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통역 교육기관
조선 '사역원'에서는 만주·몽골어 등 4개 언어 가르쳤죠
입력 : 2020.02.25 03:09 조선일보
[통역 교육기관]
고려 말 민간 통역사가 못 미더워 '통문관' 설치해 역관 교육·선발
6품직 이하, 39세까지만 뽑았어요… 조선 때 '사역원'으로 이름 바뀌어
부모와 아내의 4대조 신원 조사 후 시험에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죠
한국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했어요.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뿐 아니라, 수상식에서 봉 감독의 통역을 맡은 샤론 최(최성재)에게도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봉 감독의 발언을 1초 만에 멋지게 통역하여 순발력이 빛나는 통역사로 평가받았죠. 주변국과의 교류가 잦던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통역의 역할이 중요했어요. 과거엔 어떤 사람이 통역을 맡았고, 그들을 어떻게 교육했을까요?
◇ 최초의 공식 통역 기관은 고려에서 등장
외국어교육을 담당한 기관에 대한 첫 기록은 김부식이 쓴 역사서 '삼국사기' 중 '궁예열전'에 등장해요. 후삼국 시대 궁예가 세운 나라인 태봉에서 중앙관청으로 '사대(史臺)'를 마련해 외국어교육을 담당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통역사 역할을 했던 '설인(舌人)'들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림=김윤지
통역을 담당하는 공식 관리인 '역관'을 선발하고 통역 사무를 총괄한 공식적인 국가기관은 고려 충렬왕 때 등장해요.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 2년(1276)에 '통문관(通文館)'이라는 기구를 새로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요. 통문관을 설치한 이유는 설인들의 통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기 때문인데요, '설인(舌人)들이 미천한 신분에서 많이 나와서 통역할 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간사하게 사사로운 일로 전하는 경우가 많아, 참문학자 김구가 건의하여 통문관을 설치하였다'고 해요.
통문관에서는 고려 시대 궁궐 안에 설치했던 여섯 개의 학문 기관인 '금내학관'의 6품 이하 직에 있는 40세 미만자를 선발해 중국어와 몽골어 등을 가르치고 통역 사무를 맡겼습니다.
◇ 통문관은 조선 시대 사역원으로 이어져
통문관은 조선 시대엔 '사역원(司譯院)'으로 이름이 바뀌어 1894년 갑오개혁까지 운영됩니다. 사역원은 중국어를 가르치는 한학청, 몽골어를 가르치는 몽학청, 만주어를 가르치는 청학청, 일본어를 가르치는 왜학청을 두어 세분화된 외국어교육을 시행했지요.
외국어 공부를 마친 역관은 사신과 함께 외국에 파견돼 통역 업무를 수행했어요.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인 '조선 통신사' 관련 그림을 보면, 말을 탄 역관의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사역원에 입학하려면 부모와 아내의 4대조 신원 조사서와 신원 보증서를 제출하고, 심사관 15인이 이를 심사해 일부를 추천했습니다. 추천받은 이들은 다시 입학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해요. 이후 잡과 중 역과에 응시해 초시와 복시 모두 합격해야만 역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최초의 영어 교육기관 '육영공원'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영어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이듬해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을 미국 외교사절단으로 보냅니다. 미국 전역을 둘러보고 온 이들은 고종에게 영어 교육기관 설치를 건의해요.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188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세우고 관리들이나 양반 자제들을 선발하여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미국에서 파견한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였고, '교이영문영어(敎以英文英語)' 즉 모든 과목을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는 것을 원칙으로 세워 높은 영어 회화 수준을 이끌었다고 해요.
이 외에도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을 설립하면서 관리나 양반 자제들만 받던 영어 교육이 여성들을 포함한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었지요.
[첫 공식 영어 통역관 윤치호, 일본 유학 중 영어 배웠대요]
우리나라의 첫 공식 영어 통역관은 구한말의 정치가 윤치호(1865~1945·사진)입니다. 그는 1881년 17세 때 조사시찰단 어윤중의 수행원이 돼 일본에 갑니다. 이후 도쿄 도진샤(同人社) 학교에 입학해 영어와 서양 학문을 공부합니다.
