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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2월 2일 금요일. 맑음. 영상 15도다.
두 번째 베트남 방문이다. 춥다. 심야버스타고 인천공항 가려했다. 밤 9시에 1호선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렸다. 서울역 앞에서 탄다는 심야버스를 기다리던 중 화장실을 찾아서 서울역으로 들어갔다. 서울역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마지막 전철을 탈 수 있게 되었다. 공항에 2월 2일 0시 30분에 도착했다. 04시 30분에 체크아웃을 했다. 베트남 하노이로 들어가는 비엣젯 항공이다. 저가항공이라서인지 출발 시각이 좀 맘에 들지 않았다. 새벽 6시 30분에 비행기가 날기 시작했으니 꼬박 밤을 공항에서 새운 것이다. 5시간을 날아서 간다. 기내식은 물 한 잔도 없다.
현지시각 오전 9시 30분에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Noi Bai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밟고 환전을 했다. 100달러 지폐를 주니 226,000동을 준다. 공항은 시내 중심부로부터 약 4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기로 했다. 공항을 나와 청사 앞에서 86번 버스를 탄다. 내리는 곳을 잘 몰라 종점인 하노이 역 앞에서 내리려 했는데, 엄마와 함께 온 총각의 도움으로 숙소 근처 정류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핸드폰의 GPS를 이용해 숙소 근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비엣 뷰 호텔(VIETVIEW hotel), 3성급 호텔(주소: 20 Lo Su , 호안 끼엠, 하노이)이다. 체크인을 했다. 우리 방은 8층이다. 숙소는 맘에 들었다. 창문이 커서 훤하다. 일단 창문이 크면 왠지 좋다. 오래된 거리에 있는 숙소라 복잡하고 시끄럽다. 빽빽하게 이어진 하얀색 건물이다. 주변에는 상가도 식당도 많고 숙소도 많으며 여행사도 많다. 방에는 고급스러운 시설에 커다란 그림이 두 장이나 걸려있다. 짐을 풀어놓으니 시장기가 느껴진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하노이로 들어온 것이다.
일단 밖으로 나갔다. 숙소의 위치가 정확히 익질 않는다. 호수 방향으로 걷다가 식당을 만났다. 간판도 제대로 없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데 MY HAI라는 글씨가 보이는 오래되 보이는 식당이다.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다. 사람이 다니는 보도위에까지 식탁이 펼쳐져 있다. 우리도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메뉴를 살펴보았다. 옆에서 맛있게 먹고 있는 메뉴를 가리켜서 식사를 주문했다. 소고기 야채 볶음에 밥이다. 둘이 먹고 110,000동(5500원)을 냈다. 맛도 있지만 가격이 참 저렴했다. 대충 이 나라의 물가를 짐작케 한다.
건너편에는 신카페 여행사가 있다. 내일 닌빈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교통비를 물어 보았다. 아침 8시에 셔틀 버스로 태워다 주는데 1인당 200,000동(10,000원)을 부른다. 우리는 기차역에 가서 기차 요금과 시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지도에서 기차역을 확인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하노이는 길이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있어 길 찾기가 쉽다. 걸어가야지 이들의 삶의 모습과 도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먼저 커다란 호수를 만났다. 호안끼엠 호수(Hoan Kiem)다. 사진에서 보던 빨간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호안끼엠 지구는 하노이의 도심이자, 상업중심지이다. 베트남 최대의 공기업과 은행 본사가 대부분 여기에 위치하지만, 중앙 정부 사무소는 바우 디뉴 지역 (때때로 프랑스 쿼터라고 함)에 있다. 하노이 시위원회는 호안끼엠 호수에 인접한 딘티엔호앙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하노이의 오랜 역사를 목격해 왔다. 리 왕조 초기에 , 545년 리남데 (Lý Nam Đế) 황제는 그의 야영지에 정착했고, 토리치 강에 목조 뗏목을 건설하여 리앙 왕조의 침략을 방어했다. 호안끼엠 호수는 하노이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이다.
