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벽천(碧泉)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1) 컴퓨터경진대회 및 백일장(白日場) 개최
1985년 5월 10일 본교에서 군내 초중학교(初中學校) 학생들이 모여서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입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1) 컴퓨터 경진대회 심사 결과
① 초등부(初等部) / 금상 : 박형일(醴泉國校), 박성헌(豊壤國校), ᄋ 은상 : 김복현(虎鳴國校), 박인규(殷豊國校), ᄋ 동상 : 안귀순(殷溪國校), 이정욱(東部國校), 엄재국(醴泉國校), ᄋ 장려상 : 이정식(豊壤國校)
② 중등부(中等部) / 금상 : 배용석(殷豊中), ᄋ 은상 : 최혜정(醴泉女中), 권기대(甘泉中), ᄋ 동상 : 안창기(醴泉中), 김학철(柳川中), ᄋ 장려상 : 권은수(龍宮中)
③ 대창중(大昌中) : 1위 권중익, ᄋ 2위 : 장원식, ᄋ 3위 : 김용한
(2) 백일장(白日場) 심사 결과
① 초등부 산문부 / 금상 : 박종순(虎鳴國校), ᄋ은상 : 오신아(醴泉國校), 김종월(龍大國校), ᄋ 동상 : 진경순(醴泉國校), 조재남(柳川國校), 노진희(虎鳴國校)
② 초등부 운문부 / 금상 : 김미란(龍元國校), ᄋ 은상 : 김신영(南部國校), 노미영(龍西國校), ᄋ 동상 : 박동숙(知保國校), 이화자(鄕石國校), 윤공주(花東國校), ᄋ 장려상 : 황수경(花東國校)
③ 중등부 산문부 / 금상 : 남호진(柳川中), ᄋ 은상(銀賞) : 정미순(甘泉中), ᄋ 동상 : 박미자(豊壤中), 獎勵賞 : 이영옥(知保中)
④ 중등부 운문부 / 금상 : 박정숙(龍門中), ᄋ 은상 : 박연주(醴泉女中), ᄋ 동상 : 정정세(豊壤中), ᄋ 장려상 : 황대섭(醴泉中)
2) 체육대회(體育大會)
1985년 5월 18일 오전 9시에 예천공설운동장(醴泉公設運動場)에서 가졌다. 개회식의 순서는 주악(奏樂)에 이어 개회사, 국민의례(國民儀禮), 국민교육헌장 낭독(國民敎育憲章朗讀), 벽천 선생 추도 묵념(碧泉先生追悼黙念), 학교장 대회사(學校長大會辭), 내빈 축사(內賓祝辭), 학생 대표 선서(學生代表宣誓), 경기 선언(競技宣言)의 순이었다.
준비 체조 및 마스 게임(中高 全體, 35분), 글자 만들기(高, 100명, 15분), 달리기(高, 174명, 8분), 달리기(中 173명, 8분), 거북이 공굴리기(高, 117명, 15분), 달리기(캥가루뜀박질, 高, 175명, 10분), 인공위성(人工衛星) 뛰우기(高, 100명, 15분), 에어로빅 댄스(高, 175명, 30분), 달리기(中, 110명, 6분), 장님 안내하기(中, 100명, 15분), 달리기(라켓스푼, 高, 113명, 5분), 공차기(2人 3脚, 100명, 10분), 달리기(高, 162명, 7분), 할아버지 참새 쫓기(高, 10분), 어머니회원 경기(姜太公, 100m, 10분), 기마전(騎馬戰, 高, 337명, 15분), 국민학교 대항 400mR(5분), 중학교 대항 400mR(5분), 달리기(中, 111명, 6분), 내빈 경기(럭비공차기, 10분), 오색비가 내린다(中1 全體, 10분), 달리기(高, 117명, 6분), 88서울올림픽(中2 全體, 20분), 마라톤 10m, 어머니회원 경기(굴레벗기, 20분), 달리기(낱말맞추기, 20분), 얼굴 화장(中, 100명, 10분), 졸업생 달리기(200m, 5분), 개미 싸움(高, 111명 10분), 달리기(暗算하기, 中, 109명 10분), 자라거라 5월의 새싹(幼稚園, 30분), 기마 농구(騎馬籠球, 中3 全體, 15분), 탈춤(高, 50명, 30분), 달리기(高, 110명, 5분), 태권도 시범, 합기도 시범(40분), 깨끗이 청소하자(中, 100명, 15분), 직원 공굴리기(10분), 고지 탈환(高地奪還, 高2 全體, 15분), 학생 청백 계주(中高, 58명, 15분)
폐회식의 순서는 학생 입장, 정리 체조, 성적 발표, 학교장 식사, 국기 강하(國旗
降下), 교가 제창(校歌齊唱), 주악(奏樂), 폐회사(閉會辭)였다.
