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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노적봉・만경대・백운대・숨은벽・인수봉 연장등반
이틀간 5개봉,
가상의 거벽을 오르다
글 안준영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북한산은 한국 클라이머들의 요람이다. 베테랑 클라이머부터 이제 막 8자매듭법을 배우는 초보 클라이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북한산의 암벽을 오른다. 이들은 북한산에서부터 시작해 세계의 고산거벽으로 나아갔으며 지금 세계 산악계에서 주목받는 여러 등반들을 해내고 있다.
북한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암장은 인수봉으로 꼽을 수 있지만, 그 외 백운대와 노적봉, 숨은벽, 만경대 등도 클라이머들이 즐겨 찾는 암장과 리지등반 코스이다. 하지만 이들 바위들은 등반높이가 200여 미터밖엔 되지 않아 어느 정도 등반 경험이 있는 클라이머라면 하루산행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곤 한다. 또 1천 미터가 넘는 고산거벽과 비교했을 때 일부에 지나지 않아 북한산의 암장들에서는 체험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우리 산악인들은 새로운 등반방식으로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었다. 바로 ‘연장등반’이다. 눈앞에 가상의 거벽을 설정해 한번 등반을 시작하면 땅에 내려오지 않고 줄곧 벽에 매달려 오르내리는 것을 반복하는 연장등반은 낮은 산뿐인 우리나라의 환경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등반방식이다. 과거의 산꾼들도 이런 속에 마음의 히말라야를 올랐고, 훈련을 거쳐 결국 꿈을 실현으로 살아내 왔다.
노적봉에서 시작, 만경대까지 하루 등반
“등산이란 건 어쩌면 스스로 자학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건지도 몰라”
유학재씨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노적봉 아래서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각자 15kg 가까운 무게의 배낭을 지고 온 탓에 온몸은 땀에 흠뻑 젖은 터였다. 취재등반은 노적봉, 만경대, 백운대, 숨은벽, 인수봉을 며칠이 걸리건 모두 오른다는 계획이었다. 석가탄신일 연휴였기에 시간이 남으면 또 어딘가를 찾아 오를 궁리고 각자 배낭에 4박5일분의 식량과 장비를 나누어지고 우리는 여기까지 올라왔다.
등반은 두 개조로 나눠서 하기로 했다. 노적봉은 1930년대 백령회원들이 서면 횡단 루트로 초등한 후 지금까지 30여 개 루트가 나 있다. 서면쪽은 크랙과 침니 등이 발달한 반면, 남면쪽은 가파른 페이스와 슬랩이 대부분인데, 최근 개척된 루트들은 난이도가 5.11급 이상일 정도로 어렵다. 반면 서면쪽은 등산학교 교육장으로 활용될 만큼 쉽고 다양한 형태의 코스들이라 부담을 덜 갖고도 등반할
수 있다. 더군다나 어프로치가 길어 찾는 이들도 많지 않아 인수봉에 비하면 한결 한적하다.
우리는 조를 나누어 한 조에 3명씩 줄을 묶기로 했다. 유학재씨와 유순준씨, 기자가 한 조가 되었고 유영직씨가 이끄는 나머지가 또 다른 팀이 되어 나란히 등반을 해나갔다. 다들 리지화를 신고, 올 여름 아이거 북벽 등반을 계획하고 있다는 유영직씨는 빙벽화를 신은 채 선등을 서기 시작했다.
크랙 구간이 끝나는 4피치까지는 모두 어려움 없이 등반을 완료했다. 유학재씨가 5피치째 페이스 슬랩 구간으로 등반으로 이어나갔다. 스탠스가 좋지 않은 구간이어서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설치돼 있는 노후한 슬링을 왼발에 걸은 다음 딛고 일어나는 동작으로 크럭스를 돌파할 수 있었다. 이어 그 구간을 넘어서면서 페이스 슬랩의 경사도는 줄어들었다.
6명 모두가 노적봉에 도착한 때는 오후 3시였다.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다. 앉아서 행동식을 꺼내먹고 있던 필자에게 유학재씨가 “여기가 일본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쇠말뚝을 받았던 자리”라며 움푹 파인 곳을 가리켰다. 그 당시에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와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적봉을 걸어 내려와서 만경대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4시로 하산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등반은 끝나지 않았다. 목표는 노적봉도 만경대도 아닌, ‘노적봉+만경대’였기 때문이다.
만경대는 주로 능선을 따라갔다. 고도를 높이는 등반보다는 확보가 필요한 구간을 만날 때마다 로프를 깔고 트래버스로 이동했다. 만경대 곳곳에는 확보 없이 그냥 걸을 수 있는 구간도 많다. 그런 구간에는 대개가 옛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성곽을 쌓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이 깎아지른 벼랑 위에 2~3단으로 돌을 쌓아올린 선조들의 고생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노적봉까지 올라와서 쇠말뚝을 박은 일제, 만경대까지 올라와서 성곽을 쌓고 서울을 지킨 우리 조상들. 역사적 가치관을 갖고 바라보기 이전에 이렇다 할 등반장비도 없이 험준한 산을 넘었을 옛사람에게 그저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었다. 성곽이 있는 곳에는 초소병들이 다니기 좋게 하기 위해서 바위를 깎아놓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산악인으로서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클라이머들이 이들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등반사를 써가고 있는 게 아닌가생각해보았다.
