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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산책 스크랩 한유(韓愈) 중국 고전명시 감상 ⑦
해암 추천 0 조회 387 18.06.21 05: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중국 고전명시 감상 ⑦ 한유(韓愈, 768~824)

 

기괴하고 장대한 아름다움의 추구

 

 

1.

 

연재의 첫 호에서 언급했듯이 한유(韓愈, 768~824)는 시 〈산석(山石)〉에서 박쥐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황혼녘 산사에 가까스로 이른 사실을 서술하여 그로테스크한 자연의 형상을 묘사했다. 시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산 바위는 삐죽삐죽하고 오솔길 희미한데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가 날아다닌다

당에 올라 계단에 앉았더니 갓 내린 비가 풍족하여

파초는 잎이 크고 접시꽃도 살졌도다.

승려는 옛 벽의 불화가 볼만하다면서

관솔불을 가져다 비추지만 볼 곳은 드물기만 하다.

山石犖确行徑微,
黃昏到寺蝙蝠飛。
升堂坐階新雨足,
芭蕉葉大梔子肥。
僧言古壁佛畫好,
以火來照所見稀。

 

한유는 자연미에 도취한 심정을 묘사하지 않았으며, 자연은 인간 혹은 자기와 늘 격리되어 있음을 자각했다.

한유는 산을 사랑했다.

일찍이 화산(華山) 정상에 올라 미친 듯이 통곡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조카사위 장철(張徹)에게 준 시에서는 이렇게 썼다.

 

悔狂已咋指 미치광이 짓을 후회하여 손가락 깨물며

垂誡仍鐫銘 경계하는 편지 쓰고 명으로 새겼다네.

《答張徹》

 

한유는 중국의 오악 가운데 남악(南岳)인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 사당에 묵으면서 날이 맑기를 기도하자 어둑한 기운이 깨끗이 사라지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그때 지은 시가 〈알형악묘수숙악사제문루(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로 그 일부를 보면 이러하다.

 

 

噴雲泄霧藏半腹 구름 뿜고 안개 내어 산허리를 감추니

雖有絶頂誰能窮 절정에 오른들 뉘라서 다 볼 수 있으랴

我來正逢秋雨節 내가 온 날이 마침 가을비 내릴 때라

陰氣晦昧無淸風 음기로 어둑하고 맑은 바람 없기에

潛心默禱若有應 묵묵히 기도하매 감응이 있는 듯하니

豈非正直能感通 어쩌면 정직한 마음이 감통한 게 아닐까

須臾靜掃衆峯出 잠깐 사이에 구름 걷히고 봉우리들 솟아나

仰見突兀撑靑空 우러러보니 우뚝하게 창공을 떠받치고 있구나

 

 

그런데 이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유가 그려낸 것은 음기가 자욱한 풍광이다. 신비스럽기는 하지만 어딘가 음침하다. 형산의 주봉(主峯)인 구루산(岣嶁山) 꼭대기에 신우비(神禹碑)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애써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는 마침내 구루산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千搜萬索何處有 아무리 찾아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고

森森綠樹猿猱悲 빽빽한 푸른 숲에 원숭이만 슬피 우누나

-韓愈《岣嶁山》 -

 

역시 음산한 광경이다.

그런데 한유는 시 〈산석〉에서 황혼녘의 산사에 이른 과정을 그리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당쟁(黨爭)에 골몰하는 동료들에 대한 경고를 담았다.

 

 

 

 

山石犖确行徑微 산 바위는 삐죽삐죽하고 오솔길 희미한데

黃昏到寺蝙蝠飛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가 나누나

昇堂坐階新雨足 당에 올라 계단에 앉았더니 갓 내린 비가 풍족하여

芭蕉葉大支子肥 파초는 잎이 크고 접시꽃도 살졌도다    支 : 梔

僧言古壁佛畫好 승려는 옛 벽의 불화가 볼만하다면서

以火來照所見稀 관솔불을 가져다 비추지만 볼 곳은 드물기만 하다

鋪牀拂席置羹飯 평상을 깔고 자리 털고는 국과 밥을 내오는데

疎糲亦足飽我饑 성근 현미밥도 내 주린 배를 채우기에 족하구나

夜深靜臥百蟲絶 밤 깊어 조용히 누웠더니 온갖 벌레 소리 끊기고

淸月出嶺光入扉 맑은 달이 산마루에 솟아나 빛이 사립으로 들어온다

天明獨去無道路 날 밝아 혼자 가자니 길이 없어져

出入高下窮煙霏 안개 속을 드나들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山紅澗碧紛爛漫 산꽃의 붉은 색과 시내의 푸른빛이 어지러이 뒤섞이고

時見松櫪皆十圍 때때로 보이는 소나무나 역나무는 모두 열 아름

當流赤足蹋澗石 물 흐름에 임하여 발을 벗고 시냇가 돌 밟으니

水聲激激風吹衣 물소리 콸콸 울리고 바람은 옷에 불어온다

人生如此自可樂 사람이 나서 이와 같으면 절로 즐거운 것을

豈必局束爲人鞿 어이 반드시 궁색하게 남의 구속을 입으랴

嗟哉吾黨二三子 아아, 나의 동료 두세 사람아

安得至老不更歸 어이 하면 늙도록 속세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람이 나서 이와 같으면 절로 즐거운 것을, 어이 반드시 궁색하게 남의 구속을 입으랴.”라는 구절은 한유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밝힌 것이다. 조선 후기의 정약용은 이 구절에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1832년에 지은 〈노인에게 유쾌한 일 여섯 수, 향산체를 본받아 지음(老人一快事六首 效香山體)〉(1832) 제5수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我慕山石句 나는 〈산석〉 시구를 사모하나니

恐受女郞嗤 어린 계집 웃음 살까 두렵다만

焉能飾悽黯 억지 슬픔 꾸며내어

辛苦斷腸爲 애간장 부러 끊을 수야 없지

 

 

 

 

여랑(女郞)은 북송의 진관(秦觀)을 가리킨다.

원나라의 원호문(元好問)은 〈논시절구(論詩絶句)〉 제24수에서 진관의 〈춘일(春日)〉에서

 

有情芍藥含春淚 정 많은 작약은 봄날 눈물을 머금었고

無力薔薇臥晩枝 무기력한 장미는 저녁나절 가지를 눕히고 있네

 

라고 한 표현과 한유의 시 〈산석〉을 비교하여 “비로소 저것이 계집애 시임을 알겠네(始知渠是女郞詩)”라고 비평한 일이 있다.

 

 

2.

 

자(字)가 퇴지(退之)인 한유, 그는 맹자 이후 유학의 도통을 잇는다고 자부했다. 산문에서는 고문을 제창하여, 당송팔가의 맨 앞에 놓인다. 그는 시에서도 현실에 대해 직접 발언하고 서사적 제재로 장대한 시편을 짓거나 인생과 자연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을 남겼다.

 

한유는 정치적으로는 보수파에 속했다. 그래서 당나라 순종(順宗) 때의 혁신파를 비판했다. 다만 순종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권력자들을 미워한 점에서는 긍정적 측면이 있었다.

 

당나라 덕종이 죽고 그 아들 순종이 즉위했으나 순종은 중풍을 앓아 벙어리가 되었으므로 항상 궁궐 깊은 곳에 휘장을 드리우고 정사(政事)는 오로지 환관(宦官) 이충언(李忠言)과 소용(昭容) 우씨(牛氏)에게 맡겼다. 그러자 순종의 황태자 시절 스승이었던 왕비(王丕)와 왕숙문(王叔文)은 805년에 정치를 바로잡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유종원·유우석 등과 함께 환관의 전권과 번진의 할거에 반대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그들은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백성들의 누적된 부세(賦稅)를 탕감해 주었으며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을 폐지했다. 또한 환관이 장악했던 궁시(宮市)를 폐지하고 환관의 군사권을 박탈하려 했다.

 

이를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 한다. 영정은 당나라 순종의 연호이다. 그러나 왕숙문 등이 정권을 잡은 지 146일 만에 환관과 수구 세력들은 병중에 있는 순종으로 하여금 헌종에게 제위를 계승하도록 하고 이듬해에 영정혁신을 추진했던 왕비·왕숙문을 비롯한 여덟 명을 사마로 좌천시키거나 죽였다. 이를 이왕팔사마사건(二王八司馬事件)이라 한다. 팔사마 가운데는 유종원과 유우석이 들어 있다.

 

영정혁신 때 한유는 〈영정행(永貞行)〉을 지어 왕비와 왕숙문을 비판했다. 행은 노랫가락이란 뜻이다. 한유는 왕비와 왕숙문 무리를 머리가 둘인 뱀에 비유해서, “강산의 독기는 어둑히 끼어 있는 듯하나, 한 뱀에 두 머리 달린 건 일찍이 보지 못했네[江氛嶺祲昏若凝, 一蛇兩頭見未曾]”라고 하였다. 머리가 둘 달린 뱀이란 곧 꼬리가 둥글고 뭉툭하여 마치 머리처럼 생긴 데다 머리와 똑같이 행동하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한유는 유종원과 유우석이 정권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고 이 시에서“북군 백만 명은 범 같고 비휴 같으니, 천자가 직접 거느려야 하지 다른 장수는 안 된다네”라 하고 그 결구에서 “아, 이미 지난 일은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한다네”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한유를 ‘시세에 영합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한유의 이 시 후반부에는 유종원과 유우석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도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유는 〈진생에게 답한 서신(答陳生書)〉에서, “옛 도에 뜻을 두고 있으나 그 글의 사(辭)도 아주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사(辭)는 〈이익에게 답한 서신(答李翊書)〉에서 제창한 삼대양한(三代兩漢)의 책이었다. 그는 문사에 통하는 것[通辭]은 도를 배우기 위한 수단이며, 문학은 도를 전하는 것[傳道]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한유는 창작 과정에서 현실생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작가는 갖가지 경험을 겪으면서도 사상 감정의 평정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곧 〈울지생에게 답한 서한[答威遲生書]〉에서 “문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중(中)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실(實)을 중요시하는 법이다[夫所謂文者, 必有諸其中, 是故君子愼其實]”라고 하였다. 실(實)은 작가의 도덕수양을 말하며 중(中)은 사상, 감정, 인식의 조화와 균형을 뜻한다.

