折衷將軍僉知中樞府事 尹公墓碣銘
從孫 禮曹判書 德駿 撰
公의 휘는 衡正, 字는 景保, 남원인 이시다.
시조는 諱 威이시니 고려 염찰사이시고, 고조는 휘 시영으로 목사, 증조는 휘 청으로 별제, 할아버지 휘 민신은 참봉, 아버지는 휘 길이니 승지이시다. 임진(壬辰/1592년) 오월 초이렛날 사형제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친척들은 가문에서 대대로 이어 업으로 하는 문한을 익혀 성공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公은 스스로 모자라는 사람으로 자처하고 또 진취하는 일에 게을리 하였다. 벌써부터 과거에 뜻을 두는 학업은 집어 치우고 사환(仕宦)으로의 경영에는 뜻을 끊었다.
집이 교외에 있어 문 닫아 걸고 스스로 안분을 지켰다. 젊었을 때 사귄 친구에는 문인걸사가 많았지만 公은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자긍을 버리고 찾아다니기 초연하게 세상일에 뜻을 버린 사람 같이 하였다.
지구(知舊)들도 公의 편안 하고 고요함을 즐기는 심성을 알고 때때로 내방(來訪) 하니 公의 문 앞에는 늘 훌륭한 사람들의 차철(車轍)이 많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지만 두 아우[형각.형성]가 입조(入朝)하여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아 다스렸고 아들과 조카들도 잇대어 고을을 다스렸다.
모두가 公을 섬기기를 어버이 같이 하였는데, 公은 늘 절약할 것을 경계하고 일찍이 털끝만한 것도 허락 하지 않았다.
公이 시골에 살 때 친구들이 선물을 하면, 公은 곧 그 물건을 팔고 경시 (京市)에 가서 다른 물건을 사서 보답하고서, “나는 남들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은혜는 받고 싶지 않다.”하였다.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도 나태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술을 좋아하여 싫 컷 마실수록 더욱 말이 적고 묵중하여 취하면 잠을 잘 뿐이다.
자제들이 잘 못하는 일이 있으면 일찍이 큰소리로 나무라지 않고 다만 자책하기를 “이것은 내가 가르치지 못 한 때문” 이라고 하였다. 이웃마을 사람들도 公을 경복(敬服)하여 모두 훌륭한 분이라고 칭송 하였다. 일찍이 公의 품행과 도의[行誼]로 예부(禮部)에 록천(錄薦)되었다. 公은 젊었을 때 교제하던 친구와 인척 관계에 있는 집안들이 兩銓(양전: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에 많이 있었으나, 公의 뜻은 구차스런 벼슬길에 있지 않았다. 그런 고로 여러 동생들도 公의 벼슬을 주선하지 못했다.
수(壽)가 팔십이 넘어 현종조(顯宗朝)에 수직으로 통정에 오르니 호군(護軍)에서 오위장(五衛將)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차(陞差) 하였다.
公은 대노(大老)에 다다른 나이에[德駿 幼年時] 고시 장편(古詩長編)을 입으로 외우고 다시 손으로 써서 여러 손자들을 가르치는 데 한자의 착오도 없었다.
누가 공사(公私)간의 전고(典故)에 대하여 물으면 그 대답이 해박 하게 달통하여 막힘이 없으니 또 한 公의 총명한 기억력을 알만하겠다.
건강하고 무병하여 잠도 잘 주무시고 청력과 시력도 감퇴되지 않아 백수(百壽)는 하실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계축(癸丑/1673년)시월 초하루에 일어나시지 못하고 임종 하시니 향년 팔십이세(八十二歲) 이시다.
배위는 평산신씨 증 판서 훤(萱)의 따님 이시다. 현숙하고 부공(婦公)이 있으니, 公이 집안일을 소홀히 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니, 부인이 밭농사를 지어 자급 할 뿐 아니라 채소를 시장에 팔아서 公에게 해지지 않은 옷과 정갈한 음식을 대접했고, 여러 자녀들의 혼사를 능히 남의 도움 없이 자체 해결 하였다. 일가의 동서들에게도 규범이 되었다. 만력 기축년(1589년)에 나시어 육십오세를 사시고 계사(癸巳/1653년)에 졸하시었다.
후에 公의 관직에 의하여 숙부인(淑夫人)이 증직되었다. 五男三女를 두었는 데 장남은 박(樸). 次는 책(策), 次에 휘(彙), 次에 당(棠), 次에 실(實), 책(策)은 생원시 장원(壯元)이며 관직은 사의(司議), 당(棠)은 진사 관직은 현감, 큰 사위는 첨지 조백운, 둘째는 사과 신휘, 셋째 이규한이다.
후배 증 숙부인 청주양씨는 훈련원주부 응록의 따님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충익장(忠翊將)으로 수직 공조참판(工曹參判) 葉 이다. 박(樸)은 三男 二女이니 장남은 이회(以恢), 차남 이태(以泰)는 무과(武科)에 통정대부, 부사(府使)이며 셋째는 이항(以恒)이며, 책(策)은 一男一女이니 이열(以悅)이오, 휘(彙)와 당(棠)은 자식이 없다 . 실(實)은 二男二女이니 장남은 이화(以和), 차남은 이대(以大)이고 엽(葉)은 二男一女이니 장남은 이승, 차남은 이진 이다. 증손 이하는 이루 다 쓰지 못하였다.
공과 신, 양부인은 금천 검지산 선산 을향(乙向)에 합장 하였다.
(註:현재는 경기도 안성시 이죽면 당목리 산139번지로 이장)
수(壽)가 팔십이 넘어 수직(壽職)의 벼슬을 받고,
선행의 추천에 올라, 삼품(三品)의 증직(贈職)이 내리니,
생전(生前), 사후(死後)에 영화를 누려 유감이 없고,
또 후손들이 창성하여 벼슬과 문학이 대를 이어 배출하니
이 모두가 功을 많이 쌓으신 음덕(蔭德)이 무궁한 후세에 미침이 아닐 수 없다.
從孫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義禁府事同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副賓客 德駿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