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기의 공연산책 한국의생활문화원의 친잠례 재현행사
경복궁 강녕전에서 한국의생활문화원 오이순 원장 제작 박정기 대본 연출의 친잠례 재현행사를 개최했다.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양잠은 단군시대부터 권장되어 온 것으로 기자시대의 기록에 나타나며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조 태종에 이르러서는 왕후가 직접 친잠례를 거행함으로써 이후 우리 궁중의 큰 행사가 되었다.
백성의 경제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이를 권장하는 친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선잠제를 비롯하여 친잠의식 및 누에고치를 받는 수견례와 이를 조정대신과 팔도에 반사하는 조현례 의식이 있는데 역대로 이런 의식을 다 갖추어 거행한 경우는 영조 43년(1767년)이 유일하다고 전한다.
친잠례는 1923년 순종 때 창덕궁 친잠실에서 수견의식을 거행한 것이 마지막 예식이었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다. 남성들이 밭에 나가 땅을 갈고 먹을 것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입을 것을 생산하였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은 농업시대의 남성과 여성의 노동을 상징하고 있다.
길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고, 봄에 부지런히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야, 그 실로 가을에 좋은 비단 옷을 만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왕비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蠶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는 의식이 친잠례였다. 이 의식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3월에 친경례와 함께 시행했다.
조선 전기에는 잠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전국에 잠실을 두었고, 한양에도 동잠실, 서잠실 등 몇 군데에 잠실을 두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도록 하였다. 궁궐 안의 넓은 후원에도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에 설치한 잠실을 내잠실(內蠶室)이라고 하였는데, 왕비는 주로 궐내의 잠실에서 친잠례를 행하였다.친잠례를 행할 때 왕비는 황색의 국의(菊衣)를 입었고, 또 같은 색으로 된 상자에 뽕잎을 따서 넣었다. 친잠례를 행하기 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다. 선잠은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의 부인 서릉(西陵)이다. 사기(史記 : 중국의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에 의하면, 서릉이 처음으로 양잠을 하였으므로 누에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선잠을 모신 곳이 선잠단(先蠶壇)인데 조선 초기에 동소문 밖에 있다가 후에 선농단이 있는 곳으로 옮겨 함께 모셨다. 선잠에 올리는 제사는 종묘와 사직 다음으로 중요한 제사로 여겨 큰 규모로 행하였다. 누에를 쳐 길쌈을 하는 일이 국가의 정통성 다음으로 중요한 행사로 취급을 했다.선잠에 제사를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다른 사람을 선잠단으로 보내 대신 행하게 하는 것과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선잠단을 쌓고 직접 제사를 행하는 방법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친잠례에 대하여는 영조대에 편찬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의궤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 씨가 경복궁 터에서 행한 친잠을 정리한 것이다.
성종 8년(1477)에 처음으로 시행된 왕비의 친잠례 논의와 정비과정, 시행절차,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 성종은 친잠례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로부터 정권을 이양(移讓)받고 친정(親政)에 들어간 7년 8월에 친잠례를 거행하기로 하고 친잠의제(親蠶儀制)를 조사시키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성종 8년 윤 2월 친잠례는 송나라 제도에 따라 시행하되, 여 집사관의 이름은 조선의 관제를 따르게 하였다. 이어 3월 3일부터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기 시작하여 3월 14일에 역사상 처음으로 친잠례가 행하여졌다. 친잠례의 본격적인 시행은 3일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친잠 전날에는 액정서에서 유악을 채상단 밖에 설치하고, 3월 14일에는 왕비와 내외 명부, 궁녀들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친잠례를 시행하였다. 이날 왕비는 국의(鞠衣)를 입고 수식(首飾)을 더하여 채상단으로 거둥한 뒤 뽕나무 다섯 가지를 따고, 내외명부 1품은 각각 일곱 가지를, 내외명부 2,3품은 각각 아홉 가지를 채취하였다. 이날 친잠례에 참석한 사람은 왕비와 내명부 4명, 외명부 10명 이상, 궁녀 10명 등 대략 30명 정도다. 친잠례 거행 시 왕비는 채상 의식만 거행했으며,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는 의식은 내명부가 거행하였다. 잠실에서의 의식이 끝나면 친잠례는 끝나며, 끝난 뒤에는 왕비가 하사품을 내렸다. 이튿날에는 연회를 베풀었다.
성종 8년에 이루어진 친잠례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조선시대 최초로 시행된 것으로 왕실의 권위 상향과 왕권 강화를 의미하였고, 둘째, 왕비가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하는 모범을 보여 그들의 삶이 윤택해지기를 바라는 위민관이 반영되었다. 셋째, 조선 초기 유교적 문물제도가 완성되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거행의식과 음악, 복식, 의장물 등 당대의 문화적인 유산이 종합된 여성문화행사였다. 넷째,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왕이 아닌 왕비, 남성이 아닌 여성이 주관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조선 시대 왕비는 국모로서 여성이 갖추어야 할 덕을 상징하였는데, 왕비가 행하는 친잠례는 특히 여성 노동을 상징하였다. 남성들이 밭에 나가 땅을 갈고 먹을 것을 생산하는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길쌈을 하여 입을 것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여성들이 길쌈을 통해 생산하는 옷감을 대표하는 것이 비단이었다. 비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에를 쳐야 했다. 조선 시대 왕비가 내외명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이 바로 친잠례였다. 이 의식은 만물이 자라기 시작하는 봄에 왕의 친경례와 함께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 친잠은 백성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널리 장려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식을 갖춘 친잠례(親蠶禮)와 수견례(收繭禮)로 나뉘었다. 친잠에 관한 기록은 조선 1411년(태종 11)에 비롯되나, 실제로 친잠례를 갖춘 것은 1476년(성종 7) 왕궁 후원에 시설한 채상단에서 실시한 것이 최초가 되며, 1477년(성종 8)에는 이를 제도화한 친잠응행절목(親蠶應行節目)이 제정되었다. 친잠례의 시기는 1476년에는 3월, 1529년(중종 24)에는 2월에 한 것으로 보아 일정하지 않고, 기후에 따라 뽕잎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 실시했다.
