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학 중 그가 고려대 유니폼을 입고 뛴 경기는 단 네 경기. 그 가운데 세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정기전용 선수였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보면 그는 방치되어 있었다. 아버님이라도 생존해 계셨다면 축구 선수
의 두 다리가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돌
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들에겐 그를 지켜줄 힘이 없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었다.
"한 달 이상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쉬는 것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러다 경기가 있으면 불려나가 사나흘
연
습하고 뛰었다. 91년에는 왼쪽 발목에다 어깨까지 다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섰다.
압
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뒤뚱거리며 뛰었지만 어시스트도 하고 결승골도 넣었다.
당
시 사람들은 그런 그의 플레이를 두고 "대단한 투혼"이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무책임함에 너무나 화가 났다.
"제가 바보 같아서 그런거지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그 몸을 해가지고 경기엔 왜 나갔냐고 물었더니, 씩 웃으며 자기 탓이란다. 이야기
를 하면 할수록 미련하도록 착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는
절
대로 못할...
청소년 대표를 거쳐 그가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것은 대통령배(현 코리아컵) 대회를
앞둔 89년 6월. 그런데, 당시 대표팀 이회택 감독은 그의 경기 모습을 본적이 없다
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내내 놀다가 고연전에나 나오는 선수의 경기장면을
어
떻게 보았겠는가. "하도 옆에서 김병수 김병수 해가지고 하는 수 없이 뽑았다"는
것
이 주변의 전언이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를 본 이회택 감독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 8월
소련과
미국 원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너는 무조건 이태리에 데려갈테니 이 길로
병원
에 가서 수술을 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서는 차일피일 미룰뿐 일언반구 이야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고연전에 출전했다.
"운동하면서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딱 한번만이라도 몸이 완전한 상태에서
게임을 해보는 거였어요."
하지만,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발목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오
른쪽 발목 인대가 1인치, 왼쪽 발목 인대는 0.9인치가 늘어난 상태였다. 90년
1월에
가서야 경찰병원에서 오른쪽 발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릴적 포철 축구단
숙소
에서 만났던 최순호 선배가 수술비 일체를 부담해 주었다. 6월엔 학교측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스쿠바 대학에서 왼쪽 발목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만에 일어
났다.
그의 복귀 경기는 다시 고연전. 1년만에 그라운드에 나섰지만 그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이날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대 2로 고대가 승리. 다음날
스포츠 신문엔 "고대 황금발 김병수 - 비극은 끝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고질적인 부상이 그리 쉽게 고쳐질리 없었다. 부상이 재발한 것이다. 한참을
쉬다가
91년 1월 스쿠바 대학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나중엔 다쳐도 감각이 없었어요. 0.6인치가 늘어나면 아주 많이 다친건데 나는
1인
치가 늘어났거든요. 삐어도 삔 것 같지 않았어요."
특별한 재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몸도 추스르기 전에 경기에 출전하고,
그러
다 같은 부위를 다시 다치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으로 공식 경기에 출전한 것은 세번
째 수술을 받고 꼭 1년 뒤인 92년 1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예선이었다.
크라머 감독은 처음에 그의 선발을 반대했다. "보지도 못한 선수를 말만 듣고 뽑을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U-17 대표팀부터 그를 지켜본 김삼락 감독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세계적인 축구 이론가 디트마르 크라
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인생 50년만에 처음 만난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
고 싶다."
그리고, 운명의 콸라룸푸르. 쿠웨이트와의 첫경기를 어렵게 비긴 한국팀은 2차전에
서 바레인에게 1대 0으로 승리를 거두며 28년만의 올림픽 자력 진출길을 여는듯 했
다. 그러나, 3차전에서 복병 카타르에게 일격을 당하며 예선탈락의 위기에 몰리고
만다. 4차전 상대는 숙적 일본. 약체로 평가받았던 일본은 3차전에서 바레인에게
대
승을 거두며 느닷없이 중간 순위에서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비기는 경우에도 골득실차 때문에 본선 진출이 좌절될 판이었다.