 

다만 한유가 모든 시에서 도덕적 엄숙주의를 견지한 것은 아니다.

인생의 회한을 토로한 시구들은 대단히 쉬우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살 만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시 〈증정병조(贈鄭兵曹)〉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樽酒相逢十載前 동이 술 마시며 십 년 전 서로 만났을 땐

君爲壯夫我少年 그대는 장년이요 나는 소년이더니

樽酒相逢十載後 동이 술 마시며 십 년 뒤 다시 만나니

我爲壯夫君白首 나는 장년이요 그대는 백발이로구려

 

그리고 〈추회(秋懷)〉에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鮮鮮霜中菊 곱디고운 서리 속의 국화는

旣晩何用好 철 늦은 때 무슨 좋은 것 있으랴

揚揚弄芳蝶 까불까불 꽃 희롱하는 나비야

爾生還不早 너의 삶도 또한 얼마 안 남았구나

 

 

 

 

또한, 시 〈견흥(遣興)〉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斷送一生唯有酒 일생을 보내는 데는 술이 있을 뿐

尋思百計不如閒 온갓 계책 다 찾아봐도 한가함만 못하구나

莫憂世事兼身事 세상일이든 자기 일이든 걱정하지 말고

須著人間比夢間 모름지기 인간세계를 꿈속에 비겨야 하리.

 

사실 한유의 일상사를 보면 당나라 때의 다른 지식인들과 별다른 것이 없다. 그에게는 애첩으로 강도(絳桃)와 유지(柳枝)가 있었다. 《당어림(唐語林)》에 의하면, 강도와 유지는 모두 가무에 뛰어났는데, 언젠가 유지가 담을 넘어서 도망갔다가 가인(家人)에게 다시 붙들려 왔다. 그러자 한유는 시 〈진주초귀(鎭州初歸)〉에서

 

別來楊柳街頭樹 이별한 후 거리 맡의 양류는

擺弄春風只欲飛 춘풍에 하늘거리며 날려고 했으나

還有小園桃李在 정원의 도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

留花不發待郞歸 낭군을 기다리며 꽃을 채 피우지 않고 있네

 

라 했고, 강도만을 총애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한유는 인생의 애환을 겪은 뒤의 앙금과도 같은 인생철학을 시 속에 간간이 토로했다. 한유는 부처의 사리를 장안으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뜻을 담은 〈불골표(佛骨表)〉를 올렸다가 헌종(憲宗)의 진노를 사서 조주 자사(潮州 刺史)로 좌천되었다.

 

 

 

 

 

좌천길을 가다가 질손(姪孫) 한상(韓湘)을 남관(藍關)에서 만나 〈좌천되어 남관에 이르러 조카손자 상에게 보여준다[左遷至藍關示姪孫湘]〉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一封朝奏九重天 글월을 아침에 구중 하늘[대궐]에 올리고

夕貶潮州路八千 저녁에 조주로 내쳐지니, 길은 팔천 리

欲爲聖明除弊事 성명(聖明, 군주)을 위해 폐단을 제거코자 하거늘

肯將衰朽惜殘年 노쇠하였다고 남은 생을 애석해하랴

雲橫秦嶺家何在 구름은 진령에 걸쳤으니 내 집이 어디인가

雪擁藍關馬不前 흰 눈은 남관을 에워싸 말이 나아가지 않누나

知汝遠來應有意 네가 멀리 온 데는 응당 뜻이 있으려니

好收吾骨瘴江邊 내 뼈를 독 안개 낀 강가에서 거두어 다오

 

 

시는 “성명(聖明)을 위해 폐단을 제거코자 하거늘, 노쇠하였다고 남은 생을 애석해하랴”라고 내뱉는 결연함과 “내 뼈를 독 안개 낀 강가에서 거두어 다오”라고 부탁하는 장렬함이 각별히 두드러진다.

그 결연함과 장렬함을 중화시키기 위한 것일까, 이 시에는 일종의 시참(詩讖) 일화가 전한다.

 

언젠가 한유가 한상에게 학문에 힘쓰라고 하자, 한상이 웃으면서, “준순주를 만들 줄도 알거니와, 경각화도 피울 수가 있답니다[解造逡巡酒, 能開頃刻花]”라는 시구를 보여 주므로, 한유가 이르기를, “네가 어떻게 조화옹의 기술을 빼앗아서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이냐?” 했다. 그러자 한상이 흙을 긁어모은 다음 동이로 그 흙을 덮어 놓았다가 한참 뒤 동이를 들어내니, 거기에 벽모란(碧牧丹) 두 송이가 피어 있었고, 그 모란 잎에는 “구름은 진령에 비꼈어라 집은 어디 있느냐, 눈은 남관에 가득 쌓여 말이 가지를 못하네[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라는 시구가 작은 금자(金字)로 쓰여 있었다.

한유가 시의 뜻을 깨닫지 못하자, 한상은“오래 뒤 이 일을 징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조주 자사로 유배되어 가다가 남관에서 한상을 만나자, 한상은 “옛날 모란꽃 잎에 쓰인 시구의 뜻이 바로 오늘의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하였다.

한유가 지명을 물어보니 바로 남관이라 하므로, 마침내 한상이 앞서 지은 시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한유는 젊었을 때 장안에 갔다가 실의에 차서 도성의 동쪽 문을 나와 길을 가다가 어떤 사자(使者)가 백오(白烏)·백구욕(白鸜鵒)을 천자에게 바치러 온 것을 보고 〈탄이조부(嘆二鳥賦)〉를 지었다.  : 感二鳥賦

무지한 새는 깃과 터럭이 이상하다고 해서 천자의 사랑을 받지만 사람은 지모와 도덕을 지니고도 시절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한유는 사찰에 안치해 둔 기이한 나뭇등걸을 두고 〈제목거사(題木居士)〉라는 시 2수를 지어, 나뭇등걸도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면 기복의 대상이 되어 칭송되거늘, 재주 있는 인간은 제자리를 얻지 못한 채 떠돈다는 사실을 반추했다. 그 첫 번째 수는 이러하다.

 

火透波穿不計春 불에 지져지고 물에 뚫린 지 헤아릴 수 없는 시간

根如頭面幹如身 뿌리는 사람 머리와 얼굴 같고 줄기는 몸뚱이 같네

偶然題作木居士 우연히 나무 거사라 써두었더니

便有無窮求福人 복을 구하려는 사람 끝없이 찾아오네

 

뿌리는 사람 머리와 얼굴 같고 줄기는 몸뚱이 같은 나뭇등걸은 형태가 기이할 뿐, 애당초 영험한 기적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것에다가 ‘목거사’라고 써 두자, 사람들은 그것에 대단한 영험이 있으리라 기대하여 복을 구하러 온다. 실상 이 등걸은 골짜기에 버려진 것이나 마찬가지로 본성을 잃은 것에 불과하다.

《장자》 〈천지(天地)〉에 “백 년이 된 나무를 쪼개어 희준이란 제기를 만든 다음 청황색을 칠하여 꾸미고, 잘라낸 나머지는 골짜기에 버려둘 경우, 잘려진 채 골짜기에 버려진 나머지 부분과 희준을 비교하면 그 미악(美惡)의 차이가 클 것이다. 그러나 그 본성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하지만 한유는 〈제목거사〉의 제2수에서 “신이 되었으니 어찌 골짜기에 버려진 것과 같으랴”라고 거꾸로 노래하여, 나뭇등걸이 자기 몫을 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한편, 불우한 자기 자신을 자조했다.

 

爲神퀝比溝中斷 신이 되었으니 어찌 골짜기에 버려진 것과 같으랴

遇賞還同爨下餘 재목 알아본 것은 불쏘시개로 초미금(焦尾琴) 만든 일과 같구나

朽蠹不勝刀鋸力 썩고 벌레 먹은 나무는 칼과 톱의 힘을 이기지 못하나니

匠人雖巧欲何如 장인이 비록 교묘하다 해도 어찌할 건가

 

 

그렇지만 한유는 굳은 절조를 중시했다. 〈조산창(條山蒼)〉에서는 황하의 물이 거칠게 흘러가지만 조산에 굳건하게 서서 강물을 바라보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를 예찬했다. 초기작으로 매우 짧은 시다.

 

條山蒼 조산은 푸르고

河水黃 하수는 누렇도다

浪波펊펊去 하수 물결은 넘실넘실 흘러가는데

松柏在山岡 소나무 잣나무는 산에 있도다

 

 

3.

 

한유는 시에서 이백과 두보를 특히 존경하였다. 시 〈장적을 놀리다[調張籍]〉에서 이렇게 읊었다.

 

李杜文章在 이백 두보의 문장은 지금도 있어서

光焰萬丈長 불길이 일만 장(丈)이나 길어라

 

또한 두 사람의 위업을 우(禹)임금이 홍수의 물을 빼기 위하여 산을 가르고 물길을 열었던 공적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역시 〈장적을 놀리다〉의 한 대목이다.

 

巨刃摩天揚 커다란 칼날은 하늘을 찔러 치오르고

垠崖劃崩豁 아득한 산벼랑은 획연히 무너져 열려

乾坤擺雷硠 건곤이 뒤흔들려 와르릉쿠르릉

 

이 시의 형용을 보면 한유는 장대한 아름다움을 사랑했음을 알 수도 있다.

한유는 시 〈쌍조(雙鳥)〉에서 이백과 두보를 두 마리 새에 비교했다.

 

雙鳥海外來 두 마리의 새가 해외로부터 와서

飛飛到中州 날고 날아서 중국에 이르렀어라

一鳥落城市 한 새는 도시에 내려앉아 살고

一鳥集巖幽 한 새는 그윽한 바위 속에 둥지 틀었다네

不得相伴鳴 서로 친구 삼아 울지 못한 지

爾來三千秋 벌써 삼천 년이 되었네.

