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0년대에,
한국 땅에서 외국 책으로 공부한 사람
은 서대문우체국의 '미스아무개'를 기
억할 것이다. 지금이야 '외서'를 사는
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쉽다. 아무
인터넷 서점에나 들어가 원하는 책을
찍어 장바구니에 담고 신용카드로
계산을 끝내면 보통은 보름 안에, 늦
어도 한 달 안에 책이 집이나 학교로
배달된다.
이 절차가 너무 간편해서 나쁜 추억을
가진 사람을 오히려 눈물겹게 한다. 그
시절에는 외국에서 책을 들여오는 일
이 '꿈은 이루어진다' 같은 표어를 내
걸고 감행해야 하는 일대 사업이었다.
먼저 외국의 서적상에게 구입할 책의
목록과 편지를 보내 청구서를 받은 다
음 외환관리 당국에 외환사용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고는 은행에서 송금수표를 끊어
외국의 서적상에게 보낸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
지만, 아무튼 수표를 보내고 나면, 책
은 선편으로 빠르면 3개월 뒤에, 늦으
면 반년 뒤에 한국 땅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책이 바로 수중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절차, 거의 투
쟁에 가까운 절차가 남아있다.
구입한 책은 서대문 국제우체국에서
찾아와야 한다. 국제우체국은 책을
전달하는 일 외에 통관업무를 담당했
는데, 이 업무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미스 아무개'의 소관이었다. 우체국
에서 보낸 통지서와 주민등록증을
가로지른 시멘트 위에 내밀면, 그녀는
한번 힐끗 얼굴을 들어 거들떠보고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연다. "이거 서적이
지요? 다음 주일에 한번 더 와 보세요."
다음 주일이라고 책을 내준다는 확답
이 없으니 발길이 더욱 처참하다.
어느 날 나는 그렇게도 읽고 싶은 책
을 눈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안타까
까움을 조심스레 말했더니, 도리어 그
쪽에서, 서적통관이 쉬운지 아느냐, 사
회주의를 찬양하는 책이라도 있으면
어쩔 거냐고 공격한다. 이 책들은 그런
책하고는 거리가 멀며, 문학에 관한 이
론서일 뿐이라는 내 설명을 무지르고
다시 돌아오는 대답이 이렇다.
"책 내용을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책은
사세요?" 나는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창구의 가로대를 뛰어넘었다. 다
행히 그녀의 뒷자리에서 나이든 직원
이 달려나와 내 팔을 붙들고는 책 꾸러
미를 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미친 사람
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내가 공부를 하는데 국가가 왜 방해를
하느냐, 아마 이런 말이었으리라.
생각하면 우습다. 내 아내에게 이 이야
기를 했더니 "커피라도 한 잔 뽑아다
미스 아무개에게 권했어야지"라고 했
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에는 자판기가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때가 유신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
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
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
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
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
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
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
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
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
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그렇게 착취당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
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009)
위 선생님이 올리신 글은 시가 아닌
수필이었다. 요즈음에 가장 핫한 분
으로 떠오르는 고 황현산 작가님 작품
이다. 어린왕자를 가장 완벽하게 번역
했다고 입소문이 자자한 분이시기도
하다.
이 글을 읽고, 우리는 한참동안 마음이
숙연해져 말을 잇지 못 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황연산 작가님이
말씀하신 저 암흑의 시대를 겪지않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다만 무섭고 두려워서 늑골 사이에 꽁
꽁 묻어놓고 살았던 절망과 분노의
응어리들이, 가슴만 열면 활화산처럼
터져나올 것 같았다.
황현산(黃鉉産, 1945. 6. 17 ~ 2018. 8. 8)
1945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황현산은 고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연구해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부터 30여 년간 경남대, 강원대,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1980년대 말부터 문학평론에 입문한
그는 2000년대 중반에는 일명 '미래파'
로 불리며 난해하고 도발적인 시를
내세운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시인들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평론집 <말과 시간의 깊이>(2002),
<잘 표현된 불행>(2012)을 펴냈고,
정확하고 섬세한 비평으로 팔봉비평
문학상, 대산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
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불문학 번역가로 활동하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82),
말라르메의 <시집>(2005) 등을 번
역했다. 2007년에는 한국번역비평
학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2017년 말에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장으로 취임했으나 지병이 악화돼
3개월 만에 사임했다.
고인은 2013년 첫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펴내 6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말년에 이어진 투병
중에도 글을 놓지 않고 2017년 6월
두 번째 산문집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남겼고, 2018년 8월 8일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역시 명문이네요.
쓰신 글에 어려운 글자가 단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서도 평이한 문장이
어느새 핵심을 찌르고 있네요.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생각할 수록 잊혀지지 않을
명문장 맞네요!