하노이의 심장부로 통하는 이 호수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15세기 여(黎) 왕조를 세운 레 로이가 호수에서 건진 검으로 명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베트남을 지켰다고 한다. 전쟁에 승리한 후 보트를 타고 호수를 순회하는 중 황금색 거북이가 호수 아래에서 올라와 검을 물고 돌아갔는데, 이후 거북이가 그 검을 호수의 주인에게 돌려줬다[還劍湖]고 하여 호안끼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호수 중앙에는 13세기 몽골군을 물리친 쩐 홍다오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호안끼엠 호수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아침 6시경에는 집단 체조를 하거나 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여행자들에게는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좋은 휴식처를 제공해 준다.
붉은 다리로 연결된 응옥 썬 사당(Ngoc Son Temple)은 호안끼엠 호수의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 대학자 반 승(Van Xuong)과 13세기 몽고의 침략을 막아낸 쩐 흥다오(Tran Hung Dao), 물리학자 라또(La To)를 위해 18세기경 지어졌다. 사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테 훅(The Huc : 떠오르는 태양) 다리를 건너야 한다. 입구 기둥에는 ‘복(福)’과 ‘록(綠)’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쓰여 있고, 내부에는 길이 2m, 무게 250kg의 거북 박제가 있다. 이 거북은 호안끼엠에서 잡혀 발견 당시 전설상의 거북이일 것이라는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밤이면 원색 조명이 밝혀져 호안끼엠 호수의 야경에 한몫을 한다.
건너편 작은 광장에는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동상이 보인다. 공산주의 냄새가 나는 형상이다. 호수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건너편 작은 공원에 커다란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태조 동상이란다. 리 타이 토(974~1028)황제의 동상이다. 리왕조(李王朝)라고도 한다. 당시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세워지면서 북쪽에 강력한 거란족의 요나라가 들어섰다. 이런 틈을 이용하여 송나라로부터 제후 국가를 벗어나 리 왕조를 세우고 황제가 된 베트남 역사의 영웅 리 타이 토 황제다. 한국의 화산 이씨의 조상으로 알려진 리 왕조의 태조이다. 시조 이용상(李龍祥)은 베트남 리 왕조(이조)의 개국왕인 이태조 이공온(李公蘊)의 7대손이며, 6대 임금 영종 이천조(李天祚)의 7번째 아들이다.
1226년 정란을 맞아 왕족들이 살해당하자, 화를 피하기 위해 측근을 데리고 바다 너머 표류하다가 황해도 옹진 화산에 정착했다. 원나라 침입 시에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용상(李龍祥) 왕자가 1226년에 고려에 망명, 몽고군의 고려 침입 시 큰 공을 세움에 따라 고려 고종으로부터 화산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우리나라 화산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화산이씨는 베트남 이 왕조의 후손인 셈이다. 아직 웅진에는 그 당시 항쟁을 할 때 쌓았다는 베트남의 옛 이름을 딴 안남 토성이 있다. 그가 패망한 조국을 향해 통곡을 했다는 월성암이 있다고 한다. 지금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이 바로 리 따이 또 라는 이태조라고 한다. 동상의 모습은 유교식 곤룡포라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호수 남단에는 중앙에 작은 섬이 있고 거기에는 거북이 탑이라는 유적이 있다. 호수에는 분수가 있어 더욱 운치를 더한다. 이태조 동상이 있는 공원 다음에는 하노이 우체국건물이 있다. 더 걸어가니 건너편에는 TRANG TIEN(짱 띠엔) plaza 라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다. 2018년 새해를 기념하는 많은 꽃 과 부채, 수박 그림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도로에는 차량과 오토바이로 엄청 붐빈다.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우리의 목적지인 하노이 역에 도착했다. 20분 정도 걸어간 것 같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어 문을 열었다.(1902년) 베트남전쟁 때 폭격을 입어 파괴되었다가(1972년) 재건되었다. 역 양측의 부분에서 당시의 흔적을 회상할 수 있다.
