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지성에서 강의한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강사인 이재형님의 글입니다.>
소로 1강 - 소로를 왜 공부하나? 노동 거부형 생태 인간
1. 자비 - 생태와 인문학적 깨달음에 기반을 둔 사랑
자비라는 말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자비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대부분 사랑, 부처님, 부드러움 이런 느낌이 떠오를 겁니다.
말을 풀어 봅시다.
慈 라는 글자는 사랑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草 (풀 초) + 絲(이을 사) + 心(마음 심) 세 글자가 모여서 된 말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사랑이라는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 풀로 상징되는 자연과 이어져 있을 때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悲 라는 글자는 읽을때 ‘안타까울 비’로 읽습니다.
연민의 마음을 말하는 걸 겁니다.
이 말도 풀어 봅시다.
非 (아닐 비) + 心 (마음 심)
이걸 제대로 읽으려면 안타까움 정도로 해서는 제대로 읽은 게 아닙니다.
‘이게 아냐,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런 방식으로 약간 감정을 담아서 읽으면 정확히 읽는 겁니다.
이제 자비라는 말을 다시 읽어 봅시다.
자비는 사람의 마음이 자연과 이어져 있을 때 일어나고, 그 마음 속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인식이 포함되어 있는 (인문학적 깨달음이 포함된) 사랑입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좋은 것은 애정이지 자비가 아닙니다.
자비는 결코 부드러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자비를 잘 드러내는 불교 지도자는 수경, 도법 이런 저항적 실천을 이끌어 가는 분들이십니다.
앞으로 8주간 이어갈 소로 강좌는 결국 이 자비 이야기의 다양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삶의 의도
소로가 월든 숲으로 들어간 이유는 자기가 생각해 왔던 삶에 대해 한번 의도를 가지고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로가 도끼 한 자루들고 숲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제게도 충격적으로 다가온 삶의 모습 중 하나였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가져온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기없이 살기 - 세상의 무수한 폭력의 원인 중 하나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에너지와 권력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걸 끊어보고 싶었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적합한 땅을 찾았고, 여러 해 동안 석유와 전기 에너지에서 자유로운 삶을 꾸준히 공부해 왔기 때문에 가족들의 동의도 얻을 수 있었어요.
전기없이 깊은 산속에서 5년을 살다가 내려왔어요.
내려올 때도 이유가 있었고, 지금은 처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확대되고 있어요.
다시 돌아갈 건데, 그 때는 지난번 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서울에서 지금 하는 여러 가지 공부가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3. 운명적인 이끌림
소로는 월든을 10년에 걸쳐서 씁니다.
25년 간 일기를 꾸준히 썼고, 월든 숲속에서 지낸 일기를 기초로 10여년 간 마을 회관에서 강의하고 청중들의 반응을 다시 첨가하고, 생각이 바뀌면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서 책을 완성합니다.
그렇게 책을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소로 글을 읽으면 소로가 있는 자리에 같이 있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요.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고전에 대한 이해, 감각적 상상력이 아루러 지면서 어떤 하나의 형식에 가둘 수 없는 독창적인 글이 월든입니다.
소로의 글은 잠언 형식의 아름다운 글이 워낙 많아서 그런 글만 따로 모아서 만든 묵상록 형태로 편집된 책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소로의 속삼임, 묵직한 침묵)
직관적인 힘도 있어서 어떤 때는 아무 곳이나 펼쳐 읽었는데, 그 글이 가슴에 아로새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극찬을 할 수 있는 책인데도 실제 읽어 보면 잘 읽히지 않습니다.
월든을 읽는 것은 조금은 운명적 이끌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끌림이 있으면 글이 살아서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게 없으면 꼭 모래씹는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4. 생태적 신화
소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정확하게 인용하고 자유롭게 쓸 수 있었습니다.
인간, 노동, 자연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가지는 서로 소통하면서 완전한 인간을 만들어 갑니다.
근대 이전의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근대와 함께 시작된 중요한 현상은 인간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연과 분리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분리가 이루어 지지 않은 인간 - 노동과 자연이 일치된 인간을 만나면 잘 이해를 못하고,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 현상을 표현하는 말을 써도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어떤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고 싶은데,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현실적 언어가 없을 때 신화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학이 처음 생겨날 때 심리학은 신화의 언어를 꾸준히 사용했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런 말이 대표적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쟁 심리로 인해 한 사람이 어떤 심리적 분리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런 심리를 억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화를 사용해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생태학도 생겨난 지가 얼마되지 않는 학문이고, 인식 영역입니다.
생태학이라는 말이 쓰이고 그 현상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150년 정도 됩니다.
소로는 인간이 문명의 공격으로 인해 자연과 분리되면서 생태적 각성이 시작되던 바로 그 초기에 살았고, 그 상황에서 월든을 기록했습니다.
생태주의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소로의 삶은 일종의 신화에 가깝습니다.
