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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은 저 혼자 멈추지 않는다 -
베이징 중심가의 한 호텔에서 인후는 쥰이치와 왕사장과 함께 마지막이 될 작업을 의논하고 있었다.
왕사장이 담배를 하나 빼어 물고는 헛기침을 두 어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문제는.....자금성 지하 도서관의 책임자인 저우양을 과연 회유할 수 있는가에 달렸는데......“
왕사장이 침중한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하자 쥰이치가 이어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현대는 돈이 말해주는 시대가 아닙니까.
게다가 중국은 급속한 자본주의가 밀려들어 와서 인민들이 이미 돈 맛을 알아버린지 오래입니다.
이미 인위적인 사건을 만들어서 저우양을 돈이 필요하게 만들어 둔 상태이니 그도 어쩔 수 없이 돈 앞에
무너질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쥰이치는 김일성이 가지고 있다가 중국으로 건너간 天地 造畵經帖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금성
내 지하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첩보를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해 전해 듣고는 그것을 탈취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세계에서 손 떼고 한국으로 들어가서 평화롭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지하도서관의 책임자인 저우양에게 신분을 속이고 접근하여 친분을 쌓아두고 저우의 부인
취링링을 도박판으로 끌어들여 이미 상당액의 거액의 빚을 지게끔 만들어둔 상태였다.
아니나다를까, 취링링은 오늘도 남편 저우양이 출근하자마자 찾아온 해결사들에게 한바탕 시달림을 당하여
이미 넋이 나가있던 상태였다.
남편이 아직 이런 사실을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것은 뻔한 사실인지라 취링링은 안절부절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천지조화경첩이라는 단어가 쥰이치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인후는 심장이 세차게 방망이질 하듯이 뛰는
걸 느끼고는 두 눈을 감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해동공자 최치원이 누구던가.
인류사엔 수많은 천재들이 명멸하듯 스쳐 지나갔지만 최치원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불세출의 대천재가
아니었던가?
온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비밀을 풀어내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가 언제 어느 때에 천지가 뒤바뀌는 개벽을
하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적어놓은 서책이 바로 천지조화경첩, 이름하여 천경첩으로 불리우던 보물 중에
으뜸가는 보물이 아니던가?
하지만 글로 남겨두는 서책이란 언젠가는 소실되거나 태워지고 분실되는 물건이 아니던가.
그것에 대비하여 천경첩을 요약하여 단 81자로 만들어서 암벽에 새겨 남겨둔 것이 묘향산의 천부경 비문이
아니던가.
우주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지구의 개벽과 인류사의 비밀을 남겨뒀다는 천경첩은 오래전부터 유대인들도 찾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온 터인지라 쥰이치와 인후는 서둘러서 그것을 빼내오기로 이미 결심을 굳힌 것이었다.
인후는 스승에게서 천경첩의 존재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쥰이치가 이미 그것의 행방을 쫒고 있었다는 말을
듣자 새삼 쥰이치의 머리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획대로 잘 되면 좋겠지만 자금성을 지키는 고위 관료들은 청백리의 표상으로서 명예와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는 공무원들인데 과연 잘 될지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하네만”
왕사장이 근심서린 표정으로 말하자 쥰이치가 다시 일을 열었다.
“황금 앞에서는 무너지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저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더욱이나 이중, 삼중으로 그물망을 쳐놓았으니 저우양 할아버지라도 넘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왕사장님은 너무 걱정마시고 서책의 처분만 제대로 잘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건 걱정말게. 이미 빌 게이츠랑 이야기를 끝내놓았네. 천경첩이 확실하다면 3억달러에 사기로 했으니까”
그 때 인후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동양의 고대보물들, 특히 천지조화첩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심히 불편하게 다가오는군요”
“한군, 아무려면 어떤가. 3억달러면 적은 돈이 아닌데 이번 기회에 한 몫 잡고 깨끗이 손 터는거야.”
왕사장이 특유의 느글거리는 눈매로 인후를 보며 말했지만 인후는 웬지모를 압박감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더욱이나 쥰이치는 유대인들이 고대 보물들, 특히 한국의 보물들에 집중한다는 정보를 받고 오랜기간에 걸쳐
유대인들이 찾으려는 보물이 뭔지 알아내고는 그것을 역이용하기로 결심했었던 것이다.
“쥰이치상. 난 이번 일은 웬지 내키질 않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한군, 아니 인후야.......
너는 이제 내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편하게 말해주마. 자금성 지하 서고에 잠자고 있는 천경첩을 탈취하는
것이 내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방금 돌아간 왕사장이나 빌 게이츠 등도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이지 그들에게 천경첩을 넘긴다는 건
추호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아!! 그러면......”