대회 임원으로 대회장에 김교용, 부대회장에 정양수, 총무에 정홍 배순택, 식전부(式典部)에 황시환 권태한, 진행(放送)에 장병창 오수영 안두식 김기주, 경기부와 출발에 김길영 권중섭, 심판에 신인수 이경근 최철영 한철수, 기록부에 김정길 고병갑 류상희, 감찰 응원에 김용시 김상덕 윤효식 엄재유 황덕수 박치대 현우택 정일준 김중희 김영남 박재영 오영숙 강미영 최규영 김정채, 준비부에 서수부 이병열 권영식 정억진, 구호부에 고운성 이교숙 소경섭, 섭외부에 윤주능 정재형 조재현 김점숙, 시설부에 권영춘 윤장식 조원희 김승섭, 악대부에 김명찬, 녹화(錄畵)에 전종태이다.
3) 벽천 선생 송덕비 제막(碧泉先生頌德碑除幕)
1985년 5월 15일에 300여 명의 내빈을 모신 가운데, 교정에서 제막식(除幕式)을 거행하였다. 이 송덕비는 1982년 개교 60주년 기념행사에 모여 송덕비 건립을 위한 벽천 선생 추모 기념사업회를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회장에는 학원 제1회 졸업생이며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현석호(玄錫虎) 동문을 추대하고 부회장에는 황수만(黃수萬) 동문이 선임되었다. 발족과 동시에 활동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경비는 주로 박운하(朴運河), 황중태(黃重泰), 권영세(權寧世), 정용인(鄭鏞仁), 변정구(邊鼎九), 변병직, 조용부(趙勇夫), 김현각, 장우신(張友信) 동문 등 주로 고등학교 제5회 졸업생이 맡았다. 그리고 비문(碑文)은 본회 고문인 안호상(安浩相) 박사, 고유문(告由文)은 윤봉희(尹鳳熙) 발기인 겸 집례위원(執禮委員), 송덕비 전후면(前後面) 글씨는 서예가 권창륜(權昌倫) 동문이 수고하셨다. 송덕비의 제막식은 벽천 선생님이 1885년 음력 3월 26일에 탄생하셨으므로 음력으로 탄신 100주년이 되는 1985년 5월 15일에 정양수(鄭亮秀) 교감 사회로 경건하게 1시간 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전통 의식과 현대식을 겸한 제막 행사는 자못 성대하고 장엄하였다. 한편 송덕비 제막 기념 교내 시화전(詩畵展)과 체육대회, 그리고 군내 백일장(白日場)과 컴퓨터 경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송덕비의 모양은 현대식 자연석 형으로 하고, 규격은 좌대(座臺) 높이 지상 4척(尺), 비신(碑身) 높이 3척, 비신 길이 8척이며, 석재(石材)는 국내에서 가장 질이 좋은 충남 보령(保寧)에서 생산되는 남포(藍浦) 오석인데, 비신의 중량은 3.5톤이다. 송덕비의 자리는 교정의 가운데에 우뚝선 교시탑(校是塔) 옆자리로 이 고장 예천을 굽어 보고 있다. 여기서 오석 송덕비는 햇살 쏟아지는 낮이며 별내리는 밤에 벽천(碧泉) 선생님의 거룩한 뜻을 더 깊이 뿌리내리고 지키신다.
비문과 그 날의 고유문(告由文)과 현석호(玄錫虎) 사업회장의 식사(式辭)와 최병준 교육장의 추념사(追念辭), 그리고 벽천(碧泉) 선생님의 인품과 생애는 다음과 같다.
(1) 벽천 선생 송덕비문(碧泉先生頌德碑文)
맑은 샘물처럼 고결한 인생을 살다 가신 선생의 휘(諱)는 석희(碩熙)요 자(字)는 태익(泰益)이며 호(號)는 벽천(碧泉)으로서 이 고장 예천의 근대 문화를 개척한 선구자요 신교육의 제창자이시다. 선생의 본관(本貫)은 경주며 제숙공 휘 균(齊肅公 諱균)의 후예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휘(諱) 형집(瀅集)의 제4남(第四男)으로 고종 을유(高宗乙酉) 단기(檀紀) 4218년 음(陰) 3월 26일 탄생하시었다.
