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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5권
3. 습상응품(習相應品)을 풀이함①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생각하기를,
‘보살은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고 부처님도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반야바라밀도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고 물질도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역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고 해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마치 나[我]가 다만 이름만이 있고 온갖 나는 항상 얻을 수 없듯이,
중생(衆生)과 영혼[壽者]과 목숨[命者]과 나는 이[生者]와 양육(養育)과 무리의 수[衆數]와 사람[人]과 짓는 이[作者]와 짓게 하는 이[使作者]와 일어나는 이[起者]와 일어나게 하는 이[使起者]와 받는 이[受者]와 받게 하는 이[使受者]와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 등의 이 모두를 다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고 공하기 때문에 다만 이름으로써 말할 뿐이니라.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러하여서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를 보지 못하고 중생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아는 이와 보는 이에 이르기까지를 보지 못하나니, 말한 바의 이름 역시 볼 수 없느니라.”
【논】
【문】 제이품(第二品) 끝에서 이미 공을 말씀하셨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거듭 말씀하는가?
【답】 위에서는 대부분 법공(法空)을 말씀하셨고 이제는 법공과 중생공(衆生空)을 함께 말씀하시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바깥 법은 모조리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고 관하면서도 ‘공을 아는 자는 공하지 않다.’고 여기나니, 이 때문에 다시 말씀하는 것이다.
관하는 이[觀者]도 역시 공하니, 이것이 바로 중생공이다.
성문의 법 가운데에서는 대개 온갖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모든 법 안에는 나가 없음을 안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의 5백 년을 두 갈래로 나누면, 법공을 믿은 이도 있지만 중생공을 믿는 이도 있었다.
곧 “5중(衆) 이것은 결단코 존재하는 법이니, 다만 5중을 받는 자가 공할 뿐이다.”라고 말하므로,
이 때문에 부처님은 중생공을 말씀하면서 법공에 더하신 것이다.
또 나의 공함은 알기 쉽고 법의 공함은 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는 5정(情)으로 구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신견(身見)의 힘으로써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나를 삼을 뿐이다.
법의 공함은 빛깔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소리는 귀로 들을 수가 있나니, 이 때문에 그의 공함은 알기가 어렵다.
이 두 가지의 일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모두가 공하나니, 마치 18공(空)의 이치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다.
【문】 나에게 있어서 아는 것과 보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동일한 일인가, 저마다 다른 일인가?
【답】 모두 이것은 동일한 나[我]이며 다만 일에 따라서 다를 뿐이다.
5중(衆) 가운데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나라 하고,
5중이 화합한 가운데서 나기 때문에 중생(衆生)이라 하며,
목숨[命根]을 성취하기 때문에 영혼[壽者]과 생명[命者]이라 하고,
능히 뭇 일을 일으킴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과 같으므로 나는 이[生者]라 한다.
젖을 먹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인연으로 자라게 되므로 이것을 양육(養育)이라 하고,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 등의 모든 법의 인연은 셀 수 있는 무리의 법[衆法]으로서 무리의 수[衆數]라 하며,
사람의 법을 행하기 때문에 사람[人]이라 하고,
손과 발로 짓는 바가 있음을 일컬어 짓는 이[作者]라 하며,
힘으로 다른 이를 부리기 때문에 짓게 하는 이[使作者]라 한다.
뒷세상의 죄와 복의 업을 짓기 때문에 일어나는 이[能起者]라 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뒷세상의 죄와 복의 업을 일어나게 하므로 일어나게 하는 이[使起者]라 하며,
후생 몸이 죄와 복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받는 이[受者]라 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게 하므로 이것을 받게 하는 이[使受者]라 하며,
눈으로 빛깔을 보므로 보는 이[見者]라 하고, 5식(識)으로 알므로 아는 이[知者]라 한다.
또 눈으로써 빛깔을 보되 다섯 가지 삿된 소견[邪見]으로써 5중(衆)을 관하며, 세간과 출세간의 바른 소견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하므로 이것을 보는 이라 한다.
이른바 눈으로써 다섯 가지를 삿되게 보고 세간을 바르게 보며 무루(無漏)로 보는 이것을 보는 이라 하며,
그 밖의 네 가지 감관[四根]으로 아는 바와 의식(意識)으로 아는 바를 통틀어 아는 이라 한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모두가 신(神)을 말하는데 이 신은 시방과 3세(世)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으며 다만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억지로 그의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가 공하여 진실이 없으니, 다만 임시로 그의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문】 이 신(神)에는 다만 열여섯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인가, 다시 그 밖에도 다른 이름이 있는가?