왕비는 세자빈과 내외명부들을 거느리고 실시하였는데, 1767년(영조 43) 3월에 작성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의하면 왕비는 다섯 개, 내외명부는 일곱 개, 2·3품의 부인들은 아홉 개 가지의 뽕잎을 땄다. 이는 마치 친경의식(親耕儀式) 때 왕은 5추례(五推禮)의 밭갈이, 세손은 7추례, 종신(宗臣) 이하는 9추례를 행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이와 같은 친잠의식이 끝나면 만조백관은 왕비의 친잠에 하례를 드렸다.
누에가 고치를 지어 성견(成繭)이 되면 고치를 거두고 씨고치를 갈무리하는 의식인 수견의(受繭儀)가 있었다. 1767년 5월에 작성된 『장종수견의궤(藏種受繭儀軌)』에 의하면 영조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견의식은 5월 26일에 덕유당(德遊堂)에서 행하여졌고, 백관의 진하(陳賀)는 5월 29일 숭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수견의식은 상공이 죽상(竹箱)에 고치를 가득 담아 왕과 왕비에게 올리면 고치를 친견한 다음, 왕비는 상의, 상의는 상복(尙服)에게 주어 보관시키고 친잠과정에서 수고한 관계관을 위로하는 술과 음식을 내리는 과정으로 끝났다.
1924년 순종 효황후 윤비(尹妃)의 친잠의식은 수원의 잠업시험장에서 양력 5월 13일에 소잠(掃蠶)을 하고, 수견(受繭)은 창덕궁주합루 서편의 친잠실(親蠶室)에서 양력 6월 17일에 있었다. 이와 같이 왕비의 친잠은 채상(採桑)에서 뽕잎을 딴 후 고치를 거두고 씨고치를 갈무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틀어서 이야기 하나, 초기의 친잠은 그 일부를 생략한 채 채상단에서 뽕잎을 따는 것으로 그쳤다.
왕비가 친잠례를 행할 때는 먼저 채상단이라고 하는 단을 쌓았다. 채상단 주변에는 휘장을 쳐서 다른 곳과 구분하였으며,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머물 천막을 쳤다. 친잠례를 행하기 직전에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다. 선잠을 모신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다른 사람을 보내 대신 행하게 하는 방법과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친잠단을 쌓고 직접 제사를 올리는 방법이었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뽕을 따고 누에를 치기 위해서는 광주리, 갈고리, 시렁, 잠박(蠶箔), 누에 등이 필요했다. 왕비 등이 딴 뽕을 담기 위한 도구인 광주리는 대나무를 쪼개서 엮어 만들었는데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모양이었다. 지팡이 모양의 갈고리는 기다란 뽕나무 가지를 당기기 위한 도구였다. 시렁은 잠박을 얹어 놓기 위한 구조물로 소나무로 만들었다. 누에를 키우는 깔 자리를 잠박이라고 하는데 대나무를 쪼개 발과 같은 모양으로 엮어 만들었다. 시렁 위에 잠박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잠박을 둔 후 누에를 놓아길렀다.
왕비는 황색 국의(鞠衣)를 입고, 같은 색으로 된 상자에 뽕잎을 따서 넣었는데, 채상단의 남쪽 계단을 이용해 단으로 올라가 다섯 가지의 뽕나무에서 잎을 딴 후 황색 광주리에 넣었다. 이후에는 수행 여성들이 채상단 주변에서 뽕잎을 땄다. 왕비는 이 모습을 채상단의 남쪽에서 관람하였다. 왕비를 수행한 여성들이 따는 뽕나무 가지의 수는 품계에 따라 달랐는데, 1품 이상은 일곱 가지, 그 이하는 아홉 가지였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딴 뽕잎은 왕세자빈이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누에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갔다. 누에를 지키고 있던 잠모가 이 뽕잎을 받아 잘게 썰어 누에에게 뿌려 주었다. 누에가 뽕잎을 다 먹으면 왕세자빈은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왕비에게 돌아왔다. 이후 왕비는 왕세자빈 이하 수행 여성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왕비의 친잠례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길쌈 노동 및 양잠 노동을 장려하는 기능을 하였다.
성의순, 신혜란, 유소향, 김옥영, 최민신, 황인영, 한형정, 김예지, 김예슬, 서현자, 박수진, 김영주 등 전통 궁중의상을 착용한 출연자 100여명이 10여 년 간의 친잠례 행사출연은 재현행사를 고수준 고품격의 공연으로 상승시키고 관객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행사총괄/예술감독 오이순, 대본 연출 박정기, 기획 김기향, 사회 공경창, 복식 유호정 김정순 조남희, 분장 최정례 헤어뮤지엄, 메이크업 김선희, 헤어 강경희, 음악 이상은, 미술 서봉남, 전시 유한샘, 홍보 강영호, 온쇄 이지섭, 디자인/촬영 김기향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노력이 하나가 되어, 친잠례 재현과 학술회, 복식발표 및 전시회를 성공적인 행사로 창출시켰다.
박정기(朴精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