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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지역의 복음 전파는 주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회,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중심지는 부산, 대구, 전주였다. 백락준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특히 ‘부산은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선교사 상임지구 중에 하나였다.’ 이곳은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생명을 바친 곳이기도 하다. 부산은 서울이나 평양보다 인구가 적었으나 제물포와 더불어 한국의 최대 관문으로 선교전략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부산 지역에 일찍이 복음이 전래되었다. 요코하마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총무 톰슨(J. Austin Thomson)은 1882년 로스로부터 복음서와 소책자를 받고 일본인 나가사카(長坂)를 매서인으로 삼아 2개월간 부산을 여행하였고, 1883년부터 188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가사카는 부산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했다.
(1) 부산과 경상도에서의 복음 확장
톰슨 이후에 부산에 수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거쳐 갔다. 1885년 11월 말 성공회 소속 중국 푸죠우주재 선교사 존 울프(Archdeacon John R. Wolfe)가 중국인 지도자 두 사람을 데리고 부산을 다녀갔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 1889년 7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이어 게일과 같은 토론토대학 출신 하디(Robert A. Hardie)가 1890년 9월 30일 그 대학 YMCA 후원을 받아 조선에 파송받은 후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기 전까지 선박 검역관으로 부산 지역을 무대로 의료 선교를 했다. 당시 세관원 영국인 헌트와 게일과 하디, 그리고 베어드 선교사 등이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 거주지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57년 호주 멜버른에서 출생하여 멜버른대학과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는 누이와 함께 한국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다니던 빅토리아교회와 몇몇 교회가 힘을 합쳐 데이비스의 한국 선교를 후원하기로 했다. 이들 남매는 호주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1889년 10월 한국에 파송됐다.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5개월 동안 열심히 한글을 배워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 후 다른 선교사들과 상의한 끝에 당시 미개척지인 부산을 선교지로 정했다. 그리고 부산지역을 답사하기 위하여 어학선생과 안내원 한 사람을 데리고 부산으로 출발하였다. 이 여행은 300리의 긴 여정으로 그에게 너무나 힘든 여행이었다. 낯선 기후와 음식이 데이비스 선교사를 괴롭혔다. 부산에 거의 도착하였을 때 데이비스는 천연두와 급성 폐렴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부산에 먼저 도착해 있던 게일 선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보를 쳤다. 전보를 받은 게일 선교사는 일본인 의사와 함께 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때가 1890년 4월 15일이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 소식은 호주교회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호주 선교회는 데이비스 선교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 선교를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모금 활동을 벌여 선교사 한 가정과 3명의 독신 여선교사를 파송하여 부산에서 선교 사역을 하게 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희생적인 정신으로 선교하였다.
데이비스가 세상을 떠난 후 누이 메리(Mary Davies)마저 본국으로 돌아가자 북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 9월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부부를 부산 지역 선교사로 파송했다. 베어드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산에 새로운 선교부를 개설할 목적을 띠고 1891년 2월 2일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선교 부지를 선정하고 부지와 집을 구하기 위해 3월에 부산에 내려갔다.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1891년 9월 미국 영사 허드(A. Heard)의 도움으로 부산에 선교부로 사용할 장소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베어드 부부는 그해 11월 부산으로 내려가 그곳에 정착해 선교를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도 부산에 도착했으나 선교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1892년 2월 5일 베어드의 일기에 의하면 10피트도 안 되는 작은 방 4개에 하디 부부, 베어드 부부, 맥케이, 3명의 처녀 선교사들, 한국어 선생, 일본인 하녀가 거주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해 어렵게
겨울을 지내야 했고, 이와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맥케이와 케리 양이 신경쇠약으로 심하게 고생했고, 1892년 1월 27일에는 맥케이 선교사의 부인 사라 맥케이(Sara Mackay)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데이비스가 묻혀 있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부산 중구 복병산 언덕에 장사되었다. 1891년 12월 북장로교 선교사 휴 브라운(Hugh M. Brown) 의사 부처가 부산에 파송받았으나 1893년에 결핵에 걸려 2년 만에 사임한 후 귀국하고, 1894년에 어빙(C. H. Irving) 부처가, 그 다음 해인 1895년에는 아담스(J. E. Adams)가 부산에 파송되어 선교사들이 보강되었다. 부산 선교는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호주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호주 여선교사들은 진 페리(Jean Perry) 양의 책임 아래 고아들을 양육하기 시작해 1895년 고아의 수가 13명이 되었다. 여선교사들은 1897년 첫 신자 심서방의 부친으로 하여금 남자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여 1897년 남자 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여선교사들은 부산 시내만 아니라 인근 촌락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의 부산 사역은 매일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참으로 고된 삶이었다. 당시 부산, 경남 지역에는 진성 콜레라가 만연하여 베어드는 자신의 일기에서‘거의 매일 이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베어드는 1892년 5월 18일 서상륜과 함께 부산과 남해안 지역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뚜렷한 결실은 없었다. 1892년 보고서에 의하면, 베어드는‘한인사회에 우리가 천주교와 다른 새 종교를 전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밖에 더 하지 못했다.’고 했다. 서상륜이 1개월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간 후 마포삼열 선교사의 권유로 1893년 4월 그의 동생 서경조가 2개월가량 베어드 선교사를 도왔다. 당시 전도는 참으로 힘들었다. ‘전도는 잘할 수 없고, 구경꾼의 욕설과 관인들의 놀림감만’되는 상황에서 순회전도가 결실로 이어지기는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서경조는 남아 달라는 베어드의 간청과
