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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왜 종말론인가?
1. 종말론의 개념과 신학적 위치 및 기능
A. 종말론의 개념 (종말은 말세가 아니다. 종말 = 새로운 창조)
a. eschaton - 마지막 것, 궁극적인 것(finis)/목적(telos)=새 창조
b. eschatology - 마지막의 일들, 궁극적인 일들에 대한 이론/희망의 이론
c. 신학의 역사에서 종말론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 이르러 사용되기 시작함,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에서는 종말론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이 나타나지 않았다. => 최근에 중심주제가 됨.
d. 종말론이라는 개념은 루터교회 신학자인 A. Calov의 [신학체계]에서 처음 사용됨
e. 기독교의 종말론은 세계의 대재난과 파멸과 소멸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새 창조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론이다.
f. 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이란 종말론의 개념 정의는 적절하지 않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새롭게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와서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미래(시간적 미래가 아닌 다가오는 미래)에 관한이론이요, 이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이론이며, 희망의 이론이다. 단지 미래의 해석학이 아니라, 역사 변혁적, 실천적 이론이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희망이며 앞선 것이 아닌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사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의 삶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선취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다.
바른 종말론신앙으로 바른 종말론을 선포해야 한다.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영이 불의한 현실을 역사변혁적 이론이 종말론이다. ->현실에 참여적 신앙인이 된다.
B. (조직) 신학 내에서의 종말론 위치
- 서구 취약한 주제가 성령론, 종말론 (1900년대까지 약화)
-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종말에 대한 관심 등장.
- 기독교신학의 모든 다른 주제들과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내용을 규정하는 기초이다. 조직신학의 모든 내용들을 결정하는 기능을 갖는다.
- 신론, 그리스도론, 신앙론, 계시론, 성서론, 인간론, 성령론, 마귀론, 교회론
C. 종말론의 신학적 기능
a. 종말론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삶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기능을 갖는다.
b. 종말론은 인간의 세계와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세계와 역사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태도를 정립하는 기능을 행사한다.
c. 종말론은 기독교신앙에 근거하여 삶과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시함으로써, 혼돈과 무의미에 빠진 오늘의 세계의 의미 상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d. 종말론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과 본질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함으로써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다. => 교회는 잠정적, 지상적, 역사적 공동체
e. 종말론은 신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과 삶의 태도와 실천을 결정하는 기능을 갖는다. 기독교 이론들의 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교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f. 종말론은 “모든 기독교적 선포와 모든 기독교적 실존과 모든 교회의 성격이다”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단지 부록에 속한 종말론이 아니다. 그것은 앞을 향한 희망과 조망이요 향함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현재의 출발과 변화이다”(J. Moltmann)
D. 기독교 종말론의 출발점: 궁극적 근거-예수 그리스도 사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E. 종말론에 대한 오늘의 관심
종말론은 우리 시대의 신학에 있어서 태풍의 중심이다. 여기서부터 신학의 온 땅을 유익하게 뒤흔드는 뇌성벽력이 일어난다. 우박이 내려서 피해를 입든지, 아니면 온 땅이 신선하게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트뢸취 (역사중심으로 상대주의주장) 의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할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보았다. 지상천국,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지상에서 경험하자. 그들은 근대를 경험했다. - 낙관주의
‘종말론의 사무실은 대부분 닫혀 있다’ 이와 반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되면서 이 사무실은 초과근무를 하고 있다.” (H.U.vonBalthasar)
a. 오늘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가장 큰 요소는 미래학이다.
세계 인구의 급속한 증가, 점차 고갈되어가는 천연자원,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전, 과학 무기 특히 핵무기의 위험, 경제적 불의, 환경오염과 환경 파괴, 생태계의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 유전공학의 발전과 생명 복제, 지구화, 세계화, 세속화, 자연 재해, 테러
b. 뉴에이지 운동의 확산
생태학적 환경보호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이 시대의 다양한 영적인 그룹들과 결합됨.
생물의 종의 보호, 환경 친화적 건축, 소비의 자발적 축소 내지 소비의 포기, 생태계를 보호하는 과학기술의 발전, 중앙집권적 체제의 분해와 자치구의 자율권 신장, 경제와 사회와 정치에 있어서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구조 형성, 군비 축소, 여성의 인권회복, 질병의 치료와 건강 유지의 자연요법 등을 강조한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인간의 자기결정과 자연과의 화해를 방해하는 피안의 종교, 세계 도피의 종교로 이해된다.
c. 막스주의
기독교는 삶과 죽음의 진지성을 말살하며, 현실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약화시킨다고 비판.
d. 오늘의 묵시 사상적 세계 상황과 사이비 종말신앙
핵무기로 인한 세계 파멸의 위험, 자연 자원의 점진적 고갈, 생태계의 오염과 파괴. 생물의 종들의 멸절, 책임과 한계를 알지 못하는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 인류의 도덕적 타락, 미래의 불확실성
e. 한국교회의 사이비 시한부종말론과 공중휴거설 : 세계 부정적, 세계도피적인 삶의 태도 형성
그 시절에 세대주의와 근본주의 영향을 받았다. 세대주의는 종말론 중심이다. 근본주의적 영향 받은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일제시대 이다. 세대주의특징이 시한부 종말론, 그때 이후로 자칭 메시아 등이 200명 가까이 된다. 한국교회 이단 중에 종말계열이 있다. 주기적으로 시한부 종말론이 등장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끼친 사회적 혼란이 크다. 반대로 92,98년 이후에는 20년동안 종말을 잘하지 않는다. 죄와 종말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성경은 기독교 핵심은 종말이다.
F. 종말론 연구의 유의사항
a. 종말론은 오늘날 인간과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현실적 문제들과 갈등을 무시하고, 단순히 역사의 종말이 오리라고 기다리는 피안의 세계를 다루는 이론이 될 수 없다.
b. 종말론은 이 세계와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되었다는 환상이나 열광주의를 피해야 할 것이다. 이 세계는 미래의 구원을 필요로 하며, 구원의 미래는 아직 현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c. 종말론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성과 도피를 정당화시키지 않는 동시에 인간의 행동이나 프로그램을 하나님 나라의 오심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막시즘은 기독교의 메시아니즘을 도용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패해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다스리는 유토피아를 말했다. 변행 된 유대기독교
d. 종말론은 단순히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죄와 죽음의 세력이 다스리는 이 세계를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개혁주의 종말론 입장) 오히려 종말론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역사적 현실 속에 앞당겨 오는 일에 기여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2. 종말론의 역사와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대두
A. 역사 속에서 종말론의 다양한 차원들
a. 초대교회 - 임박한 재림 기대, 지연된 재림 사상, 몬타누스주의(열광주의적 전천년왕국설), 오리게네스의 만유회복설, 로마의 제국종교화로 인한 제국 종말론 황제와 교황이 다스리는 이 곳이 천년왕국, 아우구스티누스의 무천년왕국설 등)
b. 중세교회-연옥설의 발전, 심판,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 요아킴 피오레의 천년왕국설(성부의 시대-성자의 시대-성령의 시대) 성령시대에 과격한 것. 이단으로 배척당함
c. 종교 개혁-연옥설 반대,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설과 만유회복설 거부, 영혼불멸 신앙 강조
d. 근대-계몽주의적 진보적, 낙관주의적 역사 이해, 종말론의 차안화 (이 세상에서 지상천국화), 세속화, 탈종말론화 => 칸트, 헤겔, 쉴라이어마허, 포이어바흐, 칼 막스 등
e. 현대 신학 - 전쟁을 경험한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가 활발하고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철저한 종말론(A. Schweitzer), 영원의 종말론(K. Barth) 초기는 키에르 케고르와 칸트에 영향 받음. 영혼이 시간 속에 접촉 -> 비판받는다. 역사를 강조하는 몰트만에 의해 비판.
- 실존론적, 현재적 종말론(R. Bultmann), 구원사적 종말론(O. Cullmann)
- 예수를 중심으로 수렴되고 확산되는 구조. 창조 인류 이스라엘 예수 -> 사회 세계 종말
보편사적 종말론(W. Pannenberg), 메시아적 종말론(J. Moltmann),
진화적 종말론(T. de Chardin), 해방신학의 종말론(L. Boff)
B. 종말론의 차원(구별되나 분리되어 기술할 수 없다)
a. 개인의 종말-개인적 종말론/인격적 종말론: 죽음, 중간기 상태, 육체의 부활
b. 역사의 종말-보편적 종말론: 재림, 천년왕국설, 죽은 자들의 부활, 최후의 심판
c. 우주의 종말-우주적 종말론: 하나님 나라,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세계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C.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대두
a. 20세기 중반 이후 가장 활발한 신학적 토대의 중심에 놓여 있다.
b. 시대적 현상에 따른 관심의 증대
c. 한국교회의 종말 이해의 동향-종말론에 대한 무관심/시한부 종말론의 폐해
d. 기독교 선포의 중심이 종말이다. 종말론 불감증 환자로 만들면 안된다. 종말론적신앙에대해 말하라
e. 목회적 차원-성서적, 복음적 종말 이해의 필요성 요한계시록을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종말에 대한 선포가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종말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구원사(창조-타락-구원-종말-새창조)가 성경전체 드라마이고 역사이다. 종말은 더 나은 것이다. 회기과 복구나 완성의 차원이 아닌 더해지는 차원이 있다. 종말은 단순한 끝이나 재난이나 파멸의 소식이 아닌, 위협과 공포의 소식이 아닌 위로와 복음의 소식이다.
종말은 그런 의미에서 창조자체가 종말을 지향하고 있다. 창조가 과거완료형. Eschatological creation. 그 창조가 new creation. 창세기안에서이미종말에관한복음이들어있다. 창3:15.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객관적으로 실현되었다. 어느 시대가 마감될 때가 종말이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의 사역은 종말의 사역을 한 것이다. 귀신들린자가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라, 병자가 치유-새 하늘과 새 땅에서 종국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 지상에서 맛을 보여주신 것이다. 말씀선포와 축사등은 종말의 선취이다. 부분적 실현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종말이 실현 되었다. 우주적 사건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정치적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만 십자가와부활사건은우주적사건이며십자가와부활로우주가화해한다.
