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를 할 것인가> 학교 문을 닫을 것인가?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에디서 커, 조지 앤더슨 저, 양명득편역을 읽으며.
신사참배는 어느 진보 지식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벼운 애국적인 예식행위가 아니다.
일본의 세계 지배 구상에서 식민지 백성들의 정신을 무력화시키며 민족의식을 해체 시켜 삼등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그들의 선민 이데올로기이다.
아직도 우리 역사는 신사참배를 독립운동, 저항운동으로 보지 않고 신사참배 행위를 우상으로 보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저항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이는 당시 모든 지식인들과 문을 닫지 않은 모든 공립 초 중고등학교와 전문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앞장을 서서 자행하였으므로 다함께 저지른 집단적인 반민족 행위를 우상이니 애국적 요식행위니 하는 말장난으로 은근슬쩍 덮으려는 것이다.
자신들의 교리나 애국적 신념에서 벗어나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반성을 하면 된다. 구구절절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하는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모든 제국들은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가장 먼저 교육을 장악한다. 반복적인 교육으로 식민지 백성을 순치, 세뇌시키며 우민화하여 제국을 통치한다. 조선을 강탈한 일본은 36년 동안 4차례의 교육령을 통하여 실업교육 위주의 교육으로 고등교육을 억제하였으며 조선민족의 분열을 꾀하였다. 또한 교육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제하였으며 황국신민화와 전시동원 체제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모든 선교사들은 일제의 1915년 테라우치의 사립학교 새 개정안으로 말미암아 신사참배를 하고 학교를 유지할 것인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육을 포기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결단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였다.
새로 개정된 사립학교 규칙은 각 선교부의 선교정책의 근간을 위협하였다. 모든 학교는 총독부에 등록을 요구받았고 등록 시 요구되는 핵심은 교육으로부터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새 규정은 예배와 종교교육은 정식 과목이 아니므로 과외 과목으로 분류하여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지 않도록 하라고 정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침은 승인된 자격증을 가지 교사에 의하여 일본어로만 교육하라고 하였다. 일제는 이미 설립된 학교에는 10년간의 개정기간을 주었고 동시에 요구되는 재정과 시설 그리고 교사들의 일본어 능력은 가능한 속히 이루어지도록 강제하였다.
미션스쿨이 ‘인가된 학교’로 등록되지 않으면 재학생들이 ‘인가된 학교’로 전학을 가는 문제가 발생할 뿐 아니라 졸업을 해도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므로 선교사들은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총독부 ‘인가’를 받으려면 예배와 성경교육을 교과목에서 제외해야 되고 모든 교사들이 일본어로 능숙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일본어를 배워야 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일본어가 능숙한 교사를 채용해야 되고 또한 시설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함으로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이에 감리교선교부와 캐나다선교부는 정부의 요구에 응하여 그들의 학교를 ‘인가’받기 위하여 1916년에 동의를 하였다. 그리고 승인된 후에 이 학교들은 다른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신사참배를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는 때를 기다렸고 1923년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의 조정된 규정이 공포되어 시행되자 세 장로회는 그것을 십분 적용하여 혼란과 피해를 최소화하며 ‘지정’ 학교가 되는 절차를 밟았다.
사이토총독에 의해서 수정된 새로운 내용을 보면 보통학교는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는 3~4년 인 것이 5년으로 연장되었으며 조선인에게도 상급학교 진학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조선어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였으며 사범학교가 설치되었고 개학에 관한 규정을 마련해서 한국에 고등 교육기관 설립이 가능토록 하였다. 이때 세워진 대학이 서울대의 전신신인 경성 제국 대학이다.
이러한 수정은 언뜻 보면 한국학생들의 상급진학을 열어준 것 같지만 실상은 한국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과 같은 수준으로 공부하여 상급 일본학교에 쉽게 진학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새 교육법은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 유학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호주선교부는 규정을 받아들여 진주, 마산, 부산진에 있는 5개의 초등학교를 6년제로 늘렸다.
