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10년 1월 산악회 엔젤폭포 원정에서 돌아 오는 길에 들린 뉴욕에서 뉴욕한미 산악회의
신승모 선배가 제게 준 자료를 2회에 걸쳐 나누어 올립니다.
신승모선배님이 암벽과 패러를 하는 제가 읽어 볼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저녁 술자리에서 제게 준 이글의
출처는 신승모선배 저서 "정상의 순례자들"에서 브와뱅편입니다.
패러글라이딩을 취미로 하는 우리들이 창시자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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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르크 브와뱅
-몽블랑의 하얀표범-
---브와뱅: 1951년 프랑스 드종 출신의 장 마르크 브와뱅은 전천후 요격기 같은 산악인이다. 그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스키 황강 모험가이며 빙벽의 달인데다가 행글라이딩의 고공활강 기록을 갖고 있는 알파인 클라이머다. 브와뱅은 스키를 이용해서 몽블랑 주변 4,000m급 빙설암의 암등과 꿀르와르를 등반하고 재빨리 하강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익스트림 스키분야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정글을 누비는 표범과 같은 야수 장 마르크 브와뱅(Jean Marc Boivin), 그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가운데 묻혀있는 사자와 같이 여름 시즌에는 보나티(Bonatti)의 숨결이 살아 감도는 그랑카푸셍에 자신의 루트를 열기에 여념이 없으며, 단단히 크러스트되어 표면이 굳어 있는 알프스 꿀르와르가 무르익을 때면 한 마리의 표범이 되어 수직의 빙벽을 회유한다.
브와뱅은 전천후 요격기처럼 알프스의 침봉과 피너클을 회유하며 익스트림 스키(Extreme Ski), 파라팡트(패러글라이딩) 또는 행글라이더를 타고 결코 지치지 않는 괴력과 기지를 유감없이 발휘해 그 독보적이 가치를 인정하는 자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고 있다.
브와뱅은 1951년 6월 4일 프랑스 드종 출신이다. 그가 처음으로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일은 K2에서 행글라이딩을 했을 때였다.
그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처럼,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절벽에서 그야말로 독수리가 숲속의 토끼를 찾아 칼날 같은 바위를 넘고 눈알을 찌르는 듯한 침엽수 위를 나는 환상의 세계를 현실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브와뱅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스키활강 모험가이며 빙벽의 달인인데다 행글라이딩의 고공(高空) 활강기록을 갖고 있는 알파인 클라이머라 할 수 있다.
모험이 그의 전공인지 아니면 최근 자신이 몰두하여 독특한 경지까지 끌어 올려 놓은 파라팡트(패러글라이딩)또는 행글라이딩이 전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늘 그가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알파인 클라이밍이었다.
신장 173Cm로 서양인 치고는 그다지 큰 키가 아닌 그는 이제 두 아들의 아버지로 샤모니에 살고 있다. 65킬로그램의 체중을 늘 유지 한다는 그는 17세에 드종 부근에 있는 등산학교에서 기초 과정을 이수했다. 스키는 등산보다 2년 먼저 시작했는데 최근 그가 지향하는 익스트림스키는 23세 때부터 본격적이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국민학교 입학전에 수영, 스키, 록클라이밍 등 조기 스포츠 교육을 실시하는 프랑스에서 브와뱅의 출발은 비교적 늦은 셈이었다. 록클라이밍의 기수 페트릭에드랑제가 12세부터 극렬한 볼더링에 심취하기 시작한데 비해, 브와뱅은 에콜트에스카라드 수료 후 제크랑(Des Ecrin)의 로아장과 몽블랑에서 여름 바캉스를 보내며 알파인 클라이머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나서 3년 사이에, 그는 3대 북벽의 하나인 그랑드 조라스 북벽의 워커릉과 크로릉을 등정했고 치베타의 필립플램 루트와 피즈바딜레 북벽을 올라 알파인 클라이머로서의 실력을 쌓아갔다. 그가 루트를 보는 시각은 정통적이 것이어서 이어 퓨트리릉의 에귀유느와르서릉과 남릉, 블라티에르 서벽과 드류의 보나티필라 그리고 카를레소가 만든 토레트리에스트봉을 차례로 섭렵해 나갔다.
브와뱅은 원래 프랑스 유수의 대학 과정인 바칼로레아와 고급 기술 교육 과정을 밟은 공업 디자이너라고 한다. 또한 그는 고산 가이드이자 등산, 스키 잡지의 평론가로 일하며 기술 자문으로서의 또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파라팡트, 파라슈트 영화의 연출가로 일하는 등 다양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알파인 크라이머로서의 무수히 많은 산을 오르내린 브와뱅은 21세부터 암벽과 빙벽 단독 등반을 겸해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자신의 크라이밍 경력을 완숙한 경지로 이끈다. 그는 페를렝의 북벽 직등루트와 에귀유상놈의 브라운패티 루트 제 2등, 푸(Fou) 남벽 제8등, 그리고 드류의 아메리칸다이렉트 제 7등을 1992년 한 해에 이룩하였다. 같은 해에 단독으로 몽블랑드따귈의 알비노니 갸바루 루트와 역시 드따귈의 모디카누리를 각각 동계에 오르는 저돌성을 보여 프랑스에서 무서운 브와뱅 돌풍을 일으켰다.
이 무서운 사나이가 가이드 자격을 획득하던 1975년에 이룬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은 패트릭 갸바루와 함께 드르와트 북벽과 에귀유베르트 북벽 직등 루트와 몽블랑 드따귈의 슈퍼 꿀르와르를 직등으로 초등반한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험악하기로 이름난 피리에당글, 세키넬노미네 루트와 드르와트의 코르노다바이유 루트, 플랑(Plan)의 라가드세고뉴 루트를 차례로 섭렵하여 선배 클라이머들의 뒤를 한층 가까이 따라가는 한편 익스트림 스키 분야에서도 색다른 차원으로 데뷔를 하기에 이르렀다.