-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들이 살았던 70~80 년대가 새삼
떠올라서요. 집권자 한 사람의 탐욕과
야망이 국민들에게 얼마만큼 위압적
으로 다가왔었는지는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제가 그 시대의 얘기를
하면 "엄마 나 때는 이 아니라, 라떼는
이라는 것 아시죠? 요즈음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바로 부모님들의
나 때는.... 이라고 하더라구요."
황현산 님의 글, 저는 오늘 처음 읽는데
정말 심금을 울립니다.
- 예전에 김민영 샘께서
'어린왕자는 황현산 님께서 번역하신게
가장 좋다.'라고 하셨던 말이 기억납니다.
해서 인터넷으로 검색 해봤더니 바로
이 책이 뜨더라구요. 동네책방에 주문해
서 그저께 받은 따끈따끈한 책이랍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깊이 감동했고,
이런저런 생각에 눈물이 났었어요.
샘들이 너무 좋다고 하시니 책을 고르고
산 보람이 있네요.
- 맞아요. 저도 민영 샘이 황현산 님에 대해
말씀하신 것 듣고 네이버에 바로 검색해
보니 황현산 선생님의 프로필과 함께
그 분의 저서가 따르륵 딸려나와서 무척
반가웠어요. 감사해요. 위선생님, 님 덕분
에 오랫만에 맘에 드는 수필 한 꼭지 읽었
습니다.
- 저역시 군부독재시대가 떠오르는군요.
저희 시대엔 모두 가슴에 가득찬 응어리
와 내면의 상처들이 있었지요.
그걸 풀지 못 하고 사니까 괴로웠고요.
저도 황현산 님 작품은 처음 읽는데
정말 좋으네요.
네 번째는 우리 모임의 청일점이신
남선생님 차례다.
우리 남선생님은 과연 어떤 시를 가지고
오셨을까? 궁금증이 더해진다.
영문학을 전공하셨으니 남선생님이야
말로 가장 멋진 시를 데리고 오셨을 것
같다.
첫댓글 덕희샘~ 황현산님이 '미스 아무개'를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따뜻함이 묻어나지요.
세상이 많이 변한 것 같아도 사람 사는 곳은 크게 바뀌지 않는 '보편성'이 있는 것 같아요.
융통성 없는 '미스 아무개'는 예나 지금이나,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고요.
가끔은 제가 그 아무개가 아닐까 생각할 때마다 두렵답니다.
덕분에 저의 여름도 회상해봅니다~
<여름이 끝나면 기억은 희미해질까.>
우리 집은 에어컨이 없다. 내가 특별히 환경론자이어서도 아니고, 에어컨 사용요금이 아까워서도 아니다.
집이 아파트 고층이라 한여름에도 에어컨의 필요성을 못 느꼈다.
무더운 며칠만 선풍기를 켜도 불편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는...
근래 2,3년은 에어컨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준비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조금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할까,
지금 집에서 인테리어를 새로 해서 분위기를 바꿀까 고민하면서 올 여름도 버티었다.
별로 힘들지 않았던 여름나기가 걱정과 예측이 필요한 상황이 된 건 요 몇 년의 기억이 강하게 자리했기 때문이다.
여름의 절정이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더위는 지나갔고 여름도 끝나간다.
가을과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어도 청명하고 드높은 하늘과 구름,
바람이 선선하게 느껴지면 여름이 막을 내리고 있다는 걸 안다.
끔찍한 더위는 사라지고, 또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p.12)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타인을 위한 공감보다 보자기만한 현재의 시간 속에 갇힌 나일지라도,
짧지만 강렬했던 더위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니 나에게 아직 여름의 무더위는 진행형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주 떠올리지 않을 만큼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여름이 끝나면 기억은 희미해지겠고, 무더위는 기억하기 싫은 채로 봉인하고 싶다.
지금의 집에 에어컨을 설치하면 내년에는 그 이전의 좋았던 여름의 기억을 소환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숙자쌤...!
9 월에 달아주신 댓글을 10 월에 읽으니 지난 여름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이것 또한 신선하구나!' 여겨집니다.
수없이 많은 독서토론을 이어가지만 지난 8 월처럼 흡족했던
토론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답니다.
그런 토론을 하고 싶어서 독서동아리에 가입했고,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고자 노력하겠지만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가 않아
유감스럽기도 합니다.
내년에는 부디 에어컨을 사시는 게 어떠실지?
올해는 시원한 여름이었기에 다행이었지만 내년엔 아마도 가마솥
더위가 찾아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 말입니다.
저는 여름에도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하기 때문에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는 처지라서 한 편으론 숙자 샘이 부럽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