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성공회, 최초의 교회 강화읍성당.
한국 문화와 서양 문화의 만남이 돋보이는 강화 최초의 한옥 형태 교회이기도 하다.
유배지였던 강화, 소외된 민중을 구원하기 위한 방주는 강화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강화에는 소외된 이들이 많다.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노인들이 남았다.
교회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섬김과 나눔을 계속하기 위해 강화읍성당은 그렇게 자리한다.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구릉 정상에 자리한 강화읍성당.
100년이 넘은 건물이자 한국식과 서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끌어 들인다.
덤으로 강화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도 선물한다.
강화 최초의 기독교 전파
강화도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14년 전.
그 밀알이 된 사람은 존 코프(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 주교다.
코프 주교는 국내 정세가 어수선한 1890년 9월 29일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인 9월 30일 서울을 방문했던 코프 주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물포의 한 저택을 얻어 방 하나는 개조해 성당(지금의 인천내동교회)으로 사용하고 다른 방 하나는 진료소로 사용한다.
성공회가 한국에서 시작한 선교와 의료사업의 효시다.
코프 주교는 서울과 인천을 거점으로 고아를 위한 사회사업, 의료선교활동, 전도사 교육 및 인쇄시설을 통한 출판사업 등을 펼치면서 전국 곳곳에 선교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1992년 워너 신부에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를 탐색하게 했는데 강화도에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1893년 봄, 코프 주교는 직접 강화 갑곶이에 와서 지방 형편을 살피고 선교 가능성 여부를 알아보았다.
당시 외국인은 강화 성내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코프 주교는 우선 갑곶이 나루터에 선교 거점을 마련하기로 하고, 그해 7월 워너(L.O.Warner) 신부를 파송했다.
코프 주교와 선교단이 강화를 최적지로 선정한 이유는 우선 강화는 섬 지방으로 해양국민인 영국인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코프주교는 같은 선교지역에서 다른 교단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쟁적인 선교를 원치 않았다.
아직 선교가 이뤄지지 않은 지역을 찾고 있었고 강화도가 최적지였다.
또 강화의 지리적 조건과 강화지방민의 정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기에 좋다고 파악했다.
역사상 강화는 유배지로서 정치적으로 소외와 핍박을 받은 지역이다.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지역이므로 우선적으로 복음전파와 교회 설립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워너 선교사는 나루터 근처 조그만 한옥을 기도소와 거처로 삼았다. 1894년 1월 20일, 코프 주교가 이 한옥을 성 니콜라회당으로 축복함으로 강화 최초의 복음전파가 시작된다.
워너 선교사는 이 곳 갑곶이 나루터에서 고아들을 모아 교육시키고 나루터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인쇄사업에 주력했다.
이곳에서 인천을 왕래하면서 장사하다가 천주교, 감리교회 등을 넘나들며 방황하던 김희준이 입교하게 된다.
김희준은 이후 1915년, 최초의 한인사제로 서품되었다.
|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 내부 모습 |
트롤로프 선교사와 성당 건축
워너 선교사가 풍토병으로 본국으로 돌아간 뒤, 후임으로 트롤로프(Mark N. Trollope 한국명 조마가) 신부가 파송된다.
트롤로프 선교사는 본격적인 선교를 위해 강화읍으로 선교본부를 이동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조선정부가 해군을 육성하기 위한 해연총제아문을 설치했다.
그 직속으로 조선수사해방학당을 설립해 1893년부터 운영해오고 있었다.
3년 뒤 학교가 폐쇄 되면서 교육을 담당했던 영국인 해군대위와 하사관이 본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살던 고가를 내 놓았다.
트롤로프 선교사가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강화 성내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미국의 감리교와 프랑스의 천주교가 성공회와 함께 강화 선교의 문을 두드렸으나 두 교파는 거부되었다.
성공회가 먼저 강화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해군사관학교를 양성하는 데 도움을 준 영국 정부에 대한 조선정부의 호의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어에 능통한 트롤로프 신부는 포교활동에 전력했다.
1896년 11월부터 1899년까지 수십 명의 입교자들에게 영세를 주었다.
강화선교 6년 만의 결실이다. 용기를 얻은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 가을부터 성당건축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강화성내 고가를 매입해 축성받은 성 바우로 회당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판단하고 제대로 갖추어진 성당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트롤로프 신부는 700평의 새 성당 건축부지를 바우로 회당에서 서쪽으로 300m떨어진 강화내성 성터 위에 마련했다.
1899년 가을부터 터 닦기를 시작하고 성당 터는 배 모양으로 구상했다.
뱃머리를 서쪽에 두고 내삼문과 외삼문을 안치고, 중앙의 선복에는 성당을 배치했다.
선미에는 주교관을 배치했다.
전체적으로 바다를 헤쳐 나가는 배의 형상을 본 땄다.
언덕 위 높은 곳에 자리잡은 강화읍성당은 건축당시부터 세파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구원할 방주로서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동서양의 미가 녹아든 한옥 성당
성당은 한국문화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던 트롤로프 신부의 구상과 궁궐목수였던 도목수의 풍부한 건축경험의 합작품이었다.
그 결과 새로 지어진 성당은 동서 길이 10간, 남북길이 4간의 총 40간 규모로 그 중 16간은 중층으로 지어졌다.
팔작지붕을 얹고 목골 벽돌조로 외벽을 두른 한옥에 내부공간을 전형적인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연출했다.
