해서 선뜻 원고료 없이 『개구쟁이 신부님과 해를 맞는 부처님』 원고를 넘겨주었다. 한국출판협회와 벼룩시장이 공동 출간으로 일만 권을 내었는데 그 중에 내게도 천 권을 주었다. 그 책을 받아 제자들과 시설, 성당 따위에 나누어주었다. 이때부터 평론집과 논문들을 찾아보며 공부를 했고 『책 밖의 어른, 책 속의 아이들(최윤정 저)』 평론집을 읽다가 내 동화책 『너는 왜 큰 소리로 말하지 않니』서평이 쓰여 있어서 놀랐다. '편 가르지 않는 아이들 세상' 이라는 제목으로 흑백 논리에 빠지지 않는 작가 정신을 짚어주었고, 후에 다른 책에서 '좀 다른 이분법'이라는 제목으로 가난한 사람을 부자와 대비시켜서 이야기하지 않는, 보기 드문 작품 중의 하나라는 평을 읽었다. 그 다음으로 쓴 책이 『신라 할아버지』였다. 신라문화연구가 윤경렬 선생님 댁을 찾아가 일제시대에 우리 문화를 가꾸기 위해 애쓰신 이야기를 듣고 진한 감동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 얘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면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며 꿈을 가꾸는데 큰 등불이 될 것 같았다. 원고를 쓰면서 반 아이들에게 틈틈이 읽어주며 반응을 살폈다. 고치고 다듬고 하다 보니 반년이 넘게 걸렸다. 이 작품을 남기고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허리 뒤틀리고 무릎에 쥐가 나도 밤 세워 애착을 가지고 썼다. 책이 나가자 『신라할아버지』에 대해 모 방송국에서 8. 15 광복절 기념일에 이수만 토크 쇼에 나와 이야기 나누자는 제의가 있었는데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워 사양하였다. 제자들한테도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 감동한 제자, 혜현이는 문학가가 되려다가 미대 공예과로 갔다. 그 후, 최윤정 평론가가 쓴 『슬픈 거인』책에서 우연히 내 책 『신라할아버지』에 대한 평을 읽었다.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박물관 선생님이 되는, 다분히 도식적인 구조의 이야기가 작품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진지한 태도로 사태의 표면적 묘사에 머물지 않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사물의 본질을 건드리면서도 흑백 논리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타주의의 편협함에 갇히지 않은 이 작가에게서 우리 어린이 문학의 밝은 미래 한 자락이 보인다.' 는 것이었다. 한편 이오덕 선생님은 한국일보(1995년 7월 28일 금요일. 제 14652호) <독서-요즘 읽은 책>꼭지에서 박경선의 『신라할아버지』를 이렇게 평해 놓았다.
“이 장편 동화는 한 공예가가 걸어온 길을 쓴 이야기다, 왜정 때 일본에 가서 일본사람 스승한테 3년 동안 인형 만드는 재주를 배워온 이수동은 돌아와 인형가게를 차린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나비학자한테서, 그 인형들이 ‘일본인형’같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하면 우리 겨레의 모습을 인형으로 빚어 낼까하여 고적을 찾아다니다가 해방이 되어 경주로 가 거기서 석굴암을 비롯한 고적과 푸른 하늘을 보고 비로소 우리 겨레의 참 모습을 찾아내게 된다. 이 공예가는 3년 동안 몸에 밴 일본인형 만드는 버릇을 고치는데 30년이 걸렸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곧 머리에 떠올린 것이 왜놈들에게 짓밟힌 우리말이다. 우리는 36년 동안 일본말 일본글로 살았다. 그래서 우리 말 속에는 일본말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고 일본말이 우리말의 뿌리를 뒤흔들어서 아주 괴상한 꼴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은 말로 생각을 하고 사람의 정신은 말에 있는데, 병든 말로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는가? 이래서는 민주고 통일이고 다 헛말이 될 수밖에 없다.(중략)
이 동화는 권하고 싶은 책이 드문 요즈음 형편에서 우리 겨레의 마음을 심어주는 반가운 책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 것이 소중하다는 마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어야겠다.”
하며 반겨주셨다.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말 사랑에 힘입어 나도 우리말살리는 겨레모임회원으로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애쓰고 있다.