【답】 간략하게 말하면 열여섯 가지이지만 자세하게 말하면 한량이 없다.
그 일에 따라 이름이 일어남이 마치 관리의 호칭이 그 기술의 능함과 지혜의 공력에 따라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출가하여 도를 얻게 하는 갖가지의 이름들은 모두가 인연화합으로 생기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마침내 공[畢竟空]하다. 남[生]이 공하기 때문에 법도 공하고 법이 공하기 때문에 나는 일[生] 역시 공하다.
【경】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그 지혜가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을 지나게 되니, 불가득공(不可得空)에 의하기 때문이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이름과 법의 이름과 집착하는 곳도 역시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능히 이와 같이 행해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염부제(閻浮提)에 가득 찬 대ㆍ삼ㆍ벼ㆍ갈대의 수만큼의 비구들이 있고, 그 지혜가 모두 사리불이나 목건련과 같다 하여도,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의 지혜에 비교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ㆍ백천분의 일 내지는 산수(算數)의 비유(譬喩)로써는 미칠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지혜에 의지해 온갖 중생을 제도하고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니라.”
【논】 해석한다.
두 가지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보살의 지혜는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
첫째는 공(空)으로써 온갖 법을 알되 공도 또한 이 공함을 보지 않으며 공은 공하지 않은[不空] 것과 평등하고 동일하여 다르지 않은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지혜로써 온갖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는 다만 모든 법이 공함을 관찰할 뿐이요 세간과 열반이 하나임을 관찰하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감옥을 탈출할 때 어떤 이는 다만 담장을 뚫고 자기 자신만이 탈출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감옥을 부수고 쇠고랑을 끊고서 자신도 탈출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들도 구제하는 이가 있는 것과 같다.
또 보살의 지혜는 두 가지의 법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뛰어나나니,
첫째는 대비(大悲)요, 둘째는 반야바라밀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반주삼매(般舟三昧)요, 둘째는 방편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항상 선정(禪定)에 머무르는 것이고,
둘째는 법성(法性)을 통달하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온갖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온갖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나니,
첫째는 인자한 마음으로 원한도 없고 성냄도 없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까지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공덕으로 지혜를 장엄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
【문】 모든 근기가 둔한 이에게는 비유를 삼아야 하지만 사리불은 지혜와 근기가 영리한 분인데 무엇 때문에 비유를 삼으시는가?
【답】 꼭 근기가 둔한 이에게만 비유를 삼는 것은 아니다. 비유는 논의(論議)를 장엄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5정(情)이 보는 바로써 의식(意識)을 깨우쳐 주면서 그로 하여금 깨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마치 누각을 오를 때 사다리를 만나면 오르기가 쉬운 것과 같다.
또 온갖 중생은 세간의 즐거움에 집착하고 있는지라 길과 열반을 얻는 일을 들어도 믿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나니, 이 때문에 눈으로 보는 일로써 보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쓴 약은 먹기가 매우 어렵지만 거기에 꿀을 타면 먹기가 쉬운 것과 같다.
또 사리불은 성문 가운데서 지혜가 제일이지만 모든 부처님과 보살에다 비하면 아직 나타낼 만한 것이 없다.
염부제라 했는데, 염부(閻浮)는 나무의 이름이며, 그 숲은 무성한데 이 나무는 숲 속에서 가장 크다. 제(提)는 대륙[洲]을 말하는데 이 대륙 위에 이 나무 숲이 있고 이 숲 속에 강이 있으며, 그 밑바닥은 금모래가 깔려 있어서 염부단금(閻浮檀金)이라 부른다. 염부나무 때문에 염부주(閻浮洲)라 부르며, 이 대륙에는 5백의 작은 섬[小洲]들이 빙 둘러 있는데 통틀어서 염부제라 한다.
【문】 제자들이 아주 많은데 무엇 때문에 “사리불과 목건련 등이 염부제 안에 가득 찬 대ㆍ삼ㆍ벼ㆍ갈대와 같다.”라고 하시는가?
【답】 온갖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지혜로써 으뜸가는 이가 사리불이고, 신족(神足)으로 으뜸가는 이가 목건련이다. 이 두 사람은 불법 안에서도 위대하고 외도의 법안에서도 위대하다.
