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2]
지상강좌
신간회 당진지회의 활동(2·완)
김남석
지난해 12월 18일 오후 2시~5시까지
‘내포 동학농민혁명의 계승과
일제강점기 당진의 사회운동’이란 주제의
학술토론회가 줌으로 열렸다.
이번 토론회는
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당진역사문화연구소가 주관하였다.
학술토론회는 기조강연
▶동학농민혁명이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에 미친 영향
(안승문(동학실천시민행동 공동상임대표)에 이어
▶신간회 당진지회의 활동과 당진의 사회운동
(김남석_호서고교사),
▶일제강점기 당진의 농민운동(김학로_
당진동학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일제강점기 내포지방 형평사운동 고찰
(김영곤_당진역사문화연구소),
▶농촌계몽운동의 양상과 브나로드운동
(유미경_당진역사문화연구소) 순으로 발표되었다.
김남석 교사의 주제발표 중 당진신간회 활동을
두 차례 나누어 소개한다./편집실
당진지회의 주요 활동
당진지회는
중앙 신간회의 지침에 의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신간회와 연계하여 행동 노선을 정하고
활동 상황을 조정하였다.
동시에 당진지회는
회원을 확보하고 조직을 정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 창립 당시 153명이었던 회원은
1년이 지난 1929년 1월에는
178명으로 증대시킬 수 있었다.
당진지회는 전회원이 참여하는 정기대회와 간사회를
수시로 열었고, 그곳에서 제반 사항을 논의하였다.
또한 당진지회에서는 중요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대표회원을 선정해 중앙에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대표회원은
당진지회의 의견을 본부에 전달하였고
본부의 권고와 지시를 받아 당진지회에 적용하였다.
다음은 당진지회가 활동을 전개하던
1927년(설립기)부터 1931년(해소기)까지의
회의 일지이다.
• 신간회 당진지회의 회의 일지(1928~1931)
표 생략
당진지회의 활동 내용 중 본부와 연계된 것으로는
첫째, 당진지회가
동아일보사에 경고문을 발송한 부분이다.
이는 당진지회의 제1기 집행부의 활동에 해당한다.
당진지회는 창립 다음 날인 1927년 12월 7일,
동아일보사에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그 전문은 “貴社에서 主催한 朝鮮現代人物 投票募集은
民衆의 進路를 眩惑케 하는 英雄中心主義的 擧事로
認하고 警告함”이었다.
동아일보의 현대 인물 선정 투표는
여러 단체의 반발을 샀다.
우선 선천지회에서 반박문을 발송하였다.
이들은 동아일보에서 조선 현대 인물을 투표하되
국외에 있는 유명인사와 재감자,
형사피고인 제외한 것에 반발하면서
동아일보의 목적이 의심스럽다고 비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당진지회에서는
현대 인물 선정 자체를 반대한 것이다.
특히 영웅주의 발상으로
민중을 현혹게 한다고 비난하였는데,
민중을 중시하는 당진지회의
사회주의적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둘째, 당진지회는 재만 동포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에 대한
중국 관리의 억압 문제가
1927년부터 《조선일보》를 통해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신간회 본부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진상 파악과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것은 표면상
중국 관헌과 재만 동포 간의 문제였지만,
당시 만주 지역의 군벌 세력은
일제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당진지회는
일제에 대한 우회적인 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셋째, 당진지회는
‘조선경제조사 전문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본부에 건의하였다.
이것도
당진지회의 제1기 집행부에서 전개한 활동이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당진 주민의 삶은 매우 열악하였다.
이에 당진지회에서는 군내 사정을 조사하였고,
군내 각 시장에 소비조합 창설을 주장하며
기존 조합의 연합을 촉구하였다.
한편, 당진지회에서는
본부와 달리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이들은 규정의 정비를 통한 체제 강화,
회원의 증대를 통한 지회의 발전,
회비 모금을 통한 예산의 확충을 도모하였다.
설립 초기부터
지회의 내실을 다지는 작업을 충실히 진행한 것이다.
그 외에 당진지회는 걸식 아동의 교육에 노력하였다.
당진의 청년 운동가들은
많은 야학과 강습소를 설치하여
빈곤 아동의 교육에 노력한 바 있었다.
또한 1920년대 후반 당진군내 유지 청년들은
공립보통학교 설립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설립된 공립보통학교의 학년 연장과
학급증설을 통하여 아동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것도
당진지회의 주요 임무였다.
신간회 당진지회의 활동은
신간회의 자매기관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일보에
상세히 보도되고 있다.
