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민주주의의 시녀가 된 하나님
“미국 독립전쟁의 결과 미국 국민은
더 이상 전제 군주를 용납하지 않게 된 것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절대자 하나님까지 이제는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독립전쟁 후 통치권자들은 피통치자들의 승인이 있을 때만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청교도주의들이 믿어 온 하나님은 옛날에 누렸던 권력을 이제는 다 박탈당하고 힘을 상실한 군주가 되어 「개인주의」라는 별궁(別宮)에 들어가서 거기서 피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의지할 곳이 없는 비참한 하나님이 되고 말았다.” - 리차드 모시어의 「미국인의 기질」에서
아담이 하와를 원망하며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하와에게 돌린 이후로 남을 비난하는 손가락질은 인간성 안에 비열한 습관이 되어 왔다. 세속주의에 관한 많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하비 콕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대 종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절대 유일의 ‘하나님’이 (상대화 된) 종교 안에서 종교적 ‘신’으로 전락되고 이 신이 ‘종교적 경험들’이라고 하는 것들을 통해 접근됨으로써 태동되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세상의 군왕들을 높이기도 하고 쓰러뜨리기도 하며 강포한 자와 속임수로 이익을 남기는 자를 책망하기도 하는 그러한 하나님을 증거하던 신앙은 오늘날에 와서는 전적으로 인간의 내면적 영혼의 문제와 기껏해야 개개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화나 갈등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
콕스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새장에 가두어 놓고 길들이고 교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군말 없이 우리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포효하는 황소는 맥 풀리고 힘없이 변하게 됐다. 우리들은 이제 꽤 우리의 구미에 길들여진 거세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니체와 같은 철학자가 하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기독교인인 자들에게 있다고 비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 화이트헤드는 그의 저서 「도둑 맞고 있는 미국」에서 기독교적 원리 위에 우리 조상들에 의해 건설된 미합중국에서 자기 자신들의 주장 외에는 모든 종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있는 세속적 인본주의자들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권익이 도둑 맞고 있다고 매우 분개조로 기독교 우익의 분노를 토로하고 있다. 물론 급진적인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주장만이 참으로 진리이고 다른 모든 종교들의 주장은 객관성이 없다고 부인해 버리는 위선을 종종 행한다. 그렇지만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지지를 받고 있는, 미국의 세속화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과연 정확한 것일까? 이 장에서 나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야 말로 미국 사회와 시민 생활과 문화 생활에서의 기독교 몰락의 주범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기독교적 활력의 침체의 책임은 세속 인본주의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에게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쉽게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루가 다르게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행동들에 대해 참으로 내가 놀랄 만큼 객관성을 가지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너그럽게 대하는 현실 앞에 빈번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시각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좀더 쉽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러한 맹점을 인식하게 된다. 나의 죄를 숨기고 남의 잘못은 비판하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나쁜 근성을 우리가 인정할 때 세속화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삶을 좀더 건설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근거 없는 신화적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근거 없는 꾸민 이야기들은 세속화된 삶을 살도록 부추긴다(예를 들면 19세기 초 많은 보수주의 개신교도들은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저주받은 함족의 후예들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 물론 성경에는 이를 뒷받침할 아무것도 없으나 이러한 생각은 대단히 위력이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근거 없는 신화적 이야기들이 악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수단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이 근거 없이 꾸면 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 있는 정통 기독교의 복음 증거를 방해해 온 장본인이다.
그 신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1776년 미국이 건국된 그때 미국은 중생한 기독교 국가였다는 것이다. 최근 1960년대의 혁명기를 겪으면서 미국은 본래의 궤도를 이탈했고 그 결과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은 방임상태에 놓여 있게 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미국은 본래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진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였으나 지금은 본래의 사명과 특권이 크게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하나님의 약속된 나라였는데 지금은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에게 빼앗긴 나라가 되었다는 이 말이 과연 사실인가? 하나님께 그렇게 바쳐진 다른 나라가 역사상 어디 또 있는가? 성경은 물론 하늘나라의 예루살렘을 예표하는, 지상의 이스라엘이라는 신정정치에 따라 치리되고 있는 한 약속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근거 없는 주장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를 회복하자는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학교의 교실과 법정에서부터 쫓겨난 하나님에 대한 주장(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질 수 없게 된 것)은 약속의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에 주로 웅변적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그래서 이 각본에 따르면 이 사회가, 기독교계가 세속화되어 버린 책임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에게 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꿈은 성경의 예언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미국 건국의 조상들이 아메리카라는 나라를 세운 이래로 한번도 성경적 의미에서 미국이 스스로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언덕 위에 빛나는 하늘나라 도성의 건설”
1693년 카튼 마더는 뉴잉글랜드 정착민들의 정착 목적에 대해서 대영제국의 확장 이외에 “광야로 향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의 한 모퉁이 아메리카 안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따를 것을 표방하고 이에 대한 추구를 목표로 하는 독특한 교회의 청사진을 제시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존 윈드롭은 위와 같은 시도를 “언덕 위에 빛나는 하늘나라 도성의 건설”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청교도들의 입장은 대단히 성경적인데, 즉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대한 성경적 낙관주의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의식((神前意識)을 가지는 신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영역이,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 빠짐없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의 개념은 개인적인 기도 생활이나 교회의 모임 등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인간의 사고(思考)와 행동의 모든 영역에 확장되어 있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건너와 플리머스 항에 내린 분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청교도 정착민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이 제시한 화해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국국교회가 더 많이 가톨릭적 전통을 과감히 탈피하여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이었다. “청교도(Puritan)”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는 그들이 교리적으로나 예배 의식에서 엄격한 순수성(purity)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 중 많은 사람들은 개혁에 대한 계속되는 “공약(公約)”에 식상해서 인내심을 잃고 있었으며, 영국국교회를 거리낌 없이 비판하는 목사들은 그로 인해 더러는 생활비를 받지 못하고 더러는 투옥되기도 했다.
청교도들은 금욕적이고 세상을 부인하는 자세는 보였지만 세상에 대해 도피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이 세상 속에서 그 의미를 찾고 이 세상의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간의 상태를 개혁하고 개선해야 할 역할을 맡은 자로 생각했다. 루이스는 청교도들에 대한 일반인의 잘못된 인식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심술궂거나 성질이 비뚤어지거나 우울하거나 매정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청교도들을 싫어하는 적대자들도 그들을 그런 식으로 욕하지는 않았다.”
청교도들의 생각과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절대 주권적이며 우리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신앙고백이 있다. 새로운 과학의 한 분야를 이해하느라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든, 새로 도착한 백포도주를 시음하든지간에, 청교도들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감사할 제목들을 찾았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맡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나라의 백성으로 선택했다. 그들이 아메리카에 세운 새로운 지상(地上)의 도성은 영국보다는 훨씬 더 대의제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은 다름아닌 절대 군주제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 가운데서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를 주관하신다. 비극적인 일에서조차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그것이 청교도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수세대 안에 언덕 위에 빛나는 하늘나라 도성을 건설하려는 아메리카의 이 실험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 독립전쟁 무렵에서는 최초의 아메리카 개신교도가 가지고 있었던 성경적 신학적 내용들은 절충되고 타협되어서 이미 세속화되어 버린 노동 윤리나 문화와 학문에 대한 존중 의식, 그리고 공익(公益)에 대한 의무감과 미덕만이 잔존할 뿐인 상태로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