……

還當三千秋 삼천 년이 지난 뒤에

更起鳴相酬 다시 일어나서 울며 서로 수작하리.

 

한유는 이백이나 두보를 존경했으나, 그 시풍은 이백이나 두보와 달리 기험(奇險)하고, 또 호방(豪放)하다고도 일컬어진다.

 

한유의 시는 정말로 기괴(奇怪)하다. 본래 기(奇)는 평범하고 상투적인 것에서 벗어난 독특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자, 규범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비정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한유는 현실 생활에서 보기 어려운 사실과 이미지를 시 속에 반영하지는 않았다. 대담한 상상력이 있어야 하는 신선이나 괴물, 귀신, 무덤 등을 소재로 삼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이하(李賀)와 다르다.

오히려 한유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뿌리를 두고, 스스로를 일상의 인간으로 의식하면서, 장대한 아름다움과 선열한 비유를 추구했으며 예술 형식과 언어상에서 일상적인 규율을 깨고자 했다. 또한 벽자(僻字)를 즐겨 사용하고, 험운(險韻)으로 압운을 했다. 험운이란 같은 운목의 글자가 매우 적어서 보통은 시의 운자로 사용하기 어려운 운자를 말한다.

 

한유는 사람들에게 공포나 경이의 감정을 일으키는 장대한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었으므로 그의 시에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적다. 앞서 본 〈산석(山石)〉은 고담(枯淡)하기만 하다. 한유는 자연미에 도취하거나 자연에 몰입하여 일체로 된 심경을 표현하지 않았다. 한유에게 자연은 인간과 늘 격리되어 있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자족했고, 그렇기에 자연의 장대한 아름다움을 좋아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한유는 희화적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묘사하고 서술하기도 했다. 희(戱)는 그의 문학적 취향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유는 〈코 골며 자는 것을 조롱하다[嘲睡]〉라는 시에서 정신없이 코 골고 자는 광경을 해학적으로 묘사했다.

 

雖令伶倫吹 비록 영윤을 시켜 악기를 불게 해도

苦韻難可改 시끄러운 음색은 고치기 어려워라

雖令巫咸招 비록 무함을 시켜 혼을 부른다 해도

魂爽難復在 혼백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라.

 

영윤은 고대의 뛰어난 악공이다. 무함은 신령한 무당으로, 은(殷)나라 중종(中宗) 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뛰어난 악공을 시켜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해도 코 고는 소리는 아름답게 바꿀 수가 없고, 뛰어난 무당을 불러 초혼굿을 한다고 해도 깊이 잠든 사람의 영혼을 불러올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한 것이다.

한유는 시에서 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이를테면 〈山南鄭相公樊員外酬答爲詩…… 依賦十四韻以獻〉에서 이렇게 썼다.

 

辭慳卓闊 표현은 간결하면서도 뜻은 어찌나 풍부한지      意 : 義 

呀豁疚掊掘 나의 허술한 틈을 찾아 고맙게 충고해 주셨구려.

 

상대방의 시에서 간결한 표현과 풍부한 뜻을 장점으로 지적하는 이 평어에서도 한유는 어려운 글자들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한유는 산문으로 시를 지은 고체시를 즐겨 지었다. 고체시는 어법 면에서는 산문에 접근한 것이며, 산문의 어법을 자유롭게 도입한 것이다. 송나라 때의 어느 평론가는 “한유는 문장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한유는 특히 칠언고시에서 측성(仄聲)의 운자를 하나만 끝까지 사용하는 일운도저(一韻到底)의 방식으로 꿋꿋한 기상을 살렸다. 이 방식은 송나라 때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도 즐겨 사용하였고, 조선의 시인들도 그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

 

한유는 비유법에서도 회란무봉격(回鸞舞鳳格)이라는 독특한 격식을 개발했다. 회란무봉격이란 한 연의 안짝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앞뒤로 사용하고 바깥짝에서는 보조관념과 원관념을 거꾸로 두는 것을 말한다. 즉 한유는 〈배 상공이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면서 여궤산 아래를 지나가다가 지은 시에 삼가 화운함[奉和裴相公東征, 途經女山下作]〉의 1, 2구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几 : 幾

 

旗穿曉日雲霞雜 깃발은 새벽 해를 뚫어 노을처럼 번잡하고

山倚秋空劒戟明 산은 가을 하늘에 기대어 창칼처럼 빛나네

 

이것은 깃발로 운하(雲霞)를 비유하고 산으로 검극(劍戟)을 비유한 것이다.

한유의 시는 이치를 말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단등경가(短燈歌)〉는 단경 즉 짧은 등잔대를 소재로 지은 시인데, 사람들이 단경 아래에서 열심히 공부하다가 일단 과거에 급제하기만 하면 단경을 담장 모퉁이에 내버린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한유는 이렇게 묘사했다.

 

 

長檠八尺空自長 여덟 자 긴 등잔대는 공연히 길기만 할 뿐이요

短檠二尺便且光 두 자의 짧은 등잔대가 밝고도 편리하다

 

그러고는 또 이렇게 썼다.

 

一朝富貴還自恣 하루아침에 부귀를 얻으면 도리어 방자해져서

長檠高張照珠翠 긴 등잔대 높이 걸어 미인의 머리를 비추게 하네

吁嗟世事無不然 아 세상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나니   吁 : 籲

牆角君看短檠棄 담장 모퉁이에 버려진 짧은 등잔대를 그대여 보게나

 

 

〈술잔을 잡고(把酒)〉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성을 좇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직접 드러냈다.

 

擾擾馳名者 요란스레 명성을 좇는 자들이야

誰能一日閒 어느 누가 하루라도 한가할 수 있으리오

我來無伴侶 나는 여기에 와서 어울릴 사람 없으니

把酒對南山 술잔 들고 한가롭게 남산의 경치를 대하노라

 

그러나 한유는 묘사가 뛰어나고 비유에도 특장이 있었다.

우선 묘사에 뛰어난 대표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잡시(雜詩)〉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합합(閤閤)이라는 첩어로 묘사했다.

 

蛙黽鳴無謂 개구리 울음은 아무 뜻도 없고

閤閤祗亂人 개굴개굴 그저 사람만 귀찮게 하네

 

〈눈을 노래하여 장적에게 주다[詠雪贈張籍〉라는 시에서는 흰 눈을 이렇게 묘사했다.

 

隨車翻縞帶 수레를 따라서는 흰 띠가 나부끼고

逐馬散銀杯 말을 쫓아서는 은잔이 흩어지네.

 

눈 내린 도로의 수레바퀴 자국을 흰 띠에 비유하고, 눈 내린 도로의 말발굽 자국을 은잔에 비유한 것이다.

〈정추(庭楸)〉에서는 자신의 정원에 있는 다섯 그루의 개오동나무를 묘사했다.

 

庭楸止五株 정원의 개오동나무는 다만 다섯 그루

共生十步間 열 걸음 거리에 함께 자라났구나

 

〈조춘정수부장십팔원외(早春呈水部張十八員外)〉에서는 비 온 뒤 거리의 풍경을 묘사했다.

 

天街小雨潤如酥 거리에 보슬비 내리니 우유처럼 윤택하여라

草色遙看近却無 풀빛은 멀리서 뵈이나 가까이선 안 뵈누나.

 

〈숙증강구시질손상(宿曾江口示姪孫湘)〉에서는 강마을에 홍수가 진 광경을 묘사했다.

 

暮宿投民村 저녁에 민촌에 투숙했더니

高處水半扉 높은 곳 사립이 반나마 물이 찼구나

 

〈추회(秋懷)〉에는 가을 추위를 묘사했다.

 

秋氣日惻惻 가을 기운이 날로 싸늘해지고

秋空日凌凌 가을 하늘이 날로 추워지니

上無枝上蜩 위로는 나무가지에 매미 없고

下無盤中蠅 아래로는 소반에 파리가 없구나

 

 

明代仇英绘《玉洞仙源图》,现藏北京故宫博物院

 

 

〈도화원(桃源圖)〉에서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의 풍경을 상상해서 이렇게 표현했다.

 

種桃處處惟開花 곳곳에 복사꽃나무를 심어 꽃이 만개하니

川原遠近蒸紅霞 멀고 가까운 산천에 붉은 노을 물씬하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어부처럼 복사꽃 만발한 경치를 만끽하고 싶다는 뜻을 말한 것인데, 붉은 놀은 곧 복사꽃이 일대에 만발한 광경을 형용한 말이다.

또 같은 〈도원도〉에서, 도화원의 신성함을 부각시키려고 동해 가운데 있다는 신목인 부상(扶桑)이라든가 선계에 있다는 아름다운 돌인 낭간(琅玕), 금계성(金鷄星)의 닭인 금계(金鷄) 등을 끌어들여 상상의 공간을 묘사해냈다.

 

夜半金鷄啁哳鳴 한밤중에 금계가 꼬끼오 울어 대니

火輪飛出客心驚 태양이 금방 솟아올라 나그네 마음 놀랐네

 

 

颐和园长廊的苏式彩画:桃花源(参照清代画家任预的《桃源问津图》

 

 

〈차등주계(次鄧州界)〉에서는 이별의 시름으로 심화(心火)가 생기고 눈 안에는 안화(眼花)가 더해졌다고 했다.

 

心訝愁來惟貯火 마음은 시름 뒤로 불길 쌓여 놀라고

眼知別後自添花 눈은 이별 후 절로 꽃이 더해짐을 알겠다.

 

 

〈포도(葡萄)〉에서는 포도 넝쿨을 용수(龍鬚, 용의 수염)라 하고 포도 열매를 여주(驪珠, 용의 턱 밑에 달린 구슬)라 했다. 이 시는 포도 가운데서도 당 태종 때 섭호국(葉護國)에서 바친 서역의 마유(馬乳)를 소재로 삼았다.

