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씨앗 공동체로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길
산삼 송현종
세월이 참 빠르다.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순간, 모든 동식물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가는 동안에도 창공에 구름 흘러가듯 바람 따라 세월이 흘러, 지긋이 산수를 바라보니 파란만장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 촌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제 말기에 그들의 잔악상도 직접 보았고, 초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의 기쁨도 누렸던 기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여순사건, 참혹한 동족상잔의 6·25,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의 변곡점들을 통과해 오는 동안,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1년 이상의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야당 총재 시절에 선생을 측근에서 모시면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수차례에 걸쳐 고문과 구류 처분 등 탄압을 받으며 사람 목숨이 끈질기다는 것을 실감하였고, 독방에서 구약성서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를 21일만에 완독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 이론에 대해 탐독 등 많은 독서를 통해 식견을 넓히기도 하였다. 그동안 국제펜클럽, 천주교의 사제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가 태어난 시골 마을이 피난처가 되어, 밤마다 마을 어른들이 모이면 어느 곳에서는 죽창에 찔려 몇 명이 죽고, 어디서는 경찰 가족이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마을의 소년소녀들을 모아 놓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찬송가를 가르쳐주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셨던 윤기봉 선생님은 당시 매산고 서무과장이었다. 휴전이 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 사람을 합하여 60여명이 함께 천막을 치고 정갑봉 전도사를 모셔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작은 교회를 신축할 수 있었고, 나도 당시 매산고 교장이셨던 김형모 박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부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잠시 교회에 나가지 않다가 순천에 정착하면서 천보교회를 꾸준히 다녔는데, 서계숙 여사를 만나 하늘씨앗교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교회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사회봉사에 힘쓰면서 주님을 섬기는 대안교회의 성격이 강한 곳이라고 하였다. 이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차에, 지금은 고인이 된 권성록씨가 ‘나도 교회에 나갈까 생각하고 있다.’고 하기에, ‘잘 생각했네, 자네가 교회에 나가면 제일 즐거워 할 분이 자네 집사람이네. 자네가 교회에 나가면 한 달 후에 나도 가겠다.’라는 약속을 하고는, 다니던 천보교회 2부 예배를 보고나서 하늘씨앗교회에 다섯 번 가서 한성수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경청하고는 교회를 옮겨 하늘씨앗교인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성수 목사님은 자본주의 사회의 이모저모를 잘 헤아리는 보기 드믄 분이시다. 사교성이 좋고 박식하시며 다재다능한 분이시다. 하늘씨앗교회에 와서 훌륭한 분을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을 내 생애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하늘씨앗 교우들 개개인이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늘 깨어있고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주님을 따르는 길을 함께 간다는 것이 한없이 즐겁다. 100년 후에 하늘나라에 하늘씨앗 마을이 만들어져 지금의 교우들과 함께 하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하늘씨앗호는 현재 김남규 목사님이 선장이 되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중이다. 때론 태풍을 만나 난파될 위기도 닥칠 것이다. 하늘씨앗 승무원들이 중도에 어느 항구에서 내릴 수도 있겠지만, 선장님의 지혜로운 운항으로 낙오자 없이 우리 모두 예수님 항에 함께 정착하지 않을까?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첫댓글 감사이 잘읽었습니다
산삼님의 기자님 시절 실력이 풍겨
나는 봄꽃 향기 물씬 나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