부산에 내려온 마포삼열의 간청도 뿌리치고 인천을 거쳐 소래로 돌아갔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인간적 한계를 절감한 그가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서경조가 떠난 후 1893년 12월부터 황해도 해주 출신 고윤하가 베어드(배위량)를 도와 복음을 전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2년 영선현에 거주지를 정하고, 5월경에 주택을 건축하고 옆에 지은 사랑방 예배처소를 개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오늘날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선현교회를 설립하고, 호주 선교회는 범일동 좌천동을 무대로 복음을 전해 부산진교회를 설립했다. 첫 신자가 된 맨지스(B. Menzies)의 어학 선생 심서방이 1893년 베어드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때 두 명의 한국 여인이 함께 세례를 받았고, 그해 7월 15일에는 베어드의 집에 고용된 두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베어드는 부산을 거점으로 순회선교를 통해 그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연중 7개월 정도를 집을 떠나 순회 전도를 실시해 광범위하게 복음을 전했다. 1896년 보고에 의하면 그 한 해 동안 여덟 번의 순회선교를 실시했는데, 이는 279일을 요하는 것으로 1,000마일이 넘는 긴 전도여행이었다. 그는 마산포, 진주, 김해, 동래, 상주, 안동, 경주, 울산, 밀양, 대구, 전주, 목포 그리고 공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순회전도 결과 부산 지역의 개척자 베어드는 김해, 동래, 울산, 밀양, 진주,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공주 지역까지 순회 전도를 실시해 이들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6년까지 학교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출석교인이 60명으로 늘어났다. 베어드는 노상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항구의 선원들에게도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파송되기 전 부산항과 제주도간의 연락선을 통해 이런 방식으로 복음은 제주도에까지 전달되었다.
베어드는 단순히 복음만 전하지 않았다. 부산에 도착한 베어드 부부가 제일 먼저 한 사역은 부산 지역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1896년 남학교 재학생이 100명이 되었고, 1897년 어빈(Bertha K. Irvin) 여사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들을 대상으로 야간에 실시하는 여학교에도 16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해 4월에 부산에서 첫 기독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학교에 재학하는 나이 많은 여학생이 기독교 상인과 결혼한 것이
다. 결혼식은‘한국의 관습과 미국의 관습이 혼합된 일종의 낯선 방식이었지만 그러나 예식의 방법은 분명히 기독교식이었다. 세브란스(L. H. Severance), 갬블(D. B. Gamble), 호서방이라는 한 한국인의 기부금으로 1908년에 여학교 건물이 세워졌고, 1909년 가을에는 여자 중학교가 시작되었다. 1909년에 20개 초등학교에 138명의 남학생과 142명의 여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또한 베어드 선교사 부인은 한국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선교사 부부에게 1892년 7월 5일 딸 낸시 로즈가 태어났는데, 낸시는 다음 해 여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지만 불행하게도 1894년 5월 13일(3세) 뇌수막염으로 사망하여 부산 복병산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부인은 어린 딸을 잃은 슬픔과 베어드 선교사가 경남·북 선교 여행을 떠난 후의 외로움을 달래고,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는 애절한 찬송시‘멀리 멀리 갔더니’(440장)를 한국어로 작시하여 피셔(W. G. Fischer, 무디의 음악담당)의 곡에 붙여 부르게 하는 등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참여하였다. 어빈(Charles H. Irvin, 1862-1933)이 도착한 후 그가 추진한 의료 사역은 부산 지역에 너무 적절한 선교 사역이었고, 또한 성공적이었다.
부산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이 성실하게 실행된 선교지였다.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일환이었던 사경회는 처음부터 부산에서 중요한 선교 정책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선교사역은 북장로교와 호주 선교회 두 선교회가 담당하다 호주 선교회가 급신장하면서 전체가 호주 선교회로 이첩되었다. 이로써 지방 분산정책이 견고하게 세워지고 남부 지방에서도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① 진주 지역 복음화
진주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적 중심이었고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지였다. 또 이곳은 사회신분상 계급의식이 강했고 경남지방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이 지역이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지역일 뿐만 아니라 이곳의 복음화는 인접지역 선교를 위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진주지역 선교를 경남지역의
타 지역보다 우선하였다.
진주지방에서 사역한 첫 선교사는 1902년 내한한 커를(Dr.Hugh Currell, 거열휴) 의사인데, 그는 호주에서 온 최초의 의료 선교사였고 진주지방에서 전도한 첫 외국인이었다. 그는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13년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진주 지방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사이자 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1902년 5월 19일 내한하였다. 아일랜드 북부지방인 앤트림(Antrim)에 인접한 카를로이(Carnlough)에서 출생한 그는 1892년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아일랜드 왕립대학교(Royal University of Ireland)의 퀸스(Queens)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고, 의사가 된 그는 만주지방으로 가서 선교사역에 동참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호주로 인도하셨다. 호주에서 한국 선교사인 아담슨을 만나 한국의 부산 경남지방에서 일할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자원하였다.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MFU)의 파송을 받고 1902년 5월 19일 내한하여 부산에 머물며 의료 활동을 하였다.