어느새 태양은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만경대 능선 구간 중 촉스톤이 박혀 있는 곳이었다. 넘어가야 할 바위는 너무 둥글었다. 아주 큰 뻥 홀드 같았다. 등강기를 걸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장승필씨를 그 뒤에서 유학재씨가 배낭을 받쳐주어서 살짝 힘을 보탰다. 그 다음은 유학재씨가 올랐다. 잠시 바위를 살피던 유학재씨는 큰 소리로 “아, 여기 있었네”라고 외치며 홀드를 찾아냈다. 그리고선 날렵하게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 다음은 기자가 바위 앞에 섰다. 먼저 올라간 유학재씨가 홀드의 위치를 계속 알려주었지만 홀드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바위를 더듬고 두리번 거려본 뒤에야 홀드를 발견했다. 유학재씨가 말한 곳보다는 약간 아래에 누군가가 바위의 일부를 깎아놓는 닥터링을 해놓은 것이었다. 선조들이 깎아놓은 바위의 계단과 지금 잔인하게 패인 이 인공 홀드의 차이는 무얼까. 씁쓸한 마음이 들게 했다.
만경대에 올랐을 때에는 도시의 등들이 하나씩 켜지고 있을 즈음이었다. 위문에 닿자 이미 해가 넘어가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저녁놀의 기운만 약간 남아 있을 뿐 산속은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백운대 남면 올라 숨은벽 거쳐 인수봉까지
아침이 밝았다. 유영직씨는 침낭에서 나오면서 “간밤에 모기에 있어 잠을 못 잤다”고 말했다. 그만큼 날이 더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구운 소시지와 어제 먹다 남긴 알파미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백운대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백운대 남서면에 있는 시인 신동엽길을 등반하려고 했으나 점심때를 맞춰서 사진 기자와 백운대에서 합류하기 위해서 다른 루트를 잡았다. 시인 신동엽길에서 약간 북면 밑으로 갔다. 그곳은 설치된 볼트가 없는 미개척지로 보였다. 사람들도 거의 등반을 하지 않는지 바위 표면이 상당히 거칠었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긁힐 정도였다.
이번에도 유학재씨와 유영직씨가 선등에 나섰다. 유영직씨보다는 유학재씨 먼저 출발해서 앞서고 있었다. 밑에서 빌레이를 보고 있던 유순준씨가 “자일 끝”이라고 외쳤지만 위에서 들려온 유학재씨의 대답은 “더 가봐야할 것 같다”였다. 후등자 확보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학재씨보다는 약간 밑에 있던 유영직씨가 등반을 멈추고 유학재씨의 빌레이를 보았다. 밑에서는 유학재씨와 연결돼 있던 로프 한 동이 딸려 올라갔다. 그 로프가 이제는 유영직씨와 유학재씨 사이에 연결됐다. 안병훈씨는 “독특한 방식의 등반 시스템”이라고 말하였다. “등반은 바위의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적절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암벽의 경사도는 약 70~80도 정도 돼 보이고, 울퉁불퉁하여 홀드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후등자를 확보를 볼 수 있을만한 지점이 없었다. 유학재씨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때, 올라오라는 소리만 먼 곳에서부터 들렸다. 필자는 유학재씨의 팀으로 두 번째로 등반에 나섰다. 손에 닿은 바위의 촉감은 거칠었다. 노적봉 또한 등반을 많이 하는 곳이 아니어서 바위가 거칠고 부스러지기 쉬웠는데, 이쪽의 바위는 그보다 더 심했다. 하지만 홀드가 거칠다고 손을 뗄 수는 없었다.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 등반을 이어나갔다. 바위는 원래 다 아픈건가보다 생각했다.
유영직씨는 “바위가 살아있어서 손바닥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바위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친 바위 표면으로 자신의 등에 올라타는 것에 대해서 항거하는 듯이 느껴졌다. 홀드가 큼직큼직하고 오히려 표면이 거칠어서 미끄러질 염려는 적었다. 하지만 간혹 부스러지는 부분이 있어서 홀드 선택을 더 신중히 해야 했다. 바위와 등반자 둘 다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는 것을 느꼈다.