 

新莖未徧半猶枯 새 줄기가 다 뻗지 않아 절반은 말랐어도

高架支離倒復扶 높은 시렁이 축 늘어졌기에 다시 버텨주었네

若欲滿盤堆馬乳 만일 쟁반 가득 마유가 쌓이게 하려거든

莫辭添竹引龍鬚 용 수염이 뻗어가게 대나무를 덧대시길 사양 마시게

 

 

또 한유는 가슴속의 시름을 씻어 보려고 하지만 더욱 시름만 깊어진다는 것을 두고 기름으로 옷을 빨면 때가 더욱 번진다는 말로 비유했다. 즉, 〈후희가 이르러 왔기에 기뻐하면서 장적과 장철에게 준 시[喜侯喜至贈張籍張徹]〉에서 이렇게 말했다.

 

如以膏濯衣 기름으로 옷을 빠는 것과 같아

每漬垢逾染 적시면 적실수록 때가 더 번지누나

 

 

〈눈을 노래하여 장적에게 준 시[詠雪贈張籍]〉에서는 흰 눈을 고래의 뼈와 옥석의 가루로 비유했다.

 

鯨鯢陸死骨 땅에 올라와 죽은 고래의 뼈

玉石火炎灰 화염에 재가 된 옥석의 가루

 

본래 진(晉)나라 목화(木華)의 〈해부(海賦)〉에 “고래가 해변가 염전에 올라와 죽자……그 해골이 언덕을 이루었다[陸死鹽田……顱骨成嶽]”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유가 이를 눈에 비유하여 눈이 땅에 쌓인 광경을 고래의 뼈가 땅에 쌓인 모습으로 비유한 것이다.

〈혹독한 추위[苦寒]〉에서는 겨울날의 풍광을 이렇게 묘사했다.

 

日萼行鑠鑠 햇살 비추자 꽃잎이 눈부시게 빛나고

風條坐襜襜 바람 불자 나뭇가지 한들거리네

 

 

한유는 기발한 착상을 시에 담았다. 오동잎이 구슬 부서지는 듯 소리 내며 떨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그 사이에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추회(秋懷)〉 제9수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추회〉는 11수의 연작인데, 가을 낙엽에 촉발되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유한한 인생을 서글퍼하면서 술에 의한 환락으로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주제만을 보면 기괴함을 추구한 시와는 다른 경향을 지닌다. 하지만 시적 상상은 대단히 기괴하다고 할 수 있다. 제9수에 나오는 망서(望舒)는 달을 모는 사람인데 보통 달 자체를 가리킨다.

 

 

霜風侵梧桐 서릿바람이 오동나무에 침범하니

衆葉著樹乾 뭇 잎들이 바짝 말라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空階一片下 빈 계단에 한 조각 떨어지더니

琤若摧琅玕 쟁그랑 소리가 낭간이 부서지듯 한다

謂是夜氣滅 혹시나 밤기운이 소멸하여

望舒霣其團 망서(달)가 둥근 형체를 떨어뜨리고

靑冥無依倚 푸른 하늘에 의지할 것이 없어져

飛轍危難安 날아가는 바퀴(달)가 평안치 못해 위태로운가 해서

驚起出戶視 놀라 일어나 문 열고 바라보며

倚楹久汍瀾 기둥에 기대 한참을 그렁그렁 눈물 떨구었도다

憂愁費晷景 우수에 젖어 경각의 시각을 허비하다니

日月如跳丸 해와 달은 튀는 탄환과 같구나

迷復不計遠 헷갈렸지만 돌아갈 수 있기에 길이 얼마나 먼지 따지지 말고

爲君駐塵鞍 그대여 티끌세상을 달리던 안장을 멈추시라

 

 

또한 한유는 태화산(太華山) 꼭대기에 있다는 연꽃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고의(古意)〉라는 시를 지었다.

 

太華峯頭玉井蓮 태화봉 꼭대기 옥정에 자란 연은

開花十丈藕如船 꽃이 피면 열 길, 뿌리는 배만 한데

冷比雪霜甘比蜜 차갑긴 눈서리 같고 달기는 꿀 같아

一片入口沈痾痊 한 조각 입에 넣으면 고질병이 낫는다네

 

이 시에서는 신비스런 연꽃과 연근을 실제로 맛본 듯이 묘사해냈다. 태화산은 중국의 오악(五嶽) 중 하나로 서악(西嶽)이다. 그 중봉이 연화봉(蓮花峯)인데 봉우리 위에는 궁전이 있으며, 궁전 앞에는 못이 있는데 천엽(千葉)의 연꽃이 있다고 전해진다. 한유가 사용한 냉상(冷霜)과 감밀(甘蜜)의 표현은 이후 연근의 특성을 묘사할 때 상투어로 되었다.

 

한유는 비유어로 기존의 시어를 활용하기도 했다. 〈병중에 장 십팔에게 준 시[病中贈張十八]〉에서는 상대방의 필력을 비유하여, “일백 곡들이 용무늬 세 발 솥을, 필력으로 불끈 들어 올릴 듯하구려[龍文百斛鼎, 筆力可獨扛]”라고 했다. 이것은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의 완력을 비유해서 “힘이 세 발 솥을 불끈 들 만하다[力能쾇鼎]”라고 표현한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후 참모가 하중의 군막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侯參謀赴河中幕]〉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默坐念語笑 묵묵히 앉아 담소하던 지난 일 생각하면,

癡如遇寒蠅 어리석기가 추위 만난 파리 같으리

 

추위 만난 파리란 말은 가을 파리란 말을 이용한 것이다.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소미도(蘇味道)는 재주가 뛰어난 데다가 인망이 높았고 왕방경(王方慶)은 비루한 체질과 노둔한 언사에 범용하기까지 했는데도 소미도와 왕방경이 똑같이 봉각시랑(鳳閣侍郞)이 되었다. 혹자가 장원일(張元一)에게 소미도와 왕방경이 누가 더 낫느냐고 묻자, 장원일은 “소미도는 구월에 서리를 맞은 매와 같고, 왕방경은 시월에 얼어붙은 파리와 같다[蘇九月得霜鷹, 王十月被凍蠅]”라고 했다고 한다. 가을 파리란 형용이 우둔함을 뜻한다. 한유는 같은 뜻으로 추위 만난 파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강릉으로 부임하는 도중에 쓴 시[赴江陵途中寄贈王二十補闕李十一拾遺李二十六員外三學士]〉에서는 치아가 다 빠지고 오히려 유순한 혀로 유순한 말을 하며 살아가리란 뜻에서, “치아가 모두 빠져버림으로부터, 비로소 유순한 혀를 그리게 되었네[自從齒牙缺, 始慕舌爲柔]”라고 하였다. 이것은 《공총자(孔叢子)》 〈항지(抗志)〉에서 노래자(老萊子)가 말하기를 “그대는 치아를 보지 못했는가. 치아는 견강하기에 끝내 다 닳고 혀는 유순하기에 끝까지 해지지 않는 것이다[子不見夫齒乎? 齒堅剛, 卒盡相磨. 舌柔順, 終以不弊]”라 한 데서 따온 말이다.

 

또 〈천사(薦士)〉에서는 “허공을 가로지르듯 경어를 구사하나니, 어려운 글자를 온당하게 놓는 힘은 오(奡)를 밀쳐낼 정도일세[橫空盤硬語, 妥帖力排奡]”라 하였다. 오(奡)는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닐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하는 고대의 역사이다.

 

하지만 한유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시어도 많다. 홍시(紅枾)를 영액(靈液)이니, 정규란(赬虯卵, 붉은 용의 알)이니 한 예들이 그것이다. 즉, 한유는 〈청룡사에 노닐며 최대 보궐에게 드리다[遊靑龍寺 贈崔大補闕]〉에서 “두세 명 도사가 그 사이에 자리 잡고, 파리 옥배(玉盃)에 영액을 자꾸 따라 마시누나[二三道士席其間, 靈液屢進玻黎碗]”라 하고, 또 “붉게 물든 감나무엔 화실이 주렁주렁 달렸는데, 금오가 내려와 정규란을 쪼아 먹네[然雲燒樹火實騈, 金烏下啄赬虯卵]”라 했다.

 

 

 

 

〈유화(榴花)〉에서는 오월의 석류꽃이 이끼 위에 피어나 있는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五月榴花照眼明 오월에 석류꽃 피어 눈에 환한데

林間時見子初成 가지 사이에 때때로 갓 맺힌 열매가 보이네

可憐此地無車馬 가련해라 이곳은 귀한 분들이 없어

顚倒蒼苔落絳英 푸른 이끼 위에 나뒹구누나, 붉은 꽃잎이

 

 

〈영등화(詠燈花)〉에서는 등잔불을 옥충(玉蟲)이라고 했다. 즉 “황색의 중간에 금 곡알을 늘어놓은 듯하고, 비녀 머리에 옥충을 장식한 듯하네[黃裏排金粟, 釵頭綴玉蟲]”라고 했다.

 

〈신묘년설(辛卯年雪)〉에서는 하얀 눈발을 옥비(玉妃)라고 표현했다. 즉 “흰 무지개가 먼저 길을 출발하매, 수많은 옥비가 그를 따라 내려오네[白霓先啓途, 從以萬玉妃]”라고 했다.

〈이화(李花)〉에서는 배꽃을 미녀들로 의인화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夜領張徹投盧仝 밤에 장철을 데리고 노동의 집을 찾아가

乘雲共至玉皇家 구름 타고 함께 옥황의 집에 이르니

長姬香御四羅列 날씬한 미인들 향기 풍기며 네 줄로 늘어섰는데

縞裙練帨無等差 흰 치마에 흰 수건을 차등 없이 다 둘렀네

 

한 한유는 대유법의 묘사를 절묘하게 구사했다. 장수(長鬚)라고 하면 긴 수염이란 말인데, 한유는 그 말로 남자 종을 가리켰다. 즉 한유는 한유와 같은 시대의 시인인 노동에게 부친 시[寄盧仝]에서 “옥천 선생은 낙성에 살고 있지만, 허물어진 집 두어 칸뿐이네. 남자 종 하나는 긴 수염에 머리도 못 싸맸고, 여자 종 하나는 맨다리에 늙어 이도 다 빠졌군[玉川先生洛城裏, 破屋數間而已矣. 一奴長鬚不裹頭, 一婢赤脚老無齒]”라고 했다.

