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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62
1118독, 스님 승(僧) - 첫 번째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지금 《수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이야기》(2023.12.22.-2024.4.14.)가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 어제 다녀왔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지만, 아직 인도에서 완전히 귀국하지 못 한 까닭입니다. 아쉬운 것은, 아니 그보다는, 욕심대로라면 ‘산치대탑’을 한 번 더 보았으면 싶어서입니다. 그런 마음이 남아 있어서입니다.
스투파(stūpa)는 탑입니다. 인도에서 현재 그 원형을 알 수 있는 정도로 남아있는 탑으로는 산치(Sanchi)대탑이 거의 유일합니다. 마우리야 왕조 3대 임금인 아쇼카왕 때 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2000년, 2005년 두 번 가보았습니다만, 한 번 더 눈으로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인도 불교미술의 백미(白眉)’라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과연 그럴 것이라 봅니다.
이번 전시회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한 번 한 전시품을 그대로 갖고 와서 하는 것이라 합니다. 4월 14일까지라고 하니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남인도, 특히 산치에서는 한참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마라바티(Amaravati)와 나가르쥬나콘다(Nagarjunakonda)에 남아 있는 부조나 조각들이 주로 많았습니다. 아마라바티의 스투파는 현재 터만 남아있는데, 규모가 대단합니다. 지름 50m라고 합니다. 부서지고 깨어진 스투파에서 남은 잔해(殘骸)들에 새겨진 부처님 이야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첸나이박물관에서도 조금은 볼 수 있지만, 역시 아마라바티에서 보는 것만큼은 아닙니다. 양적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도 보존되고 있나 봅니다. 많이 빌려왔습니다.
나가르쥬나콘다, 아마라바티, 뉴델리 국립박물관, 콜카타 인도박물관, 마투라박물관 등을 애써 찾아가 보았습니다만, 그때 만난 전시품을 이번에 또 만난 것일 수도 있는데, 기억을 못합니다. 공부를 안 하고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역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모를 일입니다. 인연은…, 언제 또 남인도를 다니면서 그 옛날 선인(先人)들의 신심과 상상력을 눈으로 보게 될지 말입니다.
자, 다시 우리의 공부 주제인 「정신게」로 돌아옵시다. 한 번 읽어봅니다. 가능하면 크게 읽어주십시오, 소리 내어서. ‘스님 승’을 주의해 주십시오. 2번 나옵니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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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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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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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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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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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海)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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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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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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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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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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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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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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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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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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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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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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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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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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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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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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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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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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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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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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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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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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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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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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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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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 《 교행신증 》 제2권)
「정신게」를 공부하는 편지 제4권이 3분의 2를 지납니다. 불보론(1-30), 법보론(31-61)에 이어서, 이번 편지부터는 드디어 승보론(僧寶論)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다 승보입니다. 승보를 논의할 수 있는 단어들이 「정신게」에 여럿 나옵니다만, 먼저 확인할 것은 역시 ‘스님 승’입니다. 모두 두 번 나옵니다만, 오늘은 첫 번째 용례를 공부합니다.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중지난무과사’로 앞에서 한 이야기를 맺음하고, ‘인도서천지론가’로 뒤에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난중지난무과사’까지는 주로 《무량수경》의 내용을 의지하여 정토불교의 요체(要諦)를 말씀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믿고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제시합니다. 무엇이 “어렵다”, “어렵다” 해도 그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신요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앞의 이야기를 맺음한 뒤, 이제 새롭게 전개할 이야기는 ‘인도서천지론가’로 시작합니다. ‘서천’이라는 말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본다면 다 서쪽에 있습니다. 서쪽에 있는 천축을 ‘서천’이라 하였습니다(인도의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서천축’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예불문」에서 ‘서건(西乾)’이라 하였지요. ‘서천’이나 ‘서건’이나 다 인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도서천지론가’에서 ‘인도’와 ‘서천’은 동어반복입니다. 강조하기 위해서반복했습니다. ‘논가’는 논사(論師)를 말합니다. 부처님의 경전이나 율장에 대해서 쓰인 주석서를 ‘논’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불교사에서는 인도서천에서 지어진 1차적인 주석서를 ‘논’이라 말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지어진 주석서는 ‘논’이라 붙이지 않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원효스님의 저술 중 《금강삼매경론》이 있습니다. 원래 《금강삼매경》에 대한 주석서로서 《금강삼매경소》라고 이름했습니다. ‘논’이 아니라 ‘소(疏)’라고 그 이름을 겸손하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책이 전해져서, 중국 스님들이 보시고는 “이야, 이 책은 ‘소’가 아니라 ‘논’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라고 한 까닭에, 《금강삼매경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도서천의 논사들은 《경》에 대해서 《논》을 지었던 분입니다. 그래서 ‘논가’, 즉 논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또 동시에 ‘보살’이라고도 불립니다. 구체적으로는 용수(龍樹, 앞서 ‘나가르주나콘다’는 용수보살의 고향입니다)보살과 천친(天親=世親)보살입니다. 이 두 분은 다 보살입니다.
「정신게」의 마지막 게송에 보면, ‘홍경대사종사등’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홍경’은 경전의 가르침을 넓히는 것을 말합니다. 논서의 저술을 통해서 부처님 경전의 뜻을 널리 알렸기 때문에, ‘대사’라는 말 앞에 ‘홍경’이라고 수식하였습니다. ‘대사’는 ‘마하살’이라고 소리로 옮겼던 말, 마하사트바(mahasattva)의 번역입니다. ‘사’는 ‘선비 사’라고 하니까, ‘위대한 선비’, 내지 ‘위대한 지식인’이라는 의미일 수 있겠습니다.
