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쿠르스크에서 나타난 소련의 전략과 작전술은 주목할 만 한다. 전쟁의 제1기 때는 소련은 전략적인 방어 계획을 꺼리고 전략적인 공세 계획을 세웠다. 이후 소련은 전략적 재배치, 재조직과 막대한 양의 병력을 쿠르스크 지역에 집중시켜 거대한 전략적 예비를 형성했다. 더 나아가 소련군은 전략적 방어 계획에 전략적 공세 계획을 추가시켰다. 확실히 소련군은 막대한 전략적 우위를 가져쏙 작전술적, 전술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엿다. 하지만 이건 새로운 경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쿠르스크에서는 한 곳의 전략적 집중을 통한 막대한 우위를 갖추었다. 소련군 장비의 질적 향상과 숫적 우위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고 전략적 공세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것은 소련의 생산력 증가를 말해 준다. 무기 체계에서 기술 첨단의 우위는 독일에게 있었고 이는 독일의 전투 경험과 합쳐져 큰 효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쿠르스크 전투는 신무기에 대한 과신이 얼마나 위험한 지 잘 보여 주었다.
작전술적으로, 소련군은 쿠르스크에서 원숙함을 보여 주었다. 소련군의 작전술적 부대 편제는 옛날보다 더 좋아졌다. 전차, 포병, 기타 지원 부대 편제는 작전의 완성에 더 적합해졌다. 이는 작전술적 편제를 깊고 유연하며 더 빠른 작전 지속력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소련 지휘관들의 경험은 작전술적 수준에서의 작전 입안과 전투 지휘 능력을 설명해 준다.부분적으로 소련군은 기술적인 작전 집단(기동 집단 같은)을 구성해 작전술적 효율에 탄력을 주었다.
전술적으로, 소련군은 과거의 패배를 기억하여 전술적, 작전술적 재앙을 막는 큰 발전을 이뤘다. 이 발전은 쿠르스크에서 나타났다. 전술적 능숙함이 모든 군인들과 하급 장교들에게 주어진 것은 명백했다. 자주 사병들의 인적 손실과 훈련도에서 독일에 비해 뒤쳐지긴 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생존의 기수을 배웠고 더욱 전술적으로 숙련된 중대, 대대, 연대 지휘관들이 쿠르스크에서 나타났다.부분적으로 그들의 능력은 체계적인 전훈 수집, 전훈 분석, 그리고 이를 전군에 배포한 총참모부의 지휘 아래 결과로 나타났다. 소련군 이론가들은 이전의 전술적, 작전술적 실패를 연구하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기 위한 명령과 교범을 내렸으며 하급 제대에 실패의 원인 설명을 내렸다. 1943년 3~7일의 휴지기는 소련 지휘관들이 배운 것을 실전에 적용할 시간을 주었다.
쿠르스크에서 전술적 방어는 종심 방어였다. 병력 집중은 다층의 방어선과, 다층의 방어 지점을 방어선들 사이에 설치하는 걸 가능하게 했다. 새로운 소총병 군단의 편제는 대대, 연대, 사단의 광대한 제대 구성을 가능하게 했다. 과거에는 독일군이 2개 연대의 방어선과 가끔 있는 1개 사단 수준의 제2 제대를 마음 대로 뚫고 갈 수 있었던 반면 쿠르스크에서는 3개 사단의 2개 제대 편성 방어선을 뚫어야 작전술적 후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추가로 소련군은 좁은 방어 정면에 대대, 전차, 야포, 박격포의 Km당 배치 밀도를 올렸다.
더 많은 공병 운용은 방어선에 탄력, 적 기동 방해, 견고함, 생존력을 가져다 주었다. 기동 공병대의 운용을 통한 광대한 장애물의 설치는 더 좋은 탄력성을 전투 중에 가져다 주었다.
쿠르스크에서, 제병협동군의 전술적 방어는 모든 종류의 구경의 무기 증가와 모든 지휘에서의 통합 운영을 통해 방어에서의 화력을 증가시켰다. 화력 조율 과정의 향상은 전술적 화력 통제와 돌파하는 적을 정지시키고 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 소련군은 특화된 병기를 다루는 부대를 집단적으로 운용했다. (기동 차단 부대, 포병 집단, 대전차 예비대 등) 제일 중요한 것은 소련군이 기동성 있는 제병협동 집단을 만들어 대전차 방어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대전차 화점과 대전차 구역은 보병, 포병, 가끔 전차의 통합 체곙쏙 접근하는 어떤 기갑 세력에도 화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 이 엄청난 양의 대전차 "요새"들은 종심 깊이 퍼져 방어의 위력과 치명성을 부여했다. 소총병 사단의 방어가 돌파당하더라도 대전차 방어선은 이후의 진격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하고 적에게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예를 들어, 독일 제48 기갑 군단은 하루 만에 제67, 52 근위 소총병 사단의 방어선을 뚫어 버렸다. 하지만 제48 기갑 군단은 이후에 대전차 망어망에서 높은 기갑, 장갑 차량의 손실을 기록했다. 똑같이 제78 근위 소총병 사단의 방어는 이틀 간의 결정적인 날 독일 제3 기갑 군단을 벨고로드 동쪽에 묶어 놓았다.
