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시구(始球)를 하면서
대여섯 해 전까지 내게 숙원이 하나 있었다. 오죽하면 이렇게 중얼거렸을까? 죽기 전에는 이루어져야 하는데…….이쯤에서 이지렁을 부려 보자. 그건 서민 중의 서민인 내가 프로 야구 롯데와 다른 팀의 경기 전에 시구를 한 번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미국에서 온 로이스터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본래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 장문의 육필 편지를 띄웠다. 내용이야 뻔하다. 평생 교직에 몸 담아온 사람으로서 병을 얻어 누운 지 오래다. 이제 저승으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부산에서 살아 온 기념으로 시구를 한 번 하고 싶다고. 물론 그 편지가 로이스터에겐 전달될 턱이 없었으리라. 만약 그걸 읽었다면 그는 혼자서 코웃음을 쳤겠지.
그래도 나는 우썩우썩 나아가기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우세할 바에 단단히 하자꾸나! 그가 읽지 못하는 내 수필집 서너 권이며 별도로 내가 취입한 부산 노래 19곡 씨디도 우송했다. 동기야 어떻든 끈질긴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셈이라 할까? 게다가 앞서의 편지 내용을 재구성해서 <<수필>>부산 동인지에다 싣기도 했다. 집념은 무서웠다.
실패해도 깨달은 바가 컸다. 프로 야구 시구라는 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스타, 그래 인기인 말이다. 예를 들어 가수나 탤런트, 배우, 하다못해(?) 개그맨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퇴직 교장, 노인 대학 학장, 수필가(소설가) 따위로는 어림없을밖에.
로이스터는 안간힘을 썼지만 지도력의 한계를 드러내었고 롯데도 정상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귀국했고 양승호가 이어 그 자리에 앉았다. 역시 역부족, 그도 고만고만한 성적을 내고 물러났다. 그런데 나는 끝내 마운드에 오르는 걸 포기하지 못했으니 가관이랄까?
그러다가 이번엔 사뭇 다른 방법으로 그 과녁을 겨냥했다. 시구 대신 ‘애국가 독창’을 시위에 건 것이다. 마침 태진아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가수협회 회원이 되었으니 명분 하나를 축적한 셈이었다. 가끔은 유치원 어린이들이 애국가를 마운드 근처에서 부르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됐다!
애국가는 공식 석상에서 몇 백 번 내지 1천 번 정도는 불러왔지 않은가? 나는 또 점점 자기도취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틈을 봐 다시 연필을 손에 쥐었다. 김시진 감독 보다 높은(?) 사람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평소에 존경해오던 인사다.
생각보다 이르게 연락이 왔다. 결정적 키를 쥐고 있는 또 다른 인사는 미국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시차가 다른데도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귀국하면 곧바로 연락하겠다고. 그러고 나서 다시 열흘 후 나는 전화를 받는다. 롯데 구단의 관계자로부터. 그런데 너무나 뜻밖이다. 나이도 있고, 암 수술 직후인데 무리할 필요 없이 애국가 독창 대신 시구를 해 달라는 게 아닌가? 그가 내게 덧붙였다. 시구가 원래 꿈이었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시구가 애국가 독창보다 훨씬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단다. 나는 단박에 그 제안에 따르겠다고 대답했고말고.
당장에 운동구점에 가서 글러브 두 개와 야구공을 샀다. 야구공은 시합용 연습용 한 세트(두 개)씩이다.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가 18. 44미터라는데 그런 데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얼마든지 앞당겨 가도 되니까. 그런데 내가 공을 정작 던지려고 와인드업 하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박장대소다. 야구의 야(野) 자도 모르는 자기가 봐서도 엉망이라는 것이다. 리듬체조 선수나 여자 가수들이 걸핏하면 한 쪽 다리를 공중에 높이 들어 올리던데(양쪽 다리가 180도?) 그 흉내를 내려느냐고…….그러다가는 공이 포수 글러브 안에 닿게 전 내가 나둥그러질 게 뻔하다나? 아내의 말에 따라 폼을 고쳤다. 사실 시구야 때로는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매체일 수 있으니 실수가 미덕일 수 있지만.
나머지 몇 가지. 배번을 고르라는데 나는 내심 학교 후배 손아섭 선수의 31번을 택해 놓고 있다. 유니폼 사이즈는 100으로 한다. 스무 날 채 남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시민 앞에 나서는 처지라 조금은 날씬해 보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래 체중을 66킬로그램에 맞추기로 했다. 수술 전 73이었다. 그 목표를 앞에 두고 목표를 두고 나는 목하 씨름 중이다.
마지막 하나 걸리는 것.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마운드에 서는가가 문제다. 교육자? 시민 대표? 약간은 관련이 있겠지만 어림없다. 문인? 얼토당토않다. 내 진단은 ‘암 투병하는,늙은 대중가요 가수’로 귀착되는 것 같다.(자랑스런 부산 시민상 수상자도 이유가 되겠지.) 까짓 거 아무래도 좋다. 그렇다면 농(弄)으로라도 결론을 내자. 이제 죽어도 좋다? 그러나저러나 인간사 모두 숙명이란 걸 깨달았다 하자. ‘시구’에서 ‘애국가 독창’, 다시 ‘시구’…….잘 宿 자 한 자, 몇 번이나 끼적거려 본다.
12장
첫댓글 이원우 교장선생님....어쩜 이렇게도 다양한 수필을 많이 쓰시는지...더운 날씨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회장님 갑사합니다. 부산은 제 고향입니다. 그곳 프로구장에서 롯데를 응원하는 뜻에서 애국가를 독창하고 싶었는데, 결국 시구로 낙착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저는 서울에서 부산노래를 부르고, 더 북쪽으로 나아가 26시단에서 진중가요를 열창하고 싶습니다.
박희선 회장님의 배려-그 옛날 제가 아플 때 문병을 와 주신- 정말 잊지 못합니다. 송두성 교장 선생님도---.이해주 학장님/ 박홍길 학장님, 회장님, 저 진고개 식당 앞 노래방에서 몇 시간 보내던 추억 잊을 수 없지요. 이해주 학장님의 '전선 야곡'을 제가 근무하던 옛 부대의 어린 장병들과 열창하다니--.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