호연(浩然)의 기상(氣像)을 품은 선생은 할달대도(할達大度)하여 20대 후반에 이미 향내(鄕內)의 명사(名士)로 인망(人望)을 일신(一身)에 모았으며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단기 4245년 예천청년회(醴泉靑年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副會長)과 국유대지 소작조합장(國有垈地小作組合長)을 맡아 나라 잃은 젊은이의 길잡이요, 착취 당하는 백성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변자가 되시었다. 3.1운동 이후에는 교육
구국(敎育救國)의 일념(一念)으로 청년회와 유도회(儒道會)의 후원을 받아 단기 4255년 현 대창중고(大昌中高)의 모체(母體)인 사설 대창학원(私設大昌學院)을 창립하여 예천을 중심으로 문경, 의성, 안동, 봉화 등지의 만학도(晩學徒)에게도 신학문(新學文)에 접할 기회를 주셨고 단기 4256년 불교 유일학원장(佛敎唯一學院長)을 겸임하여 이 고장 발전의 전기(轉機)를 마련하셨다. 단기 4263년 이후 상공회장(商工會長), 금융조합장(金融組合長), 영남 명덕회 지부장(嶺南明德會支部長), 예천향교 직원(醴泉鄕校直員) 및 유도회장(儒道會長)을 역임하면서 퇴폐한 풍교(風敎)를 광정(匡正)하셨고 광복 이후에는 민족 진영의 선봉에서 혼란한 사회 질서를 회복하셨으며 신생 조국의 동량(棟樑)을 기르고자 전재산을 희사(喜捨)하여 재단법인 대창학원(財團法人大昌學園)을 설립하고 단기 4282년 2월 15일 대창학원(大昌學院)을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로 승격시켜 학교장으로 취임하셨다.
단기 4283년 동란 중 위험을 무릅쓰고 학교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시다가 뜻을 다 펴지 못하고 8월 23일 향년(享年) 66세로 순직(殉職)하셨다. 슬하(膝下)에 수성(守成)하는 장남 교용(敎容) 등 2남 7녀와 손남(孫男) 경호(慶濠), 정식(正湜) 등 여러 친외손(親外孫)을 두시니 세인이 부러워하는 덕인(德人)이요 복인(福人)이시다.
높도다. 예천을 아끼고 가꾸신 은혜여! 크도다. 대창(大昌)을 세우고 키우신 공이여! 탄신 백주년을 맞아 여기에 한 덩이 돌을 세워 후세의 거울로 삼으며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거룩한 님의 뜻을 느끼게 하리라/ 檀紀 四三一八年 五月 十五日/ 初代 文敎部長官 哲學博士 安浩相 謹撰/ 碧泉先生追慕記念事業會長 玄錫虎 謹竪
權昌倫 謹書
(2) 고유문(告由文, 解)
공손히 엎드려서 생각하옵건대 선생께서는 제숙공(齊肅公)의 후예로서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나시고 약년에 벌써 그 뜻하심이 도타우시더니 장년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지고 왜놈들이 침노하여 마침내 사직이 무너질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은 어지럽고 백성이 도탄에 허덕일 때 속마음에 간직하신 바는 오로지 나라를 구하자는 생각뿐이었나이다. 나라를 구하려면 학문을 일으키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 여기시고 학교를 세워서 영재(英才)를 기르고자 하시어 스승을 모시고 학생을 모아 힘써 가르치고 알뜰히 익히게 하여 갈고 다듬어서 훌륭한 사람들을 무더기로 길러 내시더니 우리나라가 광복하자 이들이 출세하여 정치계로 경제계로 나아가 빛나는 공적을 쌓아서 선생님께 대한 칭송이 자자했었나이다.
이제 제자들이 정성을 모아서 비를 세우고 송축(頌祝)하면서 석학(碩學)의 신필(信筆)로 공덕을 드러내어 밖으로 널리 퍼지게 하였사오니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모습이 눈 속에 어렴풋하외다. 백천년(百千年)이 되도록 뚜렷이 보이어서 어그러짐이 없으리이다. 정성되이 삼가 아뢰나이다.
(3) 축문(祝文)
維檀紀四千三百十八年歲次乙丑三月己丑朔二十六日甲寅 幼學 慶州 李穆鉉
敢昭告于
碧泉金先生伏以恭惟先生齊肅遺裔自幼異凡弱冠超詣及于壯年國勢傾頹島寇來侵竟至屋社由是混亂民生失所中心所蘊急於救國救國之策莫如興學乃說私校育英謨劃聘師募生勸敎扶脈琢而又磨輩出英材光復以後多士出世或參政界或任經濟樹功赫赫稱譽籍籍門徒輸誠竪碑頌祝碩學信筆闡揚厥德警咳在耳儀容曖目於百千年昭示無필用伸處告謹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