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주의저널 <일다> '지구화 시대 이주의 감수성' 기획에 게재된 기사의 원문입니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312§ion=sc4§ion2=%C0%CC%C1%D6
라오스 사람처럼 살기, 지구의 마을사람으로 살기(2)
- 외국 사람이기보다 한 동네사람으로 살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라오재생가능에너지지원센터 센터장 이영란
국경너머 이웃 마을로 오가며 농사짓고
“바로 이 산 너머가 타이에요.”
기숙사에 전등 하나 켤 수 있는 태양광발전기가 절실한 또 하나 산간학교를 찾아가는 길이다. 거의 탐사에 가까운 이 고행 길을 자처해 안내해주고 계신 도교육청 아짠(선생님) 씽캄이 산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아짠 손가락 끝에 걸려있었지만 내겐 꽤나 멀어 보였다.
“저기 가려면 얼마나 걸려요? 외국인데 넘어갈 수는 있나요?”
라오스의 서쪽 국경은 모두 타이와의 경계다. 따라서 라오스의 서북쪽에 위치한 싸이냐부리 도(道)의, 마찬가지로 그 서북쪽에 있는 싸이싸탄(Xaysathan) 군(郡)의 경계도 모두 타이와의 국경이 된다. 세계 최빈국 라오스에서도 빈곤한 지역으로 꼽히는 싸이냐부리에서 2010년에야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한 이곳 싸이싸탄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여서 변방이기도 한 곳이다.
“가까워요. 걸어서 서너 시간 정도. 여기 사람들은 그냥 넘어 다니며 살아요.”
서너 시간이 가깝단다. 하긴 이 지역에서 바로 옆 이웃 마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니. 서너 시간은 마을 안에 있는 초등학교 말고 이웃 큰 마을에 있는 중학교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의 중학생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서너 시간을 걸어 등교하는 게 보통이다. 새벽같이 집을 떠나도 해지기 전에 학교에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사는, 통학하는데 열두 시간을 넘게 들여야 하는 학생들은 아예 (대부분 갈대와 대나무로 지은) 학교 기숙사에서 잔다. 여기선 이 정도는 걸려야 좀 먼 곳이라고 불린다.
싸이냐부리에 나 같은 외국인은 넘어갈 수 없는, 내국인만 넘어갈 수 있는 출입국검문소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싸이싸탄에 그런 것도 없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검문소는 고사하고 지도에 표시된 길이든 표시가 안 된 길이든, 아니 보통은 길이 아닌 길로 그냥 넘어 다니며 농사짓고 산단다.
같은 말을 쓰는 외국사람, 다른 말을 쓰는 이웃사람
드디어 두 번째 학교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아짠들이 보이지 않는다. 까만 씬(라오스 전통 치마)에 하얀 웃옷, 학생 차림의 소녀에게 아짠 씽캄이 물었다. 그런데 이 학생 수줍어하는 게 아니라 뭔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눈치다. 아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냥 좀 기다려 보자며 그늘에 걸터앉는다.
라오스어는 방콕 말을 중심으로 따져도 타이어와 95% 이상 같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스 사람들은 문해력이 떨어지더라도 타이 텔레비전 방송을 거의 문제없이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라오스와 타이가 접해있는 라오스의 서북 지역, 타이의 북서 지역(이싼 지역)의 말이 거의 똑같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는 지배적인 민족들(라오족과 타이족)을 위주로 따졌을 때의 얘기다. 한국에서 온 나나 읍내에서 온 아짠이나 여기 소수민족 빠이족(타이어로는 쁘라이족이라고 불린다. 라오스 남부 캄보디아 지역에서 이동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수민족이다)에게 말이 안 통하기는 마찬가지다.
싸이냐부리는 주로 몽족으로 대표되는 고산족, 크무족 등 라오스의 선주민으로 보이는 소수민족, 강을 따라 평야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라오족 등에 속하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고르게 어울려 살아가는 지역이다. 바로 이웃한 마을이라도 다른 말을 쓰는 전혀 다른 소수민족이 살 수도 있다.
한 마을 안에 서너 개 소수민족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당장 두 번째 태양광발전기가 설치된 이 학교가 있는 마을이 그랬고, 올 해 첫 번째 에너지자립마을 만들기에 들어가는 마을이 그렇다. 앞마을은 빠이족이 다수고 라오족과 다른 소수민족이, 뒷마을은 따이족, 크무족, 라오족이 고르게 섞여 사는 곳이다.
라오스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소수)민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들은 시골 또는 산간 오지에서나 겨우 발견할 수 있는 드믄 것이 아니다. 조용한 싸이냐부리 읍내에서도, 요즘 한국 사람들이 주로 찾는 관광지인 왕위양(Vangvieng)에서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도(古都) 루앙파방(Luangprabang)에서도, 심지어 수도 위양짠(Vientiane)에서도 이들의 어울려 살기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다.
바벨탑 이야기를 다르게 읽다
라오스에서 텔레비전 뉴스는 적어도 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방송된다. 일반적으로 라오스어, 프랑스어, 영어, 몽족어, 크무족어 등이다. 처음 라오스에 왔을 때도 프랑스어와 영어는 피식민지로서의 역사, 최근 세계화의 경향 때문이려니 하고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나중에 라오스어를 좀 익히고 났을 때, 아나운서들이 소수민족 복장을 하고 전하는 뉴스가 라오스어가 아닌 다른 소수민족의 언어들이었음을 알고는 정말 무척 놀랐다.
라디오 방송은 지역 방송이 대부분이어서인지 뉴스만이 아니라 소수민족 언어를 쓰는 프로그램들이 더욱 많다. 얼핏 차를 타고 가다 듣는 방송들은 그 자유분방함이 한국의 팟캐스트, 마을 방송국 못지않다. 라오스의 각종 지역 신문, 기관지들에는 우리가 예전 스포츠 신문 같은 매체에 짧은 영어, 중국어, 일어 대화문을 고정으로 실었던 것처럼 그 지역 주요 소수민족들의 언어들이 고정란에 소개되고 있다.
내가 파견됐던 읍내 중학교의 몽족 학생 쏨분은 주말마다 싸이냐부리 라디오 방송국에 가 몽족어 녹음 자원 활동을 했더랬다. 물론 지금 그는 라오스어로만 된 국정교재로 공부하고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예전에 몽족 문자가 있었는지 없었다면 몽족이 어떤 이족의 문자를 차용했었는지 역사는 모른다.
그러나 라오스 사람들의 이런 어울려 살기는 일상에 아주 짙게 배어들어있다.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이웃과 함께 사는 방법, 그들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천천히 살펴보고 오래 귀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같은 말을 쓰는 이웃에게도 마찬가지다. 말의 속도가 약간 빠를 뿐이지, 같은 말이라도 너와 내가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듯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반복적으로 말하고 듣는 태도가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바벨탑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야훼께서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쌓는 인간들을 막기 위해 그 인간들의 말을 서로 다르게 만들어버렸다는. 인간들은 말이 달라지자 서로 싸우느라 탑을 쌓을 수 없었다는. 만약 이 이야기가 라오스에서 만들어졌다면 야훼께서 다른 방법을 쓰시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 그 인간들은 애초에 오만하게 하늘까지 오르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이해해야 사랑하게 된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기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고 나서야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나의 글이 나와는 다른 한국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좀 반복적으로 쓰인 듯싶으면 라오스 사람처럼 말하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겠다. 그러나 아직 나는 여전히 나와 다른 한국 사람들도 어서 라오스를 경험하고 느껴서, 알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