쿠르스크에서 기갑 부대의 동일한 전술적 방어는 이전보다 더 빈도가 커졌으며 이로 인하여 적 보병의 진격에 큰 위협이 되었다. 모든 소총병 사단의 방어는 전차나 자주포 대대, 연대, 또는 여단의 지원을 받아삳. 이런 통합된 기갑 부대가 대전차 화점이나 구역에 들어가고 대대나 연대 방어 지역에 들어갔다. 다른 기갑 부대들은 사단, 군단급의 기갑 예비로 지정되어 제2 제대의 연대나 사단이 반격을 개시할 때 따라붙게 했다. 특별히 위험한 지역에는 더 큰 작전술적 수준의 부대(전차 군단, 심지어 전차군도)가 전술적 방어 구역 안에 들어갔다.
쿠르스크에서 전술적 방어는 더욱 능동적인 방어였다. 소련군은 능동성(Активность)의 증대를 모든 명령과 교범에서 강조했다. 능동성은 모든 제대에서의 끈기와 탄력성-의도하지 않은 위협, 우회, 포위를 당했을 때-와 공자를 질리게 해 주는 완강함을 증가시켰다. 쿠르스크의 경우가 그랬다. 독일군은 방자의 완강함을 즉시 추산해야 했고 방어망을 돌파하는 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 제6 기갑 사단의 생존자들은 소련 병사 하나하나나 소규모 부대는 돌파당하거나 우회당해도 전투를 지속했다고 증언했다. 소련군은 개때처럼 공격해 왔으며 독일군을 끊임없이 측면과 배후에서 물어뜯었다. 이런 수백의 병사나 소부대의 종합적인 효과는 독일군의 사기와 전투 효율을 떨어트렸다.
쿠르스크에서 전술적 방어는 독일군의 공세에 더욱 효율적이었다. 이전의 전쟁에서보다 종심 깊이 배치되고, 대전차 무기들, 전차와 포병들이 늘어서 있고 작전술적, 전략적 예비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들은 독일군에게 끔찍한 피해를 안겨 주엇다. 몇몇 지역에서는 방어선이 뚫리고(벨고로드 지역처럼) 어떤 곳에서는 구부러졌지만(코로차 축선처럼) 많은 지역에서는 포니리처럼 버텨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 압도당할 징조가 보이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작전술적, 전략적 예비대가 상황을 호전시켰다.
1주일 간의 쿠르스크 전투가 끝났을 때 무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전격전은 무너졌고, 동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독일의 희망은 사라졌으며 독일은 궁지에 몰렸다. 1943년 7월에 독일군은 살아남을 수 있는 성공적인 방어를 터득해야 했다. 쿠르스크는 지난 5년 동안 무시당하던 클라우제비츠의 방어에 대한 격언에 다시 신뢰를 되찾게 해주었다.
방어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을 신중히 읽어야 할 필요성이 늘어났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의 방어는 근본적으로 공세보다 강하다. 방어는 적이 약점을 드러낼 때 까지 사용해야 하고, 누군가 더 성공적인 방어법을 사용할 때, 더 좋은 힘의 균형이 대체적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이리하여 전쟁의 자연스러운 방향은 방어의 시작과 공세의 종료가 된다."
1943년 7월에, 잘 계획된 기술적인 방어, 신중하게 조정된 병력의 편제는 강력한 공세 개념을 효과적으로 받아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쿠르스크 전투는 성공적인 공새 작전 수행의 서곡이 될 수 있었으며 이는 1943년 하계, 추계 공세로 나타났다.
쿠르스크 전투는 무시무시한 공세를 막아 내려는 자들의 학습 목표가 도었다. 쿠르스크 전투는 전 세계의 어떤 공세 이론이라도 알맞은 방어와 방어를 위한 발전이 있으면 방어를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끝
한줄 요약: 쿠르스크 떡장을 건드리면 아주 X되는 거에요. 아주 X되는 거야.
- 방어전을 위한 공병의 사전 작업에 대해서는 A. D. Tsirlin, et al, Inzhenernye voiska v boyakh za sovetskuzu rodinu (Engineer forces in battles for the Soviet fatherland) (Moskva: Voenizdat, 1970) 153-76. 을 보라. 치를린에 의하면 제13군 정면에 약 6,000개의 지뢰가 매설되었고 첫째 날 98대의 전차를 지뢰가 파괴했다. 7월 6일, 8개의 기동 차단 부대가 9,000개의 지뢰를 추가로 매설하여 둘째 날의 전투 동안 전차와 자주포를 합쳐 88대를 파괴했다. 다음 날, 8,000개의 새 지뢰가 매설되며 93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전투 공병들은 총 3,500개의 대전차 지뢰와 4,000개의 대인 지뢰를 매설해 420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파괴했다. 제4 기갑군과 캠프 분견군은 305대의 전차와 30대의 돌격포를 지뢰에 잃었다.
