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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 취급도 못 받는 시조문학
이 요 섭
최근 몇 년 전부터 일본과 유럽에 빼앗긴 우리 문화유산을 되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강대국에 비해 힘이 없고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수 많은 문화유산을 약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세계적으로 한국이라는 위상이 높아져 강국들의 부당한 문화유산의 강탈을 비판하고 되돌려달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국내에 존재하고 있는 문화유산들이 꾸준히 밀매 등을 통해 반출되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문화유산이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인이 박물관을 설립해 관리하는 분들도 있다.
본인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의 사립박물관을 답사하고 취재하여 잡지에 연재도 하고 단행본으로 펴내기도 하면서 사립박물관의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사립박물관이 4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분들이 대부분이다. 설립자들 중에는 수백억 원의 사재를 털어 유물을 모으기도 하는 데 이들은 국가 문화재급의 문화유산이 해외로 반출되거나 훼손되는 것이 가슴 아파 박물관을 설립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설립자가 고령의 나이로 더 이상 박물관을 운영할 수 없을 때에는 후세가 대를 이어 박물관을 운영할 수 있도록 정부가 배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증여세나 상속세를 물리고 만다. 그래서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박물관의 문을 닫게 되고 유물을 다시 저자거리로 내다 파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한다. 일제시대 때 해외로 빼앗긴 문화유산은 되찾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정작 국내 문제는 소홀히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한 민족의 지혜와 정신이 깃들어 있는 유산은 유형과 무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유물들이 대부분이지만 무형으로는 판소리나 무속춤, 전통문학으로서의 시조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시조문학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민족의 전통문학으로서 역사가 800여 년에 이르고 있다. 그러한 민족문학의 시조가 해방 이전만 해도 임금을 비롯하여 문·무관, 양반, 기생에 이르기까지 국민문학으로 널리 보급되고 창작되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과 장관, 군 장성, 자치단체장, 공무원, 연예인 등이 시조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장관이나 장성이 시조를 짓고 시조집을 낸다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돼버린 사회다. 누가 쓸려고도 안한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남이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그리고 정몽주나 성삼문 같은 문․무관이 현세에 나타나 현직에 있는 사람들과 시조놀이를 하자면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까 생각해본다. 선조들이 이어온 민족문학으로서의 시조가 버려진 유물 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러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화정책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고 반성해보고자 한다. 본인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서 제16대 국회와 17대 국회 초반까지 문화관광위원회의 상임위 활동을 통해 시조문학 정책에 대해 개선방안을 건의하고 시정해 나갔다.
문예지 지원 및 우수작품 발표작 지원제도 개선
당시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우수문예지에 대한 발간비 지원제도가 있었다. 발간연도와 발행부수, 문예지의 질적 수준을 고려하여 지원하는 제도인데 분야가 시, 수필, 소설, 아동문학분야만 있지 시조분야가 없었다. 당시에 계간지를 비롯하여 시조전문지가10여개 정도나 발간되고 있는데도 소외시켰던 것이다.
이에 문예진흥원 담당자를 비롯하여 상임위 회의에서 거론하여 시조전문지 한 곳을 선정, 매호 발간시마다 400여만 원이 지원되도록 하였다. 그래서 계간지 [시조문학]이 심사를 거쳐 지원받게 된 걸로 알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에 문예진흥원은 우수작품 발표작에 대한 지원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또한 시, 소설, 수필, 아동문학으로 장르를 나누어 선정하였다. 시와 시조를 분리하여 심사하지 않는 것도 문제인데 시조작품이 한 편도 선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문예진흥원에 시와 시조를 같이 심사는 하고 있는가 물었다.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사위원이 누구냐고 물으니 여류 중진 000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 여류시인은 전혀 시조를 발표해본 적이 없는 시인이니 그동안 시조작품이 한 편도 선정되지 않은 것 아니냐며 심사위원을 시조시인으로 하나 더 늘려 반드시 시조작품이 선정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실현되고 오늘날 우수작품집 지원제도에 시조가 별도로 있게 된 것도 그 당시에 시조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문예진흥원의 정책을 국회차원에서 시정토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인 복지지원제도 개선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문화예술위원회는 중진 이상이면서 생활이 곤란한 문인들을 위해 기금으로 매달 복지지원을 해주는 제도가 있다. 당시에 50여 명의 문인들이 지원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문예진흥원에 상세한 자료를 요구하여 조사해본 결과 심지어 대학교수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에도 시조는 소외되었다. 당시에 본인이 알고 있기로 시조계의 원로이신 한 분은 생활이 어려워 멀리 김포로 이사하여 혼자서 생활하다시피 하고 계셨고 몇몇 분은 생활이 어려워 창작을 포기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지만, 문예진흥원이 정작 장르를 떠나 지원제도의 원칙에 따라 제대로 조사하여 지원제도를 활성화시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편법으로 운영하고 있어 지적하였다.