하노이로 들어가는 하늘의 관문이 노이바이(Noi Bai)공항이라면, 육로의 관문은 단연 하노이역이다. 이곳에서는 하루 종일 베트남 전역으로 가는 열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든다. 하롱베이로 가는 기차도 있고 사파와 닌빈, 호치민 까지 가는 기차도 있다. 하노이 역은 청사가 A역과 B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상당히 떨어져있다. 우리나라 서울역이 중앙역과 서부역으로 떨어져 있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하노이역의 본 역이라고 할 수 있는 A역 청사에 온 것이다. 베트남말로 하노이 역을 의미하는 가하노이(Ga Hanoi)란 글자가 선명하다. 이 건물의 좌우로 긴 부속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하노이 A역과 B역은 외부에서 보면 서로 다른 장소에 독립된 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내부에서는 서로 같은 구내를 공유하고 있고 개찰구를 통과하면 결국 같은 플랫폼에서 같은 열차를 이용하게 되기 때문에, A역이든 B역이든 여행객에게 편리한 곳으로 가서 승차하면 된다. 기차표를 살 때 제일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여행자가 하노이 역에 가서 직접 표를 사는 방법일 것이다. 여행사를 통해서 표를 사면 여행사의 수수료도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베트남 말을 모르는 단기 체류의 외국인 여행자가 하노이 역에 가서 직접 표를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들었다.
우선 요금표가 어떤 객차(민영 또는 공영)의 어떤 객실(6인실 또는 4인실)의 어떤 침대(소프트 또는 하드)에 몇 층(1층 또는 2-3층)의 표를 구입할 것이냐에 따라서 요금이 다 달라질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전부 베트남말로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와 일시를 적어 창구에 웃으며 넣으면 친절하게 가격과 시간을 알려준다. 적당하면 구입하면 된다. 우리는 닌빈으로 내일 오전에 가려고 한다. 오전 8시에 출발하는 부드러운 의자 좌석을 2장 예매했다. 198,000동(두당 4950원)이다. 여행사 셔틀 버스의 절반도 안 된다.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많은 것 같진 않다. 거기에 자주 기차가 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대체적으로 한가하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하노이 시내의 알려진 곳을 찾아 구경하기로 했다. 역 앞으로 걸어서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니 철길이 나오고 철길 양 옆에 나란히 들어선 오래된 가옥들이 정겨워 보인다. 대만의 스펀 지역이 생각난다. 걸어가다 처음 만난 곳이 레닌 공원이다. 레닌 동상이 있어서 알게 되었다. 아직도 레닌 동상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길 건너편에는 가로수 고목들 사이로 솟아 있는 하노이 깃발 탑이 보인다. 전에는 탕롱 황성에 포함되어있었는데 이제는 베트남군역사박물관에 있다. 역사박물관은 전투기들을 포함한 장갑차가 정원에 나열되어 있다. 인근에 있는 호아로 수용소를 비롯해 전쟁과 투쟁에 관계된 기념관이 많다. 그만큼 역사 속에 많은 전쟁이 있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인 것 같다.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 언어 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다.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 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45년에는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의 개입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 크메르루즈)했으나 1989년 철수했다. 심각한 경제상황과 소련에서 전개된 유사한 개혁 조치들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민간 기업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들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개혁을 감행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아시아 및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으며, 이로써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탕롱황성을 찾아간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하노이 탕롱 황성(The Imperial Citadel of Thang Long)이다. 하노이는 1010년 리 왕조의 시조 이태조가 수도를 호아루에서 탕롱(昇龍 현재 하노이)으로 옮긴이래, 18세기 응웬(원)왕조가 중부지방 후에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까지 약 700여 년 간 베트남의 수도였다. 현재 남아있는 탕롱 황성의 일부는 18세기 응웬(원)왕조시대의 건축물이다.