그러나 부루나(富樓那)ㆍ가치나(迦郗那)ㆍ아나율(阿那律) 등은 비록 불법 중에서는 위대하다 하더라도 외도의 법 가운데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또 이 두 사람은 항상 대중에 있으면서 부처님을 도와 교화를 드날리고 모든 외도들을 파하지만 부루나 등의 비구에게는 이러한 공덕이 없나니, 이 때문에 말씀하지 않는다.
또 만일 사리불을 말하면 곧 온갖 지혜 있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게 되고 만일 목건련을 말하면 곧 온갖 선정 닦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게 된다.
비유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어떤 일을 빌려서 비유를 삼고,
둘째는 실제의 일로써 비유를 삼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빌려서 삼은 비유[假喩]라 하겠는데 다른 물건으로써 비유를 삼지 않는 까닭은 이 네 가지 물건[四物]이 무더기로 수북하게 나서 빽빽이 들어서고 종류도 많기 때문이다.
사리불과 목건련 등의 비구들이 염부제를 가득 차고 이러한 모든 아라한의 지혜를 한데에 모아 합친다 해도 보살의 지혜에는 미치지 못하니, 백분의 일이나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문】 다만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칠 수 없다고만 말하지 않고 무엇 때문에 백분의 일ㆍ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는가?
【답】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극단적인 말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중한 죄가 있을 때 먼저 때리고 묶어서 모진 고통을 준 연후에야 죽이는 것과 같다.
성문의 법 중에서는 언제나 “16에서 그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으로 비유를 삼고,
대승의 법 중에서는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칠 수 없는 바이다.”라고 한다.
【경】 사리불아, 염부제 안에 가득 찬 사리불과 목건련 같은 이들도 그만두고,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사리불과 목건련 같은 이들도 다시 그만두고,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 찬 사리불과 목건련 같은 이들의 지혜로써도,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의 지혜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ㆍ백천분의 일 내지는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칠 수 없는 바이니라.
【논】 해석한다.
이 이치는 위의 염부제에서와 같으며 다만 많은 수로써 함이 다를 뿐이다.
【문】 사리불과 목건련 등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지혜에는 다름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많은 수로써 비유를 삼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적으면 힘이 없고 많으면 힘이 있나니, 마치 물이 적으면 그 힘도 적은 것과 같다.”라고 한다.
또 마치 아주 뛰어나게 센 사람을 적은 사람들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지만, 대군(大軍)이 공격하여 굴복시키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 분의 사리불은 지혜가 적어 보살에게 미치지 못하나 많으면 혹 미칠 수 있다.”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비록 많다 하더라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셨나니,
그러므로 많은 것으로 비유를 삼았다.
마치 온갖 풀과 나무의 힘은 불보다 못하고 온갖 모든 광명도 그 세력이 해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시방세계의 모든 산은 하나의 금강주(金剛珠)보다 못한 것과 같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의 지혜는 바로 모든 부처님 법의 근본이요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릉비가(迦陵毘伽)의 새끼와도 같으니, 비록 아직 껍질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도 그 음성이 뭇 새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껍질에서 나온 뒤이겠는가?
보살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아직 무명(無明)의 껍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 그러니 하물며 성불한 뒤이겠는가?
또 마치 전륜성왕의 태자가 아직 복조(福祚)와 위덕을 성취하지 못했어도 온갖 모든 왕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전륜성왕이 된 뒤이겠는가?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성불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한량없는 지혜와 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 그러니 하물며 성불하신 뒤이겠는가?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하루 동안 지혜를 닦아도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느니라.
【논】
【문】 먼저 이미 “부처님을 제외하고 그 지혜는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을 지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또 거듭 말씀하시는가?
【답】 거듭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위에서는 전체의 모양[總相]으로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각각의 모양[別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먼저는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다만 하루 동안의 지혜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밝히실 뿐이다. 그러니 하물며 천만 년 동안이겠는가?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성문이 지닌 지혜는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및 벽지불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 등 이 모든 뭇 지혜와는 차별이 없고 서로 어긋나지도 않으며, 나는 것이 없으면서[無生] 성품이 공[性空]합니다.
만일 법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무생이고 성품이 공하다면 이 법에는 차별이 없는데,
어떻게 세존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하루 동안 닦은 지혜도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 하시는지요?”
【논】
【문】 위에서 부처님은 이미 “보살마하살이 닦은 지혜는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라고 하셨는데 이제 사리불은 무엇 때문에 묻는 것인가?