예술원 회원에도 시조는 소외
예술원 법 제4조에 예술원 회원이 되기 위한 예술경력의 규정이 있다.
1. 대학원에서 전문과정을 이수한 자는 석사학위과정에 있어서는
2년으로, 박사학위과정에 있어서는 5년
2. 대학 또는 초급대학에서 전공부문교원으로서 예술 또는 작품활동을 가진 경력
3.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설립하였거나, 예술원이 인정하는 예술기관에서 연구 또는 작품활동에 종사한 경력
4. 예술원이 인정하는 기관에서 연구발표 또는 작품활동을 주로하였거나 전문학식을 필요로 하는 직무에 종사한 경력
5. 외국의 대학에서 또는 예술원이 인정하는 외국의 연구기관에서 연구발표 또는 작품활동을 한 경력
6. 전 각호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 작품, 저작물 또는 발표를 한 자에 대해서는 회원자격 심사위원회에서 인정하는 실적 년수를 예술경력으로 본다.
현재 예술원의 문학분과 정원이 28명에 현원은 23명이다. 23명의 회원 가운데 시조시인으로는 시와 시조를 함께 창작해오신 이근배 시인만이 유일하다. 이근배 시인은 시와 시조로 등단하고 한국시조시인협회(1994년) 회장, 한국시인협회(2002년) 회장을 하셨기에 예술원 회원이 가능한 일이지 오직 시조만 고집하셨다면 어림없었을 것이다. 시조문단에 김상옥, 정완영 선생 등 뛰어난 작가들이 계셨는데도 예술원의 문턱은 너무 높았던 것이다. 앞으로는 더욱 시조계에 개방적이어야 할 것이다.
프랑크프르트 도서전에 전통문학은 없어
2005년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독일 프랑크프르트도서전에 주빈국으로 참가한 한국은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은 30여 억 원을 들여 ‘한국의 책 100’을 선정, 번역하여 국제도서전 주빈국관의 전시는 물론 해외출판사를 통해 출판유통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0권 모두가 해외출판사가 정해지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주빈국으로서 행사 준비가 엉망이었다고 사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준비위측은 당초에 잡았던 예산보다 정부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하고 민간 후원금도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크프르트 도서전 주빈국 총감독을 맡았던 000 교수는 ‘한국의 책 100’권의 선정과 한국문학을 소개할 작가 62명을 선정하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정된 작가들은 도서전에서 작가 사인회를 비롯하여 독일의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시낭송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시조는 ‘한국의 책 100’권에도 들지 못하고 62명의 참여 작가 속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1990년 일본이 주빈국으로 행사를 추진했을 때에는 일본의 전통문학인 하이쿠(俳句)를 알기 위해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 작가를 비롯하여 유럽에서 활동하는 하이쿠 동호회까지 출동시켜 하이쿠 낭송회, 하이쿠 작품집 홍보 등 일본 전통문학 알리기가 행사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계기가 되어 현재 유럽은 하이쿠 붐이 일고 있다. 하이쿠 시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하이쿠 시집이 출간되고, 프랑스 등 여러 대학에서 하이쿠를 가르치고 있고, 유렵 등의 세계적인 작가들은 하이쿠가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고까지 했다.
현재 약 50여 개 나라에 하이쿠 애호가가 200만 명이 넘고, 미국 교과서에 하이쿠가 수록되고, 뉴욕타임스가 하이쿠를 공모하고 있다면 놀랄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주빈국으로서 행사를 준비하는 주최측 사람들조차 우리 전통문학이 뭔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당시 국회 상임위 차원에서 국제도서전의 진행사항을 점검하기위해 준비위 총감독에게 전화를 하였다. 과거 일본이 주빈국으로서 그 나라의 전통문학 알리기에 총력을 기울인 사례를 설명하며 왜 시조가 빠졌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62명의 참여작가 중에 왜 젊은 신인 여성 소설가들이 많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독일 사람들이 한국의 패미니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원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이 한국의 창녀를 원하면 창녀를 보낼 생각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어쩔수 없었다며 총감독으로서의 고충만을 털어놓았다. 전통문학으로서의 시조에 대해 얼마나 문외한인지 답답해서 그런 수준이라면 총감독 할 사람 많으니 당장 그만 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더니 시조를 생각한답시고 공연 중에 시조를 넣겠다는 것이다. 판소리 시조창을 넣겠다는 것이다.