종말론적 신앙: 객관적 화해로 우리는 종말이라는 것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왔지만, 최종적 승리는 오지 않았다. Already와 not yet 사이. 우리의 시대는 종말의 현재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이다. 우리는 다 이겼고 앞으로도 이길 것이다. 저주와 심판은 언젠가는 완전히 치유될 것. 종말적 신앙은 개인뿐만 아니라 크리스찬이 누릴 최대의 복이고 특권이다. 창조와 구원만이 복이 아니다. No more pain, no more sorrow. 오지 않았지만 십자가와부활사건으로과거완료형으로지금여기에서누리는삶이다. 우리의 삶이 어렵지만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길 수 있다.
우리는 고난을 경험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니 지금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되듯이,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죽음 - 중간기 - 부활 - 천년왕국 - 최후심판
Ⅱ.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음의 본질과 의미는 기독교신학의 근본 토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복음의 진수요,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개인적 종말론은 각 개인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
1. 죽음에 대한 태도
-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 아마 유일한 존재로서...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특성들에 속한다. 그는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 인간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지닐 수 있는 존재이다.
A. 죽음을 잊어버리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사는 태도
- 이 세상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전부라 생각하고 주어진 삶에 탐닉하는 삶의 태도, 죽음을 망각하고 삶으로부터 배제하는 것.
-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게도 죽음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 않는다.(에피쿠로스)
B. 죽음을 의식하지만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
- 죽음에의 익숙함과 이를 통한 죽음에 대한 무관심, 무감각, 냉담한 태도
- 생명에의 무관심과 결합됨
C. 죽음은 사실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죽음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태도
a. 영혼 불멸설 - 죽음의 치명성 상실, 하나의 축제의 의미를 지님.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
b. 윤회설 - 영혼의 육체의 무수한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유일회성과 진지함 상실
현재의 삶에 대한 무관심초래, 죽음의 치명성 약화, 죽음은 하나의 통과 과정, 물질적, 사회적 삶에 대한 무관심
D. 삶속에서 경험되는 죽음
a. 인간은 삶 속에서 언제나 죽음을 의식한다.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현존한다. 삶 속에서 경험되는 실재이며,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의 한 구성적 요소이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죽음을 통하여 살아간다.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b. 삶 속에 있는 죽음의 현실은 하나님의 부재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현실과 삶의 결핍 상태를 가리킨다.
c. 죽음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죄 된 삶과 하나님 없는 이 세계의 현실 속에 현존하는 하나의 현실이다.
d. 하나님의 부재와 죽음의 연관성
- 롬5:14,21, 고전15:22, 엡2:15, 골2:13, 롬8:20, 롬5:17-18, 7:25, 고전1:10
e. 죽음은 삶의 현실이다. - 마4:16, 눅9:60, 마8:22, 요일3:14, 요일1:5, 3:15
f. 죽음은 단지 삶의 시간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인간과 이 세계의 현실 안에 현존한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을 의식하면서 산다. 그의 삶 속에서 죽음의 현실과 치명성이 경험되고, 죽음의 현실과 치명성 속에서 삶이 경험된다.
g. 죽음은 삶의 사건이요, 삶 속에서 하나의 현실로 경험된다. 질병과 고난과 노화와 좌절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이별과 고독 속에서 죽음의 현실과 치명성이 경험된다. 삶, 그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유한성에 대한 안타까움, 모든 사랑하는 것들로부터의 분리, 그들과의 이별에 대한 슬픔 속에서 진행된다.
h. 죽음의 슬픔과 치명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비로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랑의 깊이 속에서 경험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삶과 존재에의 참여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는 물론 상대방의 존재가 죽음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의식하며, 그들의 사랑에는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깊이 속에서 죽음의 무성과 치명성을 경험한다. 사랑 가운데서, 삶의 한 가운데서 죽음의 치명성이 경험된다. 이 경험 속에서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한다.
i. 사랑의 깊음 속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유한성을 경험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죽음의 한계를 느낄 때 사랑은 더욱 강렬할 수 있다.
j. 죽음의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삶을 위하여 지혜롭지 못하다. 오히려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 앞에 서 있는 자기의 삶의 태도를 결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지만, 삶에 속한다. 삶을 종결짓는 마지막 사건이다. 죽음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으면서, 우리의 삶에 무의 그림자를 던지며,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자 위협한다. 이러한 죽음의 현실을 삶 속에서 의식하고 경험하며, 죽음의 현실과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의 존재규정을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k. 삶 가운데서 죽음을 의식한다는 것은 삶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l. 죽음에 대한 의식은 이웃의 죽음과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람을 감각이 있는 사람, 죽음의 의식을 배제하거나 죽음을 미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사실을 인정하고 죽음을 의식하며 이를 통하여 죽음과 함께 죽음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무감각한 사회, 비정하고 냉혹한 사회를 인간미 있는 사회, 동정적인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불의한 사회를 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2. 죽음의 본질 - 존재의 절대적인 종국, 환생, 분리
A. 인간 존재의 궁극화로서의 죽음
a.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궁극적 완성 내지 결합이다.
b. 미완결 상태에서 진행되던 삶이 완결되어지며, 유동 상태에 있던 삶이 그의 궁극성에 도달하는 것을 듯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곧 어던 존재인지는 죽음의 순간에 결정된다.
c.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라, 궁극적 자기 정체성에 이르는 존재이다.
B.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
a. 인간의 삶이란 죽어가는 삶, 죽음에 이른 삶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끝, 개인의 종말로 이해되며, 부정적인 것, 파괴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 삶은 무의미하다. 삶 자체가 전부다. 삶 다음에 남는 것은 없다. : 소유의 인간상
b. 인격적, 정신적 존재 - 평생을 통하여 계속된 내적 성숙 과정의 완성이다. 존재의 성취다.
- 삶의 역사를 남기게 된다. 생물학적 존재는 점점 쇠퇴하지만, 그의 내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는 점점 더 성장한다. (고후4:16)
C. 하나님의 영원으로 돌아감
a.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죽음의 순간까지 불완전하며, 그들의 모든 노력과 행위는 단편적이고 양면적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인간의 모든 정체성이 완전히 드러난다. 죽음 속에는 인간은 그의 전 생애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이 생애를 책임져야 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이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b.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자기의 죄됨과 제한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와 자기의 존재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사건이 된다. 그는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속으로 들어간다.
c. 죽음은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인 동시에 긍정이다. 죄된 인간의 존재와 삶은 영원한 가치를 갖지 못하며, 영원히 존속될 수 없다. 인간의 죽음은 그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이요 심판이다.
d. 죽음은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계약의 성실하심 때문에 죄 된 인간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에 의하여 용납되고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선과 악이 병행하면서 투쟁 가운데 있던 그의 삶은 하나님에 의하여 긍정된다. 이제 그는 용서받은 자로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삶의 끝남과 단절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경험되지 않고 하나님의 긍정과 용납으로 경험된다. 그의 모든 죄 된 일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부정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에 의하여 긍정된다. 이제 그의 존재는 무로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보존된다.
3. 자연적 죽음/죄의 결과로서의 죽음 : 죽음의 원인에 대한 문제
A. 자연적 죽음
a. 구약 성서적 근거 - 창25:7-8, 35:29, 대상29:28, 욥42:16-17, 5:26, 전3:1,20, 4:2, 사65:20, 슥8:4, 수를 다하고 죽는 죽음은 인간의 피조성에 속한다.
b. 자연적 죽음 그 자체는 하나님의 벌도 아니고 심판도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다. 그러나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그의 자연적 죽음을 죄된 삶의 마지막 결과 곧 죄의 결과로서 경험한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안에서 수를 누리고 당하는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죄의 삯이요, 그의 죄되고 무의미한 삶에 대한 저주와 심판으로 경험된다.
c. 프리드리히 슐라이허마허 “죽음은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시간적 한계이며 자연적 끝이다.”
죄로 말미암아 이지러진 인간의 하나님 으식은, 자연적 죽음을 악한 것으로 경험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두려워한다. 타락한 인간의 죄된 삶의 총화이기 때문에 죄된 삶의 귀결과 이에 대한 벌로 경험된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자연적 악은(죽음)... 죄로부터 생성하지 않는다.”
d. 칼바르트
- 죽음은 “그 자체에 있어 심판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도 아니다.” 죽음은 유한한 인간 존재의 한계이며, 그 자체로서 인간의 자연에 속한다. 인간의 탄생은 비존재로부터 존재로의 넘어옴이라면 죽음은 존재로부터 비존재로의 넘어감이다.
- 죽음 그 자체와 사실상의 죽음은 구분된다. 사실상의 죽음 곧 인간이 현실적으로 당하는 죽음은 죄인의 죽음이다. 그는 죄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과 벌로 경험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저주와 죽음에서 자연적 죽음으로 해방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과 벌로서 경험하지 않고, 자연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비자연적 죽음으로부터의 이 해방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해방이기 때문에, 자연적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e. 폴 알트하우스 - “신학은 끝나지 아니하는 자연적인 생며으이 의미에서 죽음이 없는 원상태와 타락한 창조의 표징으로서의 죽음을 가르칠 수 없다.”
B. 죄의 결과 - 죄와 죽음의 인과관계
a. 구약성서적 근거 - 창2:17, 3:19, 시88:6, 삼상2:31, 시90:7-9, 신30:15, 28장, 레18:5, 겔18:21, 왕상21:20, 사2:1,20, 겔18:28, 암5:4
b. 신약성서적 근거 - 롬5:21, 고전15:21
- 죽음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생명을 파괴하는, 극복되어야 할 반신적 세력
-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죽음의 세력 추방, 생명의 세계 회복 - 마10:8, 11:5
- 바울 :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니므이 형벌 - 롬6:23, 약1:15
죽음은 그리스도에 의해 극복됨. 그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은 깨어졌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되었다.(고전15:54-55, 롬5:18)
- 요한문서 :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계 속에 가져오는 부활과 생명이다.(요5:24) 영원한 생명의 현재적 경험이 사랑에 있다면, 죽음의 현재적 경험은 사랑 없음과 미움에 있다. 여기서 죽음은 하나님 없는 인간과 세계의 죽음과 같은 상황을 가리키는 동시에 생물학적이며 자연적인 죽음이다.