성당 곳곳에 피선교지인 한국의 전통문화와 기독교의 서구문화가 조화를 이루도록 배려한 결과, 기존의 궁궐이나 사찰과는 다른 아름다운 건축물이 탄생했다.
건축 양식도 궁궐이나 사찰의 화려하고 웅장한 양식 대신 민중들에게 친숙한 부연익공식 양식으로 짓고 내부면적의 효율성을 높였다.
성당 건축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인 1900년 11월 15일, 축성식을 가졌다.
이날 새 성당에서 코프 주교는 축복예식과 성찬예식을 봉행했다.
참석 인원은 30명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강화읍성당은 성공회가 본격적으로 한국선교에 뿌리를 내리는 거점이자 상징으로 자리하게 된다.
|
◇1914년 영국에서 보내온 종이 1945년 일제에 강제징발된 뒤, 1989년 교우들의 모금으로 다시 제작한 범종. |
강화 복지의 중심으로
강화읍성당은 1981년 경기도 지방문화재 111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강화군이 경기도에 서 인천광역시로 편입됨에 따라 인천시 지방문화재 31호로 변경되었고. 축성 100주년을 맞은 2000년에는 국가 사적 424호로 지정됐다.
현재 강화읍성당은 김준배 신부가 사역하고 있다.
김준배 신부는 노인요양원, 장애인 시설, 푸드뱅크 등 강화도 내의 복지를 담당하고 있는 성공회 기관과 12개 교회를 관할하는 총사제 직분도 함께 감당하고 있다.
“강화읍성당보다 뒤늦게 생긴 온수리교회가 교세면으로는 가장 크지만 강화를 대표하는 성공회 교회는 그 역사성으로 볼 때 강화읍교회다.
강화읍성당의 건축은 선교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힘들었던 초기의 준비기간을 넘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들어가는 중대한 전환점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동시에 코프 주교와 초기 선교사들이 품었던 믿음의 이상과 순수한 선교정신이 드러나는 신앙고백적 사건이었다.”
지금은 교회 아래 직물회사 부지에 공사가 한창이다.
강화군이 그 터를 인수해 공원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강화군에서는 강화읍성당을 고려궁지, 용흥문 등 주변의 사적지와 연계해 문화벨트로 만드는 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김준배 신부는 “건물을 소유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건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자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강화읍교회가 문화재교회로서 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꼭 필요한 교회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나눔과 섬김의 실천
성공회 강화교무구 총사제 김준배 신부
강화지역에는 유독 오래된 교회가 많다. 강화지역의 교회는 대부분 다 백주년이 넘었다. 1890년 한국에 성공회가 들어와 먼저 서울과 인천에 교회를 설립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서안에 아이오나(Iona)라는 섬이 있다.
6세기경 성 콜롬바(Colomba)가 교회를 개척하고 수도원을 세워 성공회의 뿌리가 되었던 곳이다.
당시 선교사가 한국의 강화도를 보니 영국의 아이오나 섬과 닮은꼴이었다.
뱃길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이요, 여러 가지 가치가 있어 보였기 때문에 초기 선교의 중심지가 됐다.
성공회가 뿌리를 내린 지 114년째다.
지금은 12교회가 있다.
한때는 25교회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감리교가 약 120교회 정도 있다.
실제로는 감리교가 더 많다.
그러나 일찍이 성공회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하면 성공회를 떠올린다.
강화읍성당이 한국교회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강화도에 예수를 전한 최초의 교회다.
천주교나 개신교를 통틀어 가장 먼저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영국선교사들은 토착 정신이 강했다.
한국인에 맞는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한국 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했다.
교회도 한국식으로 지었다.
강화읍성당은 한국식으로 지은 강화도 최초의 교회 건물이다.
한옥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성당을 짓는 등 한국 문화를 존중하며 기독교의 토착화를 시도한 노력이 아름답다.
우리나라 절 자체도 토착화의 전형이다.
인도나 일본, 중국의 절과는 다르다.
절도 한국식이라고 해야 맞다.
단청 무늬도 태극문양, 연꽃 문양 등 다양하다.
그 사이사이에 십자가 문양을 넣어 거부감을 없앴다.
정문 옆에 보리수나무를 심고, 선비나무라고 불리는 회화나무도 성당 옆에 심어 놓았다.
이런 모습이 불교를 본땄다고 비춰질 수도 있고, 1960년대까지 남녀 좌석을 구분하는 칸막이 등을 설치했기 때문에 유교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한국 문화였기에 받아들인 것뿐이다.
여기서도 성공회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종교나 종파를 초월해 열려 있다.
앞으로 목회 방향은.
지역자체도 인구가 많이 줄고, 또 65세 이상되는 고령인구가 20%를 넘고 있기 때문에 초고령사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도 젊은이보다는 어르신들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르신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목회를 하고 싶다.
이웃에 대한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이웃과 함께 하는 목회를 하고 싶다.
강화읍성당은 문화재적 가치로는 훌륭하지만 일반 교회로서의 기능은 떨어진다.
다행히 뒷편에 3천 평(약 1만 ㎡) 정도의 땅이 마련돼 있다.
그곳에 지금의 성당건물과 잘 어울리는 현대식 건물을 지어 강화군민을 위한 복지관으로 제공하고 싶다.
강화군/ 이연경 기자 (주간기독교 : 2007/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