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 김명자
지난 6월 초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최대 ‘바이오 USA 2023’ 전시회에서 K-바이오가 주목을 끌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1,500여 개 글로벌 바이오 기업 가운데 우리 기업이 550여 개로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삼성 바이오 로직스의 부스는 두 번째로 컸다. 이번 행사에는 CDMO(위탁개발생산), ADC(항체 약물 접합체), 세포 유전자 치료제가 많이 등장했다. 한국은 기술력과 임상시험 환경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니 반갑다.
OECD는 2030년경 글로벌 바이오경제 시대로 진입하리라 예측했다(2009년). 과연 세계 바이오헬스 산업 시장 규모는 2,600조 원으로 반도체 시장(700조 원)의 3배를 넘어섰다. 급속한 고령화, 기후 위기, 식량·에너지 자원의 안보화 등 글로벌 리스크로 인해 이들 난제 해결을 위한 바이오 기술 패권 경쟁이 가속되고 있다. 세 가지 색깔의 바이오, 레드(질병 예방‧진단‧치료), 그린(농업‧임업‧수산업), 화이트(바이오 에너지와 친환경 기술 결합)가 건강, 식량, 환경, 에너지 전환의 솔루션이 됐다.
서울경제신문 주관 ‘서울 포럼 2023’(5.31-6.1) ‘첨단 바이오 시대를 열자’에서는 세계적 석학들이 바이오 헬스 분야의 혁신 동향과 전망을 제시했다. 수브라 수레시 HP 이사회 의장(전 MIT 학장, 카네기 멜런대 총장, NSF 총재)은 기조 강연에서 첨단 바이오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파괴적 기술’로 모바일 인터넷, 클라우드, 차세대 유전체학, 첨단소재, AI, GPT, 로보틱스, 3D 프린팅, 실시간 컴퓨팅 시뮬레이션, IoE(Internet of Everything) 등 10대 기술의 융합을 꼽았다.
코로나19를 겪는 과정에서 줌과 같은 플랫폼이 급속 확산했듯이, 신기술 도입의 가속화로 바이오 연구개발에서도 핵심기술과의 융합혁신이 대세가 됐다. 이미 AI, 빅데이터, 딥러닝 기술로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 처리해 성공 확률이 높은 신약후보 물질을 골라내고, 원격의료 서비스도 상용화됐다. 물리적 기술과 디지털 분야의 첨단 과학기술이 의학 발전을 가속하면서, 암·치매·노화 극복을 위한 맞춤형 유전자·세포치료, 뇌과학, 재생의료, 인공장기, 첨단 의료기기, 디지털 치료제, 원격의료 등에서 신천지가 열리고 있다.
수브라 수레시 의장은 “MIT는 학생의 전공에 상관없이 디지털 리터러시의 최소 요건을 갖추도록 교육”하며, “바이오, 의학, 공학의 학제적 배경을 가진 인력 양성에서 사회과학과 인문학 소양을 중시한다”고 했다. “한국은 기술에 능통한 고등교육 인력이 많고 반도체 기술력이 우수하므로 첨단 바이오 역량 개발에 유리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계 최초의 공학 기반 의대인 미국 칼 일리노이 대학교 의대(CICM) 마크 코언 학장의 사례발표도 흥미로웠다. 그 커리큘럼 모델의 목표는 의학과 공학의 융합, 대학과 기업의 협업으로 임상 의료 현장에서 치료혁신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성질환 치료의 조직 공학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있는 그는 의료 분야에서 AI와 머신러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유전체를 분자생물학적 방법을 통해 총체적으로 분석해,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환경을 파악해 질병의 발병 여부를 찾아내는 다중 오믹스(multi-omics) 분석에 AI와 데이터 과학을 접목해 진료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고 한다. 한국은 삼성과 LG 등 글로벌 기업과 의료계의 협력으로 AI 기반 원격 스마트 의료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경쟁에서 뒤질세라 우리 정부도 바이오산업의 적극 지원에 나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6월 7일 15개 부처·청이 공동으로 10년 단위로 수립하는 생명공학 분야 최상위 법정 계획인 ‘제4차 생명공학육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30년까지 바이오산업 생산 규모를 2020년 43조 원에서 100조 원 규모로 키우고, 선도국 미국 대비 기술 수준을 2020년 78%에서 2030년 85%로 올리는 것이 목표다.