문화정책을 이끌어 가는 실무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어디서부터 뜯어 고쳐나가야 할지 정책 보좌관으로서 답답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인터넷 문학도시 [문장]의 문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로부터 복권기금을 지원받아 문학집배원사업(시 배달 문장 배달)을 운영하고 있다. 42만 명에게 주 2회 메일을 통해 발송하고 있다. 문학집배원으로 선정된 사람은 시 배달에 김기택, 문태준, 나희덕, 안도현 시인이다. 그리고 문장 배달 집배원은 이혜경, 은희경, 김연수, 성석제 소설가이다.
시조는 배달원도 없고 배달도 되지 않고 있다.
우리 시조의 역사가 고려 중엽으로 약 800여 년으로 보는 반면 하이쿠는 500여 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시조는 3 4 3 4 조의 3장 6구 12음보로 43자 내외인 반면 하이쿠 5 75 조의 17자로 우리 시조보다 그릇이 아주 단순하여 불교의 선시나 법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각 지역의 반상회와 같은 모임으로 하이꾸 동호회가 활성화되어 있다. 애호가가 무려 1,000만 명에 이르고 있고 하이쿠 잡지와 동인지가 1,000여 종이나 되며, 일본 NHK와 매일신문사, 조일신문사가 하이꾸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일본 방송출판협회와 조일신문사 등이 하이쿠 단행본을 펴내고 있다. 최근에는 30여 개의 인터넷 하이쿠 집단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수상이나 국가 주요 인사들이 외국 귀빈에게 하이쿠를 지어 선물하는 게 일반화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과거에 검(劍)을 주거나 도자기나 전통자수 등 유형의 물건이 고작이다. 일본의 관료들이 무형의 전통문학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막사발보다 못한 시조
2006년에 문화관광부가 ‘한국의 100대 민족문화 상징’을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내용에는 황토, 갯벌, 풍수, 한우, 빗살무늬토기, 고추장, 옹기, 자장면, 막사발, 탈춤, 판소리 등 한국을 상징하는 유·무형 다양한 상징물들이 포함되었다.
심지어 중국 베이징과 산둥지방의 가정에서 해먹던 자장면이 19세기 인천에 상륙한 중국 노동자들을 통해 들어와 짜장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음식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데 우리화된 짜장면이 아닌 중국에서 쓰는 자장몐(炸醬麵)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왜 ‘짬뽕’은 ‘잠봉’으로 안 쓰는 지 국립국어연구원에 물어보고 싶다.
이토록 외래 것도 우리 것이라고 둘러 붙이는 정책 속에서 정작 우리 것인 시조는 빠져있다. 막사발은 동양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다. 그 규모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일본은 이도다완이라 해서 막사발을 아주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막걸리처럼 막 만들었다고 해서 막사발이라 한다. 그런 평범한 막사발도 100대 상징물에 들어가는 데 깨진 막사발 취급도 못 받는 게 현실의 시조가 아닌가?
시조발전을 위한 대안
우리 시조시인들이 첫째 시조의 전통성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 일본인들이 하이쿠를 지켜나가듯이 말이다. 17자로도 전통성을 유지해 나가는 데 43자가 답답하다고 파격하고 3장 6구 12음보의 음보율도 맞추지 못하는 작가들을 시조시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지 고민이다. 우리 주변에 현대시를 쓰는 시인들이 그런 작품을 보고 이게 시지 무슨 시조냐고 한다. 800여 년을 이어온 시조의 율격과 정통성을 지켜나가야 한다.
두 번째 전국에서 반상회가 열리듯이 시조낭송회가 열리도록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정부와 시조시인들이 힘을 모아 추진해 나가야 한다.
세 번째, 조선시대처럼 임금을 비롯하여 문·무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조를 지을 수 있는 풍토를 만들고 발표기회를 열어줘야 한다.
네 번째, 국가가 주도하는 전국 시조백일장을 열어야 한다. 대통령상, 국회의장상, 국무총리상 등을 수여하는 전국대회를 매년 개최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조창작의 붐이 일어날 수 있다.
다섯 번째, 앞에서 여러 가지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관광부를 비롯하여 문화예술 유관기관들의 시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한 소통채널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