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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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대마을은 경주의 서쪽 낭산자락에 위치한 서현동 율동3리 자연부락이다. ‘두대’(斗垈)는 신라시대 장씨 성을 가진 만석꾼이 백토산에 올라가 마을을 굽어보니 지세가 쌀뒤주 같이 생겨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마을에 350년을 훌쩍 넘긴 보호수 회화나무 두 그루를 당목으로 삼아 음력 정월보름에 동제를 올리고 있다.
지친 마음을 달래는 약은 의외로 작은 것에 있다. 신라 천년왕도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망산자락 두대마을에는 힐링의 명약들이 있다. 불국의 땅으로 천년을 잇게 했던 보물 마애여래삼존입불상, 효현리삼층석탑, 불교를 공인했던 법흥왕릉, 희강왕릉과 민애왕릉 등의 역사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보물들을 찾아가는 길 자체가 심신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산책길로 연결돼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두대마을 사람들도 건강한 삶의 법을 익히고 있다. 마을 전체가 금연을 약속하고 금연마을 선포식을 가졌다. 마을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마을주민들의 자긍심을 드러내 보이는 마을표지석도 화강암에 새겨 마을입구에 세웠다.
이제 두대마을에서는 이별은 없다. 마을을 찾고 떠나던 율동역은 이름뿐이다. 간이역이 폐쇄되고 건물만 흉물처럼 남아있지만 방문객들을 반기던 철쭉은 여전히 붉게 피어있다. 짤그락거리는 자갈길을 걸으며 율동역을 찾아 낭만을 즐겨보는 것도 힐링이 된다.
두대마을을 돌아 반대쪽의 산자락에 신라 43대 희강왕과 44대 민애왕의 무덤이 편안한 산길에 있다. 마을을 두고 불적과 왕릉들이 빙 둘러 있으니 왕도에서 그리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 현대를 살아가는 노곤함을 풀어보는 것, 이번에는 두대마을에서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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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릉
◆벽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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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대마을은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무열왕릉을 지나는 약 5㎞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두대마을’이라는 마을이름이 붉은 빛이 감도는 큰 바위에 세로로 새겨져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영천에서 서경주역으로 가는 기찻길을 건너 산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간이역 율동역이 마을 입구에 있으나 지금은 폐쇄되어 완행열차로 오가던 낭만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철길은 경주시가지와 마을을 분리하는 느낌을 주지만 오히려 연결된 다리 같은 생각이 들게도 한다. 율동역 앞에는 작은 화단에 철쭉이 피어 오가는 길손을 맞던 모습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다. 문이 닫힌 역사 뒤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렸던 우물이 아직도 맑은 물을 담고 있다. 간이역에서 추억을 그려보는 체험도 재미있을 듯하다.
철길을 건너고 나면 곧바로 마을 어른들의 쉼터 경로당이 나온다. 경로당 앞에서 갈라지는 담벼락에는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모습과 가족들의 따뜻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벽화가 길게 그려져 있다. 경주 동국대학교 학생들과 경주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자원봉사활동으로 참여해 그린 벽화다. 벽화마을로 불릴 정도로 매년 그림이 늘어나고 있다. 올해도 방학이 되면 여지없이 학생들이 벽화를 그리기 위해 몰려올 것이다.
마을 뒤로는 경부고속도로가 개설돼 현대를 건설하는 문물들이 빠르게 이동하는 모습이 24시간 관찰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내남면 율동3리로, 1979년 행정구역 개편에는 서현동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 행정동 탑정동에 포함됐다.
마을이 형성된 망산 뒤쪽에는 민애왕릉과 희강왕릉이 있고, 길 건너편 효현리에는 삼층석탑과 법흥왕릉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마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 마을 남쪽에는 마애여래삼존입불상이 큰 바위에 그리듯 박혀 역사를 고증하고 있다.
◆율동마애여래삼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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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동마애여래삼존입상은 두대마을이 기대고 있는 망산자락 언덕에 있다. 산 속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닌 위치다. 그러나 마을에서 길을 내어 승용차로도 삼존불을 모시는 암자 턱밑까지 갈 수 있다. 암자 바로 아래 주차장을 마련해 두어 편리하게 찾아볼 수도 있지만 마을에서 산책로처럼 개설된 도로를 따라 등산하듯 느긋하게 걸어도 2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경로당에서 삼존불이 있는 암자까지 가는 길은 대나무숲길, 야생화길, 철쭉과 백일홍 등의 꽃길로 조성돼 산책로로도 제격이다. 특히 삼존불이 있는 암자에 이르러 돌아보면 멀지 않은 곳에 산이 턱 막아서지만 전망은 시원하다. 신록이 우거진 여름철 이슬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운치는 한층 더한다. 암자에서 곡차라도 내어온다면 누구나 신선이 되어 시를 읊게 될 명당이다.