바이오와 디지털 기술 접목에서는 2032년까지 디지털 치료기기 15개 제품화, 2030년까지 알츠하이머· 파킨슨병·당뇨병 등 7개 난치·희소 질환 치료를 위한 전자약 핵심기술 개발, 2032년까지 AI 기반 신약 10개 후보물질 발굴 등이 추진된다. 차세대 신약 개발 플랫폼으로는 연합학습 기반 K-MELODY 구축, 첨단 디지털 기반 항체 3차원 단백질 구조 예측·설계 플랫폼, 동물실험 대체를 위한 휴먼 디지털 트윈과 인공장기(오가노이드) 등이 추진된다. mRNA 백신 등 감염병 대응 6대 분야 핵심기술 자립화 계획, 합성생물학(DNA 합성·편집)의 핵심기술을 미국 대비 90% 수준으로 올리는 계획, 생분해성 바이오 플라스틱, 바이오 디젤·수소 등 액체연료 개발 계획도 추진된다.
바이오 제조 기술 혁신 인프라 구축에서는 국가 공공 바이오파운드리를 건설(2028년 완공)하고, 한국인 100만 명 대상 유전체와 임상 데이터, 10대 암 임상 정보, 식물·해양 동물 등 생명 유전자원 데이터 구축 등 연구 데이터의 통합 수집·관리·공유 플랫폼을 구축한다. 기업들이 병원·연구기관의 장비·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바이오 코어 퍼실러티’도 구축(2028년)한다.
글로벌 의료 시장 규모는 2023년 1조5,570억 달러였다. 2027년에는 1조9,170억 달러로 예상된다. 그런데 한국의 점유율은 1% 남짓이다. 최우선 과제는 앞에서 설명한 융합형 의학계 인력 양성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학입시의 의대 쏠림현상(고교 성적 상위 0.1%-1%)이 극심한 상황에서, 치료 의사 양성 위주로 돼 있는 교육훈련 체계로는 바이오 강국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최근 대학병원과 의대에서 의사이자 과학자인 의사 과학자 양성 지원을 위해 2023년 4월 전국 6개소의 ‘혁신형 미래 의료연구센터’를 지정하고 의대 소속의 진료업무가 있는 의사(MD)와 이공계 연구자(Ph.D) 간의 공동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의학의 거대한 융합혁신의 물꼬를 틀 수는 없다.
의사 과학자 양성을 위해 KAIST는 기존 의과학 대학원을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의학 집중교육 3년 + 융합의학교육 1년 + 박사과정 4년)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융합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하버드대 매사추세츠 종합병원(MGH)과 모더나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포스텍은 연구 중심 의대를 의과학 대학원 형태로 개원해 일리노이 의대 커리큘럼처럼 MD-PhD 8년 복합 학위과정 (2+4+2)으로 운영하고, 2028년까지 500병상 규모 스마트병원도 설립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의학계는 과학기술 특성화대학들이 의전원 체제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의대 중심으로 의사 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안으로는 의대 교육과정을 통합 6년제로 개편해 기초의학과 연구 기회를 늘리고, 기초학문을 보호 육성하고, ‘연구 중심 병원’ 사업보다는 ‘연구 중심 의대’ 사업 추진 등으로 의사 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대 교육 개편에 대해서는 의료계 시각이 엇갈려서, 예컨대 대한전공의협의회 측은 기초의학과 연구 기회에 접할 기회를 차단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이 “첨단 바이오 강국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 방향과 추진과제는 일단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 바이오 강국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의 여지도 없다.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성패가 갈린다는 사실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하지 않는가. 혁신과 변화는 어느 방향으로든 쉽지 않다. 미봉책으로 위의 방대한 바이오 혁신과제를 해결하기에는 4차 산업혁명의 문명사적 전환점에서 혁신 물결이 너무 거세다. 의대 교육과정도 바뀌고 의전원도 만들어 혁신 생태계를 다양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경이로운 발전은 과학기술력이 있어 가능했다. 가난하기 짝이 없던 국가가 세계 경제 10위권에 도달했고, 특정 분야에서는 선도적인 과학 기술 혁신 역량을 자랑하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묻게 된다. 우리는 과연 고도의 과학기술 사회에 걸맞은 가치관과 합리적 사고체계를 갖추고 있는가. 새로운 질서와 기존 질서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적 협상 능력을 갖추었는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 결정을 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의 명언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길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처럼 “매번 하던 대로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혁신이 아니다.”
필자소개
카이스트 이사장
한국과총 명예회장
한국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 명예회장
전 환경부장관,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