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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집 리뷰
사유에의 의지로 시인의 운명을 사랑하라
권성훈(경기대 교수)
언어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이 긍정이 추구하는 것은, 타자와 세계의 관심으로부터 촉발되며 그럼으로써 접근한다. 시인이 사유하는 것 또한 이러한 긍정적 의미에서의 생성이며 존재의 성격을 각인시킨다. 여기서 언어로 환원되는 시는 불특정 다수의 영향력을 가진 고도화된 힘으로 작용하는 것. 삶에 대한 시인의 물음을 시적으로 관통하며 존재 본질을 파고들며 새로운 미학을 축출해 낸다. 이로써 시는 사유의 생성에 존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에 따른 언어 이외 존재 방식은 없으며, 이러한 생성이 끝없이 유지되는 것은 언어의 힘이 가진 세계에 대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신작시로 살펴볼 장인수 시인이 언어로 생성하는 존재 방식은 “함께 살아야 할 이유는 수백만 가지/밥 차리고/곁을 챙기고/존경해야 할 이유도 수백만 송이”(「물의 미로」)라는 일상성을 향한 긍정성으로, 이강하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존재 방식으로 “달이 뜬 저녁이면 여기는 더 눈부시다/소년과 소녀가 손을 맞잡듯/칸나도 뜨겁다”(「칸나의 해안」)라고 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같은 시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지 않는 시적 방식을 취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살펴볼 시편에서 나타나는 운명애는 자신의 삶과 그 시간을 건너가는 일상 안에서 체득되고 기록된다는 데 있다. 이때 시인의 운명애는 세계의 인식된 모든 필연성을 포괄하는 본래의 드높은 적극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존재와 세계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긍정적 원리로서의 운명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들의 운명애는 운명의 필연성을 의식하는 자유로운 적극성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거기서 시는 시인의 운명 속에서 생성되는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힘으로 파악된다.
니체는 이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명명하면서 세계 이전과 이후, 심지어는 그 위나 아래에 힘에의 의지 외에는 아무런 다른 존재 방식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그 외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시 또한 언어가 가진 힘에의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언어가 없으면 시인의 존재 방식 또한 소멸되는 것으로 시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처럼 니체가 말하는 ‘운명애’는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데 있다. 그것은 “거듭난 인간, 힘을 향한 의지를 구현하면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긍정할 수 있는 인간이 출현해야 한다.“ 이처럼 살펴볼 긍정의 방식으로 출현하는 장인수, 이강하 시인의 시는 현실 세계의 삶을 운명적인 것으로 묘파하고 있다. 물론 거기서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 구원 가능하다는 여지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계를 향한 단절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통한 새로운 가치를 시적 원리로서 실현하는데 작동된다. 이 시적 원리는 시인의 일상성과 자신 삶에 대한 긍정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이를테면 장인수는 “일상을 살다 보면 매일 시가 써진다. 시가 나에게 살짝 다녀가는 순간이 매일 발생한다. 지하철 안에서, 모란시장에서, 탄천을 산책하다가 문득 불시에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시골에 가서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니다 보면 멋진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영감과 직감이 떠오르며 시가 나에게 톡톡 말을 건네는 것이다.”(「시작노트」)라고, 이강하는 “어머니께서 사랑한 '오리'라는 이름의 강아지, 내가 좋아했던 고양이, 누에를 키우던 아늑한 방, 외양간, 그리고 넓은 대청마루가 딸린 아래채에서 내려다보는 아랫마을 주변은 절경이다. 요즘도 자주 청명한 시냇물 소리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다가 입 밖으로 쏟아진다...시가 말을 건다.”(「시작노트」) 이처럼 이들은 시공간 너머 시를 찾아가거나 발견하지 않는다. 다만 실존하는 곳에서 운명처럼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1) 정동호 외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책세상, 2013, 125쪽.
시가 말을 걸어오는 과정에서 시가 발현된다.
아내가 쪽파를 한 아름 안고 온다
와! 저 파릇한 꽃다발!
아내가 배추 포기 한 아름 안고 온다
와! 저 파릇한 꽃다발!
나는 아내가 안고 오는 모든 것을 꽃다발이라고 생각했다
꽃 한 다발 가격이 오만 원쯤인가?