죽음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 곧 하나님 없는 삶 혹은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동시에 죄 된 삶의 마지막 끝으로서 오는 죽음을 가리킨다.
- 요한계시록 :
첫째 죽음(영혼과 몸의 분리)
둘째 죽음(최후의 심판 이후에 오는 영원한 저주와 하나님으로부터의 궁극적 분리)
c. 초대교부 : 죄의 보편성 강조
- 아우구스티누스 : 육체적 죽음 / 영원한 죽음
*죽음의 세 가지 단계
❶ 파라다이스에서 아담은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다.
❷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고 사멸의 상태로 빠졌다.
❸ 죄를 폐기하며 자연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d.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
- 죽음의 세 가지 측면 : 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 영원한 죽음
- 원인 : 사탄의 유혹, 인간의 죄, 하나님의 진노 => 서로 맞물려 있다.
-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영혼의 죽음 속에서 느껴지고 육체의 죽음 속에서 경험된다.
- 영적 죽음 : 영혼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마8:22, 엡2:1-3)
- 영원한 죽음 :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분리(계20:14)
-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보는 기독교의 죽음관은 점진적 발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 구약 초기 : 죽음을 육체의 생명의 종국으로 보는 경향 => 유기적 통일체로 보는 인간론에 근거
▸구약 : 죽음을 인간 존재의 소멸이나 완전한 종국으로 보지 앟ㄴ았다. 생명의 힘이 가장 낮은 정도에 있는 상태, 살아있는 것의 그림자와 같다. “죽은 자는 존재하기를 완전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역, 스올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존속한다. 이 존재는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의 지속이다.” 죽은 자는 살앗을 때와 같은 육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창37:35,42:38, 왕상2:6, 겔32:27)
- 스올 : 음부로 번역됨. 의인과 악인의 구별 없이 모든 죽은 자가 가는 장소다. 지하에 있는 망각의 장소, 어둠의 땅(욥10:21-22)이다. 징벌도 보상도 없으며 일도 없고 계획도 없다.(전9:10) “죽음 후에 일어날 것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직한 표현이며 죽음의 종국성에 대한 표현이다.”
- 죽음 후 “인간은 음부에서 존재하나 삶이라고 불릴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죽은 자는 살아있지는 않다.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 구약성서는 죽음을 하나님과의 최종적인 분리로 간주하지 않았다. 죽음을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권 밖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나 둘워해야 할 것, 그리고 피해야 할 것으로 취급했다.(시6:1-5, 88:1-14, 사38:1-20)
- 죽음 후의 삶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호흡을 상실하고 음부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존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약 후기에 부활에 대한 소망이 제시되고 비극적 죽음관으로부터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죽음관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 개념이 발전하게 되었다.
- 예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죽음과 그후의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바리새파(육체의 부활, 천사와 영의 존재 믿음), 사두개파는 이를 거부했다. 죽음을 개인의 소멸로 간주했다. 에센파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신약 - 예수의 부활이 중심, 죽음과 그 후의 삶에 대한 교훈이 중심이다.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의 전환이다. 잠으로 표현했다.(마9:24, 요11:11, 행7:60, 살4:13) 죽은 자의 영혼은 중간상태에서 육체의 부활을 기다린다.
- 육체적 생명의 종결로 설명하거나(마2:20, 막3:4, 눅6:9)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암시하고 있다. 신약은 육체의 영혼을 구별하고 죽음을 육체와 영혼으 ㅣ분리로 이해하는 등 헬라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나 그 개념 자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대립적 이원론 배격 예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신자들에게 공포의 힘을 상실했다.
C. 자연적 죽음인가? 죄의 결과인가?
a. 타락 이전의 본래적 상태에 있어서 죽음은 창조질서에 속한 자연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유한하다. 유한성은 피조물의 표지이다. 인간의 죽음은 자연에 속한다. 그러나 죄된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자연적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인간이 이 세계 속에 실존하는 한 그의 죽음은 언제나 자연적인 것이다.
b. 인간은 본래 유한한 존재 곧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죽음 그 자체는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 죽음을 죄에 대한 벌로, 하나님의 저주로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은 죄인의 세계에서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과 저주로 경험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을 때 우리는 죽음을 더 이상 죄에 대한 벌과 저주로 경험하지 않고 자연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비자연적인 죽음에서 자연적 죽음으로의 해방이다. - 칼바르트 -
c.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죽음도 비자연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에 있어서 죽음은 언제나 비자연적인 것, 본래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d. 비자연적인 죽음은 삶 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강제적 죽음, 폭력적 죽음을 거부하고, 모든 생물들이 상대적 의미의 자연적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e. 충만한 삶은 물질적 결핍이 없는 삶,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자기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으며 수를 누리고 죽을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삶, 올바른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 목적과 의미가 있는 삶(인간의 유한한 삶이 하나님의 목적과 역사에 통합될 때 죽음의 허무를 넘어서는 영원한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삶의 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될 때 가능하다.(감사와 기쁨) 부활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믿고 희망하는 삶
Ⅲ.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 : 장소 문제 / 상태의 성격
중간적 장소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 기간에 인간의 영혼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는가? 의식을 갖고 있으며 형태가 변화하는가?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가? 그렇지 않은가?
로마 카톨릭 교회 : 연옥설 / 개신교: 거부
개신교 정통주의 : 중간 상태의 영혼은 의식을 갖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 영혼 수면설
소치니스 주의 : 영혼 멸절설
일부 성서신학자들 : 죽음의 순간 부활설
1. 영혼 불멸설
- 영지주의 : 영육 이원론
- 초기 기독교 : 몸의 부활
a. 죽음과 보편적 부활 사이에 의로운 자들과 순교자들이 거할 중간상태에 대한 유대 묵시사상적 표상
b.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 속에 있으며, 그와 결합되어 살 것이라는 희망(살전5:10, 롬14:8)
c.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
▸플라톤 이원론 - 칸트, 키에르케고르
이데아 |
현상계 |
비가시적, 불가변적, 불멸적, 초월적, 영원, 정신, 영혼, 하늘, 남자, 문화 |
가시적 가변적 가멸적 내재적 시간 물질 육체 땅 여자 자연 |
=> 만날 수 없음 대립과 분리 불연속성이 강조 된다.
▸아리스토 텔레스 유기적 이원론 = 연속성 강조, 종합, 화해 강조
- 아퀴나스, 헤겔, 판넨베르크
1) 영혼선재설 :
영혼이 하데스에 머물러 있음 -> 망각의 강을 건너 땅으로 옴 -> 삶은(육체는) 영혼의 감옥
*철학은 망각했던 것을 되살려 준다.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 죽음을 향해 동경함을 가진다.
2) 영혼불멸설 :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육 이원론의 문제
- 신령주의, 신비주의
- 금욕주의, 쾌락주의, 물질주의 -> 중독
*분설 : 분리의 가능성 자체가 잘못됨, 성서적 근거가 잘못됨.
(히)루아흐 = 영 = (헬)프뉴마 = 하나님
(히)네페시 = 혼 = (헬)푸시케 = 인격
(히)바살 = 몸 = (헬)사르크스, 소마(그리스도 몸, 교회, 부활체) = 자연
❶ 육체를 포함한 전인
❷ 인간의 죄 된 본성
=> 영혼과 육체는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 전인적 창조, 범죄, 구원, 부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 영과 육이 전인적으로 인도함 받는다.
1)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그 이후의 발견
- 죽음 : 생명의 단절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의 전이
- 삶 : 순환 운동, 영혼의 지속성 주장
- 생명 : 영혼과 몸의 결합/죽음 : 죽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
- 죽음 후에도 영혼은 존속하며, 새로운 육체와 결합항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 영혼 선재설
- 회상설(상기설)
- 육체는 영혼의 감옥, 무덤이다.
-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 = 해방, 영혼의 구원, 영혼의 본향으로의 귀향
- 영혼은 영원하며 지속적이다.
- 철학은 죽음에의 동경이다. 철학의 목적은 죽음이다.
- 죽음은 축제와 같은 것이다. 영혼의 해방의 완성자이며 영혼의 위대한 친구이다.
2) 영혼불멸성의 문제점
- 현대신학, 인간학, 심리학, 행동학 등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 인간 :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이다. 전체로서의 인간이다.
- 행동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는 결합되어 있다. 양자는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 인간 속에는 육체에 대하여 독립된 영혼이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 이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언제나 함께, 동시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성격과 사유와 행동을 결정한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사유의 활동은 인간의 정신적 조건은 물론 육체적 조건에 의존하며 육체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 육체적 활동도 영적, 정신적 조건에 의하여 결정된다.
- 영혼불멸설은 영혼과 육체 차안과 피안의 이원론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은 물질적이며 육적인 현시로가 차안의 구체적인 사회 현실을 경시하거나 천시하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조장한다.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 비교할 때, 일시적이고 허무하며 썩어 없어질 인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때, 육체를 천시함은 물론, 인간의 실존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물질적 현실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된다. 영혼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 영혼불멸설은 인간의 구체적 삶과 삶의 현실, 이 세계 안에서 지금도 신음하는 피조물들 고난과 슬픔, 생명이 파괴와 착취에 대한 무관심a을 조장하고, 영적 피안적 현실을 동경하고 추구하게 한다. 현실의 세계에 대하여 등을 돌린 삶의 태도를 조장하며, 이를 토앟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을 방지하고 또 방조하는 기능을 행사하게 된다. 현재의 삶은 피안에 대한 준비일 뿐이라는 표상은 삶의 거부의 이론이며, 종교적 기만이다. 그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모순되며, 이런 점에서 종교적 무신론이다.
-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자기폐쇄성, 탈 사회화, 탈역사화의 위험, 무신성, 무신론이 숨어있다.
- 현대 신학자들은 대부분 영혼불멸설을 반대한다.