【답】 지혜의 세력으로 능히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묻지 않고 이번에는 다만 부처님과 제자의 지혜만을 물었을 뿐이다.
체성(體性)의 법 안에는 차별이 없다 함은,
모든 성현의 지혜는 모두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지혜이고, 모두가 4제(諦)와 37품(品)의 지혜이며,
모두가 삼계(三界)에서 벗어나 3해탈문(解脫門)에 들어가서 3승(乘)의 과보를 이루는 지혜이다.
이 때문에 차별이 없다고 한다.
또 마치 수다원이 무루의 지혜[無漏智]로써 결(結)을 없애고 과위를 얻듯이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마치 수다원이 유위해탈(有爲解脫)과 무위해탈(無爲解脫)의 두 가지 해탈의 과위를 이용하듯이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그리고 부처님처럼 열반에 드는 일도 수다원은 극히 더디어도 일곱 세상[七世] 동안을 넘지 않는다.
모두 일[事]을 같이하고 연(緣)을 같이하며, 행(行)을 같이하고 과보(果報)를 같이하나니,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남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지도 않고[不生]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문】 무명을 깨뜨리고 모든 착한 법을 쌓기 때문에 지혜가 생긴다.
이 지혜는 마음과 상응하고 마음과 함께 생기며 마음을 따라 행해지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지혜는 나는 것이 없고 성품이 공하여 차별이 없다.”라고 하는가?
【답】 지혜는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반연하므로 이것이 나지 않는 것이요 인연과 화합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나니, 이것을 성품이 공하다고 한다.
분별한 바가 없이 지혜는 인연 따라 이름을 얻는다.
마치 눈이 빛깔[色]을 반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므로 안식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색식(色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혜가 비록 인연과 화합하여 법을 짓는다 하더라도 나는 것이 없고[無生] 성품이 공함을 반연하기 때문에 나는 것이 없고 성품이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문】 모든 성현의 지혜는 모두가 4제를 반연하여 생기는데 무엇 때문에 단지 사라짐의 진리만을 말하는가?
【답】 4제 가운데 사라짐의 진리가 으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세 가지의 진리는 모두가 사라짐의 진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천자(天子)를 청하면 그 신하들과 함께 식사를 했어도 역시 천자에게 공양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사라짐의 진리 때문에 나는 것이 없음[無生]을 말하고, 세 가지의 진리 때문에 성품이 공함[性空]을 말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모든 지혜의 성품은 저절로 불생(不生)이어서 성품이 저절로 공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이 없기 때문에 나지 않는다.”라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지혜와 어리석음에는 차별이 없을 것이다.
【답】 마치 모든 법이 법성(法性) 안으로 들어가면 차별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불은 저마다 같지 않으면서도 꺼지는 모양은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여러 하천에서 흐르는 온갖 물은 저마다 빛깔이 다르고 맛도 다르지만,
큰 바다로 들어가면 똑같이 동일한 맛과 동일한 이름이 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아서, 어리석음과 지혜는 반야바라밀 가운데 들어가면 모두가 동일한 맛이어서 차별이 없다.
마치 다섯 가지 색깔이 수미산을 가까이하면 스스로 그의 색깔을 잃으면서 모두가 동일한 금빛이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안팎의 모든 법은 보살마하살의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동일한 맛이 된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모양은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이다.
또 어리석음의 실상(實相)이 곧 지혜이니, 만일 분별하면서 이 지혜에 집착하면 곧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이와 같은데 어리석음과 지혜는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처음 부처님의 법에 들어가면 어리석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하나 뒤로 옮겨갈수록 어리석음과 지혜에는 다름이 없다.
이 때문에 이 모든 여러 지혜는 차별이 없고 서로 어긋나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성품이 공한 까닭에 허물이 없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하루 동안 지혜를 닦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도혜를 행해 온갖 중생을 이익되게 하며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온갖 법을 알고 온갖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나니,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겠느냐?”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논】 해석한다.
네 가지의 이론이 있나니,
첫째는 필정론(必定論)이고, 둘째는 분별론(分別論)이며, 셋째는 반문론(反問論)이고, 넷째는 치론(置論)이다.
필정론이라 함은, 마치
“중생 가운데서는 세존이 으뜸이시고, 온갖 법 가운데는 나가 없으며, 세간은 즐거울 수가 없고 열반은 안온하면서 적멸(寂滅)이며, 업의 인연은 상실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것들을 필정론이라 한다.