2피치에 오르니 테라스가 나왔다. 테라스에서부터 남은 2피치 구간은 어렵지 않았다. 1피치 출발이 오전 8시였는데 2피치 테라스에 도착이 10시였다. 백운대 철 난간이 있는 구간까지는 위험한 곳에만 로프를 설치하며 등반을 진행했다.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은 자유등반하여 등반에 속도를 붙였다. 그렇게 해서 약 1시간 만에 백운대까지 도착하였다. 1, 2피치에 비하면 소요 시간이 반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두 배 더 쉬운 코스였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정상에 도착하니 뜨거운 태양이 바위를 데우고 있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날씨에 바위에 얹힌 고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고래등 같은 대슬랩에 압도당한 숨은벽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백운대에 도착했기 때문에 사진 기자와는 백운대 정상이 아닌 호랑이굴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유영직씨는 첫날 빙벽화의 지퍼가 고장 나는 바람에 어프로치화로 갈아 신기 위해서 백운대에서 산을 잠시 내려갔다 오기로 하였다.
일반 등산로에서 약간 빗겨난 곳에서 클라이밍 다운하여 호랑이굴에 닿았다. 사진 기자와 합류해서 다함께 숨은벽으로 이동했다.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에 마치 숨어있는 듯이 끼어있는 벽이라고 해서 ‘숨은 벽’이라고 불리는 이 암릉 지대는 마치 메말랐지만 사나운 들짐승의 등줄기 같았다. 처음부터 눈앞에 펼쳐진 60m 로프 한 동을 거의 다 끌고 가야하는 대슬랩 구간에 압도당했다. 파란 하늘과 은회색 빛의 바위는 색채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바위는 하늘 끝까지 치고 올라가려는 듯 기세가 등등해보였다. 선등으로 올라가고 있는 유학재씨의 종아리가 딴딴해졌다. 종아리의 각진 근육이 마치 한 덩어리 바위 같았다.
1피치 슬랩 구간은 그렇게 어려운 동작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슬랩을 꾸준하게 올라갈 수 있는 지구력을 요하는 구간이었다. 그에 비해 2피치는 쉬운 편이었다. 3피치는 모양새가 콧잔등 같아 일명 ‘콧잔등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에서부터 시작한다. 처음 시작하는 홀드가 닿을까 말까하다. 처음 홀드를 잡은 상태에서 맨틀링해서 넘어가야 하는데 배낭이 무거워서 몸을 넘기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유학재씨가 “짜, 힘, 힘!”하며 기합을 넣으면서 콧잔등 바위를 넘어섰다. 기자의 경우에는 키가 작아서 첫 홀드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약간 점프를 해서야 겨우 시작 홀드를 잡을 수가 있었다. 왼손으로 먼저 홀드를 잡은 다음에 오른손과 함께 당긴 후에 힐 훅을 걸었다. 맨틀링으로 몸을 끌어당기면서 일어서야 했는데 배낭 때문에 거의 바위를 껴안은 듯, 안쪽 허벅지를 땅에 다 끌어가면서 겨우 턱을 넘을 수가 있었다.
태양은 점점 더 뜨겁게 내리쬐었다. 기운은 더 빨리 빠져나갔다. 급하게 물을 들이키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몸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날 서울의 최고 온도는 28.3℃로 올해 들어서 가장 더웠다. 숨은벽을 끝내고 인수봉이 눈앞에 들어왔을 때는 벌써 3시 30분이었다. 우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유영직씨와 ‘인수C’에서 합류한 유학재씨는 이미 로프를 걸고 있는 상태였다.
이틀간의 여정, 인수봉에서 정점을 찍다
인수봉 서면에 있는 ‘인수C’길은 인수봉을 오르는 루트들 중에서 가장 짧은 루트로 4피치만 등반하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우향크랙이며 마지막 구간은 페이스로 돼 있다. 장승필씨는 중학교 때 이곳을 로프 한 동 매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때는 운동화를 2주에 한 번씩 바꿨다”는 그는 하네스도 없이 그저 로프로 하네스를 만들어서 등반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죽는 게 뭔지 생각조차 안 하고 산에 다녔었지”라고 말하는 그는 올해 칠순을 넘긴 나이이지만 아이거 북벽에 도전할 계획이다.
전날의 노적봉, 만장대에 이어서 아침부터 백운대, 숨은벽까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어지는 등반에 ‘인수C’길은 더 어렵게 느껴졌다. 행동식을 먹어가며 가방의 무게를 줄여보려고 했지만, 가방은 바위를 오를수록 더 무겁게 아래로 쳐졌다. 선등자들의 자세를 밑에서 보았지만 이미 힘이 빠져버린 기자는 등강기 등반으로 인수봉에 올랐다. 인수봉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해 있던 유학재씨와 유영직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인수봉에 오르는 서울이 한눈에 보였다. 유학재씨는 “서울에 이런 산이 있다는 건, 진짜 서울 사람들이 복 받은 거야”라고 말하며 감탄했다.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흘러가는 한강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강은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흐르고, 한국의 클라이머들은 세계의 산들을 꿈꾸며 오늘도 북한산 일대의 암벽을 오르내린다. @
첫댓글 재미난등반이였읍니다 내년에도 계획함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