- 기독교의 가장 큰 오류들 중하나로 간주된다.
칼 라너 “죽음은 전체로서의 인간에게 마지막을 정립힌다.” - 영원한 생명은 인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질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밀 부룬너 “오직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 속에 근거한 참으로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인, 그리스도론적인 불멸의 사상을 인정한다.” - 플라톤적 영혼불멸설을 거부한다.
3) 영혼불멸설과 죽은 자들의 부활
a. 인간 자체 안에 주어져 있는 불멸의 것을 인정하고 신뢰한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하나니므이 능력과 은혜를 신뢰한다.
b. 인간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것에 대한 통찰/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행위에 대한 희망
c. 인간의 육체를 천시하고 신적 영혼만의 영원한 존속을 신앙/육체를 포괄하는 인간 존재 전체의 되살아남과 영원한 생명을 신앙
d. 육체 없는 영혼만이 고려의 대상/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간이 가졌던 모든 관계들과 삶의 역사가 고려의 대상
e. 인간의 구체적 삶의 역사와 그것을 구성하는 삶의 물질적, 사회적 현실이 간과됨/육체를 가진 인간의 삶의 역사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됨. 인간 삶의 물질적 사회적 현실이 고려됨.
f. 이 세계에서의 삶은 영원한 세계에 대한 준비과정이다. 삶의 유일회성과 진지성이 약화된다. 부활 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이 세계의 삶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삶이다. 이 세계에서의 삶은 단 한 번뿐이므로 삶의 진지서오가 삶의 의욕이 강화될 수 있다.
g. 물질적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창조적 의식이 약화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삶 속으로의 개입이 마비되며,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한 무관심, 사회적 현실로부터의 내적 퇴각, 이 세계로부터 등을 돌린 삶의 태도, 탈 세계화, 탈역사화의 특징을 지닌다. 이 세계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회적 현실 속으로의 개입, 의와 사랑과 자기희생의 윤리적 특성을 갖는다.
h. 죽음은 신적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의 해방이요 축제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기다린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그의 사랑하는 피조물들의 마지막 적으로 간주된다. 죽음의 세력의 극복을 기다린다.
2. 연옥설
1) 연옥설의 유래와 내용
2) 연옥설의 타당성과 문제점
3) 연옥의 현대적 해석
=> 영혼불멸설의 한 형태, 연옥에서 육체 없는 영혼의 영원한 존속을 전제하고 있다.
3. 중간기 상태
1) 죽음 안에서의 부활 - 칼라너, 로핑크, 그레쉐이크
- 육체 없는 영혼은 실재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는 결합되어, 하나의 전체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형성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 그 인격적 존재로 죽음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완성된다. 그것은 육체의 형태를 갖지 않으며 육체의 제한성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형식으로 변용된다. 이 변용은 바로 죽음 속에서 일어난다. 마지막 종말의 날은 단순히 역사의 연대기적 시간의 마지막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잇는 인간의 삶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모든 죽은 자들에게 동시적으로 한순간과 같이 온다.
- 한 인간의 죽음의 순간은 종말의 마지막 시간이 앞당겨 일어남(선취)이요. 역사의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순간이다. 모든 개인의 죽음 속에서 개인의 완성은 물론 인류의 역사의 완성과 세계의 종말이 일어난다.
- 종말은 역사의 미래가 아니라 개인의 죽음 속에서 앞당겨 일어난다. 죽음은 시간의 영역에서 영원 속으로 영원한 현재 속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마지막 부활 사이의 중간상태는 폐기된다.
- 죽음의 순간은 세계와 역사의 한 부분이 완성에 이르는 종말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마지막 날의 현실 곧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완성의 현실을 경험한다. 각 사람의 죽음의 순간에 세계의 종말이 앞당겨 일어나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최후 심판이 일어나고, 이 과정을 거쳐 죽은 자는 하나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장점 -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불멸과 몸의 부활을 결합시킨다. 종말의 마지막 완성을 단순히 역사의 미래에서 찾지 않고, 역사의 현실과 과정 속에서 찾는다. 육체 없는 영혼이 잠정적으로 머무는 중간 상태 곧 연옥에 대한 생각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연옥에 대한 생각이 철폐될 경우, 연옥에 머무는 자들을 위한 미사와 면죄부가 불필요하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1979년 죽음 속에서의 부활을 거부했다.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흔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칼 라너 - 몸과 영혼을 동시에 가진 인간의 단 하나의 그리고 전체적 완성이 죽음과 함께 직접 일어나고, 육체의 부활과 보편적 심판이 세계의 시간적 역사를 따라 일어나며, 양자가 각 사람들의 개별적 심판들의 총화와 일치한다는 생각은 이단이 아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 죽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원 속으로 넘어감이 부활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죽은 자들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문제점
- M. Schmaus : 보편적 부활과 함께 올 죽음의 세력의 마지막 극복,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메시아적 전망과 희망이 약화될 수 있다. 죽음 속의 부활은 인간의 몸과 아무 관계가 없는 단순히 인간의 영적, 정신적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은 인간의 신체적, 물질적 현실에 대해 적극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단지 영적인 것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 J. Ratzinger : 영혼불멸설의 숨은 회복을 초래할 수 있다. 죽음 속의 부활은 그 속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야할 역사와, 완성되지 않은 채 계속되는 역사의 간격을 해명하지 못한다.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삶의 시작과 현재의 미래, 그리고 죽음 너머에 있는 초개인적인 역사의 완성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며, 어떤 의미에서 개인의 죽음과 역사 전체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역사의 마지막에 올 최후의 날은 개인의 죽음의 순간과 동일시된다.
- W. Pannenberg :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과 연결되어야 한다. 신체성이 파악될 수 없다. 인류의 완성과 관계없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개인의 구원의 완성과 인류의 구원의 완성의 연관성은 미래에 대한 성서의 희망의 본질적 요소이다.
2) 전적 죽음
- 20세기 초에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됨,(칼바르트, W.Elert, 알트하우스, O.Cullmann, H.Thielecke, E.Juengel, H.Ott 등)
- 성서적인 인간론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인간의 죽음에 있어서 육체와 영혼이 전적으로 죽는다.
*칼바르트 - 죽음다음에 인간의 영혼이 남아서 나비처럼 무덤 위를 날아다니다가, 어딘가에 보존되어 죽지 않고 계속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교적인 것이다.
*W.Elert - 죽음 다음에 인간에게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Jungel - 죽음은 삶의 상황들을 전적으로 중지시키는 무관계성의 사건이다.
*H.Ott - 죽음과 함께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폐기되고,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에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의미의 담지자로 계신다.
*P.알트하우스 - 인간의 전적 죽음을 말하는 동시에, 죽음 자의 새로운 현존의 형태를 말함으로써 완호된 입장을 취한다. 몸과 영혼은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몸은 영혼의 얼굴, 눈, 태도, 몸짓이요 영혼의 표현이며 형태이다. 죽음은 몸은 물론 영혼에도 해당한다. “영혼으로부터 몸이 사라지며, 영혼도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로부터 생명으로 불러낸 인간의 인격을 간직하시며, 그에게 새로운 현존의 형태를, 곧 여기 땅위에서와 같이 다시그 ㅁ하나의 영적-정신적-신체적 형태를 주신다. “죽음이 몸은 물론 인간 전체에 해당하는 것처럼, 부활도 인간 전체에 해당한다.”
- 죽음 후에도 죽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은 인간의 전적 폐기이다. 죽음 후에도 남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뿐이다.
-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와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 활동을 드러내는 점에 있어서 타당성을 가진다.
▸문제점 - 만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폐기되었고 완전히 무로 돌아갔다면, 마지막 부활에 있어서 그의 정체성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고 또 확인될 수 있는가? 인간의 그 무엇이 부활하게 되는가? 과연 누가 부활하게 되는가? 죽은 자들이 잠자고 있다는 성서적 진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살아있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은 파괴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잇을 것인가?
3) 영혼 수면설 :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
- 루터 :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났으며, 의식과 자각이 없는 깊은 잠의 상태이다.
죽음이 인간에 대한 그의 힘을 잃어버렸다는 의미. 죽은 자들은 잠자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살아 있는 자들의 삶에 대해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
- 성서적 근거 : 신약(막5:39, 요11:11, 행7:60, 고전15:20, 행13:36, 엡5:14, 살전4:13, 살전4:14, 벧후3:18), 구약(신31:16, 삼하7:12, 왕상14:20, 시13:3, 단12:2, 사114:18, 렘51:57) => 스올에 잇는 죽은 자들의 그림자와 같은 상태를 잠자는 상태로 묘사
- W.Trillhaas : 영혼의 잠자는 상태에 대한 이론은 신약성서의 증언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신약성서의 구절들은 세상을 떠난 영혼의 상태와, 그것이 머무는 장소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 : 바울(빌1:23, 롬4:19, 살전4:16)
*이종성 : “죽음은 생의 마지막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을 말한다.”
-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과 사귐 속으로 들어가며, 마지막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상태에 있다. 잠자는 상태에서 그들은 살아있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죽은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로 구서오딘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통 가운데 잇다.