1905년 10월 휴 커를 부부는 박성애 씨 가족 다섯을 대동하고 부산진으로부터 진주에 와서 경남의 두 번째 호주 장로교 선교부인 진주 선교부를 개설하고, 진주면 옥봉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진주 지역 복음화를 시작하였다. 커를은 진주성내 북문 안에 있는 정경칠 씨 소유 초가 열 칸을 매수한 후 일부는 그의 가족과 박성애 씨 가족의 임시 주택으로, 일부는 임시 예배 처소로 사용하여 그 해 11월 5일부터 진주교회의 전신인 옥
봉리교회가 예배를 시작했다.
커를 의사 부부와 그의 조수인 박성애 부부는 남도 제일의 양반 도시이자 배일(背日)사상이 강했던 이곳에서 전도하는 일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견했으므로 우선 의료 활동을 통해 간접선교를 중시하였고 또 교육활동을 통해 어린아이와 청소년 그리고 부녀자를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곳 진주의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추산된다. 진주에서의 전도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의 의료 활동 때문에 이 지방에서 신임을 얻게 되자 전도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해서 임시 예배 처소로 사용하던 공간이 협소할 정도로 교회가 성장하여 1906년 4월 예배당 건축 헌금을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1906년 11월 2일 교회당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때의 상황을 진주면 옥봉리 예수교장로회 연혁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믿는 형제자매들이 밤마다 북문 안 전도실에서 회집하여 성경을 상고하며 토론도 하고 주일 준비와 주일학교 공부를 힘써함으로 믿음이 굳건하여 주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더라. … 이때 남녀 신도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낮이면 길거리에서 밤이면 각 동리로 순회하여 전도하며 또는 기회를 타서 각각 친분있는 집을 찾아보고 전도하며, 장날이면 으레 장터에서 전도하니 진주성은 복음을 전하는 소리가 그칠 사이가 없으며, 박성애와 영숙 양씨는 외촌으로 두루 다니며 전도하니 사방에서 믿는자가 일어남으로 하나님 공경하는 절차를 묻는 사람이 날마다 와서 묻고 가는 이가 많더라.”고 했다.
박성애는 후일 전도사로(1907), 장로로(1915) 봉사하였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지방 첫 한국인 목사가 되어(1919) 진주 옥봉리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커를과 박성애는 첫 거주지인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초가집의 방 한 칸을 시약소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의료 활동의 시작
이었다. 커를은 시약소를 중심으로 의료, 보건 증진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비록 시설과 장비가 미약했으나 후일 병원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연평균 7,000명이 의료혜택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당시 이 지방의 가장 흔한 질병으로는 피부병과 종양, 폐결핵, 눈병 등이 있었는데 이것은 주거환경과 비위생적 환경에서 오는 것이었으므로 환경개선, 위생교육, 검역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이 지방에서의 병원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추진하였다.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가 1906년 6월 825파운드를 보낸 이후 호주 교회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1913년에는 경남지방 최초의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이것이 봉래동에 설립된‘배돈 병원’(Mrs. Paton Memorial Hospital)이다. 이 병원은 호주장로교회의 탁월한 선교사였던 페이튼 선교사의 부인
의 서거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배돈 병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커를 의사 부부는 이곳에서 의료 사업의 시작과 함께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노력의 결과로 설립된 학교가 이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시원여학교(The Nellie R. Scholes Memorial School)였다. 이 학교는 커를 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그 이듬해 그의 집에서 진료소를 열고 집 정원에서 인접한 지역 아이들을 모아 초등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이것이 6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진주에 세워진 첫 근대학교의 시작이었다. 1907년에는 교육학을 전공한 스콜스(Miss Nellie R. Scholes)양이 진주에 파견되었는데, 그녀는 이 지역 교육책임자로서 1919년 4월 사망 시까지 값진 봉사를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학교 이름을 스콜스 선교사의 이름을 딴 시원여학교라 명명하였다(이 학교는 1906년 설립 당시에는 사립 정숙학교로 불리다가 남자 초등학교인 안동학교와 1909년에 합해지면서 광림학교 여자부로 불렸으나 1925년 여학교로 분리 독립되면서 시원여학교로 명명 되었다). 시원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39년 7월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자진 폐교하였다.
진주는 직접적인 전도에 의료선교, 교육선교가 합세하고, 성경학교도 시작되어 체계적인 선교를 착수함으로써 진주 지역 복음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호주 선교회는 1900년 엥겔이 도착한 후 적극적인 순회전도 노력에 힘입어 부산과 진주에 이어 마산에도 마산 선교부를 개설하고 선교 지경을 점차 확장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여자 선교사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여성 사역자들이 많았던 호주 장로교의 경우 교육, 사회사업 활동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순회전도를 통해 남성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었는데, 이는 호주 선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전국의 수많은 여선교사들이 남성들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훌륭하게 감당해 냈던 것이다. 이 같은 확장에 따라 북장로교 선교회는 1914년 이 지역에서 철수하고 빅토리아 선교회가 부산과 경남 지역의 대부분을 인계받았다.