생태적 상상력에서 한계에 접할 때 소로의 삶과 월든은 그 한계를 이해하고 넘어설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5. 노동 거부형 생태교육
노동 거부라는 말은 그 앞에 삶의 다양한 내용을 넣어서 이해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변화의 과정을 담고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 노동, 시험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자신의 노동과 분리되고, 자연과 분리됩니다.
학생이 자신의 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는 걸 상상해 봅시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담고 있는 지 금방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은 ‘나로부터 분리된 노동’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원래 인간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고나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과 소통하고 예술과 공동체적 만남과 삶을 즐기는 존재입니다.
시간을 노동력으로 바꿔서 축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근대 이전의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소로는 아주 기본적인 생계를 위한 노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로는 자신의 노동이 자신을 포함해서 자본과 국가의 축척 도구가 되는 걸 꾸준히 경계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만 봐도 거의 생계형 경영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건물 소유주에게 임대료를 주고, 빌린 돈에 대해 이자를 지불하고, 구매하는 물품 대부분에 부가가치세가 붙습니다.
커다란 욕심도 없이 아내와 함께하는 조그만 음식점 하나에서도 지주, 자본가, 국가의 축척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축척된 지주와 자본가, 국가의 잉여는 과다한 소비와 다양한 착취와 연결되어 자연과 인간 삶을 파괴하는 요인이 됩니다. 할수만 있으면 노동하지 않는 게 훨씬 아름다운 삶입니다.
소로의 일기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염려나 직업없이 자유 분방하게 군주보다 더 여유있는 시인의 여유를 지니고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나는 나 자신을 자연에 맡겼다. 수없이 많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살면서 마치 그 계절을 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인 양 살아왔다.
예를 들어 나는 주로 꽃과 함께 이 삼년을 보내기도 했다.
꽃들이 피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나를 속박할 아무 직업도 갖지 않았다.
나는 잎들의 색조가 변하는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가을 한 철을 보낼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아, 나는 고독과 가난으로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었던가! >
소로는 자신이 왜 노동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풍성한 축복인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니트족이라는 새로운 말이 있습니다.
직업을 갖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직업 훈련도 받지 않는 직업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니트족이 한국에도 13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연일 신문의 칼럼들은 최근의 통계에서 니트족이 증가하는 걸 염려하는 기사 일색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눈으로 이 현상을 봐야 합니다.
왜 직업이 있어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직업 훈련을 받아야 하나요?
자본 축적을 위한 활동에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할 이유가 왜 있나요?
니트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노동 거부형 생태 인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과 관련되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경제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생태 인간입니다.
소로를 읽으면 자연과 단절되고, 자본과도 단절되어 우울증과 절망에 휩싸여 사는 이들에게 자연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5. 시민의 불복종
시민의 불복종은 1848년에 쓰여진 글입니다.
시민의 불복종과 비교할 수 있는 글이 저는 ‘공산당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글은 같은 해에 쓰여 졌습니다.
공산당 선언과 시민불복종을 비교해서 보면 소로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 미래 가치를 담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민의 불복종은 책이 나오고서 사실 몇 사람이 읽지 못한 책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높은 가치를 받아들였습니다.
톨스토이를 삶의 모델로 정했던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지내던 젊은 시절에 남아프리카 유색인종 인권 운동을 하면서 같이 지내던 동지들과 ‘톨스토이’ 농장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간디도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따라 ‘시민의 불복종’을 깊이 있게 읽고, 바가바드기타와 함께 늘 옆에 두고 실천의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이 전통은 마틴 루터 킹, 함석헌 등 간디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시민의 불복종’은 영성적 사회 운동가들의 지침이 됩니다.
그러나, 간디나 킹의 운동 사례에서 보이듯 이들은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지도한 분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운동을 이끌어 나가도록 해내지 못했고, 간디를 저격한 사람의 자기 변론은 ‘간디는 한상 진리를 독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민의 불복종이 영성 운동가의 지침이 되었지만, 시민 자신의 지침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촛불봉기는 시민의 불복종 개념이 시민 자신의 지침이 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보여준 중요한 사례입니다.
시민불복종은 그 개념이 생겨난 지 150년이 지나서야 진정한 의미가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촛불봉기의 중요한 이론가 두 사람을 들라면, 네그리와 소로 라고 생각합니다.
다지원 강좌에서 지금 아래층에서는 네그리 사상의 진화, 위층에서는 소로 읽기가 진행되는 게 어떤 상징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6. 다중과 독종
조선일보를 우연히 봤는데, MBA 과정에 대한 특집이었어요.
그 제목이 이랬습니다. ‘독종이 되어 세계를 이해하라’
조선일보가 꿈꾸는 미래의 인간상은 ‘독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사회는 정글과 같은 시장만능 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을려면 독종이 되어 모든 장애와 난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생각일 겁니다.
우린 ‘다중’ 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을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중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소로를 공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로가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을 이해한 관점에서 사회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중이라는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과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다중은 인간의 자연성을 이해하는 현대적 관점 중 하나입니다.
<나는 내 안에 숲을 갖고 있다.
인간 정부의 재판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
인간은 나에게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
인간은 나에게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지만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만족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