▸비판 -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눅23:43, 벧후2:9)
- 신자는 죽은 즉시 천국에서 완전한 의식을 가진 채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과 축복의 상태를 누린다.(눅16:19-31, 빌2:21-23, 살전5:10)
▣ 결론적 제안
성서는 죽음 후의 중간 상태에 대한 일관된 이론이 없다. 중간 상태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이 있으며, 이 진술들 가운데는 모순되는 것들도 있다. 죽음 후에 인간은 수면 상태에 있다고 보는 진술들이 있는가 하면, 의인은 하늘나라에 있고 악인은 지옥에 있다는 진술도 있다. 수면설은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수면설은 생명의 중단을 뜻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잠자는 상태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살아 있는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우주적 교통 안에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죽은 자들을 회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사귐 속에 살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들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김명용 “이 시대의 바른 기독교사상”
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부활 (살전4:6-17, 고전15:51-52, 빌3:20-21, 고전15:27, 골3:24, 엡4:30, 요6:44, 6:54, 행4:2, 23:6, 26:23 / 단12:3, 사25:19, 25:8)
➁ 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 - G.Greshake, 로핑크, 크렌머 등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
1) 바울 - 고후5:1-4,8, 고전15:53-54(천국에서의 삶은 육체 없는 영혼만의 삶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고 사는 삶)
2) 복음서 - 요11:25,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16:22-24, 마5:29-30, 마10:28(영혼=I), 계6:9, 눅20:27-40, 제4마카비 7:19, 쿰란 문서 : 죽음 이후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과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다는 믿음, 마22:30-부활 때 의로운 자는 천사와 같다 / 눅20:36-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은 천사와 동등하다. 눅23:43(낙원-제2에녹서8:1 셋째 하늘, 고후12:4), 막9:2-8 변화산 사건
3) 계시록 - 계6:9(제단 아래), 6:11(흰두루마기), 7:9(흰 옷-제2에녹서 22:8, 이사야 승천9:2, 제1에녹서 62:15) - 흰옷을 입고 어린 양을 찬양하는 자들은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하늘에 삶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존재로 살고 있다.
4) 에베소서, 벧전 - 엡2:5-6(이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 벧전1:3-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
5) 속사도 교부들 - 이그나티우스(즉각적인 몸의 부활), 폴리캅(영혼과 육체의 부활)
- 역사의 마지막에 부활이 일어난다는 희망 사상과 동시에 죽음 속에서 부활이 일어난다는 사상이 함께 있다.(유대 문헌과 성서 및 초기 교회 문헌)
➂ 중간기와 마지막 날의 조화
1)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품이 잠들어 있다. - O. Cullmann
/ 죽은 자들이 이미 천국에 존재하고 있다는 수많은 성서의 가르침과 충돌한다.(빌1:23-24, 고후5:1-4, 히11:6, 눅23:43)
2) 유대 묵시문학적 세계관인 마지막 날의 부활이라는 관념은 폐기되어야 한다. - 불트만 -
영생과 부활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실존적 결단 속에서 죽음 속에서 일어난다. (로핑크, 몰트만, 판네베르크, 큄멜, O.Cullmann)
3) 죽음의 순간과 역사의 마지막 날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적 차이가 없고 한 순간이다. - 칼바르트, 에밀부룬너 => 실제로는 동일하지 않다. 영원한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역사의 시작과 역사의 완성은 동일한 순간이 아니다. 성서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사고 이다.
4) 죽은 자들은 완전한 육체성을 아직 갖고 있지 않은 영혼으로 존재하고 있다.
- 1979 가톨릭 교리성의 발표 : 죽음 이후 영적 실재는 완전한 육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 J.Razinger : 부활의 삶
- 약간 변형된 형태의 영혼 개념, 마지막 날의 부활을 강조한다. 넓은 의미의 헬라적 요소 아퀴나스의 영혼 개념은 육체가 없는(육체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고 육체성을 요구하고 있다.) 영혼이다.
*안토니 후쿠마 - 인간의 저인성을 강조하면서도 중간기 상태에서의 잠정적인 분리 강조
“비록 인간이 지금은 영육 통일체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통일체가 죽음의 때에는 일시적으로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5) 죽은 자들은 부활한 상태로 있으나 역사의 마지막 날의 지상으로의 부활과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 고전15:51(역사의 마지막 날) : 고후5:1(죽음의 순간에 영원한 하늘의 처소를 덧입는다)
- 바울의 주장(고전15:43-54) : 신령한 몸(하늘의 삶에 합당한 삶, 마지막 날에 입게 됨)/ 고후5장(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사상이 뒤로 물러가고 하늘의 육체를 죽음에서 얻게 될 것 기대, 영광스러운 몸): 따라서 고전15장과 고후5장 사이에는 근본적인 사상의 차이가 없다. 천상에 있는 의로운 자들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육체를 지니고 죽은 자들은 천상에서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부활체를 갖고 있다.
- 그리스도의 재림과 역사의 완성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희망이 아니고 이미 죽어 그리스도의 품에 있는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 죽은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낙원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들의 영혼은 부활체를 입고 있다. 그들은 아직 지상으로 부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며 역사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고 지상으로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그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고 그들은 지상의 사람의 눈에는 무덤 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의 구원은 땅위에서의 구원의 완성과 합쳐져야 하고 하늘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랫동안 그 영광이 짓밟히고 훼손된 이 땅위에서 빛나야 한다.
*J.크렌머 - 세례시 부활/죽음에서 일어나는 부활/마지막 날의 부활
Ⅳ. 죽은 자들의 부활
1. 예수의 부활
2. 영적인 몸으로의 부활
3. 죽은 자들의 부활의 현재적 의미
1)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고백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나타낸다.
2) 죽음과 함께 삶의 모든 것이 망각의 영역으로, 무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각자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숨김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3) 죽은 자들의 부활은 단순히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 가운데서 지금 앞당겨 일어나고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주검의 세력에 대항하도록 고무하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주검에 대한 저항하는 기능, 비판적이며 해방하는 기능을 갖는다.
4) 몸의 부활은 인간의 몸이 그 안에서 살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의 새 창조를 전제한다. 새 창조의 물질성을 지키며, 하나님의 통치는 신체적인 것과 손으로 붙들 수 있는 것을 탈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완성한다.
몸의 부활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인간과 자연만물이 평화 가운데 함께 사는 생명공동체를 지향하며,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형성될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삶은 물론 모든 공동체적 삶은 언제나 신체적이고 물질적이며 자연의 생태계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신체적이며 물질적인 개인의 삶과 공동체적 삶의 모든 영역은 물론 자연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부활의 현실의 빛과 표징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의 세계와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하고, 온 인류와 피조물들이 공존하는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한다.
몸 없는 부활을 말하는 심령주의적, 영적 부활의 표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자연 없는 인간 중심주의적 부활의 표상을 거부해야 한다. 인간의 몸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공동체를 이루는 우주적 생태계적, 신체적 변화를 시사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종말론은 육체를 영혼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물질을 정신의 지배에서, 자연을 인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이 각자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사는 새 창조의 세계를 희망한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상황들의 우주적 새 창조에 대한 희망의 시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인격적 종말론으로 끝나지 않고 우주적 종말론으로 확대된다.
몸의 부활은 인간의 육체와 물질에 대한 긍정이다. 마지막 구원은 인간의 영혼의 영역에서는 물론 육체와 물질과 자연의 영역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 “몸과 영혼의 통일성 안에 있는 인간의 부활된 생명, 하나님의 길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과 이웃 사람들과 온 우주와 깊은 사귐 속에 있는 젊은 육체이다.”
Ⅴ. 종말의 징조들과 그리스도의 재림
1.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요한 계시록의 역사적 배경
A.D. 90년대 도밑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숭배 강요와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황화하여 선포한 것이다. 로마제묶에 대한 비판 정신이 깔려 있다. 로마제국은 군사적인 정복으로 확립된 황제의 강력한 정치적 독재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통치 이데올로기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
① Pax Romana의 유혹(17:3) - 음녀
② 황제숭배의 강요(13:4) - 짐승-도미티아누스(주화 하나님으로 부를 것 강요, 황제신전, 16장 19장에 거짓 선지자로 불리는 두 번 째 짐승이자 땅의 짐승이 첫 번째 짐승인 바다 짐승의 형상을 세우고 예배 강요)
③ 사도적 복음의 깊고 절실한 상황화 - 로마 권력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거의 문학, 세속적 권력의 상대화 - 하나님과 하늘에 대한 환상을 보여줌 - 신성모독이며 로마권력의 멸망 예언
2) 요한 계시록의 성격
① 서신 형태로 보내어진 묵시적 예언(1:1) - 아폴칼립시스(계시)/예언(1:3)/서신
② 정교한 문학작품 - 요한은 자기가 받은 환상의 경험을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구약성경의 예언의 틀, 예수 전승, 사도적 케리그마, 당시 로마제국의 상황, 당시 아시아 교회들이 처한 문제들에 비추어 신중하게 해석하여 완전한 문학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
=> 로마-바벨론의 음녀/짐승 : 정치적 만화
▸이미지들의 해석 : 문학적 장치, 구약과 고대 근동의 신화, 로마 제국의 표상,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 등의 이해 - cross-reference의 구조, 평행들과 대조점들과 암시들을 검토
사탄(창3:14 뱀, 사27:1 리워야단)
③ 피해야 할 실수 두 가지
- 계시록의 이미지들을 시공을 초월한 상징들로써 이해하려는 시도를 피해야 한다.
- 지나치게 문자적 해석을 시도해서도 안 된다.
3) 계시록 해석법
① 과거적 해석 - 과거, 사도 요한 당시 초대교회와 로마제국의 투쟁을 묘사한 것(자유주의 신학자들)
② 교회사적(역사적) 해석 - 요한의 때로부터 대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전개 전체에 대한 파노라마 식 예언(요아킴, 루터, 칼빈) 저술 당시에는 미래였으나 교회 역사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
③ 비유적, 상징적 해석 - 종말에 관한 예언서가 아니다. 기독교의 선과 악이 벌이는 장기적인 대결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④ 미래적 해석 - 1-3장은 요한 당시 상황, 4-22장은 교회의 입장에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에언적 사건(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그리스도 재림 전후에 일어날 미래적 사건으로 해석
2. 종말의 징조와 그리스도의 재림
Ⅵ. 천녀왕국설
- 전천년설(문자적 해석) / 후천년설, 무천년설(상징적 비유적 해석)
- 사도 시대, 초기 교부 시대 => 전천년왕국설이 지배적
- 4C말 : Tyconius와 Augustine의 계시록 재해석 => 무천년왕국설
- 17C 전천년왕국설 부흥
- 20C : 세대주의적 전천년왕국설 등장 이후 천년왕국설 논쟁이 시작되었다.