성벽은 길이가 남북으로 약 5km정도 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프랑스 건축가 보방(Vauban.1633-1707)의 건축 양식에 따라 축조되었다. 그러나 1897년 프랑스가 하노이 성벽을 파괴하고 지휘본부를 설치하게 되면서 옛 성은 점차 그 자취를 잃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성벽은 남아있지 않고 황성 중앙부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이 성에는 일반주민이 거주하는 지역과 고위 관료지역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왕의 가족이 거주하는 3개 지역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깃발 탑과 단문, 공주루, 경천궁 그리고 북문 이렇게 5개의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1812년 쟈롱(Gia Long) 왕조 때에 축조된 유적이다. 7년간 공사 끝에 깃발 탑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깃발 탑은 3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탑의 높이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포함해 60m이다. 탑은 18.2m 란다. 탑 내부에는 54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탑 중간 중간 꽃 모양과 부채 모양의 창을 만들어 놓았다. 깃발 탑 꼭대기에는 8각형으로 되어있다. 각 벽 마다 창문이 있다. 탑을 내려와 황성 터에 들어가면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도안몬(Doan Mon), 단문 위의 망루가 오문루이다. 성벽은 매우 두껍다. 단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오문루에 오를 수 있다. 망루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좋다. 망루 뒤에 있는 몇 개의 건물들은 모두 프랑스식 건물들이다. 층계를 내려오다보니 정원에 베트남 지도 모양의 정원수가 있다. 아마도 회양목인 것 같다. 낀티엔(Kinh Thien) 경천궁이 있던 자리는 용조각과 몇 개의 계단만이 남아있다. 정원의 뒤쪽에 옛 전각의 모습이 하나 남아 있는데, 이 건물의 이름이 공주의 전각이다. 이 전각은 뒤에 있다고 해서 후루 또는 정화루(북쪽의 평화를 유지하는 전각), 공주루 라고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원 왕조 시대에 왕이 후에에서 하노이로 올 때 그의 첩과 시녀들이 묵었던 전각이란다.
후루의 전각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었으나 프랑스 군이 궁을 점령했을 때, 구조를 변경했고 원형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원 왕조 시대에 축조된 성문으로 유일하게 보존된 문이 북문(Bac Mon)이다. 1882년 프랑스 군과 전투시 포탄을 맞아 파괴된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에는 입장료가 무료라고 들었는데 이제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입장료를 받는 곳에는 옛 가옥과 용춤을 출 때 사용되었던 자료가 있다. 커다란 돌 기념물이 처음 눈에 들어온다. 도안몬 문 옆에는 해바라기가 잔뜩 심어져 있어 예쁘다. 매표소 2층에 올라가 보니 당시 사용한 듯 한 가마와 침실이 있다. 잔디밭 건너편에는 국방부 건물이 초소병과 함께 버티고 있다.
황성을 옆에 끼고 고목들 사이로 걷다보니 앞에 과일을 파는 베트남 여인이 어깨에 작대기를 지고 온다. 파인애플을 15,000동(750원)을 주고 샀다. 아내도 베트남 모자를 쓰고 짐을 져보았다. 무겁단다. 베트남 모자, 삼각형 모양의 베트남 상징과 같은 전통 모자의 이름은 논(NON)이라고 불린다. 여인이 지고 있는 막대기 양족 끝에 바구니를 매달아 짐을 나르는 지게와 같은 것은 가잉(ghang)이라고 한다. 2002년 베트남에 와서는 물건을 사고 가격을 치르려면 동에서 0을 하나 빼면 우리나라 가격‘원’이었는데, 지금은 동에서 0을 하나 빼고 또 반으로 나누어야 우리나라 가격‘원’이 된다. 달러나 원화가 파워가 대단하다. 그러니 관광객이 많이 오는 것 같다.