옥천(玉川)은 노동의 자호(自號)이다. 노동은 〈월식(月蝕)〉이란 시를 지어 역당(逆黨)들을 조롱했으므로 일생 불우했다. 한유의 이 시에서 옥천파옥(玉川破屋)이라 하면 초야에 있는 어진 이의 누추한 집을 가리키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중인 출신 문인 장혼(張混)은 한유의 이 시에서 글자를 따와 자신의 집을 이이엄(而已广)이라고 했다.

 

한유는 실재하지 않는 개념을 형상화하는 데 뛰어났다. 이를테면 〈최 이십육 입지에게 부친 시[寄崔二十六立之詩]〉에서는 쉽게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두고 “해마다 과거 급제를 취하는 것을, 턱 밑 수염을 뽑듯이 했네[連年收科第, 若摘頷底髭]”라 했고, 〈귀팽성(歸彭城)〉에서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두고 “간을 파내어 종이를 만들고, 선혈을 뿌려서 편지를 쓰네[刳肝以爲紙, 瀝血以書辭]”라 했다.

〈취해서 장 비서에게 준 시[醉贈張秘書]〉에서는 상대의 시를 평가하여, “그대의 시는 태깔이 많아, 봄 하늘의 구름처럼 무성하구려[君詩多態度, 藹藹春空雲]”라고 했다.

정여경(鄭餘慶)과 번종사(樊宗師)에게 준 장편의 시(〈山南鄭相公樊員外酬答爲詩其末咸有見及語樊封以示愈依賦十四韻以獻〉)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를 칭찬하여 “마치 새로 귀지를 없애주는 듯 시원해라[如新耵聹]” 하였다.

 

또 〈영 악사가 거문고 켜는 것을 듣고[聽潁師彈琴)]〉에서는 기쁨과 두려움 혹은 공교로움과 거침 등 상반된 느낌을 얼음과 숯에 비유하여, “영 악사여 그대는 거문고 솜씨 참으로 능하구려, 빙탄을 내 창자에 놓지 마오[潁乎爾誠能, 無以氷炭置我腸]”라고 끝맺었다. 〈맹생시(孟生詩)〉에서는 맹교(孟郊)의 고결한 성품을 두고, “워낙 자질이 남달라 뭇 소인들 속에 끼어 있기를 싫어하나니, 홀로 맑은 향기 지닌 매화가 잡목 속에 몸을 두기 어려운 것과 같도다[異質忌處群, 孤芳難寄林]”라고 했다.

 

또 〈조장적(調張籍)〉에서는 소인들의 작태를 두고,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고 하다니, 제 역량 모르는 게 가소롭구나[蚍蜉撼大樹, 可笑不自量]”리고 했다. 조정의 권신들이 잘난 체하며 권세를 부리는 것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황보식의 〈공안원지시〉를 읽고 쓴 독후감시[讀皇甫湜公安園池詩書其後)〉에서는 문자나 아로새기는 번쇄(繁碎)한 일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이아》는 벌레나 물고기까지 주석했으니, 정히 뜻이 큰 사람이 아니로다[爾雅注蟲魚, 定非磊落人]”라고 했다. 〈현재유감(縣齋有感)〉에서는 영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고삐 놓아 달리는 행동에 비유하여, “비록 대궐의 시종신이 되긴 했지만, 어찌 청운을 향해 고삐 놓아 달리랴[雖陪彤庭臣, 詎縱靑冥靶]”라고 냉소했다.

 

한유는 새의 울음소리를 중의법으로 사용하는 방식에도 탁월했다.

 

〈박탁행(剝啄行)〉에서는, “똑 똑 똑 똑, 손님이 문에 왔으나, 내가 나가 응대하지 않자, 손님이 떠나며 화를 내는군[剝剝啄啄, 有客至門. 我不出應, 客去而嗔]”라고 하였다. 〈증동유(贈同游)〉에서는 “일어나라 깨우니 창은 완전히 밝았고, 돌아가길 재촉하다니 해가 지기 전이거늘. 무심한 꽃 속의 새들은, 또 서로 정을 다해 우는구나[喚起窓全曙. 催歸日未西. 無心花裏鳥, 更與盡情啼]”라고 했는데 이 시의 환기(喚起, 봄 새)와 최귀(催歸, 두견)는 모두 새 이름이라고 한다.

 

한유가 비유어로 사용한 어휘들은 훗날 상투어로 된 것도 있다. 위에서 인용한 모든 어휘가 이미 후대의 문인들에게는 상투어로 되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예를 더 든다면 다음과 같다.

 

한 마을 사람들끼리 계를 닦는 것을 계돈계(鷄豚契)라 한다. 이것은 한유의 〈남계시범(南溪始泛)〉에서 “부디 같은 마을 사람이 되어, 봄가을마다 계돈으로 잔치를 했으면[願爲同社人, 鷄豚燕春秋]”이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과탈자(夸奪子)라고 하면 명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도 한유의 〈잡시(雜詩)〉에서 “예전의 과탈자들은, 일만 개 무덤이 되어 산봉우리를 누른다[向者夸奪子, 萬墳厭其巔]”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그리고 첨정(添丁)이라는 말은 아들을 뜻한다. 이것은 한유가 〈노동에게 부친 시[寄盧仝]〉에서 “지난해 아들 낳아 첨정이라 이름 지었나니, 나라에 바쳐 농사에 충당하겠다는 뜻이었지[去年生兒名添丁, 意令與國充耘耔]”라고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소식(蘇軾)은 〈안국사심춘(安國寺尋春)〉에서 “병으로 춘풍 구십 일을 그냥 보내고, 홀로 첨정을 안고 꽃 피는 것을 보노라[病過春風九十日, 獨抱添丁看花發]”라고 했으니, 소식의 시어는 한유를 계승한 것이다.

 

한유는 시에서 역사 사실 전체를 소재로 삼아 인간의 삶을 관망하기도 했다. 시 〈과홍구(過鴻溝)〉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홍구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오랜 전쟁을 중지하고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 영토로 삼기로 했던 기준점이 되었던 곳을 말한다.

 

龍疲虎困割川原 용과 범이 지쳐 강 언덕을 분할하니

億萬蒼生性命存 억만 창생은 목숨 겨우 붙었네

誰勸君王回馬首 누가 군왕에게 말머리를 돌리도록 권하였나

眞成一擲賭乾坤 진정 한번 던져 천하를 놓고 도박하였지.

 

유방의 군세가 강해지자 기원전 203년 8월, 항우는 유방과 강화(講和)를 하여, 홍구 서쪽은 한, 동쪽은 초가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른바 할홍구(割鴻溝)의 맹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유방의 군사(軍師)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유방에게, “초가 굶주리고 있을 때 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것[양호유환(養虎遺患)]과 같습니다”라고 권하였다. 유방은 항우를 추격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국면을 만들었다. 건곤일척이란 사자성어가 한유의 이 시에서 나왔다.

 

 

4.

 

한유는 대장편의 시를 여럿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4언시의 〈원화성덕시(元和聖德詩)〉와 7언시의 〈석고가(石鼓歌)〉, 5언의 〈산석(山石)〉이 유명하다.

 

〈원화성덕시〉는 당나라 헌종이 안녹산의 난을 극복하고 이룩한 중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024자(字)로 지은 4언 고체시이다. 원화는 당나라 헌종의 연호이다.

 

〈석고가〉는 주나라 선왕(宣王) 때 사주(史籒)가 선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서 북처럼 생긴 돌에 새겼다고 하는 것을 소재로 삼은 것이다. 손하(孫何)의 비해(碑解)에 의하면, “주 선왕이 기산(岐山)의 양지쪽에서 사냥할 때 따르던 신하들로 하여금 그 사적을 돌에 새기게 하였는데, 지금의 석고다. 더러는 엽갈(獵碣)이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석고문(石鼓文)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나라 때 들어와서 위응물(韋應物)과 한유가 〈석고가〉를 지은 이후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한유의 이후로 북송 때 소동파가 〈후석고가(後石鼓歌)〉를 지었다. 석고문은 서체의 한 모범으로서 애호되었다. 한유는 석고문의 자획을 두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年深豈免有缺畫 오랜 세월에 어찌 자획 이지러짐을 면하랴만

快劍斫斷生蛟鼉 날쎈 칼로 찍어 자르니  교룡이 살아난 듯. 

 

한유는 고사를 사용하여 뜻을 표현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이를테면 〈장철에게 답한 시[答張徹]〉에서는 “그대를 벗 삼으려 하다가 육항에게 사양하고, 나를 스승 삼자지만 공손정에게 부끄럽네[結友子讓抗, 請師我慚丁]”라고 했다. 상대방을 벗 삼고 싶지만 뛰어난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고, 상대방이 나를 스승으로 모시려 하지만 자신은 자질이 모자라다고 말한 것이다.

 

이 시구는 육항과 윤공타의 일화를 모르면 그 뜻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육항(陸抗)은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시대가 어지러워져서 사람들이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나 그가 양호(羊祜)에게 술을 보내자 양호가 의심 없이 마셨고 양호가 그에게 약을 보냈을 때도 육항이 의심 없이 먹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한유가 자신보다 뛰어나고 육항과 같은 인물이 있기에 그 사람에게 벗 삼기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겸손해한 것이다. 한편 공손정(公孫丁)은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활쏘기 명수로, 자신의 제자의 제자인 윤공타(尹公?)가 공격해오자 활을 쏘아 윤공타의 팔을 관통시키되 목숨은 살려주었다. 한유는 자신은 공선정처럼 도량이 크지 못해 상대방의 스승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겸손해한 것이다.

평소 한유는 문자음(文字飮)을 할 줄 알아야 교양인이라고 여겼다. 문자음이란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고 문장을 논하는 것을 말한다. 〈취해서 장 비서에게 준 시[醉贈張書]〉에서 그는 이렇게 장안의 부호 자식들을 조롱했다.