“그래. 너의 짐작대로다.
왕사장도 믿을 수 없고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최고의 경전을 유대인들에게 한낱 돈을 받고
팔아넘길 수는 없는 노릇인게야.
천경첩은 해인사 팔만대장경 옆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 천경첩을 추적해 왔던 것이지.
그리고 이제야 그 오랜 비원이 풀릴 날이 다가오고 있는게야.
그러니 마지막을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하고 이 일에서 손 떼야지”
“그러셨군요. 근데 쥰이치 상은 천경첩의 존재를 어찌 아시고 계시는 것인가요”
“임진년 때 논산에서 잡혀온 우리 조상들이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비급이었지.
왜구들은 조선 궁궐을 약탈하여 천경첩을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그것이 어쩌다 김일성에게로 건네졌고 또
김일성 사후에 중국으로 건너간 사실을 알아낸거지.”
“음...”
“인후야. 천경첩은 우리 조상들이 남기신 보물 중에 보물이다.
그것을 다시 빼내서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비로서 음양의 완벽한 조화와 질서가 발휘되어 한반도가
천 년 만 년을 비상할 용트림을 하는게다.
예수를 팔아먹은 유대인들이 천경첩을 쫒는 이유는 지구가 개벽을 하는 시기를 알아내기 위해서인데 그들은
인종청소를 위해서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을게야.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유대인들 보다 우리가 먼저 천경첩을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다.”
“정말......놀라운 사실들이군요. 스승님께 말씀 들어서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쥰이치 상의 입을 통해 들어보니
모골이 다 송연해 지는 느낌입니다.
아울러서 유대인들이 정말 무섭게 느껴집니다.
이 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떠돌던 그들의 한이 그정도로 깊을 줄이야.....”
“유대인들은 어리석은 민족일 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과 평화와 우리 한민족이 추구하는 조화와 질서는 반드시 한 번은 부딪칠 것이고
사랑과 평화를 몰아내고 조화와 질서가 승리한다면 비로소 지구상엔 평화가 찾아올게야. 하지만.......”
“하지만?”
“북한이 잘 돼야 한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아니, 잠깐만요.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천부경 81 자와 천경첩은 내용이 틀립니까?”
“물론이지. 조상들에게서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해동공자 최치원은 천부경 81자엔 우주의 생성과 소멸
원리를 적어두었고 천지조화경첩에는 지구의 개벽이 오는 시기를 기록해 놓은 서책으로 팔만대장경 보다
으뜸의 보물인 것이다.
그런 보물 중에 보물을 빼앗겼는데 우리 후손들이 그것을 알고도 침묵한다면 훗날 죽어서 조상들 뵐 면목이
서겠는가”
“으음...”
“더욱이나 나는, 아니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은 왜구들한테 잡혀 와서 恨의 세월을 보내며 조센징이란 놀림을
받으며 자란 복수를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천경첩을 반드시 손에 넣고 해인사 팔만대장경 옆에 놓아두어야 하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한다네.”
“아....”
인후는 뭔지 모를 뜨거움이 치밀어 올라와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곤 가만히 쥰이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급기야 눈물 방울을 떨어트리는 인후의 망막으로
스승과 대스승의 얼굴이 겹쳐왔다.
한반도가 웅비하는 비원의 그 날이 곧 오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인후는 쥰이치를 오래도록 끌어안고 펑펑
울고만 싶어졌다.
그런 인후의 심정을 아는지 쥰이치도 인후를 세차게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혔다.
창밖을 보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석고가 된 듯 오래동안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한동안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을 품고 자란 쥰이치와 평화와 박애주의로 뭉쳐진 인후의 기가 서로 소통을 이루더니
한 극점에서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그 날 모처럼 술을 마시며 밤이 야심한 시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여편네가 한 번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려나 앙”
“글쎄 이러지 말고 조금만 더....”
“아 시끄러. 고위 공무원 아내라고 봐줄 줄 아쇼? 우리 뒤엔 조직이 있어.
게다가 고위 공무원의 아내가 도박빚에 시달린다는 뉴스라도 뜨면 당신 남편이 어떻게 된다는 건 알지?”
“글세 그러니까......”
저우양이 출근하자마자 들이닥친 검은 양복의 사내 셋은 쥰이치가 고용한 달건이들 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흑사회 조직원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취링링은 달건이들에게서 빌린 도박빚을 갚지 못하자 전전긍긍 하고 있었다.
“어쨋든 오늘이 기한이야. 오늘까지 해결 못하면 당신 남편과 대면하는 수 밖에 없어.