경사도 55도의 플랑 북벽과 팔라비치니 꿀르와르를 활강하는 데 성공한 그는 다시 바레느와르 꿀르와르와 투리아 북벽을 재활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가이드 직업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 시즌 가이드를 하고 나면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정체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극적인 등반을 계속하기 위해 가이드를 하는 횟수는 가능한 한 줄이려 한다.
“저는 줄곧 제 자신을 불태우는 모험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트레이닝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고 정신적인 무장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지요. 남이 한 번도 내려가 보지 않은 꿀르와르를 활강하는 것은 대단히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꿀르와르를 활강하여 첫번째 턴을 하고 두첩째 턴을 할 정도가 될 때는 이미 두려움이란 없어지고 오히려 마음의 평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낙천적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자신이 몰입하고 싶은 분야가 결정되면 보름 정도 완전히 자신을 떠맡겨 충분한 조건을 갖출 때까지 트레이닝에 집중한다. 일순간의 실수로 목숨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정글의 위험을 뚫고 나가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1978년 첫 해외 원정인 페루로 떠나기 전까지 브와뱅은 그랑드조라스 슈라우드(Shroud)를 단독으로 2시간 25분 만에 등정하고 플랑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하는 라가드세고뉴 꿀르와르를 단독으로 초등했다. 1977년 한 해에 브와뱅이 활강한 주요 루트는 모두 8개로 그 가운데 6개가 초활강이었다. 그는 당시 어려운 65도의 급경사를 스키활강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제는 갈고 닦은 등반과 활강의 기량을 멀리 페루의 안데스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와스카랑(Huascaran 6,787m) 남벽, 피스코(Pisco 7,780m) 북벽, 퀴타라후(Quitaraju 6,100m)) 북벽을 역시 스키로 활강해 그의 진면목을 국제적으로 과시한 브와뱅은 세 곳 모두 초활강의 신기원을 이룩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앞길이 넓고도 확 트였으며 한편으로는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1979년, 브와뱅은 1979년 프랑스 마칼루 서릉 서미터 베르나를 멜레(Bernard Mellet)의 K2 남서릉 원정대원으로 참가했다. 샤모니 출신의 강인한 가이드 야닉 세뉴르와 왕년의 베테랑 모스카, 그리고 10명의 촬영팀 속에서 브와뱅에게는 별로 뚜렷한 역할이 맡겨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샤모니 계곡을 주름잡기 시작한 풋나기 모험가 불과했다.
1,400명의 포터가 짐을 나른 덕에 10일만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50명의 셰르파가 다시 짐을 600m위인 제 1캠프로 올려 주었다. 그러나 12명의 대원이 7,500m 지점까지 전진하는 동안 1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1명은 아스콜레 마을로 귀환 하던 중에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는 불상사로 원정대는 타격을 받았다. 22일 만에 제4 캠프(7,500m)를 설치해서 마칼루의 콤비 세뉴르와 멜레는 7,800미터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18일 동안 200미터 밖에 전진할 수 없을 정도로 악천후가 계속되었다. 9월 9일 천신만고 끝에 8,350m 지점에 제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공격에 나섰으나 정상 155미터 아래에서 주저 앉고 말았다.
브와뱅은 제 4캠프까지 진출해서 정상공격 대원으로 내정되었으나 망막출혈로 고생한데다가 행글라이더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으므로 다른 대원들 보다 체력소모가 유달리 많았다. 25~30킬로그램의 행글라이더를 올려 놓은 브와뱅에게 멜레 대장의 하산 명령이 떨어졌다.
K2 남서릉 7,600미터 지점, 브와뱅의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행글라이더에 안전 벨트를 묶고 베이스 캠프를 향해 바람을 타고 활공하는 퍼모먼스에 몸을 내맡겼다. 5,000미터 지점에 있는 베이스 캠프와 고도 차이는 2,600미터로 거의 백두산 높이를 13분간 활공하는 동안 1분에 200미터씩 고도를 낮추어 나갔다.
희말라야 등정 사상 최초로 새로운 형태의 도전을 몸소 실천해서 직접 보여준 브와뱅에게 전세계의 산악계는 경이의 찬사를 보냈다. 그해 브와뱅은 영국 정부가 수여하는 ‘국제 용맹 스포츠맨상(International Award for Valour in Sports)’을 수상했다.
영국의 산악 전문지 <마운틴>은 그의 산경력의 전환점을 1980년 마터호른 연결 등반으로 평가한다. 브와뱅은 1980년 6월 6일에 4시간 10분에 걸쳐 단독으로 북벽을 올랐으며 정상에서 행글라이딩 활강을 한 데 이어 다시 마터호른을 올라 동벽을 스키로 활강했던 것이다. 브와뱅은 그 연장 등반의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제가 학생 시절에는 클라이밍에 미쳤던 때가있었죠. 그때는 하루에 200미터까지 루트를 네 개씩 오르는 시도를 하여 독일의 선구자 루드비히 푸르첼러의 흉내를 내 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패트릭 베로에게 그 의견을 말하자 그도 쾌히 동의 했고, 그래서 우리는 더욱 어려운 루트를 길게 연장해 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1981년 8월 14일 베로와 브와뱅이 푸 남벽을 오르고 드류의 아메리칸 다이렉트를 연결해서 블라티에르까지 하루 만에 오를 수 있었던 업적은 행글라이더의 덕이었다.
(계속)
첫댓글 좋은 정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