 

長安衆富兒 장안의 부자 아이들은

盤饌羅羶葷 고기와 훈채를 소반에 차려 놓고

不解文字飮 시 지으며 마실 줄은 알지 못한 채

惟能醉紅裙 기녀의 붉은 치마에 취할 줄만 아나니

雖得一餉樂 한식경의 즐거움은 얻을지 몰라도

有如聚飛蚊 모기떼가 윙윙거리는 것과 같을 뿐

 

홍군(紅裙)은 붉은 치마라는 말로 미녀나 기녀를 뜻한다. 이 시에서부터 비문(飛蚊, 날아다니는 모기)이라고 하면 고상한 풍류를 즐길 줄은 모르고 그저 술에 취해서 기생들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유는 실제로 문자음을 즐겨, 여러 사람이 함께 연구(聯句)를 하기도 했다. 연구란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가 한 구씩 짓거나 두 구씩 지어서 전체의 시를 이루는 방식이다. 맹교(孟郊)와 성남(城南)에서 153운(韻)을 사용하여 1,530자에 달하는 시구(詩句)를 함께 지어 〈성남연구(城南聯句)〉를 엮은 것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 이후로 연구의 작시가 중국과 한국의 문인들 사이에 우아한 놀이로 정착되었다. 일본의 중세시대에는 한 구절은 한시, 한 구절은 일본시[화가(和歌)]로 잇는 연구(連句) 양식이 한때 유행하기까지 했다.

 

한유는 제자들과 함께 형산(衡山)의 도사 헌원미명(軒轅彌明)과 함께 차 달이는 돌솥인 석정(石鼎)을 소재로 하여 〈석정연구(石鼎聯句)〉를 이루기도 했다. 이 연구에서 한유는 돌솥의 구멍을 지렁이 구멍이라고 묘사하고 그 구멍에서 끓는 찻물의 소리를 파리 울음소리에 비유하여 “때로는 지렁이의 구멍에서, 파리 울음소리가 가늘게 들리네[時於蚯蚓竅, 微作蒼蠅鳴]”라는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한유는 지적인 시를 좋아하였지만 그의 비유는 생활과 밀착되어 있었다. 또 실제로 한유는 생활의 현장과 밀착되어 있는 주제를 시에 담기를 즐겨 했다. 심지어, 자기 아들 부(符)에게 글을 읽게 하기 위하여 성남(城南)으로 보내면서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이란 시를 지어 글 읽기를 권하면서 생활의 냄새가 가득한 시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 시에서, 두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으면 어릴 때는 두 아이가 별 차이 없지만 자라면서 서로 차이를 드러내어 서른이 되면 뼈대가 굵어져 하나는 용, 하나는 돼지가 되는데, 그것이 모두 독서의 힘이라고 하였다.

즉,“나이 서른이 되어 뼈대가 굵어지면, 하나는 용 하나는 돼지가 된단다. 비황(신마)은 쏜살처럼 달려, 두꺼비 따위는 돌아보지 않는단다[三十骨骼成 乃一龍一猪 飛黃騰踏去 不能顧蟾蜍]”라고 했으니, 이 시구에는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우려감이 잘 드러나 있다.

한유는 또 이 시에서 “사람이 고금의 의리를 알지 못하면, 마소에 사람 옷을 입힌 격이니라[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라고 했고, “문장이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경서의 가르침은 전답과 같은 것이다[文章豈不貴, 經訓乃菑畬]”라고 했다. 자식이 금우(襟牛, 옷 입은 소)가 되지 말고 문장과 경서를 익히고 고금의 의리를 깨치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활세계 속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보편적인 마음이 아니겠는가. .

 

한유는 〈자식에게 보여주는 시[示兒]〉에서 “처음 내가 서울에 올라올 적엔, 한 묶음 서책만 가져왔을 뿐인데, 삼십 년을 고생하고 근면한 끝에, 이 집을 장만하게 되었단다[始我來京師, 止携一束書. 辛勤三十年, 以有此屋廬]”라고 했다. 고난 속에서 일정한 부귀를 얻었음을 자부한 것이다. 문학에서도 그는 각고(刻苦) 끝에 일가(一家)를 이룬 것을 자부했다. 그렇기에 그의 시문에는 지식을 과시하고 세상을 오만하게 깔보는 면이 드러나 있다.

성호 이익이 지적했듯이 시 〈남산〉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한유는 실로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었다. 이한(李漢)은 〈한창려집서(韓昌黎集序)〉에서 한유의 학문과 문학을 평하여, “기이하기는 교룡이 하늘을 나는 듯하고, 성대하기는 범과 봉황이 뛰는 듯하다[詭然而蛟龍翔, 蔚然而虎鳳躍]”라고 했다. 실제로 유종원은 정치적으로는 한유와 성향을 달리했지만 한유의 문학을 사랑하여, 한유가 시를 부쳐오면 장미꽃의 이슬에 손을 씻고 옥유향(玉풆香)을 뿌린 뒤에 그 시를 읽었다고 한다. 한유가 죽은 뒤 학자들은 그를 태산처럼 높이 숭앙하고 북두칠성처럼 우러러 존모했다. 한유는 태산북두(泰山北斗)였던 것이다.

 

송나라 시인 진관(秦觀)은 〈한유론(韓愈論)〉에서 한유의 시를 두보의 시에 견주어 이렇게 논평했다.

 

(한유는) 마치 두자미가 시에서 뭇 작가들의 장점을 한데 모은 것과 같다. ……맹자가 이르기를 ‘백이(伯夷)는 성인 가운데 청(淸)한 분이요, 이윤(伊尹)은 성인 가운데 임(任)을 중시한 분이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가운데 화(和)한 분이요, 공자는 성인 가운데 시(時)를 중시한 분인데, 공자를 일러 여러 성인을 모아서 대성했다고 한다.’고 했다. 아, 두씨와 한씨는 시에서 집대성(集大成)한 분들이라 하겠다.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과 역서로 《불교와 유교》 《일본서기의 비밀》 등이 있음. 성산학술상과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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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시가 너무 많아 자료를 별도로 올렸습니다.

어려운 자도 많고 별 재미 없지요.

 

 

교수님들은 공인이시고 가급적 정사(正史)만 말씀하시니 그런가 합니다.

그래서 가끔 한귀절씩 나오는 야사(野史)를 찾아 보려합니다. 대개 개인적인 일이니 여자 얘기가 됩니다.

 

 

한유(韓愈) 는 뒷얘기가 많습니다.

기사 내용중에 진주초귀(鎭州初歸) 아래 시와  두 첩 얘기가 나옵니다.

 

別來楊柳街頭樹 이별한 후 거리 맡의 양류는

擺弄春風只欲飛 춘풍에 하늘거리며 날려고 했으나

還有小園桃李在 정원의 도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

留花不發待郞歸 낭군을 기다리며 꽃을 채 피우지 않고 있네

 

두 첩 이름이 유지(柳枝),강도(絳桃)인데 위시의 楊柳는 유지(柳枝)를 말하고, 桃李는 강도(絳桃)를 말합니다. 강도는 그냥 있는데 유지가 도망가려 한 것을 쓴것입니다. 이 시를 두고 비꼬는 말도 많고 뒷 얘기가 많습니다

 

한유는 시인이자 위엄있는 최고 유학자인데 바람기가 좀 있어서 어린 여자애들을 사철 좋아해서 두 시첩을 데려다 키웠는데 그 이름이 유지와 강도입니다. 둘이 가무를 잘하는데 한유가 시쓰고 술먹을 때 흥을 돋구고 한유가 유달리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感春詩> 에서 말했습니다.

 

“嬌童為我歌,哀響跨箏笛。艷姬蹋筵舞,清目刺劍戟。”

"아리따운 소년이 내 노래를하면 그 슬픈 소리가 아쟁과 피리소리를 넘어가고

요염한 계집애가 연무를 추는  이쁜 얼굴의 눈빛이 검극을 찌르는구나"

 

이시를 보면 참 취미도 다양했습니다.^^ 嬌童이라니 교태를 부리는 미소년도 좋아한 모양입니다.

清目은 직역하면 안되고 眉清目秀 빼어나게 잘생긴 모습을 말합니다 

한유가 그동안 쓴 시가 오해를 받습니다. 제 계집 얘기 쓴 것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한유가 두첩을 좋아했는데 첩들은 오히려 안좋아했는데 유지가 특별히 그러했습니다. 오랫동안 영감하고 짝을하고 사는게 내키지 않아서 자기의 행복과 사랑을 찾기로 결심을하고 한유가 집에 없을 때를 틈타 담을 넘어 도망갔습니다. 불행히도 도중에 잡혀왔고 그 얘기를 들은 한유가 위 시를 쓴것입니다.

 

그런데 문장중에 한유를  一個老頭子(일개노두자)라 한 표현이 있는데 老頭子(노두자)는 나이먹은 사람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늙은이,영감쟁이, 영감탱이, 정도입니다, 대개 頭자를 붙여 사람을 이르면 조롱하는 표현이 많지요. 禿頭(독두)란 말이 있는데 또 上下禿頭(상하독두)라고 누가 그랬다나....

 

그 후에도 한유가 유달리 강도만 좋아하고 유지는 소원하게 했답니다.

한유가 죽은 뒤에 장적이 <哭退之詩> 에 한유의 풍류에 대해 시를 지었습니다

 

"“中秋十五夜,圓魄天差清。為出二侍女,合彈琵琶箏。"

중추 보름날 밤에 하늘의 둥근달은 유달리 맑은데 두 시녀가 나오더니 아쟁과 거문고를 같이 타네"

 

해석하면 별다르지 않지만 달을 圓魄(원백)이라고 했습니다. 보름달 표현하는 말이 수도 없이 많은데 圓魄이라니요. 한자에는 가차자라해서 발음이 같으면 다른 자를 빌려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약올리거나 비웃는 시입니다.

魄(백)은 넓다라는 뜻도 되지만 귀신 백으로 더 쓰이지요. 원은 원한 원(怨)도 있습니다.

중추절(추석)은 제일 좋은 날이고 보름달도 제일 크지요.

죽어서 귀신이 되어 네가 아끼던 두 시녀를 보니 좋으냐? 아니면 아까운 시녀두고 어찌 죽었냐. 정도일겁니다.