그만큼 당진지회의 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진지회의 활동 내용은
1920년대 중반의 당진지역 혁신청년단체인
신합청년회의 활동에서 퇴보하여,
1920년대 초기의 청년운동인 지역 유지의
‘施惠적 유지정치’로 환원하고 있음도 드러난다.
당시의 당진의 최대 현안은
우강 합덕지역의 농민 문제였다.
신합청년회의 활동은
농민의 권익 증진에 주력하였고
이는 당진소작조합의 활동과 동일했다.
그리고 이들은 당진청년동맹과
신간회 당진지회를 결성하였고,
통합을 통해 투쟁 역량을 증대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항일의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권익은 나아지지 못했다.
한편, 당진지회는
1930년 1월 15일 발생한 석문공립보통학교
(현, 석문초등학교) 격문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운동은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한 직후에 일어났고,
핵심 인물은 印鵷洙였다.
그는 당진지회 회원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석문면 통정리에 위치한 석문공립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당시 집안 조카뻘되며
석문공보교 훈도로 근무하던 印雲植을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리하여
인운식이 당직이던 1월 14일 밤, 자신이 연필로 쓴
“만세를 불러라, 만세 불러”라는 내용의
유인물 약 40매를 들고 학교로 갔다.
그리고 인완수가
교실 복도에서 밖을 감시하는 틈을 타서
인운식은 유인물을
5학년생 36명의 책상 속에 배포하였다.
다음 날 경찰이 학교에 들이닥쳤고,
유인물은 모두 수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운식이 체포되었고,
당진지회 간부이며 조선일보 당진지국장인
高麟煥(高一), 지회 소속의 林鍾萬, 印鵷洙, 李忠範,
鄭亨澤, 鄭有錫, 印章植 등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고인환, 인원수, 임종만, 인운식 등 4명이
검찰에 송치되었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그 결과, 4명은 보안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 회부되었고,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검사의 항고에 의하여
경성복심법원에 올라갔지만,
최종 무죄로 확정되었다.
결국 당진지회 회원들이 연루된
석문공보교 격문 운동은
큰 혐의가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났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당진지회에 대한 억압은
강화되었고, 지회의 활동이 크게 위축당했으며
결국 해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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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 독립운동유공자석암신태순지묘
(獨立運動有功者石菴申泰舜之墓).
당진읍 대덕리에 조성되었으나
도시개발로 2001년 11월 12일
대호지면 출포리 산4-5에 이장하였다.
후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公의 姓은 申氏요 諱는 泰舜이요 號는 石菴이며
貫은 平山이시니 始祖 壯節公崇謙의 三十世孫이신
諱錫允公의 三子로
1884年 甲申 5月 3日
忠淸南道 唐津郡 唐津邑 大德里에서 出生하시었다.
일찍이 鄕里에서 漢學을 勉修하시더니
東學에 入道하여 1904年에는
唐津에 敎區를 創設하시었고
1910年 庚戌國恥를 當하고는
憤然히 光復運動에 獻身코자 上京하여
天道敎 中央總本部 庶務委員으로 孫秉熙先生을 도와
1919年 己未獨立宣言과 萬歲示威를 陰佑하시었다.
1923年부터는 民立大學期成會 組織에도 加擔하여
全國을 巡廻하며 基金調達에 注力하시었으며
1927年 우리 民族의 單一抗日體인
新幹會가 組織되자 京畿支會의 總務職을 맡아
일을 하시더니 그 後에 唐津으로 내려와
唐津支會 設立에도 寄與하시었다.
公의 이와같은 爲國活動에는
鄕里에 계신 6兄弟분의 財産을
上海臨時政府의 政治資金으로 供與하시었다.
公이 祖國光復에 바친 心血이
始終 이와같이 積極的으로 나가자 日警의 監視는
날이 갈수록 深化하여 酷毒한 拷問끝에
심한 衝擊으로 급기야 1929年 6월 6일
自宅에서 永眠하시니 享年 45歲이시었다.
地方有志 및 各社會團體들이 모여
社會葬을 擧行 이곳 邑內里에 모셨으나
이번에 遺子弘均이 새로 大德里後麓에 移葬하였다.
政府에서는 公의 遺勳을 기리어 1980年 8月에
建國功勞 大統領表彰을 追敍하였으니
이에 郡民의 뜻을 모아 墓碑를 謹竪한다.
西紀 1982年 5月 日
唐津郡守 曺國煥 謹竪 完山後人 李炳台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