분별론(分別論)이라 함은,
마치 무외(無畏) 태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다른 사람들이 성을 내지 않겠나이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런 일은 분별하여 대답해야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태자가 말하기를,
“모든 니건자(尼健子)들은 똑똑히 아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부처님은 간혹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중생을 죄 가운데서 벗어나게 하시지만 중생은 성을 낸다. 그러나 그 중생들은 뒤에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때 무외의 아들이 그의 무릎 위에 앉자,
부처님은 무외에게 물으시되,
“너의 아들이 혹시 기와나 돌이나 풀이나 나무를 입 안에 머금는다 하면 너는 삼키도록 그대로 두겠느냐?”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그대로 두지 않겠나이다. 먼저 토해 내게 하고 만일 토하려 하지 않으면 왼손으로 귀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입에다 쑤셔 넣어서 비록 피가 나온다 해도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그 아이를 가엾게 여기지 않는 것이더냐?”라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그 아이를 몹시 가엾게 여기는 까닭에 그 아이를 위하여 기와나 돌을 꺼내려는 것이오니, 비록 그때는 아프다 하더라도 뒤에는 편안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중생이 중한 죄를 지으려 하면 착하게 가르치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듣기 싫은 말로써 타이르게 되나니, 비록 성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뒤에는 안온함을 얻느니라.”라고 하셨다.
또 다섯의 비구가 부처님께,
“즐거움을 받으면서 도(道)를 얻나이까?” 하고 묻자,
부처님은 말씀하시되,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괴로움을 받으면서 죄를 얻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괴로움을 받으면서 즐거움을 얻기도 하며,
어떤 이는 즐거움을 받으면서 죄를 얻기도 하고,
어떤 이는 즐거움을 받으면서 복을 얻기도 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것 등을 분별론이라 한다.
반문론(反問論)이라 함은 도리어 묻는 바로써 그에게 대답하는 이론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한 것과 같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물질[色]은 항상한 것이더냐, 무상한 것이더냐?”
비구가 대답했다.
“무상한 것입니다.”
“만일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이더냐?”
“괴로운 것입니다.”
“만일 법이 바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법을 들은 성스런 제자들은 이런 법에 집착하면서 ‘이 법 이것은 나요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하겠느냐?”
그러자 대답하기를,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지금으로부터 존재하는 물질이 과거거나 미래거나 현재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곱거나 추하거나 간에 이 물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도 이 물질의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바르고 진실한 지혜로써 알아야 하느니라.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에서도 그와 같이 할지니라.”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것들을 반문론이라 한다.
치론(置論)이라 함은, 마치 14난(難)과 같이,
“세간은 항상한가, 세간은 무상한가, 세간은 끝이 있는가, 세간은 끝이 없는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치론이라 한다.
지금은 부처님께서는 반문론(反問論)으로써 사리불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사리불의 지혜는 일에 대하여 아직 깨치지 못한지라 부처님께서 일의 실마리[事端]를 되물으면서 그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를 일컬어 도혜(道慧)라 하나니, 후품(後品)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살바야(薩婆若)의 지혜는 바로 성문과 벽지불의 일이고,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지혜는 바로 모든 부처님의 일이며,
도종(道種)의 지혜는 바로 보살의 일이다.
또 8성도분(聖道分)은 진실한 도이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갖가지의 인연으로 도에 머물게 하므로 이것을 도혜라 하며,
중생으로 하여금 도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나니,
이것은 성문의 종성[種]과 벽지불의 종성과 부처님의 종성을 이익되게 한다.
또 온갖 지혜는 얻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이것을 일체종(一切種)이라 한다.
유위(有爲)거나 무위(無爲)거나 간에 일체종지(一切種智)로써 알며,
부처님의 도를 얻은 뒤에는 마땅히 온갖 중생을 제도하고 온갖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혹은 대승(大乘)으로써 혹은 성문승(聲聞乘)으로써 혹은 벽지불승(辟支佛乘)으로써 하기도 한다.
만일 3승(乘)의 도에 들지 못하면 복덕을 닦아 천상과 인간 안의 부귀와 쾌락을 받도록 가르치고,
만일 복덕도 닦지 못한다면 지금의 세상에서 이익되는 일인 의복과 음식과 침구 등으로 하게하며,
만일 그것도 하지 못한다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익되게 해야 하나니, 이것을 일컬어 온갖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문】 만일 부처님은 온갖 성문과 벽지불이 중생을 위할 수 없음을 아신다면 무엇 때문에 물으시는 것인가?