- 그리스도의 재림 방법과 천년왕국설의 문제는 성경관과 구원관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 해석의 차이의 문제이다. 재림의 시기와 사건의 순서에 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시적으로 그리고 큰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 이 가운데 어느 한 견해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 모두가 성경과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이론의 여지없이 결정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성경해석이나 신앙전통에 비추어 문제점이 적은 이론을 택해야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1. 천년왕국설
1) 전천년왕국설
2) 후천년왕국설
3) 무천년왕국설
❐ 참고 - 천년 왕국 (millennium)
· 계 20:1~10 관한 해석
- 문자적 : 전천년설
--------------------> *후천년설은 모호하다
- 상징적 : 무천년설
1) 무천년설 (Amillennialism)
· 학자들 : 어거스틴, 루터, 칼빈, 카이퍼, 바빙크, 벌코프
· 주장 : 계20장의 천년왕국이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단순한 신약시대의 상징이다.
*신약교회 = 상징적 천년왕국
· 이유 : 계시록의 말씀만 가지고 천년왕국을 주장할 수 없다.
❶ 신약성경 다른 곳에 천년 왕국이라는 것이 없다.
❷ 성경 전체적으로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다. (요5:28)
=> 이러한 사건 이후가 세상의 종말이고 끝이다.
· 반론 :
❶ 요한 계시록은 독특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 신약성경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을 지라도 천년 왕국이 가능하다.
- 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계22장)
❷ 요한 계시록에 천년왕국의 표현이 6번 나오는 데 이것이 교회로 연결 시키기에는 부족하다.
❸ 사탄이 결박된 시대라는 표현과 해석의 문제가 생긴다.
- 신약교회에 사탄의 결박이 포함되지 못한다.
2)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 무천년설의 반론에 대한 반론 : 무천년설과 의견이 비슷하다.
: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
- 요한 계시록의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있을 수 있다. 이 왕국은 예수님 재림 후에 있을 것이다.
->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사회의 복음이 증거 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진 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신약시대 이후에 큰 황금시대이다.
*문자적이지만 상징적인 견해도 가지고 있다.
· 학자들 : 어거스틴, 찰스 하지, 윌리암세드, 로버트 뎀리, 벤자민 워필드
· 주장 : 신약에서 천년왕국의 말이 없으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계20장의 사탄의 결박이 신약 교회전체가 아니고 기독교 복음이 꽃피워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때 결박당한다.
· 반론
❶ 성경의 종말의 징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❷ 계19장, 20장의 순서와 맞지 않는다.
❸ 세상이 좋아진다고 주장하는 데 현시대는 불안하게 흘러가고 있다. (핵전쟁, 마약, 환경오염등) 신약시대 이후 복음의 황금기와 대치된다.
*현재는 많이 선호하지는 않는다.
3) 전천년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적 전천년설
1) 세대주의 적 전천년설 - 성경을 철저히 문자적으로 본다.
❶예수님의 초림 -> ❷신약교회시대 -> ❸예수님의 공중재림(휴거)가 일어난다. : 어느 순간 갑자기 : 믿는 자들을 대리고 가신다. -> ❹지상에서 7년 대환란이 일어난다. : 지구의 만들어진 ↳ 3년 반 : 적그리스도등장
*유대인들의 대 회심이 일어난다.
(계6~18장)
*하늘에서는 혼인잔치가 벌어진다.
(믿는 자들과의 잔치)
이후의 엄청난 환란이다. -> ❺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지상 재림하신다. : 천년왕국의 시작 -> ❻천년왕국 : 성전에 세워지고 제사제도가 회복되고 제사를 드리게 된다. : 실제 천년동안 지속된다. (이스라엘의 땅) 에스겔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다.
-> ❼천년왕국 후에 악인의 부활하고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 영혼이 사탄과 악인들은 깊은 구덩으로 빠진다. -> ❽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히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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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어린양의 혼인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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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대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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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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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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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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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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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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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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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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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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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재림 |
성전 |
악인의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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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란을 강조한다. (단9~12장, 마) -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대 환란이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전의 회복, 이스라엘 백성의 회심)
-> 구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다.
· 반론
- 예수님의 재림은 한 번있는 것이지 두 번 오는 것이 아니다. : 성경에서 이렇게 나누어놓지 않았다.
- 구약의 예언(구약의 예배, 성전등)의 성취로 보면서 그대로 회복되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히브리서의 단번에 제사가 무효가 된다.
=> 구원사적인 문제 =>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약화시킨다.
· 학자들 : 스코필드, 월보드, 팬트코스
2) 역사적 전천년설
-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것이다. : 전체적인 의미가 세대주의 적 전천년설과 같다.
· 차이점 : 이스라엘을 중심하는 구약의 회복이 아니고 하나님 왕국으로서 신약적 성격의 나라
· 학자들 :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엥겔, 고대, 랑게, 알포트, 엘리콧
· 대환란 -> 예수님의 재림 ->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멸하고, 천년동안 사탄이 결박된다. -> 아마겟돈 전쟁 후에 사탄은 불 못에 던져진다. -> 성도들이 왕 노릇한다.
· 반론
- 요한계시록 외에 천년왕국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 신약의 종말론을 볼 때 천년왕국의 필요성이 희박하다.
- 예수님이 재림 후에 임시적으로 천년의 기간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 지옥 교리의 중요성
❶ 예수님이 친히 선언하신 진리이다.
-> 멸망의 교리에 대해서 책임지신다.
❷ 하나님의 거룩하심 의로우심에 대한 바른 개념을 주신다.
❸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를 알게 해주신다.
❹ 회개와 믿음의 정당한 계기를 마련한다.
*문자적으로 실현될 곳이다.
*천년왕국설 논쟁
- 후,무 천녀설 : 구약 예언에 대한 상징적 해석, 영적 해석/전천년설 - 문자적 해석
과도기적 통치기간
- 후- 지상천국/무-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
후- 의와 평화의 황금기/무- 교회시대 전체
- 후- 지상 왕국 : 전진적인 것, 그리스도의 가시적 임재 없는 지상통치/전-격변적인 것, 그리스도의 직접 지상통치
- 후- 낙관적, 긍정적 세계관, 역사관/무, 전- 배교, 타락 등 비판적 역사관
- 세계의 복음화, 평화의 황금기 후 재림/전, 무-그리스도 재임의 임박성
*주요 쟁점
① 성서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철저한 미래적 해석/역사적 전천년설- 미래적, 역사적 해석 결합
후, 무- 영적 해석/전- 문자적 해석(세대주의는 구약에 근거/역사적 전천년설은 신약에 근거)
② 계시록과 공관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들을 단일 사건으로 보는가(무)? 복수 사건으로 보는가(전)?
③ 계20장의 부활에 대한 해석 - 동일한 종류의 부활인가(전)? 다른 종류의 부활인가(후,무)?
계20:4 (육체적 부활:전)/ 1회 육체적 부활(무)
- 사단의 결박시기 : 그리스도의 초림 때문인가(무,후)? 재림 때인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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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휴거설/환난설
- 명확한 결론이 내려진 주제가 아니다.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 휴거의 시기, 환난의 성격, 환난 시 교회의 존재 유무
1) 환난전 휴거설(미래주의적 해석)
- 교회가 대환난에 앞서 휴거되어 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
- 대부분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 초기 교회는 환난전 휴거설에 관한 명확한 진술이 발견되지 않는다.
- 미래주의적 해석이 등장 : Darbyism, 세대주의
- 살전4:16-17의 해석
-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예언대회, 스코필드 관주 주석, 성서학원 운동 등을 통해 확산
- 근본주의 신학계에서 수용 : J.Brooks, A.Pierson, C.I.Scofield, R.A.Torrey등
▸성서적 근거
➀ 살전5:9, 계3:10 -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된다.
➁ 교회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계7:9-14)
➂ 휴거에 대한 본문(요14:1-14, 고전15:51-58, 살전4:13-18)과 재림에 관한 본문(24:4-31, 막13:24-27, 눅21:25-27, 계19:11-21)등이 내용상 차이가 난다. 즉 휴거와 재림은 두 별개의 사건이다.
▸강조점
➀ 대환난의 독특성을 강조 -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의 시기인 대환난을 통과하지 않는다. 대환난의 기간(단9:27)을 7년으로 간주
➁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➂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환난 직전)과 지상 재림(환난 후)
3회의 부활 : 휴거 때 죽은 성도의 부활/대환난 끝에 있을 환난 동안에 죽은 성도의 부활/천년 왕국 끝에 있을 불신자의 부활
➃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 강조(마24:36)
*문제점 - 이스라엘과 교회 구분, 그리스도의 두 단계 재림
*강점 - 임박한 재림을 강조함으로써 복음 전파와 세계 선교 강조, 신자들에게 종말론적 긴장을 지닌 신앙생활하게 한다.
2) 환난 후(환난 통과) 휴거설(역사주의적 해석)
- 교회가 하나님의 보호 아래 환난을 통과한 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휴거된다.
- 역사적 전천년설
-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락탁티우스 등
- C.Eedman, N.West, A.Gordon 등 신복음주의(E.Carnell, G.Ladd, R.Gundry)
- 성서는 모두 환난 후 휴거설을 나타낸다.(요14:1-11, 고전15:51-58, 살전 3:18)
▸특징
➀ 문자적 해석에 덜 의존해 있다.
➁ 교회가 대환난 동안에 존재한다.
➂ 하나님의 진노와 대환난을 구분한다. 진노는 신자가 아닌 악한 자에게 임한다.(요3:36, 롬1:18, 5:9, 살전1:10, 계14:8,19, 15:1,7, 16:1,19, 19:15). 환난은 신자도 경험한다.(요16:33)
➃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화난ㄴ을 통과한다.(계3:10)
➄ 한 번의 재림과 두 번의 부활(환난 후와 천년왕국의 시작에 있을 신자의 부활, 끝에 있을 불신자의 부활)
➅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 - 일련의 사건이 임박하다.
*문제점 - 천녀왕국의 기간이나 주민 등에 대한 이해 부족
=> 어떤 전에서는 무천년설과 명확한 구별이 되지 않는다.