② 대구와 경북 지역 복음화
경북 지역에서는 1895년 대구에 처음으로 선교 거점이 마련되었다. 대구 선교의 주역은 베어드(William M. Baird)와 아담스(安義窩, James Edward Adams)선교사였다. 1895년 베어드 부부가 부산에서 대구로 선교 거점을 옮기면서 대구지역의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896년 베어드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1895년 북장로교 연례회가 끝난 후 다시 대구와 진주를 방문했을 때 장차 선교부를 개설할 것을 염두에 두고 울산이 아닌 대구에 217달러를 주고 집 한 채를 구입했다. 베어드는 선교부 개설지로 대구를 택한 이유를 여섯 가지로 들었다. 첫째는 지리적으로 경상도의 중심에 위치했고, 둘째는 사람이 많은 마을들로 둘러싸여 약 7만 5천이라는 꽤 많은 인구가 있으며, 셋째는 접근이 용이하며, 넷째와 다섯째는 정치적 중요성과 상업적 중요성이고, 마지막 여섯째는 이미 외국인인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당시 베어드의 보고에 담긴 대구 지역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정확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산 선교부의 허락으로 베어드가 대구에 집을 구입한 것은 1896년 1월이었다. 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도 내륙에 선교부를 개설하려는 베어드의 계획에 긍정적이어서 선교부가 베어드의 대구 이주를 허락함으로써 구체화되었다. 베어드는 부산에 북장로교 선교부를 개설한 데 이어 대구 지역 복음화를 착수함으로써 개척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896년 지방 관리의 공
식적인 허락 속에 대구에 거주하며 선교 거점을 확보한 베어드는 광범위하게 순회전도하며 대구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베어드가 1896년 북장로교의 교육사업에 대한 책임을 맡아 서울로 옮겨가자 1897년 부산에서 사역하던 베어드의 처남 아담스가 대구 선교부로 와서 베어드의 사역을 계승했다. 아담스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데 이어 그 해 10월에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현 동산병원)을 설립했다. 이때 죤슨 선교사는 미국 미주리 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심음으로써 대구를 한국 사과의 시배지가 되게 하였다. 그 후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 지역에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하는 한편 1902년 제일교회 안에 대남 남자소학교와 1906년 계성중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 사역을 감당하던 아담스(안의와) 선교사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근 40년 동안 한국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바쳤으며, 그의 자
녀들(4남 1녀)도 그의 뒤를 이어 선교 사역에 헌신하였는데, 특히 그의 아들 안두화 목사는 강인구 목사, 최재화 목사와 함께 1954년 2월 5일 오늘의 계명대학교 전신인 계명기독학관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2) 전라도에서의 복음 확장
①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동기
남장로교 집행위원회는 미지의 나라인 한국에 새 사업을 시작할 마음도, 인력도,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테이트가 조선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지원서를 제출했을 때 그에게 다른 곳을 선택하도록 요구했었다. 그랬던 집행위원회가 어떻게 서로 잘 알지도 못했고, 선호하는 선교 대상지도 달랐던 일곱 사람들과 더불어 한국 선교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은 그의 저서『호남 선교 초기 역사』에서 그 이유를 세 마디로 압축하여 표현했는데, 기회, 집요함 그리고 기부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기회-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최초로 주어진 기회는 1891년 10월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있었던 전국 신학생 선교회 연합 모임에서였다. 그곳에서 테이트 씨와 레이놀즈 씨는 각자의 신학교 대표로 참석하여 서로 처음 만났다. 그들은 조선에서 온 두 명사의 연설을 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선의 개척 선교사로서 칠년을 사역한 후 첫 휴가를 받고 귀국한 언더우드 목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개화파로서 추방 당한 후 당시 밴더빌트(Vanderbilt)대학의 학생이던 윤치호 공이었다.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놀즈, 전킨 그리고 존슨 씨 등은 조선에 파송 받기를 희망하는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테이트 씨가 받았던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집요함-그들의 기도는 1891년에 시작되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비록 길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들이 조선에 가도록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 깊이 감동되어 있던 전킨 씨와 레이놀즈 씨는 매일 만나서 함께 기도하는 것을 습관화하였다.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께서 은자의 나라에 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시기를 갈구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다. …그들의 지원서가 묵살된 지 두 달 가량이 지난 어느 날 두 젊은이는‘8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라는 전보를 받았던 것이다.”
“기부-기부에는 두 가지 종류, 즉 문필적인 측면과 재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교회의 회보들에 기고한 기사들을 통해 그들은 현재 조선인들의 마음이 열려 있으므로 그곳에서 활동에 착수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을 조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당시 남장로교회는 작은 나라인 그리스에서 선교인력을 막 철수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작은 나라인 조선에 대신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가장 큰 보탬이 된 기부는 언더우드 박사의 동생으로 뉴욕 브룩클린에 살고 있던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 씨가 희사한 2,000불이었다. 언더우드 박사는 사비 500불을 희사하였다. 이것은 우리 장로교회의 자매교회 사역자들이 우리 선교회에 베풀어 준 수많은 선행들의 큰 시작이 되었다.”