그러니 알아서 하라고. 우릴 원망해봐야 소용없으니까”
이마에 길게 흉터가 있는 달건이가 말하며 집을 나가자 취링링은 이마에 밴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일본인......신사처럼 친절했던 그 일본인을 따라 마작에 손 댄것이 뼈아픈 실수였어’
취링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울고만 싶어졌다.
이제 내일이면 남편인 저우양이 알게 될 것이고 자신은 파멸하는 길만 남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취링링은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멀리 친척이 있는 곳으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래동안 생각을 거듭한 취링링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는 듯한 눈빛으로 남편인 저우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웬일로 전화를 다 주고.....”
저우양의 생기있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자 취링링은 그만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주저앉고만 싶었다.
“링링?”
다시 한번 저우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취링링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드릴 말이 있으니 오늘은 퇴근 후 바로 들어오셨음 해서요”
“아니 뭔데 그래? 중요한 애기야?”
“그냥.....여하튼 일찍 들어오세요. 기다릴게요.”
거기까지 말한 취링링은 전화를 내려놓자 눈 앞이 깜깜해졌다.
마작에 빠져서 무서운 줄 모르고 미친듯이 돈을 빌린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학자의 길을 걸어온 남편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런지 상상하자 소름이 돋아나오는 걸
느끼곤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날 오후,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들어온 저우양은 취링링의 청천벽력 같은 고백에 한 동안 넋을 놓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도박빚이 얼마라고?”
“400만 위안.....”
꺼져가는 목소리로 힘들게 말한 취링링이 우는 표정으로 말하자 저우양이 벌떡 일어나며 술상을 엎어버렸다.
“이 여퍈네가 미쳤나. 400만 위안이라니.....똑똑히 말해. 원금이야 아니면 이자까지 합한 금액이야?”
“원금.....”
“이런. 망할.....링링, 당신이 그렇게나 어리석은 여자였어? 갑자기 도박빚이라니......
누가 끌어들였어. 순진한 당신이 혼자서 찾아갈 리는 없을테니까”
“........”
취링링은 울상이 되어 저우양을 바라보았지만 저우양은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서 말 못해? 분명 누군가 꼬신 작자가 있었을거야. 누구야?”
“그게......그냥 어던 일본인 관광객과 우연히 어울리다 하게 됐는데 첨엔 돈 좀 땄거든요.”
“아갈통 닥쳐!~ 뚫린 입이라고 .....이걸 그냥.....”
“여보 잘못했어요 제발.....”
“ 이 일이 밖으로 퍼지면 우리가 어떻게 되는진 알지? 당신은 이혼후 빈털터리로 쫒겨나고 나도 끝장이야. 알아?”
저우양이 목소리를 높일때마다 취링링은 울상이 되었다.
다음 날 출근 후에 일주일 간 병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 저우양은 거실에 앉아있는 세 명의 달건이들과 이야길
나누었다.
“조사해봐서 알겠지만 나는 공무원입니다 월급은 4만 8천 위안이고 현재 저축해 놓은 돈은 합해서 200만
위안이 조금 넘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호오.....매우 솔직하십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와 같은 걸 보니.....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오시니 우리도 말하지요 이자는 필요 없으니 원금 400만 위안만 받겠습니다만......
200만 정도가 부족하군요. 그건 언제까지 해결을 해주실라요?”
“현재로선 월급뿐이니......매 달 월급의 반을 갚아도 7년 정도가 걸립니다만”
“7년이나? 허어 이것 참,,, 우리는 선생의 처지를 이해해도 우리 두목은 이해심이 없는데 말이오”
“들어봐서 그 쪽 생리를 잘 압니다만......쥐어짜내도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파멸을 한다 해도 말이오”
“선생의 그 말은 맞소, 공무원이야 뭐 뻔한거 아니겟소. 월급 뿐이겠지요.”
“그러면 매 달 월급의 반을 갚는 걸로 해주시겠소?”
“우린 그렇게라도 해주고 싶지만 우리 두목은 저 여자가 각서를 쓴 내용대로 처리하라고 했으니 좀 난감하군요.”
“각서라니요?”
그렇게 말한 저우양이 취링링을 바라보자 취링링은 울고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자. 직접 읽어보시죠.”
달건이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저우양이 읽어보고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취링링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체념하는 눈빛이었다.
종이엔 신체포기각서가 써 있었고 취링링의 필체가 확실하였다.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학문가의 집안으로 이어와서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이 하는 집안이오.
도박에 빠져 남편 이름에 먹칠이나 하는 저런 여편네는 없어도 그만이오.”