3) 환난 중간 휴거설(환난 전 휴거설의 변형)
- N.Harrison, O.Buswell Jr., G.Archer 등
- 다니엘서와 계시록이 삼년 반 명시(단7:25, 9:27, 12:7)
- 환난과 진노를 구별 : 하나님의 진노는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환난 동안에는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노가 시작되기 전 휴거된다.
- 살후2:3(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살후2:9(악한 자의 임함)
- 교회 휴거는 일곱 번재 나팔을 불 때(계11:15-19, 살전4:16, 고전15:51, 계14:14)
*문제점
- 나팔을 동일시하는 것(계11장, 고전15장, 살전4장), 3년 반에 대한 다니엘서와 계시록의 강조를 휴거와 연결시키는 것
- 부분 휴거설 : 성도들이 준비될 때마다 휴거된다.(열처녀 비유 마25:1-13, 마24:40-41, 눅21:36)
- 성도의 상급에 기초하고 있다.
▸휴거 논쟁
- 휴거의 시기와 그 대상을 쟁점으로 하여 전천년왕국설에서 일어난 것이다.
- 미래주의적 해석이다.
*주요쟁점
➀ 교회와 대 환난과의 관계
- 교회가 대환난을 면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통과할 것인가?
- 대환난 동안 교회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➁ 휴거와 재림의 관계
- 휴거와 재림은 별개의 독립적인 사건인가? 동시에 일어나는 연속적 사건인가?
- 공중재림과 지상재림, 두 단계로 볼 것인가? 한 단계로 볼 것인가?
➂ 대화난과 하나님의 진노의 관계
-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➃ 재림의 임박성
-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환난 전 휴거설)?
- 그것에 선행하는 어떤 사건들과 징조들이 있는가(후, 중간 휴거설)?
Ⅶ. 최후의 심판과 만유 구원론
1. 최후의 심판
- 이중심판 : 천국과 지옥/영생과 영벌
(마7:13-14, 마25장, 막9:45, 눅16:23ㅡ 막9:48)
2. 지옥설
- 기독교는 초기부터 지옥교리를 가르쳐 왔으며 그것은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지옥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은 신학적으로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지옥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 현대에 들어와 지옥을 부정하는 현상이 지배적이다.
지옥 개념은 “쓸모없고 해로운 것”이다.(E.S.Chesen), "지옥이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M.Marty)
- 낙관주의적 자유주의 신학과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영향이다.
- 복음주의 신학과 교회에서도 발견된다. 목회자들은 지옥, 영원한 형벌과 같은 심각한 주제에 관해 설교하기를 주저한다.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의문시하거나 논박하기도 한다. 지옥을 부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보편구원론과 멸절설이다.
- 지옥은 부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기독교의 중심교리 중 하나로 많은 논제를 포함하고 있다. 지옥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지옥은 어디에 있으며, 지옥불은 실제인가? 비유인가? 지옥 고통은 형벌적인가? 치료적인가? 지옥 고통은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1) 지옥 교리의 발전
2) 영원 형벌설
- 가장 일반적이며 전통적인 견해이다.
- 지옥을 악인에 대한 영원한 형벌 장소와 조건으로 간주한다.
- 악인에 대한 형벌은 영원하며, 그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징벌이다.
- 성서의 지옥 표상에 대한 문자적 이해와 요약이다.
- 문자적 견해, 고전적 견해, 정통적 견해, 유력한 견해
▣ 특징
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실재한다. 지옥 고통은 의식적 고통을, 지옥 불은 문자적 의미의 불을 의미한다.(눅16:24, 마8:12) / 천국 축복으로부터의 분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➁ 지옥의 본질적 목적은 교정이나 치료가 아니라, 응보적 형벌이다. 지옥은 모든 악인과 불신자에 대한 징벌의 장소요 상태다.(살후1:9, 유1:7, 계21:8) 일단 지옥에 가면, 누구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심판의 기준인가를 보여준다.
➂ 지옥은 영원하다. 악인의 영원한 거처요, 고통은 영속적이다. 예수는 지옥을 영원한 불, 꺼지지 않는 불,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장소(막9:43,48),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계20:10)으로 묘사했다. aionois(끝없는, 영원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을 의인과 악인의 최후의 운명, 즉 영생과 영벌에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지옥과 천국의 기간이 동일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마18:8-9, 25:41,46)
➃ 지옥 형벌의 등금 문제에 대한 여러 입장들이 있다. 악인이 지옥에서 동등한 형벌을 받는다. 형벌의 균등성을 부정하고 개인에 따라 차등이 있다. (뵈트너, 에릭슨) 로마가톨릭교회는 지옥의 개인에 따라 정도가 다르다. 징벌은 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 비판
➀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의 본성, 사랑과 은총의 조화문제가 전통적 견해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영원한 형벌과 고통을 허락할 수 있는가? / 지옥의 존재와 하나님의 본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어거스틴 - 영원한 형벌에 대한 논란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오해로부터 일어난다. 중생하지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 - 하나님의 성품이 지옥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필수적으로 만든다.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무한히 협오하므로, 죄인에 대해서도 그의 진노와 증오를 나타낸다. 영원한 형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의 무한성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에릭슨 -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죄다. 지옥 고통은 인간 자신의 선택이다. 따라서 지옥과 하나님의 사랑은 모순되지 않는다.
➁ 지옥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존재 이유와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이 지옥에서 인간에게 끝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준다는 개념은 사디스트적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조화되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사탄의 행동에 더 적합한 것이다. 전통적 지옥관은 왜곡된 하나님 개념에 기초한 것이며 비성서적이다.
➂ 일부 전통적인 견해 지지자들도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 개념이 지옥교리를 약화시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는 전통적 견해의 수용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엇으며, 비판자들의 꽁격의 초점이 되었다.
3) 비유서로가 조건적 불멸설
A. 비유설
- 성서에 나타난 지옥 표상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비유적 또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옥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아닌, 악의 결과로 일어나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정의한다. 지옥은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혼자 살려고 하는 세상적 결정의 실현이다. 자기중심적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장소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표현된 신약성서의 지옥 모습은 지상의 화염과 동일한 뜨거운 열과 연기의 장소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 임박한 파멸을 경고하는 비유다.
- 지옥 고통이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임을 강조하며 영원형벌설의 사디즘적인 요소를 비판한다. 하나님은 지옥에서 그의 피조물이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 할 수 없으며, 성도들 역시 동료들의 영혼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 성서적 근거와 이론적 토대
➀ 유대문학의 지옥 형상은 상징적이었다. 중간시대에 게헨나, 힌놈의 골짜기는 지옥에 대한 비유로 널리 사용되었다. 일부 유대인이 받아들였다. 이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으며 신약성서는 그것을 거부했다.
➁ 하나님은 항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그 시대의 언어와 형상을 사용하여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고 나타낸다. 신약시대에는 다채로운 언어 또는 과장법이 사요오디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심원한 악의 장소를 의미했다.
➂ 신약성서 저자들의 의도는 그들의 언어와 표현이 비문자적으로 이해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유다는 지옥을 영원한 불(유1:7)과 캄캄한 흑암(유1:13)으로 묘사했다.
➃ 종교개혁자들과 현대 복음주의자들 대부분이 비유적 해석을 지지했다. 칼빈은 꺼지지 않는 불을 비유적 표현으로 간주했으며, 루터는 문자적 해석을 거부했다. C.Hodge는 지옥불을 문자적 불로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B.Graham, C.S.Lewis, W.V.Crokett)
▣ 비판
성서와 불일치한다. 단순한 상징과 비유라고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공포의 대사응로서의 지옥형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을 부정한다. 찰스 핫지는 지옥에 대한 표상들을 모두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의 실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B. 조건적 불멸설
❐ 멸절설-조건적 불멸설 / 영혼 소멸설
- 지옥의 본질을 파멸로 해석하고 악인은 죽은 뒤 소멸된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을 운명을 지녔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멸적 존재라는 신념에 기초한다.
➀ 죽음은 인간에게 존재의 종식을 의미한다. 불멸성은 인간 본성의이 일부나 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신앙을 조건으로 인간에게 그것을 주신다. 신자는 불멸, 곧 영생을 누리게 되는 반면 불신자는 존재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지옥은 악인의 영혼을 소멸하는 종말론적 소각이다.
*영혼 소멸설 - 불멸성은 인간 본성의 일부지만, 악인은 죄로 인해 그것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악인은 죽은 뒤에 끝없이 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그 존재가 소멸하게 된다.
➁ 지옥의 존재나 악인의 지옥 형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영원성을 부정한다. 악인의 최종적 파멸을 지옥의 본질로 이해한다. 지옥불은 악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소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자의 궁극적 결과는 자기파멸이다. 따라서 지옥은 고통 속에서 새로운 불멸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한 인간의 반역적 삶이 끝나는 것이다.
➂ 성서 주석과 헬라적 인간관 거부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전통적 견해에 대한 비판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 시37:20, 말4:1-2, 마10:28, 13:30,42,49-50, 고전3:17, 갈6:8, 살후1:9, 히10:29, 벧후2:1-6, 3:7, 유1:7, 계20:14-15
불과 멸망의 형상을 결합하면, 존재의 종식, 즉 소멸을 의미하게 되낟. 성경은 악인의 궁극적 파멸을 증거 한다.
➃ 전통적 지옥관이 성경 자체보다 오히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헬라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전제를 갖고 성경을 이해하면, 악한 자는 지옥에서 영원히 의식적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견해에 이르게 된다. 죽은 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신앙과 영혼불멸 개념이 혼합된 결과가 전통적 견해다. 그렇지만 영혼불멸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멸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사이며 인간의 내적 소유물이 아니다.
➄ 최초제기 - 4세기의 Arnobis “절멸이 악행자에 대한 진정한 형벌이며 그의 진정한 죽음이다.”
소치누스 - 악인의 멸절 교리 주장 : 악인은 죽음과 더불어 멸절되지만 의인은
마지막 날 불멸의 생명으로 부활 될 것이다
제7일 안식교 - 악인의 영혼은 일정기간 형벌을 당한 뒤 소멸된다.
여호와의 증인 - 악인의 영혼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된다.
