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수덕사~덕숭산 산행~서산 해미읍성~해미순교성지(여숫골)....[둘쨋날]
◐ 4/22(토)
- 수덕사 탐방 및 덕숭산 산행(14:00-16:36, 5.1km, 2.14km/h)
☞ 주차장(14:00)-수덕사 황화정루(14:12/0.6km)-정혜사(14:38/1.6km)-덕숭산(15:07/2.4km)-만공탑(15:35/3.3km)-관세음보살상(15:40)-소림초당-사면석불상(15:52/3.8km)-수덕사 황화정루(16:15/4.2km)-주차장(16:36/5.1km)
- 덕산온천 온천욕
- 시크릿가든 바베큐 만찬 및 화합의 장(18:00-23:00)
◐ 4/23(일)
- 해미읍성 탐방(08:40-10:00)
- 해미순교성지 탐방(10:10-10:50)
- 소박한 밥상 점심 만찬(연잎밥 정식, @20,000 / 11:25-12:25)
●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탐방 story ●
해미읍성(海美邑城) 의 정문 진남문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소재한 구 해미군의 읍성으로서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현재에도 원형이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서산시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랜드마크이며 서산 9경의 1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미읍성은 고려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1417년(태종 17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414년(태종 14년)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421년(세종 3년)에 완성되었다.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 위치한 해미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 3대 성지이기도 하며, 천주교 대전교구 관할로서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 순교 성지이다. 성지가 위치한 일대는 '여숫골'이라고도 불린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는데, 1872년까지 6년간 이어진 박해기간 동안에 붙잡힌 천주교 신자 약 1,0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잔인하게 처형 또는 생매장 되었다.
해미읍성(海美邑城) 의 정문 진남문
흉악 범죄인 현상 수배 방(榜)
수배방에는 현상범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 현상범을 신고하면 포상금(3냥)을 준다는 해미현감의 공고방이다
동헌
해미읍성 내아
관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
청허정 오르는 108 계단
여기 돌계단을 하나 둘 오르면 소나무 그늘이 가득 펼쳐진 곳에 고풍스런 정자 청허루가 나타난다
청허정
청허정
청허정 정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청허는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당부한다
소나무군락지
해미읍성 성곽
해미순교성지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132명의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4년 8월 17일 해미성지를 방문하여 순례하고 아시아 주교단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자들을 묶어 물속 둠벙에 빠뜨려 생매장을 시켰던 진둠벙과 해미천 옆에 생매장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 유해발굴지에 조성된 노천성당, 서문 밖 순교지에 있던 자리개돌 원석이 보존되어 있다.
해미순교성지 인근에는 내포 지방에서 해미로 넘어가는 순교자 압송로였던 한티 고개가 있다. 고갯길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정상에 1처가 시작되어 해미 방면으로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소박한 밥상 식당 입구
식당 분위기가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골 전원 풍경이다
연잎밥한정식, 1인 2만냥 이다
연못도...
장독대도...
운치있는 시골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