하룻밤 모텔 숙박비와 비슷하군
고흐가 즐겨 그린 해바라기 꽃다발 그림이
한 폭에 천억 원이라는데
아내가 팟단, 배추 포기를 안고 올 때
천억 원 꽃다발이 걸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인수 「꽃다발」 전문
이 시편에서 체감할 수 있듯이 장인수 시의 긍정의 힘은 일상 가운데 아내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내 품에 안긴 흔한 ‘쪽파 한 아름’과 ‘배추 포기 한 아름’을 ‘꽃다발’이라고 치환하는 그의 시에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의 심오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것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을 희극적으로 회화하면서 아이러한 미학을 발생시킨다. 이로써 ‘꽃다발’은 존재에 대한 성찰로서의 자각이면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데 있다. 이에 “와! 저 파릇한 꽃다발!”이라는 감탄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꽃다발’이 가진 기표가 전혀 다른 기의로 자리잡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아내가 팟단, 배추 포기를 안고 올 때” 하나의 야채로 생각되었던 것이 ‘꽃다발’로 각인되는 순간 다시 태어나는 존재가 가진 힘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천억 원 꽃다발이 걸어오는 것”인바,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내 사랑 속에 내재된 운명애를 동시에 나타낸다.
이처럼 그의 시는 미감으로 환산했을 때 「우유식빵」처럼 “꽃등심보다 더 좋다고 한다/치즈도 없고, 햄도 없고, 야채도 없고, 크림도 없는/밍숭맹숭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아내라는 “효소를 만나/부풀어오르는/ 말랑말랑/불룩불룩/따끈따끈/찢어서 뜯어먹는 맛”을 가진 우리에게 사유의 “이빨이 튼튼하지 않아도 오물거릴 수 있는 맛”을 주고 있다. 때로는 “슬픔도 아픔도 고소하게 부풀어오르는 맛”을 지닌 시적 풍미로 “슬픔의 반죽 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반죽 덩어리”로 변하기도 하면서. ‘긍정적인 방식’에의 ‘언어의 덩어리’로 구워지고 있다.
오늘처럼 아름다운 너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물찻오름 입구를 돌아가는데
산딸나무 나긋나긋하다
흰 꽃 너머
너의 꿈이 나의 꿈이라면 좋겠다는 물소리가 애틋하다
고요와 소란을 실감한 신발들
할아버지삼나무에 붙어사는 콩짜개덩굴 달팽이 이끼 버섯을 발견하고는
서로 간 공생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지
불현듯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던 영혼의 나무가 나타나 말을 거는 것 같다
인간의 탐욕과 집착으로 더는 생태계 훼손이 없기를
푸르른 빛의 하울링
이대로 끝이 아니기를
휘파람새 지저귀는 피톤치드 층계
하늘과 구름 사이가 선겁다
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가 세상에 또 있을까
처녀림을 빠져나온 찰나
화산송이길 양쪽 삼나무
V자 그리며 나를 계속 앞으로 당긴다
너와 내가 점점 깊어진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세계」 전문
이 시편의 제목처럼 이강하가 보는 세상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세계’로서 세계의 모순을 긍정적으로 관찰한다. 그는 “오늘처럼 아름다운 너를 또 만날 수 있을까”라고 현실의 삶 그 자체에 모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면 현재의 가치는 지나고 나면 과거가 되므로 오로지 인간과 세계의 실상인 생성을 왜곡하지 않는 현실의 시간에 집중한다. 요컨대 “물찻오름 입구를 돌아가는데/산딸나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거기서 “너의 꿈이 나의 꿈이라면 좋겠다는 물소리”를 들려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서로 간 공생이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지” 현실을 긍정한다. 이는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탐욕과 집착으로”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에 진리와 가치의 근원으로부터 소외되는 것과 대치되는 인식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아!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가 세상에 또 있을까”라는 시인의 사유는 인간애로부터 출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와 인간을 부정하는 귀결로부터의 반향이다. 그의 긍정적 존재 방식은 오래된 인간 존재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의 삶을 긍정하는 가운데 ‘V자 그리며’ 신뢰와 확신으로 설정되고 있다.
한편 “한여름 태양은 위대하다”고 시작하는「루꼴라 그리고」에서 시인은 ‘위대한 정오’를 보여준다. 위대한 정오는 태양이 허공의 중심에서 있으면서 그림자도 소멸 상태에서 발생한다. 이른바 모든 것이 정지된 것과 같은 ‘극과 극을 경험’하면서 ‘아주 잠깐 정오’를 보여준다. 이것은 ‘루꼴라’라는 식물의 “탄생과 죽음을 미화”하면서 “빗방울 사이 여러 밤”과 “바람 사이 여러 낮”이라는 존재의 세계에 생성의 세계가 극한적으로 접근하면서 쓰인
다.