저우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자 건달들은 뜻밖이라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취링링은 놀란 얼굴로
고갤 들어 저우양을 바라보았으나 저우양은 소파에 앉으며 체념한 표정이었다.
“허어......이거 난감하구만. 어쨌든 좋소.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두목에게 선생이 말한 그대로를 전하고 내일
다시 오겠소.”
건달들이 돌아가자 저우양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취링링을 부르더니 독한 표정으로 말했다.
“링링. 이혼이야. 당신은 우리 집안 명예를 더럽혔으니 할말은 없겠지?”
“여보...제발......”
취링링이 눈물을 흘리자 저우양은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서 주점에 들어가 빼갈과 안주를 시키곤 담배를
빼물었다.
저우양이 맥없이 주점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 인후와 쥰이치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우양이 들어간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저우양씨 아니십니까?”
쥰이치가 일부러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아. 저우융캉씨가 여긴 웬일로?”
“하하하 술집에 술 마시러오지 왜 오겠습니까”
“허허.....그렇구먼”
“아니. 근데......지금 자작하시는 중입니까?”
“그렇게 됐소. 뭐 때로는 혼자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더군요.”
“저는 일행과 왔는데 같이 합석해도 괜찮겠는지요?”
“그러시오. 앞 자리에 앉으시오.”
“서로 인사나 나누시죠. 한 형. 이 분은 저우양이라는 분으로서 공무원입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한인후 라고 합니다.”
인후가 예의 바르게 허리를 90도로 꺽으며 인사를 하자 신선한 느낌을 받은 저우양이 자리에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저우양입니다. 한국인 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관광차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근데 저우융캉 씨는 발도 넓군요. 한국 사람과도 교류를 하시니 허헛”
“인터넷으로 알게 되어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근데 이 친구가 모처럼 맘 먹고 돈도 왕창 싸들고 왔는데 북경에서 실망만 하고 돌아가게 되어
투덜거린다는군요 하하하”
“그건 또 무슨 소리?”
“아. 글쎄 이 친구가 책이라면 사족을 못쓸만치 엄청 좋아라 하는 친군데요.
북경의 서점들과 고서점들을 골목까지 누비고 다녔어도 자신이 읽을만한 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지
뭡니까? 고작 세 권 정도 건졌다며 북경도 별거 없다며 툴툴 거리지 뭡니까 하하하”
“책?”
“그렇습니다. 그것도 고서적을 찾아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는 친구이니 말 다했지요.”
“고서적을? 아니 아직 젊어보이는 데 돈이 얼마나 많기에......실례지만 한 형은 뭐하시는 분인가요?”
“무역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지요.”
인후가 예의 바른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자 저우양은 호기심이 일었다.“
“호오! 무역을 하시는군요. 한형은 재주가 많으신가 봅니다 허헛”
“아닙니다 재주랄 것이 있겠습니까. 남보다 몇 발자국 더 움직이자는 신조 하나만 갖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열라 움직이니 돈뭉치가 굴러 들어오더군요.”
결코 자만심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인후의 표정을 보자 저우양은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근데 찾으시는 책이 어떤 책인데 이 넓디 넓은 베이징에 실망했다는 것인지요.”
“뭐 별것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하늘을 나는 최초의 인간이 되거나 날개 달린 천사 등......
그냥 하늘이 좋아서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워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천(天)자가 써 있는 고서적을
모아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동안 책의 제목에 천 자가 들어가는 책을 모았습니다만.......
이번 베이징 방문에서는 고작 세 권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으음....”
저우양이 묵직한 신음을 토하자 인후는 가방에서 세 권의 낡은 서책을 꺼냈다.
“요번에 베이징 고서점에서 산 책은 이것입니다.
천가장의 난이라는 서적과 천지의진경. 그리고 남은 하나는 천지동이래 라는 서적이군요.”
“책의 제목에 천 자가 붙어있는 책은 얼마든지 있을텐데요?”
저우양이 사뭇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ㅡ 인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많지요만 아무 책이나 닥치는대로 살 수야 있나요.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사야지요.”
“그도 그렇군요.”
이 때 쥰이치가 끼어들었다.
“한 형이 자금성 내 도서관을 구경하다가 급 실망했다고 합니다. 하하”
“아니 왜?”
눈을 치켜뜬 저우양이 말하자 쥰이치가 목소릴 낮추더니 은밀하게 말했다.
“책도 많고 고서적도 많지만 한 형이 이미 본 것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천하에 둘도 없는 얼간이 짓이라고 말하더군요.”
“으음....”
“더욱이 지난 문화혁명 때 갑자기 공안 당국이 각 가정의 집들마다 찾아다디며 온갖 고서적들을 압수하거나
돈 서푼을 주고 쓸어간 행동을 비판도 하더군요.”