삼존불은 집채만한 바위에 입체적으로 새겨졌는데 이색적이게 흰 색이 드러나 마치 화장을 한 듯하다. 1963년에 보물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암벽에 새긴 일반적인 마애불처럼 본존불의 머리와 상체는 두터운 부조로 새겼다. 하반신으로 내려갈수록 얕게 새겼고 옷 주름은 선각으로 새겨 특이하다. 얼굴은 네모에 가깝게 둥글게 새겼는데 풍만하다. 눈두덩이 두껍고,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는데 미소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게 그렸고 왼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었는데 뭉툭하게 그려 예술적 솜씨는 별로다. 광배 바깥쪽으로 불꽃무늬를 촘촘하게 새겨 전문가들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읽는다.
협시보살은 본존불보다 얇게 새겼다. 일반적인 삼존불의 협시보살이 대칭적으로 표현되는 것과 다르게 팔의 위치와 옷자락 처리 등이 다르다. 좌협시보살이 내려뜨린 왼손에 정병을 잡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
본존불은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의 서면 아미타불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나고 육계가 둥글고 낮아진 점, 광배가 두광과 신광으로 나뉜 점으로 보아 굴불사지 석조사면불보다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율동의 마애삼존불은 보물로 지정된 만큼 불교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 찾는 발길이 한산하다. 이 때문에 두대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은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며 신라시대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법흥왕릉과 효현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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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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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현리 삼층석탑
두대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2㎞ 거리에 법흥왕릉과 삼층석탑이 있다. 이곳은 효현리이지만 자연부락이 분리돼 외와마을로 불린다. 효현리는 임진왜란 때 효자가 난 마을이라 그렇게 부르고, 외와마을은 기와를 굽는 마을 바깥에 있다는 의미다.
효현리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는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67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이중기단 위에 삼층 석탑을 올린 4.6m 높이로 안정적인 모습이다. 탑 꼭대기 부분은 없어진 채로 1973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동경잡기와 삼국유사는 이곳을 애공사지로 설명하고 있어 북쪽의 법흥왕릉을 추정하는 단서가 되고 있다.
법흥왕릉 가는 길은 등산길이자 산책로다. 기계화되지 않은 논이 있어 모내기철에는 개구리 소리가 와글거려 정겹다. 마을과 가깝지만 동떨어진 야산이라 숲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종류별로 들리고 개체수가 늘어난 고라니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두대마을에서 승용차로 이동해 주차하고 500여m 걷는 길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길이 된다.
산 속의 법흥왕릉은 왕의 업적에 비해 다소 초라함을 느끼게 한다. 일반 무덤보다 조금 크게 조성되었지만 흔한 호석조차 보이지 않는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로 신라시대 처음으로 병부를 만들고 율령을 반포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금관가야를 합병해 낙동강 유역으로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건원이라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또 불교를 공인해 국교로 정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지었다.
삼국유사에 왕의 무덤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는 기록에 의해 법흥왕릉으로 추정하고 사적 제17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무열왕릉과도 2㎞ 정도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찾는 길은 한산한 편이어서 오히려 힐링코스로 좋다.
◆민애왕릉과 희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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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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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강왕릉
신라하대 왕위쟁탈전으로 죽고 죽이는 내란이 일어났던 시기가 희강왕과 민애왕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희강왕릉과 민애왕릉은 서로 500m 거리를 두고 두대마을 반대편 남쪽 산허리에 있다.
두대마을에서 남쪽으로 산허리를 끼고 4㎞ 거리를 빙 돌아가면 망성리다. 망성리에는 염불지로 불리는 못을 비롯해 여러 개의 연못이 있어 강태공들이 줄지어 찾아든다. 못 주변에 텐트를 치고 1주일씩 숙식하면서 낚시를 즐기는 팀도 있다. 산과 연못이 어우러져 마을의 정취는 자연스럽게 아름답다.
왕릉은 망성리 마을안길로 들어가야 진입로를 어렵게 찾을 수 있다. 유독 이곳의 문화유적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친절하지 않은 편이다. 마을안길 전봇대에 매달린 표지판은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낯선 탐방객들에게 혼선을 준다. 그러나 일단 진입로만 찾게 되면 시원한 산책로로 조성된 2기의 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큰 만족으로 대가를 지불한다.
신라 43대 희강왕릉과 44대 민애왕릉은 마을을 잇는 고개를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고갯마루에서 어느 한 곳을 선택해 다녀와서 남은 곳을 찾아야 된다. 왕릉으로 가는 길은 모두 숲속으로 난 오솔길이라 계절별로 큰 차이 없이 울창한 소나무숲길을 즐길 수 있다. 간간이 잡목들이 우거져 야생화와 함께 단풍을 즐기는 재미도 있다.
민애왕릉은 호석이 둘러져 규모는 크지 않지만 왕릉으로 품위를 갖추었다. 희강왕릉은 산비탈면에 흘러내릴 듯 흙으로만 봉분을 만들어 왕릉으로의 품위는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규모도 일반봉분보다 조금 크게 조성된 것뿐이다.
원성왕의 증손자인 민애왕은 흥덕왕이 죽자 희강왕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상대등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불만을 가지고 시중 이홍과 난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왕좌에 올랐다. 민애왕은 또 왕위에 오른지 1년 만에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우징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은 1년 만에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이 46대 문성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산세 좋은 곳에서 신라하대 권력다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대입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과거에서 미래를 배운다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힐링의 코스로 괜찮을 듯싶다.
첫댓글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왕 이름이 바뀌어가는 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가 될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