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칠 수 없는 편지 (隨筆)
影園 김인희
오늘은 종일 잿빛 하늘이었습니다. 하늘도 나무도 날아가는 새도 모두 찌푸린 얼굴이었습니다. 훌훌 옷을 벗어버린 나목(裸木)을 보고 잠시 상념(想念)에 젖었습니다. 그 나목처럼 미련을 모두 떨쳐버리고 홀연히 떠난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는 밀물이 되어 덮칩니다.
어머니!
당신을 부르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아픔으로 다가오는 그리움입니다.
제가 두 자녀를 옆에 끼고 방송통신대학교 공부를 시작했던 2000년은 제 생애 가장 슬픈 해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뻘뻘 흐르는 한여름에 우리 집에 오신 당신의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습니다.
“엄마, 전화도 없이 오셨네요. 전화하셨으면 터미널로 마중 갔을 텐데요.”했더니 “전화는 왜 해. 어린것들 데리고 씨름하느라 힘들 텐데... 부여 터미널에서 계백장군 동상 쪽으로 걸어와서 박물관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네 생일이 한여름이라서 바쁜 농번기에는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단다.”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학기말 시험을 코앞에 두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낑낑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책상에 앉아 쩔쩔매는 제 모습을 처량하게 보시고 칭얼대는 작은 아이를 업고 아파트 놀이터로 가셨습니다. 딸이 공부하지 못한 한(恨)을 간직한 것을 너무도 잘 아는 당신은 딸에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룻밤을 묵으시고 다음날 청양으로 떠나시면서 “影園아, 공부 잘하는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그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단다. 가난한 농부가 아들 대학에 보내 놓고 뒤대느라 정신없었단다.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부디 공부해서 네 꿈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유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 했습니다.
어머니
그때 당신을 배웅하면서 당신 말씀대로 대학교 공부를 마치고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습니다. 당신께서 무척 기뻐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늦가을 당신께서는 아무런 여지(餘地)도 주지 않으시고 동화처럼 작별을 고하셨습니다.
아들 하나 딸 다섯. 당신의 자식들이 모두 성가(成家) 하여 남매를 두었을 때 함지박 미소를 머금고 할 일 다 해서 겁날 것 없다며 노래하듯 말씀하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잠자다가 저세상으로 갈 수 있는 복(福)을 받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노래처럼 새벽에 잠에서 깨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
눈물 많은 여식은 당신과 이별하고 마음 놓고 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홀로 계신 아버지를 위해 가장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드리고 청양으로 달려 다녔습니다. 제 양쪽에 매달리는 어린 자식들과 공부하느라 여념(餘念)이 없었습니다. 제가 기필코 대학 공부를 마쳐야 할 분명한 이유는 당신의 유언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습니다. 시험 기간에 힘들 때는 영어영문학과를 선택한 것에 일말(一抹)의 후회를 한 적이 있었지만 주저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봐란듯이 공부를 마치고 당신께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저를 내려다보시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전공과목 과락으로 한 학기 유보되었을 때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공부를 마치고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치열하게 공부했던 시간들을 보석처럼 간직했습니다.
공부방 선생이 되어 아이들과 수업하는 동안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영어 공부방으로 시작해서 초등학교 전과목을 가르치며 확대했습니다. 토요일에는 독서논술 수업을 했고 밤에는 중학생 영어 과외를 했습니다. 그때 가르친 제자들이 사회의 주역들이 되었다는 소식은 저를 나르시시스트가 되게 합니다.
그렇게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詩人으로 등단하고 隨筆家로 등단했습니다.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사회복지학 석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꿈을 한 가지씩 이루면서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부디 네 꿈을 이루어라! 당신의 마지막 말씀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제가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게 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편지를 자주 썼습니다. 제가 명절 때 고향에 왔을 때 당신께서 하신 말씀 기억합니다. 당신께서 “影園아, 어찌 그리도 글을 예쁘게 잘 쓰느냐. 네 편지를 읽노라면 착하고 따뜻한 네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구나.”하고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창호지 문에 새겨 넣었던 선홍색 과꽃은 한 편의 詩였습니다. 당신의 그 DNA가 제게 詩心이 되어 뜨겁게 흐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의 슬픔과 아픔 또한 제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셋째 언니가 결혼 후 육 개월 된 아기를 두고 하늘나라로 떠났을 때 당신의 황소 같은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후로 당신께서는 화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식을 앞세운 비운의 어미라는 주홍색 꼬리표를 스스로 만들어 달고 살았던 가여운 나의 어머니.
당신의 나르시시즘의 미소를 기억합니다. 할머니께서 장맛이 꿀맛이라고 칭찬하셨을 때 장독대 돌아가며 남몰래 웃었던 그날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초등학교 졸업식 날 아침에 곱게 화장하고 거울에 뒷모습을 비추어 보던 여인의 향기를 아름다운 편린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어제는 천안 충청창의인성교육원 덕향문학 출판기념회 행사에서 시낭송을 했습니다. 부여 행사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자동차를 운전하여 달려왔습니다. 국립부여박물관 공연장에서 시낭송을 했습니다. 예쁜 목소리로 시낭송을 잘했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오늘은 공주시 서원 행사에 초대되어 시낭송을 했습니다. 서원에서 주최한 행사라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개인 시낭송과 합송시 시낭송을 했습니다. 행사 후 서원 관계자로부터 무대를 빛내주었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행사 때마다 초대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어떤 관객은 제 시낭송 CD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들려주실지 알고 있습니다. 제게 들레지 말고 겸손하라고 말씀하고 싶으시지요?
아무렴요. 저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당신께서는 제가 꿈을 이루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당신께만 살짝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멈추지 않고 전진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서 걸어온 걸음입니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았을 때 잠시 주저하면서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만 당차게 도리질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눈물이 많고 마음이 여린 나약한 모습으로 지냈습니다. 무서운 사람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는 동안 견고하게 성숙했나 봅니다. 저를 흔드는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그것도 하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들려주신 꿀팁(tip) 잘 지키고 있습니다. ‘影園아, 억척스럽게 일하지 말라. 곰 같이 미련한 女子가 되지 말고 여우 같이 귀여운 女子가 되어라. 부모의 말은 文書란다. 자녀들에게 하는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예쁘게 단장하고 사랑받는 아내가 되어라. 너는 마음이 착하고 따뜻해서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게다...’
우리 형제들 휴대전화 단체 대화방에 다음 주 일요일에 부모님 산소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무서리가 선홍빛 과꽃 위에 내린 날에 당신께서 하늘나라도 떠나신 것을 떠올립니다. 저는 아직도 당신 기일(忌日)을 달력에 적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휴대전화에 아버지 전화번호가 아직 저장되어 있습니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전화를 누르면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저는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눈물 속에 피어나는 선홍빛 그리움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