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해바라기가 있었다 / 서영은
그 집엔 세 식구가 살았다. 나이 많은 노인과 삼십 년 연하의 젊은 아내, 그리고 부엌일을 하는 할머니. 운전기사가 있었으나 출퇴근을 했다.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라고는 하지만, 노인은 원기가 왕성하여 식욕도 주량도 젊은이 못지 않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나서도 두세 시간 일을 하고 난 뒤라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에 비해 젊은 아내는 표정이 시무룩하고, 이렇다 할 병치레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기운이 없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지났건 만 아내에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 집엔 노인의 전처가 십오 년 남짓 살면서 남긴 흔적들이 그릇에, 침구에, 가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다섯 마리의 개들까지도 전처가 거두고 기른 정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아내가 전처의 입김, 흔적들을 비켜 눈길 줄 곳은 창밖뿐이었다. 그것도 거실에서 내다본 뜰이 아니라, 주방의 식탁 앞에서 바라본 골목길과 길옆의 공터였다.
아내에게 낯설음을 주는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처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가족 친지들은 물론이고 부엌일 하는 할머니, 기사, 내방객들, 정원사, 수도 전기 검침원에 이르기까지) 전처에 대한 기억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어, 아내는 그들로 하여금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해서 지금은 아내의 남편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집에서 노인은 어디까지나 죽은 전처의 남편이었다. 함께 있는 것은 아내였으나, 남편의 기억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전처였다. 그래서 부부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커피 타드릴까요?"
"안 선생(남편은 전처를 그렇게 불렀다)은 내가 타주는 커피가 맛있다고 했지."
그것은 단순히 커피 맛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집에서 커피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 커피를 타서 쟁반에 받쳐 들고 서재나 거실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하루에 딱 두 번만, 아침과 점심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데, 그것도 손수 아내의 것까지 타서, 아내의 몫은 아내에게 주고, 자기 잔은 들고 욕실로 갔다. 노인은 욕실 안에서 혼자, 어쩌면 대변을 보면서 천천히 커피를 마신 뒤에, 이를 닦고, 잔까지 씻어서 가지고 나왔다.
"안 선생은 커피가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했어. 그 사람은 커피 한 잔을 가지고 하루 종일 마셔. 전화 받고 나서 한 모금, 부엌에 들어가 참견하고 나와서 한 모금, 뜰에 나가 개들 데리고 놀다 들어와서 한 모금…."
"그러면 커피가 다 식어서 버릴 텐데."
"식은 커피가 더 맛있대, 그 사람은."
아내는 처음에 그 말뜻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노인의 생활 리듬을 지켜보고 난 뒤에야, 커피는 그들 노부부에게 그저 맛만 즐기는 기호 식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면, 노인은 보온병을 가지고 안방으로 갔다. 방의 구석 쪽에는 항시 찻상이 놓여 있었다. 그 찻상 위에는 깨끗이 닦인 찻잔 두 세트가 쟁반 위에 엎어져 있었고,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 설탕 단지와 차 스푼이 놓여 있었다.
노인이 즐기는 커피 맛은 매우 진하고 달았다. 커피 네 스푼에 설탕 세 스푼의 배합이었다. 그런데 노인이 커피를 타는 것을 보면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지고 놀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물을 조금 부어 껄죽한 상태에서 잘 저은 다음, 다시 물을 반 컵 정도 되게 양을 만들었다. 그 사이 방바닥이나 찻상에는 물이 튀거나 약간씩 엎질러져 있게 마련이었다. 노인은 항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휴지(이 휴지는 서예를 하다가 생긴 파지를 색종이 만 한 크기로 잘라서 손수 만든 것이었다)로 일일이 방바닥에 흘린 물을 닦고 나서, 커피 잔을 들고 욕실로 갔다.