‘인도서천지론가’ 다음에 ‘중화일역지고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중화’는 다 아시다시피 중국입니다. 중국집을 ‘중화반점’이라고 하는 데에서 가장 분명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역’은 일본을 가리킵니다. 일본 지역이라는 뜻이지요. ‘중화일역지고승’은 ‘중국과 일본의 고승’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정신게」는 ‘인도서천지론가 중화일역지고승’ 이하에서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서 일본에 이르러 온 정토신앙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신 인도의 보살, 중국과 일본의 고승들을 찬탄합니다. 그분들의 일생과 저술에 나타난 의미를 시로써 간략히 정리하면서 찬탄합니다.
모두 일곱 분입니다. 인도에서는 용수와 세친, 중국에서는 담란, 도작, 선도, 일본에서는 원신, 원공 … 이렇게 일곱 분들입니다. 이 일곱 분들의 계보를 흔히 ‘칠조(七祖)’ 또는 ‘칠고승’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칠조’라고 한다면, 일곱 분의 조사라는 말이 됩니다. ‘조사’라는 말은 종파의 개조라거나 중흥조, 이런 분들을 조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신란스님의 삶을 살펴보면, 그 스스로 평생 암자 하나 소유하지 않았던 분이 아닙니까. 그런 분이 과연 종파라는 교단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조사들의 계보를 세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분 자신이 한 작업들을 본다면 종파를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다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란스님의 작업들(=해석들)을 의지하여 종파가 세워진 것은 후대의 일입니다. 그것을 소급하여 신란스님이 ‘칠조’를 말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종파적인 ‘종통(宗統)’보다는 신앙적 차원에서의 ‘신심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칠고승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가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정신게」에서는 ‘고승’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중화일역지고승’과 마지막 구절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도, ‘칠조’라는 말보다는 ‘칠고승’이라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합니다. 적어도 신란스님에게는 말입니다.
칠조를 말했다고 한다면, 뭔가 종파의 건설자로서 어떤 제도적인 차원에서 욕심을 가진 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평하는 분이 없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칠고승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신앙의 선배라고 하는 의식에서라고 하는 식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행신증》을 다 저술하시고 마지막 부분에서, 붓을 놓기 전에 신란스님은 이렇게 술회합니다.
(도작스님의) 《안락집》에 말하기를, (《안락집》에서 경론과 어록으로부터 정토에 대한) 진실한 말씀을 뽑아서 모은 것은 (중생들이 극락에) 왕생하는 이익을 닦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먼저 태어난 자로 하여금 뒤에 태어나는 자를 이끌게 하고, 뒤에 태어나는 자는 먼저 태어난 자를 찾아뵈어서 연이어져 다함이 없게 하고자 해서이다.
「정신게」를 공부하는 우리는 뒤에 태어난 자입니다. 후생(後生)입니다. 그래서 먼저 태어난 신앙의 선배들을 직접 뵈올 수는 없습니다. 태어난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우리를 생각하면서 남겨주신 논서나 주석서 등을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그 책 속에서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가신 선배님들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선배들이 계시지만, 특별히 신란스님에게 이르는 정토불교의 역사에서 깊은 영향을 끼쳐주신 분들 일곱 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칠고승입니다. 정토진종의 공부는 정토삼부경과 칠고승의 저서들, 그리고 신란스님의 저술들이 바로 기본적인 교과서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독자들 중에는 “왜 한국의 고승들은 빠졌느냐”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관스님께서 《신란의 칠고승에서 한국의 고승이 없는 이유 연구》(동국대 석사논문)라는 논문으로 해명한 바 있습니다.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만, 간략히 말씀드리면 신란스님은 ‘믿음’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란스님께서도 신라의 경흥(憬興)스님이 지으신 《무량수경연의술문찬》과 같은 《무량수경》의 주석서를 깊이 읽으시고 《교행신증》에서 많이 인용하셨습니다만, 어떤 교리적인 해명 부분에 대해서 중점이 두어졌을 뿐, 핵심적인 ‘믿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경흥을 인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점은 역으로 경흥스님 자신의 정토신앙이 어떠했는지? 유식 법상종에 속한 스님으로서 정토신앙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경흥스님의 맥락에서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중화일역지고승’들, 즉 담란, 도작, 선도, 그리고 원신, 원공의 저술들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자료를 구할 수 있고, 저술의 번역이나 연구들이 더러는 나온 것이 있습니다. 뜻이 있는 분들은 찾아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아직 공부가 미진합니다.
정토불교에서 책을 읽는 일은 이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부처님이나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마음을 읽는 일입니다. 마음을 읽을 때 저절로 염불하게 되고, 염불의 소리가 겉으로 터져 나올 것으로 봅니다. 선불교에서는 경론을 통해서 이론적인 정립을 한 뒤, 이론을 버리고서 실참(實參)을 하라고 하지만, 정토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끝내 경전과 고승들의 책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아미타불의 목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지에서도 ‘스님 승’의 두 번째 ‘유가신사고승설’을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2024년 2월 25일)
첫댓글 中夏日域之高僧...인데
왜 편지에서
"중화’는 다 아시다시피 중국입니다. 중국집을 ‘중화반점’이라고 하는 데에서 가장 분명한 용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셨을까요.
"중하"...를 "중화"로 혼동하셨나,
이상타...싶기도 하고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하, 中夏=中華...였군요.
요미카타는 둘 다 "ちゅうか"...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