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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절망에 희망을 주는 기도
성경 본문 : 누가복음 23장39절-43절
설교 자 : 지 명숙 목사 <2023년 9월 20일 수요일>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오늘 본문에는 가장 절망적인 사람이 한사람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렸을 때
같이 달린 행악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습니다.
①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런데 그때는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가 죽는 순간 이였습니다.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때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
그는 마치 건물이 무너졌을 때 그 건물더미에 깔려
큰 부상을 당하여 죽어가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부상을 당하여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부상을 당하였고,
큰 건물더미에 깔려 있기 때문에 꼼 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그는 평생 고생하여 세워놓은 회사가 부도가 나려고 하는데,
감옥에 갇히는 자와 같았습니다.
지금 회사가 부도가 나려고 하기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하는데,
감옥에 갇혀서 꼼짝할 수 없게 된 자와 같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② 종교적인 의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으니 어떻게 교회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혔으니 어떻게 교회에 가서 기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를 하고 싶어도 손을 모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양손을 벌리고 못을 박았기 때문에
손을 모우고 싶어도 모울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고 싶어도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까?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종교를 찾고,
또한 종교가 가장 큰 위로가 되는데,
종교 의식을 행할 수 없으니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③ 지옥에 가는 것이 분명한 운명 이였습니다.
그는 죄인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지옥에 간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 이였습니다.
이렇게 그의 입장은
망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된 상황 이였습니다.
우리도 살다가 보면
이런 절망적인 때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요셉>이 깊은 웅덩이에 빠졌을 때 꼼짝없이 죽게 된 것과 같이
꼼짝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본문에 나오는 강도는 그런 상황에서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를 보고
본문 <누가복음>23장43절 말씀에
43절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행악 자는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최고의 희망의 상황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희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이 강도가 최악의 절망의 상황에서
최고의 희망의 상황으로 구원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 행악 자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달렸기 때문에
완전한 절망의 상황에 있는 그에게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원한 희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면 절망에서도 희망이 있습니다.
① 하루는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배는 꼼짝없이 침몰되게 되었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자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죽게 된 자기들을 구원하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태복음> 8장 26절 말씀에
26절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하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② <베다니>에 <마리아>와 <마르다>와
그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청하였으나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장사 지냈습니다.
이제 <나사로>는 다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흘이 지났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시고는 베로 염을 한
<나사로>의 죽은 시체보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이미 죽었고, 그리고 베로 꽁꽁 동여매서
꼼짝할 수 없는 <나사로>의 시체가 살아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이미 죽어서 장사를 지낸 <나사로>에게도
<예수님>이 오시자 다시 사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11장 25절-26절 말씀에
25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하면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같은 상황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달린 강도에게
<예수님>이 하신 약속도
본문 <누가복음>23장 43절 말씀에
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것 이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함께하시면
죽어도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즉 가장 좋은 곳이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도 죽을 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과 함께하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가 다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도 다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 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하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도 희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주>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습니다.
한참을 간 후에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우리가 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손주>는 “몰라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번에는
“그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손주>는 “몰라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온후하게
“그 소리가 나에게는 네가 길을 잃어 버렸다는
소리로 들리는데”라고 말을 했습니다.
<손주>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니 예요. 나는 길 안 잃어버렸어요.
나 할아버지와 함께 있잖아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우리의 길 잃어버림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도
우리에게는 길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에
<예수님>은 이미
20절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장 2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실 때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 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하시고 떠나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신 후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예수님>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은
<예수님>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명상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명상하는 자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명상하는 자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항상
<예수님>을 명상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치고 절망하는 것 봤습니까?
기도하는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마태복음>28장 19절 말씀에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는 것 이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는 자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일을 만나면 더욱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기도 했습니다.
이 행악 자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행악 자와 똑같은 환경에 있었던
다른 행악 자는 예상된 대로 멸망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구원받은 행악 자와
<예수님>과 똑같은 거리에 있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행악 자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 행악 자도 구원을 받았어야만 했습니다.
이 행악 자가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행악 자는 <예수님>을 비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행악 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꾸짖으며,
오히려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3장 42절 말씀에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렇게 기도했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멸망 받는 자와 구원받는 자의 차이는
기도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자들은 좋은 환경에 있어도 멸망 받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어떤 기도가 그를 그런 상황에서 구원을 했습니까?
(1)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기도였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3장 41절 말씀에
41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 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죽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그 죄의 댓 가는 매우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그대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는 순결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자기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때에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노예들이 노를 저어서 가는 갤리선(Galley ship)을 타고 가는
<이탈리아>의 군주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노를 젓는 노예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무슨 죄를 져서 이곳에 끌려왔느냐 ?”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노예들이,
“내가 받는 죄 값은 나의 형이 받아야 합니다.”
“재판관이 뇌물을 받고 나를 억울하게 죄인을 만들었습니다.”
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런데 한 힘센 젊은 노예는
“각하, 나는 여기서 정당하게 벌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돈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훔쳤습니다.
그러므로 나 외에는 이 죄에 대하여 책임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군주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는
“이 악당아 ! 이렇게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너 같이 악한 놈은 이 정직한 무리에서 꺼져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료들은 계속하여 노를 젓는데
그 젊은이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할 때 구원의 길이 열리기 시작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고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달린 다른 행악 자가
절대로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과 같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고
그 앞에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다 구원을 얻게 되는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23장 42절 말씀에
그는 <예수님>을 보고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 하소서”라고 간구를 했습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①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리켜 <예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② 천국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천국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이렇게 <예수님>을
천지의 주인, 구세주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으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천지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절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인정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절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릴 때 <하만>이란 사람을 총애를 했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궁궐에 드나들 때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가 미워서 그와 그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하에 있는 모두 지방에서
다 죽이기고 했습니다.
그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은 1만 달란트를 뇌물로 주고 그 권한을 물려받았습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받은 옥쇄 반지로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대인>들을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죽이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조서를 써서 전국에 방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이 방을 가지고 역졸들이 말을 타고 전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모든 <유대인>들은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모든 <유대인>들이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역사로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하던
<하만>의 음모가 드러나서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한 장대에
<하만>이 달리고, 죽을 운명에 놓인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어야 할 날이 다시 원수를 갚고
다시 사는 <부림절>이 된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구원의 소망이 넘치는 줄 믿습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