“그건......”
짧게 한 마디를 한 저우양이 인후를 보자 인후는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고서적들을 밀반출하니 보호 차원에서 그랫던거요.”
저우양이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한 형이 책 좀 사려고 500만 위안이나 들고 온 돈뭉치는 공염불이 되었구료 하하하”
쥰이치의 500만 위안 소리에 눈이 떠진 저우양이 빼갈을 주욱 들이킨 후 말했다.
“아니. 책을 사는 데 500만 위안씩이나?”
“아이고오 저우양 선생도 참. 아마츄어처럼 왜 그러십니까. 하하하 요즘 볼 만한 고서적 한 권에 50만에서
100만 사이를 왔다리갔다리 하는 판인데요 하하하”
“그렇군요. 자금성 지하 도서관에서 일만 하는 내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가 없지요.”
순간, 인후와 쥰이치는 찰나적으로 서로의 눈빛을 마주쳤다
쥰이치가 새삼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자금성 지하도서관요? 한 형이 구경을 한 도서관이 아닌가요?”
“거긴 일반에 공개하는 도서관이고 지하엔 또 하나 큰 도서관이 있소. 내가 그 곳 책임자고”
“아아......그러시군요. 저우양씨는 그저 자금성에 출근하는 공무원인 줄 알았는데 지하도서관을 책임지신
분이군요.”
“그렇소. 그 지하도서관엔 온갖 종류의 서적들이 세월을 먹으며 조용히 숨쉬고 있소.
그 곳을 관리하는 나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오.”
그 때 인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중국은 땅은 크지만 진시황의 분서갱우로 인해서 고서적은 별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모르는 소리!”
저우양이 인후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분서갱유를 했다 해도 이 넓디 넓은 중국 땅에 있는 고서적들은 많소이다.
당국은 그런 서적들을 모두 거둬와서 지하 서고에 쌓아두고 있소.”
“그러면 고서적들이 참으로 많겠군요?”
“당연하오. 나도 틈틈이 고서적들을 읽는 재미로 출근하니까 말이오.”
이때다 싶어 쥰이치가 끼어들었다.
“잘 됐군요. 고서적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한 형에게 구경 좀 한 번 시켜주시지요?”
“큰일 날 소리”
저우양이 손사래를 치며 택도 없다는 얼굴로 다시 빼갈을 들이켰다.
“지하 도서관은 일반인들이 출입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우양씨가 책임자라면 권한으로 얼마든지 한 사람쯤 구경시켜줄 수는 있을텐데요.”
“그야 뭐.....”
저우양이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배갈 잔을 잡자 쥰이치가 재빨리 인후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우양씨. 단도집입적으로 말씀 드리지요. 자금성의 지하 도서관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군요.
만약 저를 데리고 들어가서 구경을 시켜주면 저우양씨에게 500만 위안을 드리지요.”
인후의 입에서 500만 위안이라는 말이 튀오나오자 저우양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저우 집안의 명예를 뭘로 보는게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오.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고 있소이다.”
저우양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은 상당히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쥰이치가 다시 인후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우양씨. 그냥 구경만 하겠습니다 1시간을 넘기지 않을 것을 약속 드리지요. 그리고 만약 제가 보고 싶은
책 중에 천 자가 들어있는 책이 있다면 딱 한 권만 가지고 나가게 해준다면 500만 위안을 더 드리겠습니다.”
저우양이 눈을 치켜뜨며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다시 빼갈 잔을 잡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뿐입니다. 구경만 해주는 데 500만 위안을 드리고 읽고 싶은 책 한 권만 가지고 나가게 해주면 500만을
더 드리지요 물론. 읽고 싶은 서적이 없으면 그냥 구경만 하는 걸로 만족합니다.”
“어허......거 택도 없는 소릴......”
저우양은 자신의 말에 힘이 없음을 느꼈다.
쥰이치가 다시한번 인후에게 눈짓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저우양씨 그렇게 해주시지요.
이런 기회가 또 오는 것도 아니고 이 참에 저우양씨도 한 몫 잡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셔야지요?”
쥰이치의 가족이라는 말에 저우양은 취링링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리석게도 꼬임에 빠져 도박을 했지만 그래도 대학시절부터 교내 연애를 하며 사랑을 키워오며 결혼까지 한
취링링을 떠올리자 마침내 저우양은 가슴 한 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자리를 옮기자고 말한 후 일어서서 앞서 나갔다.
밖은 어느새 빗줄기가 흩뿌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네온싸인이 휘황한 어둠 속을 뚫고 도시의 저편으로 넘어갔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