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주일부터 구원론 설교를 시작한다.
구원론이 매우 방대하고 복잡한 작업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예민한 문제임을 알면서도 감히 구원론 설교를 시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깊이 천착하고 이해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구원을 받아야 할 만큼 심각하게 뒤틀리고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은 구원을 갈망한다.
개중에는 신을 부정하는 자들도 있고,
종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자들도 있지만 그런 자들마저도 구원을 갈망한다.
혹 의식의 세계에서는 부정할 수 몰라도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구원을 갈망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은 때때로 삶의 공허감을 느낀다.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다가도 문득 삶의 근원적인 공허를 느끼고는 멈칫할 때가 있다.
웃고 떠들며 작은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다가도 뿌리칠 수 없는
삶의 공허와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직면하고는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왜 사는지를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되뇌게 된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게 된다.
이게 다 인간이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내적 증상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뜬금없이 찾아오는 삶의 공허감이나 절대 한계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가도
바쁜 생활에 쫓긴 나머지 망각해버리거나 접어두고 산다.
그저 잠시 정신적인 사치를 즐기고 싶을 때, 또는 인생이 나를 코너로 내몰 때,
세상에게 상처받았을 때 한 번씩 꺼내 만지작거릴 뿐
공허감의 실체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추적할 여유조차 없이 생활의 언저리를 맴돌기만 한다.
물론 사람은 쉬지 않고 계몽의 길, 문명의 길을 걸어왔다.
이성을 밝히고 의지를 불태우며 지식과 기술을 축적해왔고,
축적된 지식과 기술로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기술문명을 성취했으며 자유의 영역을 확대해왔다.
그러나 위대한 성취와는 상관없이,
아니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구원에의 갈망 또한 거세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사람만 구원을 갈망하는 게 아니다.
정글의 사자와 호랑이도, 동산의 나비와 벌도, 바다의 고래와 새우도,
들의 민들레와 쑥부쟁이도, 온 생명을 키우는 공기와 땅과 강과 바다도,
심지어 광활한 우주 공간까지도 다 타는 목마름으로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조금만 깊이 귀 기울여보라.
온 생명과 온 세상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심히 뒤틀려 절룩거리는 엇박자 소리가 들릴 것이다.
땅에서 솟구치는 아벨의 핏소리가 들릴 것이다.
모든 사람의 영혼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탄식 소리만 가득한 게 아니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구원의 소리도 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께서 온 세상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새로운 구원의 길을 내시고는,
이리로 오라고 부르시는 구원의 소리도 있다.
물론 앞에 말한 것처럼 이 소리는 교회에 의해 완전히 뒤틀리고 왜곡되어서 제대로 듣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더더욱 깊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오라. 와서 함께 듣자. 생명의 소리, 구원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구원 이야기는 멀고 먼 종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존재와 삶 전체와 직결된 오늘의 문제요,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이야기이며
인류 지성사의 최고의 화두이니.
첫댓글 저도 잔뜩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