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 노래비
마의태자" 전설의 슬픈 노래
<작사:정두수 작곡:임종수 노래:조영남>
행치령 고개넘어 백자동 고개넘어
산새도 오지않는 깊은산골 갑둔리
달빛보다 더푸른 천추의 그 푸른 한
나라를 찾겠노라 그 큰듯을 품은채
어찌눈을 감으셨나. 마의태자 우리님
하늘이 버리셨나. 바람도 스산하다.
무덤조차 잃어버린 첩첩산중 김부리
꽃보다 더붉은 망국의 그 푸른 한
세월아 말을 하라. 마의태자 우리님
남강 김창묵 세우다
---2003년 4월 5일 고향가는길 행치령 고개 정상에서---
신라 최후의 왕 김부(경순왕)의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935년(경순왕 9) 10월 고려 건국자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한 후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國書)가 전달되었다. 태자는 통곡하며 경주에서 올라와 인제군 상남과가리산 피래에 은거하다가 개골산(皆骨山: 金剛山)에 들어가 베옷[麻衣]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나 무덤등 확실한 자료는 없다.
강원도 인제에 김부리(金富里)라는 마을이 있다. 지명이 경순왕의 이름 김부(金傅)와 똑같다. 그러나 이 김부는 경순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마의태자를 의미한다. 이제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가 보자.강원도 인제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속초 쪽으로 거의 다 가 한계령을 넘기 직전에 있다. 인제군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는데, 김부리는 인제군의 남쪽 경계인 상남면에 소재한다. 서울에서 차로 가려면 46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인제 어구에 서 있는 ‘마의태자유적비’를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된다.
먼저 김부리에 대해 적어놓은 ‘인제군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본래 김부동 김보왕촌 김보왕동 등으로 불리다가 김보리가 되더니 김부리가 되었다.
김부리는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 머무르면서 신라를 재건하고자 김부대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모집해 양병을 꾀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이곳에는 김부대왕각이 있어 봄, 가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김부리로 들어가 보니 사람이 하나도 살지 않는 폐촌 아닌가.
또 김부리와 나란히 갑둔리(甲屯里)가 있었다고 하는데, 장방형 분지여서 마의태자가 은신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김부리와 갑둔리를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말했다는데, 육군에서 재빨리 이 일대를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해버리는 바람에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이 마을 어린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 건물이 텅빈 채 서 있고 그 옆에 대왕각이 남아 있다. 이름이 대왕각이지 서낭당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이 분지에 마을이 셋이나 있었고 마을마다 대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 남은 대왕각마저 영원히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1000년 동안 김부대왕각에서 김부대왕 제1자의 위패를 모셔온 신라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로 변해버린 것이다.
마의태자 유적지는 비단 경주김씨 후손이나 강원도 인제군의 역사 유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에도 호국정신을 기리고 가르치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이다. 바로 그런 곳이 국군의 불도저에 의해 역사의 무대 밖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마의태자 유적지로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왕릉 터가 없어지고 그 위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순간이었다.
마의태자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이규경은 이 마을을 답사하지 못한 탓에,김부가 마의태자란 사실을 모르고 경순왕으로만 이해했다.
실제로 김부리의 김부대왕각에 모셔놓은 위패에는 ‘김부대왕 제1자’라고 명기돼 있을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생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이 석탑에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라는 비명(碑銘)과 요 성종 태평16년 병자(서기 1034년, 고려 정종 2년)라는 간지(干支)가 나왔다. 그래서 어쩌면 이 탑이 마의태자가 죽고 난 후 그 후손이 세운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항려(抗麗) 운동의 기지
김부리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 유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왕릉터와 김부석탑 2기(오층석탑 1기와 삼층석탑 1기), 그리고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이 있다. 이 골짜기를 ‘맹 개골’이라 전하는데 개골산의 개골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그런데 흥미를 끄는 유물은 대왕각 제단에 배설돼 있었다는 철마상(鐵馬像)이다. 이것 역시 누군가 가져가버려 찾을 길이 없는데 그 모형이 남아 있다.
철마상을 두고 경주의 신라왕릉에서 발굴된 천마상(天馬像)을 모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이가 있지만, 필자가 아는 한 철마상은 대장간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符籍)이었다.
이런 부적이 많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곳에 대장간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장간에서는 농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도 김부리가 고려에 반대하는 항려운동(抗麗運動) 기지였다는 증거로 이 고을의 특이한 지명을 들 수 있다. 김부리 옆의 마을 이름이 갑옷 갑(甲)자에 진 칠둔(屯), 즉 갑둔리다. 갑옷을 입고 진을 친다는 군사적인 이름이 왜 필요했을까.
또 한 골짜기의 이름은 막을 항(抗)자에 군사 병(兵)으로 항병골이니, 이렇게 위험천만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거기다 단지(斷指)골이 있고, 임금이 넘었다는 행차 고개에다, 수거 넘어 등의 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