蘇軾(소식)이 한유의 여자얘기를 듣고 "저 영감탱이 염복이 터졌구나(這個老頭子真是艷福不淺啊!) " 했답니다.^^

 

그런데 한유가 이런 시도 썼습니다

:『長安眾富兒,盤饌羅膻葷,不解文字飲,惟能醉紅裙。』

장안에 부잣집 애들이 모여서 쟁반에 고기반찬을 늘어놓고 시문은 하지않고 오로지 마시고 여자에만 능하구나 

 

여기에 不解文字飲(불해문자음)이 라는 말을 한유가 처음 썼습니다. 文字飲(문자음)이란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학문은 논하는것을 이릅니다. 紅裙(홍군)은 붉은치마인데 여자를 말합니다.

술마시며 고준담론하지 않고 여자만 밝힌다는 말인데 누구 얘기인지....

 

그래서 文潛(문잠. 장뢰)이 놀리기를 " 愛文字飲者,與俗人沽酒同科" 문자음을 좋아해서 속인들의 沽酒(고주)와 같은 과로구나" 했답니다. 沽酒(고주)는 고사가 있는데 '그놈이 그놈' 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한유가 죽은 사연이 참 요상합니다.

한유가 유황을 먹었는데 그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어찌 일생에 음사(淫邪)를 경계해야하거늘 약을 먹고 죽는가" 했습니다. 말하자면 정력제로 알고 드신겁니다^^ . 하루는 유지. 하루는 강도 .. 참 힘드시지요.

물론 남자가 주야로 일을 잘해야지요.그래도 나이먹어 하나도 아니고 둘인지 셋인지 아무튼 션찮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도망가지....

(대만에서 한유가 정력제로 유황먹고 죽었다고해서 그 후손들이 명예훼손으로 소송도 했습니다)

 

아무튼 한유는 후세에 별로 평이 좋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자도 있지만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인심을 잃은 탓입니다. 요즘 시인, 선생님들 새겨봐야 할겁니다.

 

 

 

이제 백거이(白居易) 얘기를 해보지요. 원래 풍류(?)하면 백거이가 최고입니다^^

일전에 올린 백거이 편 맨 아래에 두 여자 얘기를 올렸는데 해석도 없으니 누가 보겠습니까. 그걸 풀어보겠습니다. 한참때 놀던 얘기는 넘어가고...

 

백거이한테 두 여자가 있었는데 소만(小蠻)과  번소(樊素) 입니다. 소만은 춤을 잘 추고 번소는 노래를 잘했는데 번소의 입이 앵도같이 이쁘고 소만의 허리가 버들가지 같았답니다. 번소는 첩이고 소만은 기생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素口蠻腰(소구만요)인데 현대인들이 미인을 표현할 때 앵도취(櫻桃嘴 앵도같은 입술) 소만요.양유지( 小蠻腰或 楊柳腰 버들같은 허리)라 합니다.

구글에서 小蠻. 樊素를 이미지 검색하면 중국산 쭉빵 미녀들이 마구 나옵니다^^

 

백거이가 쓴 시에 이 두 여자 얘기가 표현은 달리했지만  엄청 나옵니다. 그런데 후세의 평가는 한유와 다릅니다. 백거이가 색에 빠진건 당시 사대부들은 모두 축첩을 했고 보편적인 일이라는군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한유와는 정반대의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백거이가 나이먹어 늙고 병이 들자 말을 팔고 기생을 내보내기로 합니다. 자신의 어려움이 남에게 미치는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사랑해서인지 돌연 말이 돌아보고 울부짖어 차마 떠나 보내지를 못하고 번소와 소만이 감정이 북받혀 돌아오니 그녀들도 차마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번소가 마음이 상해 눈물이 땅을 적시며 말하길

 

"주인님께서는 저 말을 오년이나 탓으나 갑자기 사고가 나서 놀라거나 태만히 하지 않았고  저는 주인님을 십년을 섬기며 살 비비고 살았으나 어긴적이 없고 실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제 모양 비록 누추하나 아직은 쇠하지 않았습니다.

저 말은 아직 힘이 장사고 또 병들고 지치지 않아 저 말의 힘이면 주인님의 한걸음을 대신할 수 있고, 제가 노래하며 또한 주인님께 술 한잔을 권할수 있습니다

지금 한번에 둘을 보내니 가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저에게 가라하시니 그 말씀이 고통스럽고, 말보고 가라하시니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습니다. 사람의 정이나 말의 정이 이러한데 어찌 주인님은 홀로 그리 무정하십니까?"

 

백거이가 장탄식을하며 말합니다.

"말아 말아 울지마라. 소야소야 울지마라. 내가 병이 들고 해마다 쇠약해지는구나.

항우가 장차 죽음에 이르지 않았으면 왜 하루에 추(騅 :항우의 말)를 버리고 우희(虞姬)와 이별했겠느냐.

소야소야. 내가 스스로 양유지 노래를 부르리라.

내가 저 금악잔에 술을 따를테니 나도 너도 취해서 고향으로 가자꾸나"

 

에구, 슬퍼라~~~~~.

이렇게 이별을 하고 백거이는 향산으로 가서 아홉노인네들과 어울려 지냅니다.

한유와는 비교가 되는 풍류(?) 입니다요.

님을 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인님이라하니 그것도 참 슬프고,나이먹었어도 아직 쓸만한데 왜 보내냐는 말도 슬프지만, 백거이의 항우에 대한 비유가 역시 시인입니다.

 

이상의 얘기는 아래 글들을 가급적 직역해서 쓴 것입니다.

재미없어 보이는 어려운 한문에도 숨어있는 거시기한 애기가 많습니다^^.

 

 

 

 

鎮州初歸

 

別來楊柳街頭樹,擺弄春風只欲飛。

[1]還有小園桃李在,留花不發待郎歸。[2]

 

註釋

 

1.擺或作搖,弄或作撼,只或作祗。

2.《唐語林》雲:「退之二侍妾,名柳枝,絳桃,初使王廷湊,至壽陽驛絕句雲雲。」《邵氏聞見錄》:

「孫子陽為予言,近時壽陽驛發地,得二詩石,唐人跋雲:

『退之有倩桃、風柳二妓,歸途聞風柳已去,故雲雲。』後張籍祭退之詩雲:『乃出二侍女。』非此二人耶?」

 

唐朝詩人風流韻事盤點:韓愈和白居易蓄妾

 

威嚴大儒韓愈,也有“風雲氣少,兒女情多”的時候。他養有兩個侍妾,一個叫絳桃,一個叫柳枝。二人能歌善舞,時常為韓愈詩酒助興,韓愈非常得意,曾作《感春詩》説:“嬌童為我歌,哀響跨箏笛。艷姬蹋筵舞,清目刺劍戟。”

唐穆宗時,藩鎮軍閥王庭湊叛亂,時任兵部侍郎的韓愈奉命前去安撫,走到壽陽(今屬山西)驛站,竟暫時忘記了使命,專門思念起家中二妾來,作《夕次壽陽驛題吳郎中詩後》絕句説:

“風光欲動別長安,春半邊城特地寒。不見園花兼巷柳,馬頭惟有月團圓。”

韓愈思念侍妾,侍妾卻不思念他,特別是柳枝,不甘心長期陪伴一個老頭子,決心追尋自己的幸福和愛情,趁韓愈不在家時,毅然跳墻逃走,不幸被追獲。韓愈返歸家中,聽説這事,又作詩説:

“別來楊柳街頭樹,擺弄春風只欲飛。還有小園桃李在,留花不發待郎歸。”(《鎮州初歸》)

從此便專寵絳桃,疏遠柳枝了。韓愈死後,門生張籍在《哭退之詩》中還特地提到韓愈的風流生活:

“中秋十五夜,圓魄天差清。為出二侍女,合彈琵琶箏。

”到了宋代,蘇軾談到韓愈蓄妾時,感慨説:“這個老頭子真是艷福不淺啊!”

 

http://big5.china.com.cn/book/txt/2009-10/10/content_18677837.htm

 

 

《後山詩話》云:「退之詩云:『長安眾富兒,盤饌羅膻葷,不解文字飲,惟能醉紅裙。』

而老有二妓,號絳桃、柳枝,故張文昌云:『為出二侍女,合彈琵琶箏』也。

又為《李千志》,敘當世名貴,服金石藥,欲生而死者數輩,著之石,藏之地下,豈為一世戒邪,而竟以藥死

故白傅云:『退之服硫黃,一病竟不痊』也。」

《西清詩話》云:「張耒文潛云:『東坡嘗言退之詩:長安眾富兒,盤饌羅膻葷,不解文字飲,惟能醉紅裙。

疑若清苦自飾者,至云:艷姬踏筵舞,清眸射劍戟,則知此老子個中興複不淺。

文潛戲答曰:愛文字飲者,與俗人沽酒同科。』」

 

膻葷 고기. 양고기. 戒邪 : 戒邪淫

 

文士聚飲自然會與常人不同,要表現出一定的文化教養。

韓愈《醉贈張祕書》一詩云:「長安眾富兒,盤饌羅膻葷。不解文字飲,唯能醉紅裙。」

這裡的「文字飲」是指談詩論文,需要較高的文化修養。

文字飲」後來發展成為一種「雅令」,在文人之間流行。

 

 

 

感春三首

 

晨游百花林,朱朱兼白白。柳枝弱而細,懸樹垂百尺。[樹或作對。]

左右同來人,金紫貴顯劇。[或作極。]

嬌童為我歌,哀響跨箏笛。[跨或作誇,非是。]

艷姬蹋筵舞,清眸刺劍戟。[張文潛云:「東坡言退之詩『不解文字飲,惟能醉紅裙』,疑若清苦自飾者。至云『艷姬蹋筵舞,清眸刺劍戟』,則知此老子個中興複不淺。」刺,七亦切。]

心懷平生友,莫一在燕席。死者長眇芒,生者困乖隔。[生者或作生存。]

少年真可喜,老大百無益。

 

http://ctext.org/wiki.pl?if=en&chapter=296613

 

 

感春 (辛夷高花最先開) 作者:韓愈 

 

辛夷高花最先開,[1]青天露坐始此回。已呼孺人戛鳴瑟,[2]更遣稚子傳清杯。[3]選壯軍興不為用,坐狂朝論無由陪。[4]如今到死得閑處,還有詩賦康歌哉。[5]

 

洛陽東風幾時來?川波岸柳春全回。宮門一鎖不復啟,[6]雖有九陌無塵埃。策馬上橋朝日出,樓闕赤白正崔嵬。孤吟屢闋莫與和,寸恨至短誰能裁?