일
본과 바레인 사이에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파상공세를 퍼부었지만 골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지루한 공방전 끝에 어느새 전
광판의 시간은 다 지나갔다. 2년 동안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때 왼쪽 사이드에서 낮은 센터링이 일본 문전으로 날아 들었다. 그리고, 골문 앞에
서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김병수였다. 빈자리를 보고 쏜살같이 뛰어들며 자세를 낮
추고 왼발을 갖다 댔다. 골이었다. 극적인 결승골이었다.
그는 환호했다. 아니 미친 사람처럼 두팔을 벌리고 트랙을 따라 달리며 무슨
소리인
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도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한국 올릭
픽팀은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을 3 대 1로 꺽으며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그해 3월
북
미 전지훈련을 떠난다. 하지만, 원정 명단에 김병수의 이름은 없었다. 다시 부상이
었다.
본격적인 J리그 출범을 앞두고 일본의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 소속 구단들은
한국
의 유망 선수 영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쓰다 자동차도 그런 구단 가운데
하나였다. 물밑 작업이 한창이던 91년 그들은 김병수를 점찍고 가계약을 맺었다.
올
림픽 최종예선이 끝나고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92년 2월
스카우트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통보한다. 재기 가능성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마쓰다는 93년 "산푸레체 히로시마"라는 이름으로 J리그에 참가했고 고려대 1년 후
배인 노정윤이 그를 대신해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
다. 이제 그의 이름은 그렇게 조금씩 잊혀져 갔다.
"그냥 걸었어요. 하루종일 술에 취해서 걸었어요. 원래 술을 못마셨는데 그땐 취하
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어요. 떠나고 싶었어요. 그냥 아무 곳이나... 그래서 자꾸만
걸었어요."
강원도 산골 천재 소년의 꿈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무표정한
얼
굴로 담담하게 이어가는 모습에서 그가 느꼈을 환멸과 절망의 깊이를 어림짐작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읽어보려고 애썼을 뿐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
야 어떻게 그 아픔을 느낄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비
디오 대여점을 하는 큰 누나 집에서 가게를 봐주며 아무런 낙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
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끼는 못속이는 것인지 조그만한 고무공을 들고 가게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리프팅을 시작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애들 가지고 노는
공으로
"묘기"를 부리자 하나 둘 구경꾼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꼬마들이 주된
관객(?)이었다. 공을 빼앗아 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마들 틈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요
리 조리 피하며 리프팅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제는 지나가던 어른들까지 관중석(?)
에 합세했다. 심지어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멈춰서서 이 희한한 남자의 재주를 지켜
봤다.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어났다.
"동네에 헬스클럽이 있었는데 심심할 때마다 운동하러 갔거든요. 그런데, 거기
관장
님이 제가 마음에 드셨나봐요. 어느날 갑자기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는 거예
요."
그의 어두움을 걷어낼 한줄기 빛같은 여인을 만났다. 다름 아니라 바로 그
헬스클럽
관장님의 딸이었다. 그런데, 나이차가 적지 않게 났다. 김병수를 만났을 때 부인
허
은영씨는 고등학생이었다. 어린 딸을 믿고 맡긴 장인도 대단한 분이지만 겁(?)도
없
이 시커먼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은영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학교 앞에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집에 바래다 줬어요. 밝고 착하고 건강
했어요. 그래서 끌렸나봐요."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복덩이를 만난 것일까. 암울하기만 하던 그의
진로
가 마침내 열렸다. 일본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JFL의 코스모 석유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 적지않은 연봉에다 부상 부위의 재수술과 재활 훈련까지 보장한다는
파격
적인 조건이었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일단 수술부터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92
년 초여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름 사이로 멀리 한국 땅이 보였다.
아픈
기억과 상처만 안겨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