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비전을 그려 보자.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크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등에 영향을 받겠지만,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나라의 실현 가능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큰 원인이다. 대통령 당선 후 새로운 정부가 내세우는 비전은 정의로운 나라, 더불어 잘사는 나라, 모두가 행복한 사회 등이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를 공허한 구호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말은 듣기 좋지만, 구체성 진정성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딱 상품광고의 카피 수준이다.
국가의 비전을 찾는 손쉬운 방법의 하나는 우리보다 앞서간 어떤 나라를 모델로 삼는 것이다. 그간 따라야 할 모델로 제시된 나라는 다양했다. 북유럽국가들과 독일, 스위스, 아일랜드 등의 유럽국가가 많이 이야기 되었고, 싱가포르를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시위 중에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는 것을 볼 때 속으로 미국을 모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모델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아닌 듯하다. 모델이 될 국가의 조건은 무엇일까? 잘 사는 나라, 경제성장이 빠른 국가,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와 같이 외형적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선진국이라 인정되는 나라는 살펴보면, 오른쪽 끝에는 미국이 있고 왼쪽 끝에는 북유럽 국가들이 있다. 미국은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감수한다. 미국보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남미국가들처럼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북유럽 국가들은 경쟁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국가의 규제와 간섭을 통해 복지를 확대하고 불평등을 줄이려 한다. 북유럽 국가들 보다 규제가 많아지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경쟁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어디를 모델로 하여야 할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미국을 찾을 것이고, 좌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북유럽 국가들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양쪽 끝에 있는 국가는 모델로 적합하지 못하다. 조금 잘못하여 옆길로 가면 선진국의 대열에 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 상위 0.1% 1%의 소득 불평등은 미국보다 심하지 않지만, 상위 10%의 소득 불평등은 미국보다 심하다. 한국은 불평등이 지금보다 더 악화되면 남미국가들처럼 될 수도 있다. 한국의 일부 규제는 북유럽 국가보다 복잡하고 일관성이 없어 경쟁력을 갉아 먹고 있다. 잘못하면 경쟁에서 지고 선진국의 마지막 문턱을 못 넘을 수 있다. 한쪽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고 답을 찾으면 미국과 북유럽의 중간에 있는 국가들이 좋은 모델일 것이다. 여기에서 인구가 아주 작은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상은 몇 나라 안 된다.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정도일 것이다.
이중 독일은 그간 우리의 바람직한 국가 모델로 많이 논의되었다. 특히 Mittelstand이라 불리는 중소기업의 강한 국제경쟁력, 늙은 국가이면서도 제조업중심 산업구조, 분권화와 지역 균형발전, 넉넉한 복지제도와 철저한 환경보호 등에 대해 배우려는 연구가 많았다. 여기에다 우리와 같이 분단국가이었다가 통일을 이룩한 나라이고, 다당제 국가이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하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하든 따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성과는 별로였다. 이는 모델 문제가 아니고 배우는 학생이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독일의 겉만 보고 비슷하게 따라 하려고 한 것이 잘못인 것 같다. 독일과 같은 강소기업을 육성한다고 중소기업에 대한 세제 및 자금 지원을 확대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다고 지방과 농촌에 자금지원을 늘려 왔다. 이런 것들은 과거 늘 하던 정책과 비슷했고 효과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을 모델로 삼았다면 독일이 잘되고 있는 외형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찾아 한국의 미래 비전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아주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독일 경제가 잘 되고 있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논의기 필요한 부분이지만 필자의 의견으로는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의 신뢰수준과 공정한 보상체계, 두 가지가 핵심인 것 같다.
먼저 국민의 정직성과 사회의 신뢰수준은 독일도 예전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한국이나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는 아직 높은 듯하다. 한국의 경우 일반 국민의 정직성은 좋아지고 있으나, 청문회 등을 볼 때 정치인 고위 관료 등과 같은 지도층의 도덕성은 더 나빠지는 모습이다. 지도층의 부도덕은 사회 전체의 신뢰를 훼손하고, 신뢰훼손은 국민경제의 총요소생산성을 저하시켜 경제성장의 제약 요인이 된다. 한국의 신뢰수준 저하는 지도층의 부도덕과 함께 정책의 불투명성, 검찰 법원 등 사법당국에 대한 불신, 정의롭지 못한 조세제도 등에도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은 직업 간 임금격차가 크고, 보상체계가 불공정하다. 미국은 직업 간 임금격차가 한국보다 크지만 그 격차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한국에 비해서는 불공정 소지가 적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임금 명예 안정성 등이 높아 사람들이 크게 선호하는 직업은 의사와 변호사, 교수, 관료와 선출직공무원, 일반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공공부문과 관련이 있다. 이들 직업의 보수와 대우는 제도와 정부의 정책에 의해 결정되며, 한국경제의 지급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좋다. 그러니 사람들은 본인 뿐 아니라 자식까지 어떻게 해서든 이런 직업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에 독일은 엔지니어가 의사보다 더 높은 보수를 받고, 숙련된 기능공이 교수나 공무원보다 보수수준이 높다. 그러니 독일은 중소기업이 강하고 제조업 경쟁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의 대학입시와 사교육 등 교육문제도 왜곡된 보상체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한국은 높은 직업의 보상이 시장에서의 경쟁보다 시험과 대학 입학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불공정한 보상체계는 사회의 신뢰수준도 떨어뜨린다.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한국경제의 비전을 사회의 신뢰수준 제고, 보상체계 개혁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달성할 실질적인 정책과 제도를 같이 연구하여야 한다. 돈 푸는 것보다는 어렵겠지만 고민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모델로 삼은 독일의 우파인 기독교민주당과 좌파인 사회민주당이 하는 정책을 잘 살펴보면, 어떤 것이 우파 쪽에서 해야 하는 정책이고 어떤 것이 좌파 쪽에서 해야 하는 정책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윤석렬대통령을 포함 한국에서 많이 인용하는 하르쯔개혁은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정 하에서 2002년부터 2005년 까지 이루어진 노동개혁이었다. 이로 인해 사회민주당은 정권을 잃었지만 독일경제는 유렵의 병자 처지에서 벗어나 2007년 세계 금융위기를 이겨내고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하르쯔개혁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해야 개혁이 성공하는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즉 좌파 쪽인 사회민주당이 노동개혁을 했듯이 자기 진영의 문제를 스스로 개혁할 때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도 이런 정책을 추진해야 좌파니 수구니 하며 상대를 무조건 욕 만하는 정쟁에서 벗어나, 정책을 갖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 즉 개혁적인 진보나 개혁적인 보수라는 바람직한 정치세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독일의 하르쯔개혁 사례를 본다면 윤석렬정부는 노동개혁보다는 전문직이나 공공부문 즉 기득권층의 개혁을 우선해야 한다. 윤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의사정원 확대도 중요한 전문직 개혁의 하나이고, 일자리 창출 등 국민경제에 많은 도움이 된다. 어려움이 많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끝가지 추진하여 꼭 성공했으면 한다. 이런 개혁들이 모여져야 국민들의 실질적인 삶이 개선되고, 한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