 

春田可耕時已催,王師北討何當回?[7]放車載草農事濟,[8]戰馬苦饑誰念哉?蔡州納節舊將死,[9]起居諫議聯翩來。[10]朝廷未省有遺策,肯不垂意瓶與罍。

 

前隨杜尹拜表回,[11]笑言溢口何歡咍![12]孔丞別我適臨汝,[13]風骨峭峻遺塵埃。[14]音容不接只隔夜,兇訃詎可相尋來。[15]天公高居鬼神惡,欲保性命誠難哉!

 

辛夷花房忽全開,將衰正盛須頻來。[16]清晨輝輝燭霞日,薄暮耿耿和煙埃。朝明夕暗已足嘆,況乃滿地成摧頹。迎繁送謝別有意,誰肯留念少環回?[17]

 

 

註釋

1.移至 ↑ 辛夷高數丈,江南地暖正月開,北地寒二月開。初發如筆,北人呼為木筆。其花最早,南人呼為迎春。《苕溪漁隱》曰:「木筆、迎春,自是兩種。木筆色紫叢生,二月方開。迎春白色高樹,立春已開。然則辛夷乃此花耳。」高花或作花高,以末章「辛夷花房忽全開」言之,則此為高處之花先開矣。何遜詩有「巖樹落高花」。

2.移至 ↑ 《禮記》:「大夫妻曰孺人。」又《書》「擊鳴球」。戛,鼓也。戛音稭。

3.移至 ↑ 《選·恨賦》:「左對孺人,右顧稚子。」杜詩:「傳杯莫放杯。」

4.移至 ↑ 憲宗即位五年,平夏平蜀軍江東赫然中興,而公年逾強仕,投閑分司,故有此言。

5.移至 ↑ 《書》:「臯陶歌曰:庶事康哉。」

6.移至 ↑ 唐都長安,以洛陽為東都,故有宮門一鎖之句,若有感雲。

7.移至 ↑ 元和四年,討成德節度使王承宗。

8.移至 ↑ 車或作軍,非是。

9.移至 ↑ 是年,彰義軍節度使吳少誠卒。

10.移至 ↑ 裴度以河南府功曹召為起居舍人,孟簡、孔戣皆為諫議大夫。聯翩,相繼也。

11.移至 ↑ 杜尹,謂杜兼也。

12.移至 ↑ 《楚辭》:眾共所咍。咍,笑也。咍,呼來切。

13.移至 ↑ 孔丞,謂孔戡也。

14.移至 ↑ 峭峻或作峭峭。

15.移至 ↑ 元和四年,杜兼為河南尹,十一月無疾暴卒。孔戡以衛尉寺丞分司東都。五年正月,將浴臨汝之陽泉,至其縣,遂卒。兇訃相尋謂此。訃音赴。

16.移至 ↑ 須頻或作頻頻,非是。

17.移至 ↑ 此篇言辛夷花之盛如此。元微之有《問韓員外辛夷花》雲:「韓員外家好辛夷,開時乞取兩三枝。折枝為贈君莫惜,縱君不折風亦吹。」豈此耶。

 

 

柳枝

 

《唐語林校證》卷六〈補遺〉~585~

韓退之有二妾,一曰絳桃,一曰柳枝,皆能歌舞。初使王庭湊,至壽陽驛,絕句云:

「風光欲動別長安,春半邊城特地寒,不見園花兼巷柳,馬頭惟有月團團。」

蓋有所屬也。柳枝後踰垣遁去,家人追獲。及鎮州初歸,詩曰:

「別來楊柳街頭樹,擺弄春風只欲飛。還有小園桃李在,留花不放待郎歸。」自是專寵絳桃矣。

 

《樂府雜錄》

楊柳枝,白傅閑居洛邑時作,後入教坊。

 

《碧雞漫志》卷五〈楊柳枝〉

《楊柳枝》,《鑑戒錄》云:「柳枝歌,亡隋之曲也。」前輩詩云:「萬里長江一旦開,岸邊楊柳幾千栽。錦帆未落干戈起,惆悵龍舟更不回。」

又云:「樂苑隋堤事已空,萬條猶舞舊春風。」皆指汴渠事。而張祜《折楊柳枝》兩絕句,其一云:

莫折宮前楊柳枝,玄宗曾向笛中吹。傷心日暮煙霞起,無限春愁生翠眉。」

則知隋有此曲,傳至開元。《樂府雜錄》云:白傅作《楊柳枝》。予考樂天晚年與劉夢得唱和此曲詞,白云:「古歌舊曲君休聽,聽取新翻楊柳枝。」

又作《楊柳枝二十韻》云:「樂童翻怨調,才子與妍詞。」注云:「洛下新聲也。」劉夢得亦云:「請君莫奏前朝曲,聽唱新翻楊柳枝。」蓋後來始變新聲。而所謂樂天作楊柳枝者,稱其別創詞也。今黃鍾商有《楊柳枝》曲,仍是七字四句詩,與劉白及五代諸子所製並同。但每句下各增三字一句,此乃唐時和聲,如《竹枝》、《漁父》,今皆有和聲也。舊詞多側字起頭,平字起頭者,十之一二。今詞盡皆側字起頭,第三句亦復側字起,聲度差穩耳。

 

 

 

 

古美女標準:膚發唇齒,對胸無要求

 

 

左「素口」右「蠻腰」:白居易的風流人生

 

作者:新浪讀書

 

元和二年(807年),白居易在周至任縣尉,這時他已36歲,依然是孑然一身。孤獨和寂寞折磨著他,他只有寄情於花草,把花當作情人。他的《戲題新栽薔薇》詩直呼出了他的心聲:“少府無妻春寂寞,花開將爾作夫人。”白居易直到37歲才結了婚,婚後和楊氏夫妻關係並不壞,但白居易仍然時時想起少年時代的女友湘靈姑娘。當年湘靈姑娘曾送給白居易一雙鞋子,白居易一直保存著,多年來,不論在朝在野,走到哪裡就帶到哪裡。

元和十年(815年),白居易貶江州司馬,於是又將鞋子帶到了江州。第二年春天,他將衣物一類的東西攤在院子裡曬太陽,忽然見到那雙鞋子,少年時的歷歷往事便一起湧上心頭。他又想起了當年的湘靈姑娘。

這時白居易已是45歲的人了,仍禁不住思緒翻騰,感歎再三,賦詩抒情:“中庭曬服玩,忽見故鄉履。昔贈我者誰,東鄰嬋娟子。因思贈時語:『特用結終始,永願為履綦,雙行復雙止。』自吾謫江郡,漂泊三千里,為感長情人,提攜同到此。今朝一惆悵,反覆看未已。人只履猶雙,何曾得相似?可嗟復可惜,錦表繡為裡。況經梅雨後,色黯花草死。”

 

素口蠻腰,蓄妓玩樂,始自東晉,唐代比較普遍,而在白居易身上表現得最為突出。為了滌除人生煩惱,白居易以妓樂詩酒放縱自娛。他蓄妓與嗜酒無度,直到暮年。從他的詩中知姓名之妓便有十幾個,最出名的是小蠻和樊素。唐孟棨《本事詩·事感》中記載:“白尚書(居易)姬人樊素善歌,妓人小蠻善舞,嘗為詩曰:櫻桃樊素口,楊柳小蠻腰。”也就是說,美姬樊素的嘴小巧鮮艷,如同櫻桃小蠻的腰柔弱纖細,如同楊柳

現代人形容美女說櫻桃嘴、小蠻腰或楊柳腰,就是從白居易那裡學過來的。

 

另外據《容齋隨筆》上說,白居易有首詩,叫做《小庭亦有月》云:“小庭亦有月,小院亦有花。菱角執笙簧,谷兒抹琵琶。紅綃信手舞,紫綃隨意歌。左顧短紅袖,右命小青娥……”白居易自己做注說:“菱、谷、紅、紫,皆小臧獲名。”臧獲,即家妓。詩中的菱角、谷兒、紫綃、紅綃等女子都是他的小妾或家妓。早年白居易曾上書極力反對皇帝選美,不想白居易後來也沉溺於聲色之中。當然唐代士大夫們蓄妓並非只有白一人,是一種很普遍的現象。

 

白居易後來老了,體弱多病,決定賣馬和放妓,他不希望他們跟著自己吃苦。但是他心愛的馬居然反顧而鳴,不忍離去。樊素和小蠻等人對白居易還是蠻有感情的,她們都不忍離去。樊素感傷落淚地說:

“主乘此駱五年,銜橛之下,不驚不逸。素事主十年,中擳之間,無違無失。今素貌雖陋,未至衰摧。駱力猶壯,又無虺憒。即駱之力,尚可以代主一步;素之歌,亦可以送主一杯。一旦雙去,有去無回。故素將去,其辭也苦;駱將去,其鳴也哀。此人之情也,馬之情也,豈主君獨無情哉?”

白居易也長歎道:“駱駱爾勿嘶,素素爾勿啼;駱返廟,素返閨。吾疾雖作,年雖頹,幸未及項籍之將死,何必一日之內棄騅兮而別虞姬!素兮素兮!為我歌楊柳枝。我姑酌彼金缶,我與爾歸醉鄉去來。”

 

 

素口蛮腰

 

樊素与小蛮原为唐代大诗人白居易小妾,素善歌,蛮善舞。白居易有诗赞二女,“樱桃樊素口,杨柳小蛮腰”,

后素口蛮腰作为成语用于形容美貌的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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