【답】 부처님의 뜻은 이와 같으니, 곧 사리불로 하여금 자기의 입으로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보다 못하다.”라고 말하게 하려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물으신 것이다.
사리불은 말하기를,
“없나이다, 세존이시여”라고 했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인자한 마음은 있다 하더라도 본래 발심이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또한 선근(善根)을 돌이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하루 동안 지혜를 닦아도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경】 “사리불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우리들은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온갖 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게 해야겠다.’고 하는 이런 생각이 행여 있겠느냐?”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런 인연 때문에 알아야 하느니라.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혜는 보살마하살의 지혜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써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논】
【문】 위에서 이미 사리불에게 반문하면서 일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 것인가?
【답】 사리불이 수다원(須陀洹)도 똑같이 해탈을 얻기 때문에 모든 부처ㆍ보살과 평등하게 보려고 하므로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털구멍과 허공을 평등하게 보려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거듭 그 일을 물으시는 것이다.
또 비록 동일한 일이라 하더라도 이치의 문은 저마다 다르다.
앞에서 지혜를 말씀하심은 온갖 중생을 위해서요,
여기에서는 “우리들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무여열반을 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니,
무여열반에 대한 뜻은 먼저의 설명에서와 같다.
또 하나의 성문이나 벽지불조차도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이겠는가?
【경】 사리불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에게는,
‘우리는 6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성취시키고 세계를 장엄하며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을 갖추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겠다.’고 하는 이런 생각이 행여 있겠느냐?”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논】 해석한다.
먼저는 간략히 말해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겠다.”라고 하는 것이고,
이번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인연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이른바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가 그것이다.
6바라밀의 뜻은 먼저의 설명과 같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한다는 일은 뒤에 설명하겠으며,
그 밖의 10력(力) 등에 대해서는 먼저의 설명에서와 같다.
【경】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능히 생각하기를,
‘나는 6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구족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고 열반을 얻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하지만, 마치 개똥벌레는,
‘나의 힘으로 능히 하나의 염부제를 두루 비추어서 크게 밝히겠다.’고 하는 이런 생각은 하지 못하듯이,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우리들은 6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구족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며 열반을 얻게 하리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사리불과 목련이 한 보살보다 못한 까닭은,
마치 개똥벌레가 비록 많아서 저마다 반딧불을 비춘다 하더라도 햇빛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개똥벌레도 역시 “나의 광명으로 능히 한 염부제를 비추겠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듯이,
모든 성문과 벽지불도 “나의 지혜로 능히 한량없고 그지없는 중생을 비추겠다.”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또 마치 반딧불은 밤에는 조금 비추다가도 해가 나오면 보이지 않듯이,
모든 성문과 벽지불도 역시 그와 같아서 아직 큰 보살이 없을 때에는 사자처럼 외치면서 설법하고 교화하다가도 보살이 나오게 되면 하던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경】 사리불아, 비유하건대 마치 해가 나왔을 때에는 광명이 염부제를 두루 비추어서 그 광명을 받지 않는 이가 없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6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18불공법을 [구족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을 얻게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마치 일천자(日天子)가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7보(寶)의 궁전과 함께 사천하(四天下)를 돌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항상 쉬지 않으면서 중생을 위하여 모든 냉기ㆍ습기를 제거하고 모든 어두운 데를 비추며 저마다 그의 처소를 얻게 하듯이,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 발심해서부터 항상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까지를 행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게으르거나 쉬는 일이 없으며, 불선(不善)의 냉기를 없애고 5욕(欲)의 진창을 마르게 하며, 어리석음과 무명을 깨뜨리고 착한 업을 닦도록 가르치고 인도하면서 저마다 그의 처소를 얻게 한다.
또 해의 광명이 두루 비추되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으면서 그 높고 낮은 데와 깊고 얕은 데를 따라 모두 비춘다.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세간에 출현하여 5신통에 머물러 허공에 처하면서 지혜의 불을 놓아 모든 죄복의 업과 모든 과보를 환히 비추어 준다.
보살이 지혜의 광명으로써 중생의 삿된 소견과 쓸모없는 이론을 없애는 것은 마치 아침 이슬이 해를 보면 이내 사라지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