육중한 기념비가 있는 국회 건물을 왼쪽에 끼고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틀어가니 노란색 주석궁이 나타난다. 1800년대에 지어진 200년이 넘은 건물이다. 한국 단체 관광객을 따라 무심코 들어갔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입장료가 있었다. 외관의 노란색이 인상적인 주석궁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총독부로 쓰던 프랑스식 건물로 테라스가 아름답다. 호찌민은 국가 주석으로 재임하던 시절 주석궁에 살지 않고, 근처에 있는 정원사의 남루한 집을 관저로 사용했다.
주석궁의 노란색은 금을 뜻하여 부를 상징한다. 작은 호수가 있고, 내부에는 호찌민이 사용했던 집기들이 비치되어 있다. 1954년 12월부터 1969년 9월까지, 15년 동안 호치민이 업무를 본 곳이다. 정원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나무와 나무가 붙어있다. 일명 사랑 나무라고 한다. 연리지 나무다. 이 나무 아래서 서로 포옹하고 뽀뽀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주석궁 뒤에 있는 길을 망고길이라고 한다. 망고나무에는 망고가 달려있지 않다. 호치민이 기르던 망고 나무들로 호치민 주석이 죽고 나서는 망고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망고 나무는 어느 해만 계속 열리다가 이후 망고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연못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호치민 관저로 간다. 호치민 관저는 호찌민이 1958년부터 11년 동안 거주한 집과 관저다. 호치민의 소박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입장료는 4만동이다. ( 한국돈 약 2000원) 프랑스군이 침략했을 때 전기공의 집이었단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원하지 않아서 이곳으로 이동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아직까지 받고 있는 것 같다. 관저로 들어가면 하나의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다. 호수가 있다. 호찌민은 살아생전 이곳에서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물고기가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을 큰 낙으로 여겼다고 한다. 예전 호치민 주석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근처에 요상하게 생긴 나무가 자라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부처목' (붓목 :BUT MOC) 이라는 나무였다. 실제로는 나무뿌리다. 뿌리가 내려가다가 막힌 것이 있으면 못 내려가고 거꾸로 다시 올라온단다. 날카로워 위험해 보인다. 호수 주변으로 조성된 길은 호치민 주석이 산책하던 곳이라고 한다. 실제 호치민이 사용했던 차고와 차들이라고 한다. 차 세 대는 소련에서 선물 받은 차라고 한다. 호치민이 손님들을 접대하거나 회의하기 위해 사용했던 회의실도 보인다. 벽에 아무 장식도 없이, 단출하게 책상과 걸상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유리창을 통해 바깥에서 관람한다. 연못 주위를 삥 돌다보면, 호치민 주석이 실제 사용했던 집이 있다. 나무로 만든 2층 구조로 되어있는 집이다. 2층이 실제로 호치민이 먹고 자며 생활했던 곳이다. 휘황찬란한 치장 없이, 단출하게 꾸며져 있다. 호치민은 1969년9월 2일 바로 이 저택에서 심장마비로 79세의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관저를 나오면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살폈다. 노인장이 전통복장을 입고 붓으로 글씨를 써 주고 있다. 딱 중국이다. 바로 근처에 있는 못꼿사원(Chùa Một Cột, 우리말로 일주사라고도 함)에 갔다. 못꼿 사원은 하노이의 가장 대표적인 사원 중 하나로 한적한 공원 안 연못 위에 자리해 있다. 기둥이 하나로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이란다. 못꼿 사원은 한국말로 일주사라고도 하는데, 하나의 돌기둥에 의해 작은 호수 위에 높이 솟아 있는 모습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사원은 원래 1028년에서 1054년까지 통치했던 리 타이 통 황제에 의해 지어졌다. 1049년 황제가 결혼을 못하고 왕비도 없어서 자손도 없었다고 한다. 황제가 관음보살상이 애기를 앉고 있는 꿈을 꾼 후 한 소수민족 여인을 만나 아들을 나았다고 한다.