부부지간에 사이좋게 지내는 2가지 비법
첫째, 바보 되기
둘째, 친절하기
밥을 함께 잘 먹는 밥보처럼 살면 좋다
화를 낼 때도 멍청하게 웃어주는 바보가 좋다
친절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 주는 것이다
상냥한 미소와 말투로 어려운 일을 먼저 하는 모습이다
친절하기보다는 바보 되기가 조금 어렵다
봄날, 함께 청계산에 갔을 때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서
“여보, 진달래처럼 꽃피 흘리고 싶어.”
코뼈가 으스러지도록 때려달라고 부탁하던 아내
헉! 아내가 미쳤나?
나는 꽃잎을 뭉개어 아내의 얼굴에 처발랐다
꽃물 들고 꽃피 흘리고 꽃지랄 떨면서
우리는 천치 바보가 되었다
-「바보가 되기」 전문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일체의 사물들은 유전하고 변화한다. 이것은 항구성 없는 이 세계의 관계로부터 시작되고 그 중심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존재를 통해 규정된다. 이 시에서 ‘바보다 되기’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차라리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으로 변신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 그것은 “부부지간에 사이좋게 지내는 2가지 비법”을 전수하는 것으로 화목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바보를 통해 발견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인의 발견술은 “밥을 함께 잘 먹는 밥보처럼 살면 좋다/화를 낼 때도 멍청하게 웃어주는 바보가 좋다”와 같이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 맺음을 위한 일차적인 목표를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그야말로 ‘바보 되기’는 바보의 몸이 되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정신이 깃드는 것으로 언행 자체가 바보의 ‘꽃물 들고 꽃피 흘리고 꽃지랄 떨면서 천치 바보’로서 상대방에 다가서는 것이다. 이로써 이 같은 바보 같은 존재 방식은 “공감하는 말로 내가 맞장구를 치며”(「단추는 왜 골탕을 먹이지?」) 생겨나는 철저한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목이 긴 너는 도망칠 수 없다
내가 네 안에 꽂힌 이상
낮달이 떠 있다 유리 밖에 양쪽으로 길게 해와 손을 맞잡고
변화하는 구름을 관찰하는 장미 친구들이 보인다
흰 코끼리 부부가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중이고
풀밭 위로 토끼들이 뛰어다니고 얼룩말과 사자가 달려 나가고
새와 나비가 언덕을 오르내리고
어미고래가 새끼를 데리고 파도를 가르고
오로지 우리에게는
공기와 맑은 물이 삼시 세끼 인데
유리 밖은 별천지
마음을 비우든
창문 너머를 이해하든
나는 너의 침묵을 칭찬한다
너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앞으로 나도 얼마나 더 가벼워질 수 있을까.
-「유리화병과 장미」 전문
화병에 꽂힌 장미는 그 공간이 세계의 전부다. 이 경우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없는 정신의 속박과 의지의 나약함과 같은 정동의 억압이 발생한다. 장미의 정동의 억압은 “목이 긴 너는 도망칠 수 없다/내가 네 안에 꽂힌 이상”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낄수 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서 긍정은 안주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삶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관심으로서 고통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다. 이른바 장미가 작은 화병을 통해 “낮달이 떠 있다 유리 밖에 양쪽으로 길게 해와 손을 맞잡고/변화하는 구름을 관찰하는 장미 친구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비록 “우리에게는/공기와 맑은 물이 삼시 세끼 인데/유리 밖은 별천지”일지라도 여기서 “마음을 비우든/창문 너머를 이해하든” 진정한 행복은 자기 자신과 삶을 긍정하는 정동으로부터 도출되는 최고의 가치를 말한다. 이 같은 정신은 힘에의 의지로서 사유하는 운동이며 나아가 시적으로 응고화하는 작업으로서 내적으로 “그래야 산꼭대기가 될 수 있지”(「그래야 산꼭대기가 될 수 있지」)라고 유한한 생산자로서의 존재를 산출하는 일이다.
위와 같이 긍정적인 사유의 방법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시편에서 장인수의 시작은 “‘의인법이 없는 시는 버릴 것, 은유가 없는 시는 버릴 것, 진지한 시는 버릴 것, 중얼중얼 긴 시는 버릴 것, 동음이의어가 없는 시는 버릴 것, 재미없는 시는 버릴 것.’”(「시작노트」)으로 귀결되고, 이강하의 시작은 “결국 어딘가로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바다였다. 가난과 지독한 외로움도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시인이다, 라고 위로해 준 것도 바다였다.”(「시작노트」)로 완성된다. 이처럼 이들의 시편에서 세계가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며 고정할 수 없는 것을 생성하는 주체로서 존재를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장인수와 이강하 시인은 언어가 가진 사유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로써 세계를 고유한 언어로 보증하고 존재의 개별적 성격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삶 자체를 긍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권성훈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 저서 『시 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편저 『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등이 있다. 고려대 연구교수 역임,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