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격! 돌격 앞으로!'
1960년대 개발년대를 이끌었던 불도저식 행정이다.
'불도저' 행정의 상징으로는 제14대 서울시장 김현옥을 선뜻 꼽는다.
김현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있다가 1961년 5.16쿠테타 이후 최연소 부산시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항만도로 등 부산 곳곳에서 각종 개발사업을 벌인 끝에 1966년에 서울시장으로 발탁돼 주목을 받는다.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은 앞뒤 가리지않고 미친 듯이 각종 공사를 밀어붙여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도저식으로 각종 공사를 벌이는 김현옥 시장 일솜씨가 마음에 들어 그에 대한 신임도가 유별났다.
1967년 말 시작된 여의도 개발은 한강 종합개발의 신호탄이었다.
김현옥 시장은 여의도 개발의 도시설계를 당시 가장 유력한 건축가 김수근에게 맡겼다.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 김수근은 후배인 윤승중, 김원, 김석철 등에게 이 일을 맡겼다.
“한강개발계획을 세워라. 첫째,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둘째,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가설한다. 셋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함으로써 한강 홍수를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동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 있도록 한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여의도 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한강개발 3개년계획을 착안한 것은 1967년 8월이었다.
같은 해 9월 서울시는 한강개발 3개년계획을 수립했다.
주무부서인 건설부와의 협의를 통해 여의도와 영등포 사이에 샛강을 두되 소양강댐이 완공되면 폐쇄해 택지를 더 조성하고,
홍수방지 차원에서 한강 본류의 폭을 1300m로 유지하는 안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여의도의 총면적은 127만평에서 샛강 면적 등
40만평을 뺀 87만평으로 확정됐다. 여의도 방죽(윤중제)의 높이는 15.5m, 제방 너비는 21m이며, 제방 안에 조성되는 택지는
강바닥에서 13m 높이로 정했다. 총 둘레는 7.6㎞였다. ‘여의도의 몇 배’라는 대한민국 면적의 기준치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한강 폭을 1300m로 한다는 건설부와 서울시의 합의는 참으로 교묘했다.
여의도를 개발하되 강물의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밤섬을 없애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방을 쌓으려면 엄청난 골재가 필요한 마당에 코앞 밤섬 폭파로 골재를 얻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당시 밤섬의 면적은 1만 7393평으로 지금의 40배 크기였다. 어마어마한 골재가 채취됐다.
한강 개발은 추진되었다. 한강 개발의 핵심공사는 여의도 윤중제 준공. 여의도 주위에 제방도로인 윤중제를 쌓는 공사였다.
1968년 서울시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높이 16m, 둘레 7.6㎞, 폭 35~50m의 윤중제가 완성됐다.
윤중제로 여의도는 침수 피해에서 벗어나게 됐고 여의도에는 국회의사당과 아파트 등이 들어서게 된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한강 밤섬에 살던 사람들은 보금자리에서 쫓겨났다.
김현옥 시장은 여의도 개발을 위해 한강 밤섬을 폭파시켰다.
밤섬을 폭파시킨 건 한강 하구를 넓혀 물이 여의도로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밤섬 폭파 당일 발행된 1968년 2월10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한강 한가운데 돌과 모래로 된 섬 밤섬(율도)1만7300평이 없어진다. 서울시는 10일 상오 밤섬 폭파작업에 착수,
5월 말까지 제거작업을 한다. 폭파이유는 하구를 넓혀 현재 공사중인 여의도를 홍수에서 구해내기 위한 것.
500년 동안 운명의 혜택을 모르고 살아온 이 밤섬은 62가구 443명이 도선업과 어업으로 살아온 서울의 명소.
행정명칭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 6반. 도둑이 없고 질병이 없다는 이 섬엔 ‘부군신’이란 사당이 있다.
이 고장은 500년 동안 수도물과 전깃불을 모르고 살아왔으며 한강물로 밥을 지어 먹고 살아왔다는데도 탈이 없다.
또 전기대신 집집마다 부군등이라는 조롱불을 켜서 마을을 밝게 하고 있다.(…)
주민들은 서울시가 와우산에 마련한 연립주택에 집단이주 된다”
여의도 뚝 쌓기공사 등 그 개발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이다. 서울의 불도저식 개발의 문제점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1970년 4월8일 서울 마포 창전동 산1번지에 위치한 와우아파트(시민아파트) 15동이 무너졌다.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은 당시 와우아파트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시30분께에 무너졌다. 그 시각은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어시간만 늦게 무너졌더라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14가구 사람들은 한순간에 날벼락을 맞아 참혹하게 부서진 콘크리트더미 속에 파묻혀 버린 거였다.
(…) 조사단의 긴급진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의 3분의 1정도가 날림공사로 붕괴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공사가 그처럼 날림이 된 원인은 다 짐작했던 대로 무계획적인 성급한 사업 추진에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겹쳐져 있었다.
시멘트 배합상태가 정상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예정된 기일 안에 아파트를 준공시키려고
얼음이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도 시멘트 작업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공무원들이 잇따라 쇠고랑을 차는 모습이 신문마다 실리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청장이나 그 밑의 과장 정도만 쇠고랑을 찰 뿐 정작 시정의
총책임자인 시장은 자리를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와우아파트사고에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곧 내무부장관에 기용된다.
김 현옥은 68년 밤섬의 돌과 흙, 여의도 모래톱의 모래를 가져다 높이 16m, 둘레 7.6㎞의 둑을 쌓고 110일 만에
그 안쪽에 87만여평의 ‘새 여의도의 기적'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의도 주민 1200여명(200여가구로 추정됨)은
봉천동과 신정동으로 강제 이주됐다. 봉천동에서는 한 가구당 8~10평 정도의 땅을 제공했으나, 소유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천동·신정동으로 옮아갔던 사람들은 그 뒤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여의도 윤중제가 완공된 뒤 양말산 일대에는 국회가 자리잡았고, 비행장과 땅콩밭에는 방송사과 증권거래소, 증권사들, 63빌딩 등이 들어섰다.
여의도 개발에 대한 1세대 주민들의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렸다.
김부선(68)씨는 “우리가 살던 곳에 국회가 들어섰고 땅콩밭과 비행장에 훌륭한 건물들이 들어섰으니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영희(66)씨는 “양말산이나 샛강은 참 좋았는데, 그런 걸 유지하면서 개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