이후 황제가 고맙다는 의미에서 연못에 기둥하나로 사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프랑스가 하노이에서 철수하면서 사원을 파괴했지만 하노이의 상징적 기념물이었던 이 사원은 1955년에 완전히 재건축되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당시 벽돌로 되어있는 기둥을 무너뜨리고 갔단다. 다시 복원하면서 시멘트 기둥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원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사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복원 과정에서 원래 건축 자재가 대부분 그대로 사용된 것 보아 건물 중 일부는 거의 10세기 가까이 된 것이다. 작은 방 하나로 된 사원 내부에는 반짝이는 황금상 관음보살이 있는 작은 제단이 있다. 현지인들은 이곳에서 기도를 한 커플은 결혼과 임신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관음상의 발밑에는 신도들이 바친 향기로운 꽃과 신선한 과일들이 놓여 있다. 신선한 과일인데 이상하게 생긴 과일이다. 손가락 모양으로 모아진 노란색 과일이다. 꽃 모양이다. 나중에 시장에서 물어보니 먹지는 못하고 제사용으로 사용한단다. 그 위에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버티고 앉아있다. 사원의 바로 뒤에는 큰 보리수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1958년에 인도에서 선물한 것입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에서 접목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못꼿 사원은 하노이 바딘 지역 옹 입 키엠 거리 뒤에 있는 공원에 자리해 있다. 사원은 여름에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열고 겨울에는 월요일과 금요일에 문을 닫는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수석에 꾸며진 탑과 절과 새들과 사람이 아주 어울린다. 입장료는 무료다.
그 뒤에 호치민 박물관이 있다. 하노이 호찌민 박물관(Hanoi Ho Chi Minh Museum, Bao Tang Ho Chi Minh Hanoi)은 1990년 5월 19일, 호찌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호찌민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관하였다. 구소련의 원조를 받아 레닌 박물관의 전문가가 설계와 내부 장식을 담당했다. 호찌민 생가 모형, 애장품, 편지 등 호찌민 생애와 관련된 모든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과거관 과 미래관으로 구분된 전시실에는 평화, 행복, 자유 등을 상징하는 외국 작가의 현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 가이드가 있으므로 부탁하면 안내해 준다. 시멘트 건물로, 연꽃 모양을 본 떠서 만든 3층 규모의 박물관이다. 내부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바딘광장으로 간다. 러시아의 붉은 광장, 중국의 천안문 광장 같은 곳이다. 바딘 광장은 1945년 독립선언문이 낭독된 곳이기도 하다. 항상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성지 순례하듯이 방문하는 곳으로 안쪽에 호치민의 묘가 있는데, 미이라처럼 방부제 처리를 하여 유리관 안에 보관 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볼 수 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방부제 처리는 러시아가 짱이라 한 번씩 시체가 러시아로 가서 리모델링을 하고 온다고 한다. 지금은 베트남도 기술이 발전해서 자체로 처리하는지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바지나 민소매는 안 되고 카메라등 짐은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아쉽게도 입장시간이 넘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참고로 호치민 묘소 입장시간은 화, 수, 목, 토, 일 7:30부터 10:30까지라고 한다. (월, 금은 문을 닫음) 그리고 매년 10~12월경에 시신 방부처리하기 때문에, 이때도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장대한 무덤을 가진 것은 평범한 화장을 원했던 호치민의 유언과는 반대되는 일이다. 호치민을 이렇게까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소망인 것 같다. 호치민 묘소는 관리를 매우 엄격하게 한다. 금귤나무를 보려고 노란 선을 들어갔다. 노란색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군인이 바로 제지를 한다. 호치민 묘소 입구와 주변에는 하얀색 군복을 입은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광장에서 좀 놀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 관공서는 전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 같다. 법무부 건물을 지나가니 하노이 문묘, 유학자를 양성하던 베트남 최초의 대학을 찾았다. 문묘(국자감 Van Mieu)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070년에 리탄통 황제가 공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래 1076년부터는 최초의 대학으로서 처음에는 왕자와 귀족자제들이 학습하는 곳이었고 후에 유학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전통 베트남 건축 기법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가치가 있다. 경내는 벽을 경계로 모두 다섯 곳으로 나눠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만이 출입했고, 좌우측 출입로는 중국인과 군인들을 위한 곳이다.