② 남장로교의 전라도 선교의 시작
전라남북도 지역은 1892년 입국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거점으로 삼은 지역이다. 이는 1893년 2월에 조선에 있는 모든 장로교회의 사역자들로 구성된 장로교 공회의 선교 지역 분할 정책에 따라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이 저들의 사역지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전킨(W. N. Junkin, 전위렴), 테이트(L. B. Tate, 최의덕), 매티 테이트(Mattie S. Tate, 최매티), 레이놀즈(W. B. Reynolds,이눌서), 데이비스(Linnie Davis) 등 일곱 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6개월간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운 후 이눌서의 조사 정해원(鄭海元)을 통해 1893년 6월 52냥(미화 26달러)을 지불하고 전주 성문 밖 은송리(현재 완산동, 옛 백운정 자리)에 가옥 한 채를 구입했다. 소외계층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어 전주성 안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던 은송리에 복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복음에 비교적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정해원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1893년 6월 정해원과 그에게 전도를 받은 이들이 은송리의 초가집에서 예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전주 지역 복음화의 센터가 된 전주서문교회의 출발이다. 정해원은 1893년 자신의 가족과 함께 전주에 거주하면서 아주 적은 봉급을 가지고도 전도와 교회 관리에 열심을 다했다. 그는 암울한 시대적 환경, 점증하는 척외(斥外) 사상, 전주 토반(土班)의 의식구조, 그리고 배타심이 강한 동학운동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를 쉬지 않았다. 다른 지역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도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 전주 선교부 설립
은송리 선교 소식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선교를 준비하고 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 대단한 도전과 용기를 주었다. 1893년 가을 전위렴과 최의덕은 이미 전주에 정착하고 있는 정해원의 안내를 받으며 6일간의 어려운 여행 끝에 전주에 도착하여, 이미 정해원이 매입해 둔 선교사 주택에서 몇 주일을 지내며 이 지역의 선교 준비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유교 문화에 깊이 물든 전주 지역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 복음 전파가 쉽지 않았지만 이들은 찾아오는 구경꾼과 대화를 나누며 선교를 타진했다. 은송리 사람들은 자신들과 외모가 다른 낯선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몰려들었다.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펼쳐
놓고 팔거나 전도하며 찾아오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전킨과 테이트가 이 도시를 둘러 보러 다녔을 때 조그마한 소년들은 그들을 따라 다니며 야유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테이트는 다시금 전주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2주를 보냈다.
1893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연례회의에서 제2차 전주 선교여행에 대해 자세히 보고하였고, 남장로교 선교회는 최의덕 선교사를 전주에 상주시키기로 결정했다.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최의덕 남매는 1894년 3월 19일 3개월의
여정을 목표로 전주 은송리로 향했다. 이 전도여행에는 어학 선생 서광범과 전도부인도 동행했다. 이들은 꼬박 5일간의 여행 끝에 3월 24일 토요일 오후 8시에 전주 은송리에 도착했다.
최의덕의 여동생 최매티는 전주에 온 최초의 백인 여성이었다. 서양 여자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들이 묵고 있는 집마당과 앞길에는 생전 처음 보는 오똑한 코, 훤칠한 신장의 아름다운 금발의 서양 여인을 구경하려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심지어 한꺼번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집 울타리가 뜯기고 대문 빗장도 망가지고 말았다. 어떤 때는 4, 5백 명의 부인들과 어린이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복음 전파의 호기로 사용하셨다.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가운데서도 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구경꾼들이 매일 끊이지 않고 밀려오는 바람에 한국말을 배우고 실습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들은 도착 다음 날 주일예배 때 다섯 명 내지 여덟 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고, 5월 말까지 전주에 체류하는 동안 주중에도 12명의 남자들이 찾아와 예수교 교리를 배웠다. 이들 중 여섯 명이 세례를 받기를 청원했으나 최의덕은 이들의 신앙을 점검하여 이 중 3명 정도만 세례 받을 자격을 갖추었음을 확인했다.
은송리의 선교 소식이 남장로교 선교회 선교사들에게 알려지면서 선교사들은 대단히 격려를 받았다. 이에 고무된 이눌서 선교사와 의료 선교사 드루(A. D. Drew, 유대모)는 1894년 3월 27일 서울을 출발, 경기 강화와 인천을 거쳐 서해안을 통해 3일만인 3월 30일에 군산항에 도착했다. 군산에 도착한 이들은 그곳 참사에게 복음을 전해서 군산개복교회를 태동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다음 날인 31일 정해원의 조사와 최의덕의 영접을 받으며 전주 은송리에 도착한 이들 일행은 4월 5일까지 은송리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들이 성경교리를 배우고 주일예배도 꾸준하게 드리는 등 그동안 이루어진 선교의 결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레이놀즈 일행이 도착한 후 드려진 첫 주일예배 때 참석한 사람 가운데 박씨가 레이놀즈에게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레이놀즈 일행은 5일간의 은송리 선교 답사를 마친 후 전주를 출발, 인근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 전라도 일대의 해안 지방을 두루 둘러 남해와 부산까지 갔다가 배를 타고 제물포를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오는 긴 탐사 및 선교여행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동학운동의 발발로 전주 선교는 뿌리도 내리기 전에 철수해야 했다.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부군에서 전봉준이 반외세, 반봉건을 외치며 시작한 동학운동으로 전주 곳곳에는 척왜척양(斥倭斥洋),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글귀가 나붙기 시작했으며, 5월 31일 전주는 동학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전라도의 심장부이며 호남 일대의 으뜸가는 도성인 전주성의 점령은 동학농민군의 전 기간을 통한 전투에서 최대의 승리이자 최후의 승리”로 기록되는 사건이었다. 이미 위기를 감지한 미국 영사가 자국민들에게 철수하라는 소환령을 내려 은송리에 자리 잡고 있던 최의덕 남매는 당나귀와 가마를 타고 전주를 떠나 군산에 도착, 배편으로 서울로 일시 철수해야 했다.
