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삶과 사색의 양식이다 이는 명백히 종교가 아니란 말이다 유교가 종교적 수요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다 유교의 제례예의 등의 모습이 중교와 같은 경건함을 유지하기 때문에 종교적이라는 분석이 가능하고 유교적 사색법이 극히 보편적이기 때문에 신학과 같은 종교적 탐구에도 뜻있게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유교가 조상숭배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종교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원뜻에 어긋난다
유교는 생각하는 나무와 같다 뿌리와 줄기와 가지를 유지하면서 모든 공간을 체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공간을 마구 유영하는 나비처럼 유랑한다고 하여 공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서 하늘로 대변되는 공간개념을 유지하는 것은 그 사상이 자유로움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근본에서 보면 자유사상이다 그것이 신이라고 정의될지라도 전지전능한 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간의 미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는 아무런 정의도 내리지 않고 인 의 등의 전통개념을 깊이 음미하였다 그 공간성을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 경전의 원의를 탐구하되 그 문자에 매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종교는 경전을 통해서만 신에 접근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은 그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안에 신과 같은 요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유교사상은 진실을 문제삼고 있을 뿐 사람과 사물은 진실의 응결체로 보기 때문에 그 내부에서 진실을 탐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교는 종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혹자는 유교가 윤리적인 것일 뿐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윤리라는 말을 특별히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도리를 말할 뿐이다 도리란 진실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예의이다 사람이 정한 에티켓과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언제나 진실과 진심이 문제가 된다 예의 형식은 최소한의 도리행동 공간이다 나머지 공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예의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을 때 극기복례라고 대답하였다 사사로울 수 있는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자세한 말씀을 요청하였을 때 공자는 다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예를 행하는 것이 극기의 한 방식이었고 사사로움을 벗어나 널리 통하는 기초적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예는 극기를 통하여 극인 즉 남의 자아에 대한 개입을 역시 절제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와 남의 사사로움이 개입된다면 진실은 멀어지게 된다 진실과 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학(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