경내 좌우에는 거북 머리 대좌를 한 82개의 진사제명비가 있고, 특히 정문에서 들어가면 1805년에 건축된 퀘 반 각(Khuê Văn Các, 奎文閣)이 있는데 옛날에 유학자들이 퀘 반 각에 올라가 詩文 창작, 담론 또는 향유 활동을 하였는데 현재 퀘 반 각은 1000여 년의 문화 역사를 담겨있는 하노이시의 상징이며 베트남 사람의 호학정신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문묘의 각 문을 거쳐 나오면 출세한다는 속설이 있단다. 그래서 졸업시즌이 되면 많은 대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단체 졸업사진이나 개인의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제단도 있고, 왕정시대의 학자 Chu Van An 의 제단도 있다. 입장료는 두당 30,000동(1,500원)이다. 제1 정원은 ‘입도정원’으로 2층에 종이 있다. 제2정원은 ‘대중정원’이다. 2층의 동그란 구멍이 있는 문이 규문각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1484년부터 1778년까지 116회에 걸쳐 시행한 과거에 급제한 1307명의 명단이 새겨진 비석 82개가 있다. 제 3 정원인 “석비정원‘으로 ’천광정‘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베트남 화폐 10만동에 등장하는 연못이다. 그리고 더 들어가면 대성전이다. 커다란 종과 북이 양 옆에 있다. 2층에 올라가 본다. 내려다보이는 전경보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지붕의 기와들이 더 정겨워 보인다. 중국인들도 많고 일본인, 서양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옆에 있는 공원이 꾹뜨잠(국자감)공원이다.
이제 호수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림을 파는 거리다. 실내 장식용 여러 가지 자료들을 같이 팔고 있다. 우리나라 태권도장도 있다. 거리는 복잡하다. 차도는 오토바이와 차량으로 가득하고 인도는 주차해 놓은 오토바이와 자전거 사람들로 가득하다. 걷기도 어렵다. 그림을 구경하면서 걸어가니 그런대로 재미있다. 호안끼엠 호수에 도착했다. 하노이 올드 쿼터(Quarter)가 보이는 호숫가에 앉아서 잠시 쉰다. KFC가 있는 상가건물과 마주보이는 상가 건물에는 한글 간판도 있다. 호수 공원에는 사파의 추수기의 계단 논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빨간색 다리로 해가 넘어간다. 어두워진다.
식당을 찾아갔다. 아침을 먹던 식당이다. 역시 사람들이 많다. 돼지고기 수육과 야채볶음, 노란색 밥을 주문했다. 아내는 소고기 쌀국수다. 오이와 함께 나온다. 식사비가 전부 다 해서 100,000동(5,000원)이다. 가격도 저렴하지만 맛도 좋다. 바로바로 요리한 것처럼 훈훈한 음식이다. 가을 날씨 정도로 서늘하다. 거리의 오토바이들도 모두 라이트를 켜고 달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물을 한 통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노이에서 첫날을 보냈다. 숙박비는 36달러(820,800동)이다.
2월 2일 경비— 점심 110,000, 기차표 198,000동, 파인애플15,000동, 황릉 60,000동,
문묘 60,000동, 저녁식사 100,000동, 물 20,000동,
숙박비 828,800동(36달러)
계1,391,800동*0.05=69,59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