1894년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으로 정국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동학란이 휩쓸고 지나간 후 전주는 무참히도 파괴 되어 있었다. 1895년 매티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전주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시의 삼분의 일이 관군과 동학도들 사이의 전투에 의해 황폐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장날에는 죄수들이 일단의 군인들에 의해 끌려나와 동학란에 대한 경고로서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예배에도 참석했고, 예수를 따르기로 약속했던 여섯 사람의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으며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방문객들이 외국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자 수백 권의 기독교 서적과 소책자가 팔려 나갔다. 1895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테이트 남매는 서울을 떠나 전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에는 해리슨(William B. Harrison)이, 1897년에는 레이놀즈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오랜 준비 작업을 거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7년 3월 6일 토요일,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예배를 드렸다. 레이놀즈와 테이트가 전주 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그 다음 날인 3월 7일 주일예배에는 8명이 참석했고, 그 다음 주 3월 15일 주일예배에는 10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2주 후 3월 28일 주일부터는 4명의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주일학교 교육을 시작했다. 1897년 7월 17일 김창국, 김내윤, 유충경의 어머니, 김창국의 어머니와 할머니 함씨 등 5명이 세례를 받았고, 이 중 김창국은 전주 신흥학교와 평양숭실중학을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 이 지역의 목사가 되었다. 1897년 8월 1일 전주에서는 처음으로 레이놀즈의 집례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다.
② 남장로교의 전라도 선교
군산 선교부 개설
군산이 복음과 접촉한 것은 1894년 3월이었다. 호남 선교의 개척자 레이놀즈와 드루가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군산을 거쳐 전주로 가던 길에 군산에서 참사를 만나 전도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895년 3월 전킨과 드루는 제물포에서 범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하여 그곳 주민들과 접촉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때 군산의 김봉래와 송영도가 주님을 영접했다. 군산에 임시 거처할 집도 구입했으나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이곳에 정착하지 못하다가 드루와 전킨은 전 가족과 함께 1896년 2월과 4월에 각각 군산으로 이주하면서 군산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후 곧 바로 데이비스(Linnie Davis)도 거기에 합류하였다.
당시 군산의 상황은 조선의 여타 지역 못지않게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은『호남 선교 초기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군산은 제물포로부터 120마일, 전주로부터 35마일 떨어져 있는 금강 하구에 위치해 있다. 1896년 군산은 부두나 우체국 그리고 전보를 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그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하며 더러웠다. 당시 한국의 유일한 교환수단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오래된 엽전이었다. 10센트 정도의 돈이 되려면 이것 100개가 필요하였다. 20달러 정도가 되면 짐꾼이 져야 할 정도였다. 쌀이나 닭고기, 달걀 등은 5일마다 열리는 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다른 물품들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조달되었다. 그것들이 제물포에서 세관을 거쳐 기선을 통해 군산으로 오기까지 선교사들은 한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복음전도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는 이곳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즉각적이었다고 니스벳은 말한다.
드루(유대모)는 자기 집에 진료소를 차려 놓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찰하였고, 전킨(전위렴)은 순번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896년 4월 6일 월요일, 김봉래, 송영도, 차일선 세 사람이 학습문답을 거쳐 7월 20일 월요일에 전킨 목사의 집 사랑에서 전킨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전라도에서는 처음 있는 세례식이었다.
전킨은 정기적으로 회중들에게 설교했는데, 그 성도들의 대부분은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토요일 밤 집에서 출발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데이비스 여 선교사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모임을 이끌었다. 군산은 전주처럼 유생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아니고 가난한 어민들로 형성된 마을이라 문맹자들이 많아 이들을 대상으로 한글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전킨 선교사의 어린 자녀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남장로교 선교회는 1896년 10월 5차 선교연례회의에서 주거환경이 별로 좋지않은 군산 선교부를 철수하고 대신 전남지방의 중심지인 나주 쪽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드루(유대모) 선교사가 서울과 군산 간의 교통의 편리성과 전도선(傳道船)으로 서해연안을 선교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군산 선교부를 존속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한 데다 군산 교우들도 군산 철수를 완강히 반대하여 남장로교 선교회는 군산으로부터의 철수보다는 군산과 나주 양쪽을 모두 발전시
키는 방향으로 수정했다.
1899년 전킨은 전도선이 정박하기에 좋은 궁말(구암리)의 산등성이와 기슭에 선교 센터와 주택을 짓고 이 지역 선교를 본격화했다. 늦가을에 건축 공사가 완료되어 12월 4일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구암교회가 설립되었다. 구암교회 설립에 참여한 전도인 장인택은 1893년 1월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사공의회 결성때에 남장로교 위원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와 함께 조선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했던 인물이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어학 선생이자 역관으로 추정되는 장인택은 군산 선교의 주역이 되었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되면서 군산항을 새롭게 정비하는 바람에 오래된 집들이 철거되고,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후 군산 예배 처소는 점점 위축되고, 대신 구암교회가 활성화되어 수년 후 수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발전했다. 1904년 교회당의 협소함을 느낀 교인들은 교회당 신축을 위해 전교인이 동참하여 1100냥으로 구암리 땅을 매입하고 건축을 시작하여 10칸으로 증축하고, 1910년 오인묵을 장로로 장립하여 조직교회로 발전하였다. 1919년에는 전 교인이 10전씩 또는 은지환, 은비녀, 새끼 4천발 등을 헌금하여 ㄱ자형 교회당을 신축하고 2월에 불 목사의 사회로 봉헌예배를 드렸다.
또한 전킨 선교사의 서재에서 그의 부인과 함께 여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치고 교육한 것이 안락소학교(현 구암초등학교), 군산영명학교(현 제일고교), 군산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드루를 대신해서 와 있던 다니엘(Thomas H. Daniel) 의료선교사와 최초의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Esther Kestler, 계순라)가 병원 선교 사역을 활발히 진행하여 구암예수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킨과 드루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순회전도에 의해 1899년 남전교회가 설립되었고, 1900년에 지경교회가 설립되었다. 저들은 군산 외에도 옥구와 부여, 서천, 한산, 보령, 남포 등 충청도 일대에까지 지경을 넓혀 갔고, 드루는 전도선으로 서해안 섬들을 방문하면서 진료와 복음 전파를 병행했다.
