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남긴 것 이 상 규(고신 대학교 교수, 교회사)
이상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신앙의 자취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교리나 신학전통에
대한 무관심으로 경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나, 그의 순수한 신앙,
복음에 대한 순전한 열정, 기독자적 삶에 대한 일관된 생애는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생애 여정 속에 서 보여준 몇 가지 열매들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기독교적
가치(Christian Values) 고양
선생님은 일평생
동안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봉사자의 삶을 살았고 겸손하고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가 흔치 않을 때에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학위를 얻었으나 박사로 불리기를 원치 않았고,그저 선생으로
불러 주기를 바랐다. 큰 업적을 남기고도 상 받기를 거절하였고, 시상식에
나가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떤 것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 비록 자신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반하는 것이었다·이런 점에서 그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산 분이었고, ‘오직 믿음만’으로 살고자 했다. 자신의 유언처럼 “오직
주를 섬기다가 간 사람” 이기를 원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적 인격이지만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신앙적 비범함이 있었다. 그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들은 이런 그의 삶의 편모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장기려선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사랑의 방법이었다. 그는 기독자 적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사랑을 강조한 요한서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요한의 사랑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혁명이다”고 전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체를 발견한다. 사랑은 확실히 인생의 지상선이다.
사랑에 있어서 율법은 완성된다. 도덕의 도덕,생명 중 생명은 사랑이다.“라고
한 다음, 사랑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사람은 결국 사랑할 줄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할 바가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이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리라고 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들에대한
사랑의 반향은 우리들의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차라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했다. 또 “바울의 사랑의
찬미”라는 글에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은 영원하며 사랑은
생명 그 자체라고 했다. 그는 사랑과 생명 평화 이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그의 삶은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생애였다. 그는
신앙과 삶의 동일한 좌표를 가진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추구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굴절된 삶으로 비난받는 우리 시대에서 그는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여 주었다. 그가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진정한 의미의 기독자적
삶(Christian Life)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신학이론이나 교의, 그리고 교회적 전통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교리나
신학 이론, 논리적 체계는 냉냉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장기려선생은 그의 삶에 뿌려진 열매를
통하여 한 사람의 기독자적 삶이 가져올 수 있는 그 큰 위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자적 삶을 살 때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과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다.
삶을 통한
한국교회 개혁
둘째로 그의
생애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삶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한국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지는 않았으나 한국교회의 지나친 외적 성장운동이나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는 것 등을 포함한 외형적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사실 한국교회는 1960넌대 박정희 정권의 ’잘살아보세’
철학, 곧 경제상장 제일주의의 영향으로 성장(成長)을 제일의적 과제로
수용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다른 가치들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선생님은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이해하였다.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인 1975년에 다음과같이 쓴 일이 있다.
밀톤의
r낙원상실(실락원)」올 읽어보면, 맘몬은 고충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충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교회가
복음의 본질적인 활동보다는 외적 성장이나 외형적 확장을 중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그것은 맘몬이즘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또
“나는 한국의 기독교는 자본주의 기독교라고 해서 혹독히 비평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맘몬과 타협하고 보조를 같이 하고 있옴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은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사회나
교회의 문제와 모순,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독교적 삶이다. 기독교적 삶, 곧
말씀에의 순종, 감사, 사랑의 실천은 가장 중요한 사회 비판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 즉 체제와의
싸움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을 뿐이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최선의 방법은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재물에
대한 자유함, 그리고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이것은
그스도인의 순종과 감사의 행위이며 물질주의적이며 배금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가장 확실한‘사회비판’이다. 선생님은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이상으로 여겼고, 간디 옹을 닮아보려고 애썼다 그의 무소유의
삶 자체가 물량지향적인 우리 사회와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불의한 사회를 비판하는 최선의 길은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이처럼
장기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사랑의 실천철학은 가장 효과적인 사회비판이자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통한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의 모델 제시.
선생님은 한국교회에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 혹은 기독교적 사회봉사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은 양극화되어 있니 진보적 교회는
1970년대 이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 제도나 조직의 개선을 위해
싸웠고, 개인구원에 대한 무관심은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든 약점이 있었다.
또 보수적인 교회는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구원에 일차적인 관심을
둠으로서 결과적으로 사회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고, 기독교 이념의
사회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변화와 개선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양극단을 지향하고 기독교 정신의 사회화를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언급한바 있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운동이다.
기독교적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 이타적 생활방식,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며 개인의 생활을 통해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적 정신을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이를 조직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바로 의료보험조합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료보험의
개념이 인식되기도 전에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담배값 일백원에도
못 미치는 월 70원의회비를 받은 것을 보면 그것이 가난한 서민을 위한
구빈원(救資院)의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십자 병원의 설립,
그리고 복지관 설립도 같은 맥락예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운동은 기독교의 건실한 사회참여 흑은 사회 봉사 방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마치 초기 한국교희가 기독교학교를 설립함으로서
특수계층의 사람들만이 누리던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학교교육을 대중화하여
기독교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같다. 또 병원을 설립하여 현대의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던 것과 같다. 의료보험조합은 국가 주도의
의료 보험제도가 시작되기 앞서 자의적, 자발적 참여를 통해 영세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으로서 이 운동은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돌아보는 이상적인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사회개혁을 외친 일이 없다. 또 인권을 위해서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률 개혁하고 개선하는데
누구보다도 더 큰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일생동안 생명, 사랑,
평화를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회생적인 삶을 통해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노예해방이나 사회개혁을
위해 정치적인 투쟁을 한 일은 없으나 그가 가르친 사랑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사회를 개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선생님은 기독교적 사랑에 기초한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의 중요성 일깨워
끝으로 그는
이 시대의 조국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대립,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북에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일생동안 외로이
사셨다. 그도 이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고 인간적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가 있었으나 ”결혼은 오직 한번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다.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현실에서 혼자 사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며, 최선의 윤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결혼의 신성이 파괴되고 분별없는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는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생활의 방식 자체가
오늘 우리 시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장기려선생과 깊이 교제해 온 임능빈(林能彩)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려의 부부관계는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깨닫게 해
준다고 말했다.
1990년 6월
그가 남긴 망향편지는 우리의 가슴을 적시기에 부족함이 없다·
.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
.
이 편지와
함께 남북대화가 있을 때마다 그가 잠 못이루는 밤을 지새며 두고 온
아내 만나기를 소망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그가 혼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1994넌 제 2차 고향방문단 일원으로
확정됐으나 교환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 그가 겪은 실망과 아픔은 필자에게도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 당시 장박사님과 필자는 어떤 교회
모임의 강사로 초청받고 하룻밤 씩 강의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북한 방문의 기대 속에 잠을 이루지 못헤 예정된 강의를 할
수 없어서 필자가 대신 이틀 밤을 강의한 일이 있다.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아픔을 이해할 만 했다.일반적으로
기독교 윤리에서 볼 때, 일부 일처제 원칙(마19:4~6,고전7:10), 항구성의
원칙, 그리고 신실성의 원칙은 결혼과 가정생활의 3가지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과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 죽음만이
그것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 생애적인 위임(Whole life Committement)이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는、그의 말은 감동적이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의
자기 희생적인 삶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