호주선교부는 산하의 중등학교들은 기독교교육이 허가되는 ‘지정’을 받으려고 노력하였으나 1915년 전에 세워진 학교들은 ‘지정’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 세워진 학교들은 ‘지정’을 받지 못하였고 신사참배 문제로 압박을 받으며 폐교를 절차 속에 들어갔다.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과 만주국 설립 후, 신사 참배, 창씨개명을 모든 학교에 노골적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아래는 호주 선교사가 신사참배 문제에 직면한 호주선교부에 대하여 기록한 글이다.
에디서 커, 조지 앤더슨 저, 양명득 번역한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95, 96, 97쪽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신사참배의 이슈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학교는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는 첫 기관이었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거룩한’ 황국의 ‘거룩한’ 창시자를 경배하는 것으로, 최소 1910년부터 애국의 행위로 가장되어 소개되었다. 1889년 헌법에 의하여 종교의식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미션 스쿨들이 신사참배에 참석하도록 요청을 받았을 때 보통은 학교에서 애국적인 행사로 대신하여 그 요청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국주의자’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일본은 전쟁을 지향하게 되었고 신사참배는 의무화 되었다.
그 첫 번째 타격은 1935년 평양에서 일어났는데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한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장 맥큔 박사에게 가해졌다. 그는 정부에 의하여 면직되었으며 한국에서 강제 출국 당하였다. 그 다음 해 모든 중학교의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신사참배 의식에 참석하도록 요구되었다.
한국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선교사들 간에도 이 문제로 분열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한국 청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애국적인 행위로 여기어 도전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미장로교회 학교들은 즉각 학교를 폐쇄하였고, 감리교와 캐나다 학교들은 벌써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국가가 임명한 교장이 있는 학교들이었다. 호주선교부는 기독교 증언이 타협되지 않는 선에서 정부의 요구를 가능한 받아주기를 원하였다, 만약에 양심이 허락하여 교사나 학생이 시민의 한 사람으로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석하기를 원할 경우 그것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1936년 2월 선교협의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선교정책을 확립하기 위하여 모임을 가졌다. 협의회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피력하였다. “호주선교부는 황제 폐하를 향한 존경과 충성을 느끼며…그러나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만 예배하므로 …신사나 다른 영령들에게 참배하라는 요구는 종종 예배의식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위반되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고, 또는 참배를 하라고 우리 학교를 지도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압박은 계속되었다. 1939년 1월 또 다른 특별한 선교협의회 회의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36년의 선교정책 발전에 의하여 우리는 이제 재 결의하기를 신사참배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신념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증인 되라는 우리의 우선적 의무와 배치되는 것이고, 신사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을 통하여 우리의 기독교 증거를 계속하기를 원하며, 일본과의 호의와 도움의 노력으로 학교를 계속하기를 원한다.”
1939년은 모든 미션 스쿨이 폐교되는 해였다. 교장의 승낙 없이 계속되는 학자들의 신사참배는 학교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선교협의회 결정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임원회는 선포하였다.
진주학교의 폐교 명령은 그 해 초에 내려졌고, 학교는 정부가 내건 조건으로 인하여 폐교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항의서신을 보내었다.
호주선교부가 6월에 서면으로 지시를 받기를 7월 31일 학교가 폐교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교장들의 사표를 미리 보내라는 요구였다. 새 학교를 이미 승인받은 거창선교부는 그것을
거절하였고, 학교를 지역교회로 이관하였는데 ‘땅과 건물 그리고 시설은 1941년 3월까지 2년 동안 빌려주는 것’으로 하였다.
통영은 1940년 3월까지 운영되도록 허락을 받아 제일 마지막에 문을 닫게 되었다. 실업 사역은 계속 허락되었다. …
신사참배는 어느 진보 지식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가벼운 애국적인 예식행위가 아니다. 일본의 세계 지배 구상에서 식민지 백성들의 정신을 무력화시키며 민족의식을 해체 시켜 삼등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그들의 선민 이데올로기이다.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화해서 1931년 만주를 침략하였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하였다. 1941년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전선에서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내선일체의 애국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모윤숙 등의 문인들이 동원되었고 김활란, 윤치호 등의 명사들이 바람잡이가 되었다.
신사참배는 식민지 한국인들을 위해 일본학자들이 만든 황민화 교재 제1장이였다.
2021.8.26.목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