John Stott, P.Hughs, J.Wenham, C.Pinnock
➅ 전통적 견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성경의 교훈과 가장 일치하는 교리로 취급한다. 문자적 독해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에 일치한다.
*C.Pinnock의 주장
- 보다 성서적이다. 전통적 견해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준다고 보는 반면 조건적 멸절설은 사디스트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일치한다.
- 도덕적으로 더 정당하다. 전통적 견해는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괴물처럼 그리고 잇는 데 반해 조건적 불멸설은 하나님이 악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 법적으로 더 타당하다. 전통적 견해는 악인이 받아야 할 것 이상의 영원한 형벌을 요구하는 데 반해, 조건적 불멸설은 일정 기간의 형벌과 소멸을 요구한다 .
- 형이상학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 전통적 견해는 천국과 지옥이 영원히 공존하는 우주론적 이원론에 기초하여 악과 고통이 지옥에서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의 구속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있다. 조건적 불멸설은 지옥의 본질을 파멸로 이해함으로써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적절히 나타내고 있다.
▣ 비판
-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 성경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66:24, 막9:43-48은 지옥형벌의 영원성을 명시하고 있다.
✪ 결론
- 지옥에 관한 기독교적 논의는 그 존재보다는 본질에 집중되어왔다. 지옥의 실재에 동의하면서도 그 본질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영원한 형벌, 치유와 정화, 파멸 중 어느 것으로 보느냐 / 영원한 것으로 보느냐, 한시적인 것으로 보느냐
- 전통적 견해(영원한 형벌) / 연옥설과 보편구원설(치유와 정화)/ 절멸설(파멸)로 해석된다.
- 지옥불 : 전통적 견해(징벌의 불) / 멸절설(멸망의 불) / 연옥설과 보편구원설(정화의 불)
- 비유설 : 상징적, 비유적 해석, 하나님과 분리된 생태로 해석
- 전통적 견해(문자적 해석) :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의 사랑의 조화의 문제점
- 비유설 - 전통적 견해의 수정 시도
- 조건적 불멸설과 보편구원론 : 보다 급진적, 영원한 형벌의 완전한 폐기 주장
- 현대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더 이상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비유설이나 조건적 불멸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성서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
3. 만유구원설
1) 만유구원설의 주장
➀ 성서적 근거 제시
- 행3:21(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엡1:7-10(통일되게 하려하심), 골1:20(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화목-화해), 빌2:9-11(모든 존재들이 예수의 이름에 굴복,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 고전15:1(모든 생명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15:28(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21:4-5(만물을 새롭게 하리라-몰트만 주장의 핵심 근거) : 그리스도의 은혜는 마인에게 미치는 긍휼이다.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신다.
➁ 지옥의 영원성 부정
- 지옥을 인정하지만 지옥은 영원하지 않다고 본다. 헬라어 aionios는 히브리어 olam과 마찬가지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낟. 절대적 의미의 영원이 아니다. 이 단어는 aiones와 olam과 마찬가지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한다. 절대적 의미의 영원이 아니다. 이 단어는 aiones와 olamin과 같은 복수형이 존재하고 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막9:48의 영원한 불못은 교육적 의미를 지닌 정화의 불이다. 세상 끝까지 존재할 수 없다. 영원의 의밈는 한계가 있는 영원이라고 주장한다. Walter Michaelis는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죽음은 종말론적으로 관찰할 때 최후의 것 지평 속에 있느 한 단계 이전의 것이다. 최후의 것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한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이 종결될 수밖에 없다. 지옥의 고통과 경험은 현존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지옥이 있고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아직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지옥도 없애고 지옥을 경험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➂ 그리스도의 지옥여행과 파괴된 지옥
“그리스도께서 지옥을 열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몰트만-
그리스도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고 지옥을 열었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도 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곳에도 희망은 조재하게 되었다.” 지옥의 문이 열리 ㄴ것뿐 아니라 지옥을 감싸고 있는 성벽이 무너졌다. “그의 고난으로 그리스도는 지옥을 파괴시켰다.” 더 이상 “영원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 - “지옥은 세상의 어떤 장소나 지하세계의 언떤 장소가 아니고 하나의 실존적 경험인데 곧 죄와 하나님 없는 존재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경험이다.”
저주받은 세계와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 몰트만은 루터의 이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을 파괴시키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본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는 세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의 진노뿐 아니라 미래의 진노와 미래의 지옥의 고통까지 겪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만인의 죄를 속량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지옥의 문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은 궁극적으로 지옥과 죽음이 하나님 안에서 폐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옥의 경험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르 ㄹ그 지옥에서부터 꺼내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옥은 열려져 있고 닫혀진 영원한 지옥ㄷ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복음전파(벧전3:9, 4:6)를 주장했다. 개신교는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부정,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거부한다. 산자와 죽은 자의 교통 가능성, 연대성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예수 이전에 죽은 자들도 복음의 소급하는 능력에 의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➃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의 질적 차이
하나님의 결단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유일회적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고후5:19, 요3:16) 멸망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십자가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 전환의 개인적, 주관적 경험이요 수단이지 전환 자체가 아니다. 나의 신앙이 구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에게 신앙을 마련한다. 잘못된 결정은 시간의 세계에 속하는 결정이다. 그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을 뒤엎을 능력이 없다.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이다. 인간은 끝없이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양자택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주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의해 한계 지워져 있다.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있다. 불신자의 불신앙을 하나님이 화해시킨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보다 크게 보아선 안 된다. 불신앙과 저주는 인간의 자유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➄ 최후 심판과 용서하시는 하나님
마지막 심판의 날은 기쁜 날이다. 두려운 날이 아니고 가장 놀랍고 놀라운 날이다. 총체적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구현화 되는 심판이다. 하나니께서 십자가에서 의도했던 바가 완성되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만유를 용서하시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역사의 완성이자 계시이다.
➅ 만유의 구원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이 포함되어 있다. 악한 자들의 악은 심판받아 없어질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모든 잘못된 것들은 없어질 것이다. 악했던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전체 피조물과 우주를 구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다. 변혁된 세계이다. 마지막 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세상의 신격화 이론이 더 맞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종국적으로는 마귀도 구원하실 것이다.
➆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2) 만유구원론에 대한 평가
A. 문제점
- 제기되는 비판들
: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 기독교 전통과 심각하게 충돌하낟.
: 기독교 선교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
➀ 지옥에 대한 문제
➁ 영원에 대한 의미
➂ 믿음의 문제
➃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B. 긍정적 기여
➀ 바르트의 화해론 이후 남겨진 신학적 숙제를 해결했다.
➁ 수많은 신학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느 가능성을 열었다.
➂ 만유를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➃ 가톨릭의 잘못된 연옥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산자와 죽은 자의 교제를 가르쳤던 초대 교회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➄ 바르트의 만인 구원의 가능성을 넘어 만유 구원의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Ⅷ. 시한부 종말론
1. 시한부 종말론의 특성
- 발생 배경 : 급격한 사회변동과 불안정한 사회구조를 배경으로 기존교회가 현실에 안주하는 반면 종말론적 신앙을 강조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 계시의 종국성을 부정하고 새로운 계시를 강조한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짜 맞추기식으로 연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한다.
- 자기 집단만 구원 얻는다는 집단적 이기주의 경향을 지닌다.
- 예수의 재림 시기를 예고한다.
2. 바른 종말 신앙
- 시한부 종말론을 대하는 한국교회의 자세
➀ 사회가 불안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며 종말 신앙이 약화될 때마다 이단적 종말론이 등장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대형교회주의 등 양적 성장과 현세지향적 축복을 강조하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점검해야 한다.
➁ 이단들이 예고한 휴거의 날이 지나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 될 것이다. 그 날이 지나가면, 그것이 거짓 예언이었음이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종말론으로 인해 혼란이 왔다 해서 종말론적 신앙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종말은 분명히 있으나 그 시기를 모를 분이다. 따라서 신자의 바른 태도는 언제라도 종말을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➂ 교회는 신자들에게 항상 올바른 성서관과 종말론을 가르쳐야 한다. 이단들은 성경보다 새 계시와 신비체험에 더 권위를 부여한다. 거짓 예언과 잘못된 성경 해석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서가 최종적인 게시이며 최고의 규범과 권위라는 신앙과 성서적인 종말론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수적이다. 또한 현세에 안주하여 종말을 부정하거나 종말에 무관심한 현상과 현실 도피적으로 임박한 종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상, 이 양 극단을 피하여 성경적인 종말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단순히 내세로 도피하는 것으로 해결하기보다 기독교적으로 대처하고 극복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➃ 올바른 성경 해석법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해야 한다. 이단 종파는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거나 짜 맞추기식으로 해석하여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변형시키거나 왜곡시킨다. 바른 성경 해석법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이단의 발생을 막는 예방책이다.
➄ 지나친 신비주의와 체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체험적인 신앙은 필요하나 성경에 근거한 체험이어야 한다. 성경을 능가하거나 역사를 외면하는 신비체험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공허하다. 환상이나 직통계시를 쫓다 성경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➅ 성서적인 종말론을 확립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시한부 종말론의 도전을 성서적 종말론의 확립과 종말론적 신앙의 부흥을 위한 적절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a. 개신교의 신학적 빈곤
b. 그릇된 성서 해석
- 성서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문의 묘사를 이 시대의 특정한 사건과 직결시키는 일
- 성서의 본래 정신과 의도를 간과하고 이것과 관계없이 특정한 본문을 기독교의 진리로 간주하는 일
- 상충되는 본문들을 연관시켜 파악하지 않고 한 편의 본문들만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삼고 다른 한편의 본문들을 제쳐 두는 일
- 성서의 본문들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접합시키는 소위 짜 맞추기식 성서 해석
c. 극단적 신비주의, 영계 체험, 예언, 환상, 직통계시 등
*기독교 종말 신앙의 핵심 정신
➀ 다가오는 세상에 대한 준비
➁ 소명에 충실하고 신실한 삶 (마24:45-51, 25:14-30)
➂ 복음전파의 중요성 (마24:14, 벧후3:9, 행1:8)
➃
이웃사랑 (마25:31-46)
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