1899년에 윌리엄 불(William F. Bull, 부위렴)이, 이어 1900년에는 훗날 윌리엄 불의 부인이 된 엘리자벳(Miss Libby Alby Elizabeth)이 군산에 파송되어 군산 선교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 외에도 배유지(E. Bell, 1893), 하위렴(1894), 오웬(C. C. Owen, 1896), 스트레퍼(F. E. Straeffer, 1899)가 입국해서 부족한 인적 자원을 보강, 호남의 남장로교회는 북장로교 선교회에 이어 가장 큰 교세를 가진 장로교 선교회로 자리 잡았다.
•목포 선교부 개설
전라남도 지역의 선교사역의 시작은 언제나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목사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1895년 한국에 온 후 벨 목사 부부는 처음 3년 동안은 서울에서 언어도 공부하고 풍습도 익히면서 그곳에 있는 다른 선교사들과 동역했다. 벨 목사는 몇 차례에 걸쳐 남쪽 여행을 한 바도 있다. 선교 시초에 선교부는 전남의 선교사역이 광주에서 서쪽으로 20마일 가량 떨어져 있는 큰 성곽도시이며 한때 이 지역의 도청소재지이기도 했던 나주에서 개시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이 선교에 대해 너무나도 적대적인 것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목포의 개항계획을 내비쳤기 때문에 선교회는 목포에 거주지를 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때 체스터(S. H. Chester, 당시 미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의 총무)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유진 벨 목사와 같이 서울에서 조랑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육로 여행을 마치고 난 다음 이 결정에 동의해 주었다.
1897년 6월 4일 목포에 도착한 벨은 장차 선교지로 사용하기위해 목포의 외곽지대에 약 2,500평의 땅을 구입했다. 1897년 11월 27일 목포를 다시 방문한 벨은 목포 지역을 순회하고 아주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성공했다. 이곳을 선교지로 구입하고 그곳 가까이에 있는 초가집을 매입, 임시 사택 겸 예배 처소로 사용했다. 1898년 5월 15일 불과 두 달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여 목포 선교는 처음부터 탄력을 받았다. 나주에서 활동하던 매서인 변창연이 목포로 옮겨오고 1899년 초에는 스트레퍼(Miss F. Riea Straeffer)가 목포에 합류한 데다 이미 1897년 11월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吳基元)이 목포에 파송되어 진료소를 개설, 군산 선교부처럼 직접 전도와 간접 전도를 동시에 병행할 수 있었다. 유진 벨 선교사가 조사 변창연과 함께 전도하여 노학구, 김만실, 김현수, 임성옥, 지원근, 마서규, 김치도 등 20여 명이 개종했다. 그리하여 1897년 유진 벨 선교사와 레이놀즈 선교사 그리고 20여 명의 성도들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것이 목포 양동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1910년에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한국 최초의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1904년까지 1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유진 벨 선교사는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우는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에 열정을 쏟으며 신앙인들을 키워 나갔다.
이 지역의 선교는 놀랍게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이 지역 선교의 개척자 벨의 아내 로티 벨(Lottie Witherspoon Bell)이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미완의 선교를 남겨 놓은 채 아들 헨리와 딸 샤롯을 가슴에 품고 1901년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벨은 전주 선교부 선교구를 여행 중이어서 아내의 마지막 임종도 보지 못했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벨은 얼마의 안정을 취한 뒤 또 다시 목포 지역의 선교에 헌신해야 했다. 1898년 목포에 파송 받고 헌신적인 의료 선교를 펼치던 오웬은 1900년에 북장로교 선교사 화이팅(Gregoriana Whiting)과 결혼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방 의료 순회전도를 강행하다 폐렴에 걸려 1909년 4월 3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호남은 한국 복음화의 구심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06년 가을, 목포에서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이 발흥, 곧 시작될 평양대부흥운동을 예비했다.
•광주 선교부 개설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1904년 2월 목포에서 전체 선교사 수양회(All Mission Bible Conference)를 갖고 광주-나주의 선교 가능성을 다시 타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주와 광주를 3월 18일에 방문하고 돌아온 유진 벨 선교사, 의료선교사인 오웬, 프레스턴(John Fairman Preston, 변요한 선교사) 등의 보고에 따라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광주를 새로운 선교부 개설 장소로 최종 선정하고, 유진 벨, 오웬, 변창연, 김윤수, 서명석 등이 12월 19일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하였다. 유진 벨 목사는 남문 밖에 위치한 양림동 동산에 있는 몇 개의 임시 주택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교사들과 가족들 그리고 한국인 기독교인 3명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1904년 12월 25일에 광주 최초의 공식적인 기독교 첫 예배가 드려졌다. 이때 유진 벨 선교사의 부인 마가렛(Mrs. Margaret W. Bell, 1904년 유진 벨 선교사와 결혼)의 선교보고서(1905년)에 의하면 사람들이 마당과 안방과 건넌방에 꽉 들어찼으며 구경꾼까지 포함하여 약 20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와 같이 광주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이곳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는 1905년 선교 활성화를 위해 사람이 많이 사는 광주성 안에 교회를 짓기로 하고 정부로부터 북문 안에 있던 사창(司倉)터를 빌려 예배당을 착공, 1906년 가을에 완공했다. 이것이 광주 최초의 예배당인 북문안교회였다. 북문안 교회는 1919년 광주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국유지였던 교회 땅을 환수당하고 일제로부터 폐쇄당하였다. 그래서 그 해 가을 금정으로 이전하여 당시의 남문 밖인 금정 101번지에 부지를 구입하고 북문 안에 있던 예배당을 옮겨 지었다. 이때부터
남문밖교회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공식 명칭은 금정교회였다. 그 후 금정교회에 4-5백명의 교인들이 모이자 교회가 비좁아져서 양림동에 사는 교인들 300여 명이 금정교회 당회장이던 김창국 목사와 함께 광주천을 넘어 양림동의 오웬 기념각에서 1924년부터 예배를 드림으로 양림교회가 시작되었고, 1926년에 교회당을 지어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
광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녀는 바로 엘리자베스 쉐핑(Miss Elisabeth J. Shepping)이다. 그녀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간호학을 전공했으며, 이어 성경학교를 마치고 1912년 32살 때 미국 남장로교 외국선교국이 해외로 파견하는 간호 선교사로 선발되어 한국에 왔다. 광주에 와서는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 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서서평(徐徐平)이라고 지었다.
