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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명
차나무과 |
Eurya japonica |
낙엽이 진 중부지방의 겨울 산은 온통 잿빛이다. 띄엄띄엄 섞여 있는 소나무가 가버린 푸름을 일깨워줄 뿐, 삭풍이라도 몰아치면 삭막함이 숲을 훑어 놓는다. 그러나 멀리 남해안에서 제주도를 잇는 난대림의 겨울은 중부지방과 풍광이 크게 다르다. 늘푸른 넓은잎나무가 산을 덮고 있어서다. 난대림의 상록수는 대체로 두꺼운 잎사귀에 왁스 성분이 풍부하여 광택이 난다.
양지바른 난대림의 나무들 사이로 자잘한 톱니와 갸름하고 도톰한 잎사귀를 달고 있는 자그마한 늘푸른나무를 흔히 만날 수 있다. 바로 난대림의 붙박이인 사스레피나무다. 이 나무는 자람 터를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다.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서부터 숲이 우거진 산속까지 어디라도 적응하며 잘 살아간다. 주로 우리가 쉽게 만나게 되는 곳은 메마르고 건조한 산자락의 빈터다. 웬만한 건조에는 잘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잎 뒷면에 있는 기공(氣孔)이 소나무처럼 약간 함몰된 위치, 즉 ‘함몰기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변세포1) 에 의하여 증산작용을 조절하는 기능도 있지만, 기공 위치 자체가 쓸데없이 수분이 날아가버리는 것을 줄여주도록 설계되어 있다.
자람 터가 만족스럽지 않다 보니 사람 키 남짓한 작은 나무가 되어버렸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잘 버텨 나간다. 줄기 여기저기에는 싹눈을 숨겨두어 잘려지면 금세 싹을 내밀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쓸데없이 키를 키우느라 아까운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자람 환경은 좋지 않지만 잎사귀는 놀놀해지는 법 없이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자주 만날 수 있은 쓰임이 하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접하는 꽃다발의 바닥나무는 대부분 사스레피나무다. 화려한 꽃만 모여 자칫 천박해질 수도 있는 꽃다발의 품위를 올려주는 품격나무다.
사스레피나무는 한 번 쓰고 버리는 꽃다발로 세상의 임무가 전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숲속의 기름진 땅에 씨가 떨어지면 왕성한 생장으로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당당하게 경쟁한다. 진짜 사스레피나무인지 의심될 만큼 제법 큰 나무로 자랄 때도 있다. 간단한 기구를 만들 수 있는 굵기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 사스레피나무는 난대림의 숲이라면 어디라도 찾아들어 숲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추위에 버틸 힘은 거의 없다. 남해안에서 내륙으로 조금만 올라와도 사스레피나무를 만나기가 어려워진다.
사스레피나무는 암수가 다른 나무로서 이른 봄날 꽃을 피운다. 다섯 장의 꽃잎을 가진 작은 꽃이 가지 밑에서 땅을 향하여 수십 수백 개가 줄줄이 매달린다. 암꽃과 수꽃의 모양이 비슷하고, 꽃이래야 새끼손톱만 한 크기다. 암꽃은 황백색에 꽃잎의 끝부분은 꽃이 피고 조금만 지나면 보랏빛으로 변한다. 꽃에는 특별한 냄새가 있다. 향기로운 냄새가 아니라 가정용 LPG가스가 누출될 때 나오는 퀴퀴한 냄새에 가깝다. 꽃이 필 때면 후각이 예민한 사람들은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열매는 늦가을에서부터 초겨울에 걸쳐 까맣게 익으며 다음해까지 달려 있다. 열매가 많지 않은 겨울 동안에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여 효과적으로 종자를 퍼뜨린다.
사촌나무로 우묵사스레피나무가 있다. 이름 그대로 사스레피나무와 꽃, 열매, 나무 모양은 모두 비슷하나 잎 꼭지만 요(凹)형으로 우묵하게 들어가 있는 나무다. 내가 본 우묵사스레피나무의 아름다운 군락은 제주도 성산일출봉에서 구좌읍 쪽으로 이어진 해안도로다. 겨울날 제주도를 여행하게 된다면 한번 가보기를 권하고 싶다. 사스레피나무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의 궁금증이나 아직 어원을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