- 제67 근위 소총병 사단의 활동을 보고 싶으면 G. Kovtunov "Na Ognennoi duge" (On an arc of fire) VIZh, July 1981, 57-63.을 보라.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포병 지원과 대전차 구역의 성과에 대해 보고 싶으면 K. P. Kazakov, Vsegda s pekhotoi vsegda s tankami (Always with the infantry, Always with the tanks) (Moskva: Voenizdat, 1969), 129-62.을 보라.
- 이건 원래 교범에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최고 사령부와 전선군 사령부가 지휘관들이 아직 기동전을 수행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퇴역 대령 헤르만 뤼트겐과의 인터뷰. 뤼트겐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제6 기갑 사단 소속 전차 중대의 장교였다.
- <전쟁론>, 358
첫댓글 어휴, 저 더러운 절대방어. 독일이 1943년에 시간끌지 않고 반격을 시도했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피할 수 있었겠죠?
옛날에 Scored Earth라는 냉전기의 독소전쟁 서적이 있었는데 저자인 폴 카렐(본명 파울 칼 슈미트)은 만슈타인이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이후 만슈타인의 주장대로 즉시 공세를 개시했다면 소련을 진짜로 패배시킬 수 있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긴 했습니다. 물론 당시는 소련측 사료에 대한 접근이 크게 제한되었고 만슈타인, 구데리안의 회고록이 교차검증 없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인데다가 폴 카렐은 사실 알게네마이저-SS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Scored Earth는 여러 모로 현재는 사료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주방어 vs 물량 닥돌.. 그나저나 소련군 병력의 능동성 부분이 와닿네요. 부대 패배 후에도 완강히 저항한다라. 긴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항복하거나 무단후퇴하면 가족이 시베리아에서 코로 감자국을 먹는데 군의관 동지라도 착검돌격 해야될겁니다 ㄲㄲㄲㄲ
Активность는 정치적인 이유로 나온게 아니에요 ㅠㅠ
러시아어 독학한게 하나도 쓸모없네요=.=;;; Активность 대충 능동,능동성 정도 인거 같은데
이등병 제대인 나도 착검 돌격인가... 사람 죽는 건 많이 봤지만..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면.. 으휴.. 그래도 찔리는 것보단 낫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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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레도 더 많은 연구와 러시아의 자료 공개로 결론이 조금 달라질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근데 Battle of Krusk 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렸나요?
잘읽었습니다 작은 러시아의 쿠르스크를 빼앗으려다가 털린 힛총통 안습 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레도 하리코프를 드디어 완전히 점령했으니 된거에요 . (근데 교환비가 ㅠㅠ)
전쟁역사상
최대의 다층 방어선.
종심만 대체 얼마인지.
"전력을 하도 집중시켜서 공자나 방자나 싸우다 져서 말아먹으면 재앙"이라는 평이 괜히 나오는게 아니죠 ㄲㄲ 실제로 독일도 꼴아박고 말아먹고 꿈도 희망도 없어졌으니까요. 으앙 쥬금.
독일 입장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저기다 저렇게 꼴아박아야 되는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 하긴.. 동부전선 자체가 굳이 갈 이유는 없었구나 ㅇ - ㅇ ;;
쿠르스크 돌출부를 모델의 9군과 호트의 4기갑군이 잘라먹어서 군사적타격(병력 손실)을 안겨주고 그만큼 짧아진 방어선으로 여유를 찾는다는 작전술적인 이유였죠.
1943년이면 전쟁을 승전으로 끝낼 수 있는 전망은 순전히 희망사항이었을 뿐이고
전략적인 면에서 사면초가였으니까요.
만슈타인이 3차하리코프 전투 끝나고 아마 총통한테 건의했을 겁니다.
바바롯사작전은 일단 나치독일의 목표 실현 그 자체니까요.
--영국이 인도를 먹은 것처럼 우리도 러시아 먹어 초강대국이 되자.
또한 영국이 아직 우리한테 항복 안 했으니 걔네와 서방세계랑 싸우려면 자원이 더 필요하니 거기 뺏어서 잘 써먹자.--
그리고 위의 님 뎃글에 대한 사족 하나.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전투에 참가한 부대의 병력,장비를 따지면 소련보다 물량이 딸렸습니다.
쿠르스크 공세는 단순히 방어선의 축소 말고도 저 돌출부로 소련군의 전력을 집중시키고, 그걸 포위 섬멸한다는 목적이였습니다. 달성한다면 분명 동부전선의 안정화는 가능했죠.
그런데 소련군이 너무 많이 몰렸다? 아 더러운 떡장요. 이탈리아도 위험한데 그냥 지지요.
답글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