그녀는 제중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간호하면서 특별히 나병환자들을 정성껏 돌봤으며 길에서 여자 나병환자나 거지들을 만나면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목욕시키고 밥을 먹여서 자기의 옷을 나누어 입혔기 때문에 평생 두 벌 옷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일화에 의하면 엄동설한에 두 사람의 나병 환자가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달려가 하나밖에 없는 담요를 가져다가 둘로 나누어 하나씩 덮어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나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녀가 죽을 때 집에는 옥수수 두 홉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금주(禁酒), 금연(禁煙) 운동을 전개했고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했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 갈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 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 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또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지원자인 로이스 니일의 이름을 딴 것임)에서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또한 쉐핑은 가난한 여학생들이 자력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명주, 모시, 마포, 무명, 베 등의 천에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해서 번 수익금으로 그들의 학비를 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양림에 뽕나무밭을 만들고 양잠, 제사, 직포 기술을 학생들에게 보급하여 자립을 도왔다. 여성들의 교육 기회가 제한되어 있을 때 이일학교는 이 지방 여성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녀는 수많은 고아들을 돌봐주었는데 그 가운데는 양딸을 삼아 키우고 교육시켜 시집을 보내준 사람만도 13명에 달했다.
쉐핑은 1922년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제일교회인 금정교회에 부인조력회(현 여전도회)를 조직하여 신앙 수련과 협동사업, 신용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쉐핑은 1934년 6월 26일 54세를 일기로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죽는 날까지 병원이나 교회, 학교의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숨을 거두기 전 그녀는“먼저 가니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남기고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쉐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떠났다. 그녀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 병명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쉐핑은 자신이 죽은 뒤에 시신을 해부해서 병명을 밝히고 다시는 자신과 같은 병으로 죽는 이가 없도록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쉐핑의 사후에 그것이 영양실조라는 것을 알았다. 불쌍한 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눠 주다 정작 자신은 영양실조로 죽어 간 것이다. 골다공증으로 뼛속까지 아파도 자신의 배를 채우지는 않았다. 쉐핑이 남긴 재산은 고작 금전 7전과 옥수수가루 2홉이 전부였다. 장례식은 당초에 교회장으로 할 계획이었으나 광주의 지방 유지들에 의해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광주 기독병원 뒤쪽 선교사 동산묘지에 안장되었다.
•순천 선교부 개설
광주 선교부에 이어 1912년에 순천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순천선교부의 개설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광주에 거점을 마련한 오웬이 순천에 와서 복음을 전파한 후 몇 교회를 설립하였고, 1909년에 프레스턴과 벨이 이곳에 와서 보니 이미 순천에 50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목도했다. 이들은 신앙문답을 실시하고 원입교인을 세우는 등 이 지역의 교회를 관리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프레스턴이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1910년부터는 봄과 가을 정기적으로 두 차례씩 문답을 실시하여 이곳 교회를 관리해 나갔다. 1910년에 니스벳(Nisbet)이 처음으로 순천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1911년에는 순천에 선교기지를 구입해 정식으로 순천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1912년 광주 선교부에서 코잇트(Robert Thornwell Coit, 高羅福)와 스윈하트(Martin Luther Swinhart, 徐路得)가 순천에 선교사 주택을 건축하고 그 이듬해 4월 코잇트와 프레스턴 가족이 순천으로 이사했다. 이어 두 명의 여 선교사 비거(Meta Louise Beggar, 백미다)와 두피(Lavalette Dupuy, 두애란), 그리고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한 의료 선교사 헨리 티몬스(Henry Loyala Timmons, 김로라), 순천 선교의 공로자 크레인(John Curtis Crane, 구레인)이 합류해 순천 선교 역시 놀라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순천에서도 희생이 적지 않았다. 주택 공사가 채 완료되기도 전에 입주하여 비좁은 가운데 아래층에서 생활하다 코잇트 선교사의 두 자녀가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남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에 파송된 어느 선교회 못지않게 복음 전파와 사회적 책임의 모델이 되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교회와 병원과 학교를 설립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들에게 영생의 복음을 전해 새 생명을 얻게 했고, 육신의 질병에 허덕이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병원을 설립하여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졌으며, 기독교 근대 교육을 실시, 어두웠던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