『너는 왜 큰 소리로 말하지 않니』가 첫 동화집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어서 할 이야기가 많다. 1994년에 3000부 발간을 시작으로 인세를 10% 받으며 ‘어린이 도서 연구회 우수도서’로 선정되어 서울 교보문고에 베스트셀러 6위 안에 두 번 들었고 2012년에는 29쇄까지 찍었다. 첫 동화집을 들고 어린 날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무덤에 찾아간 이야기는 『아버지와 한 약속』 동화 책 표제가 되었고, 어린 날의 자전적 동화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한 약속』을 쓰게 된 동기는 강준영 선생님의 <전쟁과 촛불>을 읽다가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아픔을 독자에게 털어놓는 일인칭 문체와 내용에서 감동과 용기를 얻어서 나도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어린 날, 아버지와의 동반 자살이라는 비밀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놓을 수 있었다. 6학년이 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집장사(집을 지어서 파는 일)를 하던 아버지가 부도를 맞아 포장마차에서 풀빵장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저녁거리를 살 돈을 얻으러 아버지의 포장마차에 갔다가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꺼낸 하얀 알약을 보았다.
“아무 희망도 없고 이렇게 거지처럼 살아서 뭐 하겠노? 우리 그만 이 약 먹고 죽자.”
하셨다. 나는 먹으면 죽는 약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 집이 망한 것을 주위 친구들은 모른다고 자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자존심에 엄청 상처를 받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살고 싶어 아버지께 희망을 이야기하였다. 그 당시 가난한 초등학생 이윤복의 일기가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었고 문화교실을 단체로 다녀 온 나는 아버지께 이윤복 이야기를 꺼냈다.
“아부지, 지도 이윤복이처럼 일기 계속 쓰고 있어예. 백일장에 나가서 상 타고 청와대에까지 초대받아 갔다 왔잖아예. 그러니 아부지, 제 일기도 영화가 되어 돈 많이 벌면 아부지 다 드릴게요. 그때까지만 밥 먹여주이쇼. 살아보입시더.”
어린 딸이 한 말에 아버지가 희망을 걸었을까? 아버지는 알약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난 그 이야기를 오랜 세월 동안 가족 아무한테도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포장마차에서 풀빵 장사를 하는 것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거둔 성미를 담임선생님과 반장이 우리 집에 가져왔을 때 나는 너무 부끄러워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러면서 내가 커서 돈을 많이 벌면 우리 집처럼 어렵게 사는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주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담아 다른 원고들과 함께 지식산업사에 보냈는데 김경희 사장님이 전화를 하셨다.
"박선생, 참 감동 깊게 읽었소. 나도 그 아버지처럼 두 아이를 데리고 죽으려고 한 적이 있었소."
어려운 삶을 살아본 사람들만 나눌 수 있는 교감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목숨이 지금껏 살아있는 것은 어린 날, 무작정 희망을 가지고 일기를 진솔하게 썼기 때문이고 서툰 글이나마 아버지가 믿고 의지하며 밥 먹여 살려준 내 목숨은 글에게 ‘은인’의 빚을 진만큼 그 값을 보은해야만 했다. 그래서, 1994년,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첫 동화집과 인세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아버지는 무덤에 누워 말씀하셨다.
“글은 우리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다. 그러니 너가 글을 써서 받는 인세는 생활비에 보태지 말고 어려운 제자, 주위 사람들, 복지 시설에 나누어라.”
그래서 23권의 책을 내고 인세도 많이 받았지만 문학회에서 주는 상금까지 생활비에 보태지 않고 신부『김대건』전기를 써서 받은 원고료는 성당건립 기금으로 내었고, 지금껏 아버지와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은 문학상을 불러올 세련되고 재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동문학 평론’에서 박상재 선생이 내 동화책 『엉뚱이 뚱이(우리교육사)』에서 평했던 그 말을 그대로 가져와도 좋겠다. ‘이 책의 스토리에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박경선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경험한 소재들을 작품에 용해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랑의 가치와 교육적 효용성‘을 증거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는 평이었는데 ‘사랑의 가치와 교육적 쓸모와 보람’ 그것은 내 동화의 주류를 이루는 밑바탕 정신이었기에 그것을 일컬어 ‘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탈렌트 김수미 씨를 보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남들에게 밥 해 먹이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는 그 모습이 아이들과 학교 식구들에게 밥 챙겨주기를 즐겨하던 내 모습과 닮아 있어서다. 퇴임 뒤에도 시골집에 베나(베풀고 나눔)의 집이라 이름을 붙여서 ‘손님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입니다’는 현수막을 거실에 걸어두고, 굿네이버스에서 돌보는 아이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여 내 손으로 밥 한끼 해먹이는 재미로 산다. 내가 해주는 밥 한끼 속에 '사랑의 가치‘가 녹아 있고 이런 활동으로 건져 올린 사는 이야기를 글에 갈무리해 담아 밥 같은 효용성으로 구수하고 입맛돋아 살맛나고 배부른 동화를 쓰고 싶을 뿐이다. ’어린이 문학‘ 2020년 가을호에 실린 <시장 엄마>는 딱 한 가지만 빼고는, 요즈음 내가 사는 모습이기도 하다.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름 없는 작가로 흙과 바람, 구름처럼 흩어져 사라져가겠지만. 천상병 시인처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모든 것이 은혜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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