1883년 미국의 루셔스 푸트 장군이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 임명되자 그의 통역관이 돼 한국에 돌아옵니다. 이후 고종과 미국공사 푸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되지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
[뉴스 속의 한국사] 고려·조선시대 역관
역관 조인규가 고려 최고 관직에 오른 비결은…
입력 : 2017.04.11 03:09 조선일보
[고려·조선시대 역관]
3년간 문 닫아걸고 몽골어 공부… 쿠빌라이 칸 신임 얻어 출세
고려 왕실과 사돈 맺고 실권 장악
조선 선조 때 공신 책봉된 홍순언
명나라 역사서 오류 바로잡고 임진왜란 때 구원군 요청도 했죠
인공지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앞으로 우리나라 산업 구조도 빠르게 변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인공지능과 관련된 대학 학과의 인기가 크게 오르고, 통역·번역과 관련된 학과의 인기는 떨어지고 있대요. 조만간 통역·번역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완전히 대신하게 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죠. 전문적인 학술 분야나 예술·문학 분야의 언어·책은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통·번역을 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통역·번역을 맡은 관리를 두었는데 이들을 '역관(譯官)'이라고 불렀어요. 역관은 사신과 함께 외국에 파견되어 외교 업무를 돕고, 외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임금과 신하들 앞에서 통역을 하였지요. 양반이나 귀족 신분이 아니었지만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크게 출세한 사람도 있었어요.
◇ 몽골어에 능통했던 조인규
역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충렬왕(1236~1308) 때입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고려 조정은 '통문관'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미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을 뽑아 중국어 등을 가르쳐 역관으로 길러냈어요. 특히 충렬왕 때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고려에 번번이 정치적 간섭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어보다 몽골어를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이 필요했는데, 조인규도 그중 하나였지요.
▲ /그림=정서용
조인규는 3년 동안 집 문을 닫아걸고 몽골어 공부에만 열중하여 몽골어를 완전히 익혔습니다. 덕분에 원나라 사신으로 임명되어 30여 차례나 원나라에 다녀왔지요. 이에 충렬왕은 "조인규가 몽골어와 중국어를 통달해 조서·칙서의 내용을 정확히 번역하니 원나라의 역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원나라에 요청하였어요. 충렬왕에게 딸 제국대장공주를 시집보낸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은 조인규가 딸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것을 보고 충렬왕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원나라 역관으로 임명되고 원나라 황제의 인정과 신임을 받게 되면서 조인규는 고려에서도 가파른 출세 가도를 걷게 되었어요. 한미한 가문 출신임에도 조정의 중신으로 임명되었고,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고려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었지요. 충선왕이 즉위하자 당시 고려 최고 관직인 시중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에 몽골어를 열심히 익힌 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죠.
◇ 200년 묵은 역사 분쟁을 해결한 홍순언
조선 때에는 홍순언이라는 역관이 뛰어난 중국어 실력과 선행을 베푼 덕에 공신(功臣·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에 오르는 일이 있었어요.
1584년 홍순언은 선조의 명을 받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로 갔습니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역사서에 '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 문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임무를 뜻해요.
고려 말에 이성계와 대립하던 고려 문신들이 명나라로 도망가 이성계를 모함하며 '이성계는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거짓말을 하였는데, 이 말이 명나라 역사서에 사실처럼 기록되었던 것이죠. 이후 조선 조정은 약 200여 년 가까이 계속 사신을 보내어 "잘못된 기록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명나라는 말로만 고치겠다고 약속할 뿐 실제로는 기록을 바로잡지 않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홍순언이 명나라에 도착하니 어찌 된 일인지 명나라 예부시랑을 지내던 석성과 그의 둘째 부인이 홍순언을 마중 나와 있었어요. 예부시랑은 당시 명나라의 교육·의례·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예부에서 둘째로 높은 관료였는데, 예부시랑이 조선에서 온 역관을 직접 마중 나온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답니다.
석성과 그의 부인이 홍순언을 마중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과거 홍순언은 명나라에 갔을 때 기생집에서 일하는 한 여인으로부터 딱한 사정을 들었어요. 이 여인의 부모님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여인은 수중에 돈이 없어 부모님 무덤을 고향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여인은 할 수 없이 기생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효심에 감동한 홍순언은 무덤을 옮기는 데 필요한 큰돈을 미련 없이 빌려주었는데, 훗날 이 여인이 석성의 둘째 부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 홍순언이 다시 명나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혜를 갚기 위해 마중을 나온 것이지요.
덕분에 홍순언은 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석성의 도움을 받아 명나라 역사서에 잘못 기록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200년 가까이 해결하지 못했던 종계변무를 처리한 홍순언은 선조로부터 공신으로 책봉되고 당릉군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어요.
홍순언은 임진왜란 때에도 명나라의 구원군 파견을 끌어내 조선을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어요. 이때에도 석성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당시 석성이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병부에서 가장 높은 관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홍순언은 구원군을 지휘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에게 당시 조선 정세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선조와 이여송이 직접 대화를 나눌 때 통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 ㈜ 파우스트 칼리지
전 화 : (02)386-4802 / (02)384-3348
이메일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1@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ceta211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Cafe : http://cafe.daum.net/21ceta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Web-site : www.faustcollege.com (주)파우스트 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