아내에게 무엇보다 낯선 것은 노인의 이와 같은 완만하고 내밀한 생활 리듬이었다. 죽은 전처를 대신해서 노인과 생활 리듬을 함께 하는 사람은 부엌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그 집에서만 십 년이 넘게 일 해왔기 때문에 노인의 식성, 생활 습관, 살림의 속내, 내방하는 손님의 면면까지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인은 자질구레한 살림에 대한 주문을 할머니에게 직접 했다. 저녁 술자리에 초대된 손님들의 면면에 따라 준비해야 하는 안주와 반찬류에 대해서도 할머니와 의논했다. 아내는 거실의 귀퉁이에 두 쪽짜리 가리개를 세워 만든, 조그마한 자기 송간에서 노인과 할머니가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양쪽 다 가는귀를 먹어서 서로에게 잘 들리게 하려고 목청을 한껏 높여 말했다.
아내는 자기 방이 따로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 않았으나, 그 집의 어떤 것도 본래 놓임새를 자기를 위해 변경하거나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다못해 거실의 문갑 위에 놓인, 전처의 장례식 때 썼던 조화바구니까지도 그대로 두고 지냈다. 젊은 아내에겐 자연스럽게, 자신의 불편을 참고 내색하지 않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방법이라 여겨졌다.
아내는, 나란히 누운 잠자리에서 남편으로부터, 손님이 초대된 날 부엌일을 거드는 중에 할머니로부터, 술상에 둘러앉은 손님들로부터 전처 얘기를 들을 때면 가만히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들이 무심코 하는 얘기건, 심중에 야릇한 의도를 품고 하는 얘기건, 아내는 그들의 태도에 별다른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세월은 어찌됐든 그러구러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흐르는 세월은 언젠가는 반드시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므로.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내는 먼저 식탁 앞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거실 바닥을 쿵쿵 울리는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식탁 위에는 미리서부터 사기대접 두 개와 소금 한 종지 그리고 끓는 물이 담겨 있는 대형 보온병이 노인을 위해 따로 차려져 있었다. 수년 동안 노인은 아침 식사로 잣죽만 들었다. 그것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어떤 것이 생활화하면 그것이 금처럼 변함없이 지켜졌다.
노인과 아내는 같은 식탁 위에 따로따로 자기 아침을 차려서 먹었다. 아내는 잣죽의 느끼한 맛이 벅차서 간혹 먹기는 해도 주로 밥과 국을 먹었다. 노인이 식탁 의자에 와서 앉자마자 할머니가 잣죽을 끓인, 손잡이 달린 냄비를 냄비째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잣죽 속에는 계란 한 개가 띄워져 있었다. 노인은 음식을 가만히 앉아 받아드는 것을 아주 재미없어 했다. 요리는 아내가, 또는 할머니가 하더라도 그것을 들기 까지는 꼭 손수 참여하는 과정을 만들어내곤 했다.
아내는 자기 밥 먹는 것도 잊고, 노인이 잣죽에 띄워진 계란을 풀고, 대접에다 잣죽을 반쯤 덜어서 소금으로 간을 한 다음, 반찬 없이 죽만 들고, 다시 나머지 반을 그릇에다 옮기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냄비에는 죽이 눌어붙어 있게 마련이었다. 그것을 숟가락으로 달달 긁어대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리고 나서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냄비에 부어 잣의 향기까지 물로 헹구어, 그 잣 향기 나는 물을 먼저 비운 대접에다 부어, 그 그릇에 남은 잣죽 찌꺼기까지 마저 부시어, 나머지 죽을 옮긴 대접에 붓고 나서, 잘 섞은 다음, 한 숟갈 한 숟갈 음미해 가며 먹는 노인을 바라보는 동안, 아내는 무심결에 '재미있다' 하는 듯이 눈을 껌벅거렸다. 자기 식사를 다 마친 뒤에도 아내는 남편의 곁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아내의 눈길이 주방 창문을 지나 공터로 날아갔다. 거기에 심은 이 없이 저절로 피어난 해바라기 세 그루가 있었는데, 드디어 노란 꽃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우리도 뜰에 해바라기를 심어볼까?"
어느새 노인도 수저질을 멈추고 아내의 눈길이 날아가 있는 곳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씨앗을 받아둬야겠어요.“
아내가 노인의 생활 리듬에 섞여든 것인지, 노인이 아내의 생활 리듬에 섞여든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부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십여 일 뒤였다. 아내는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촘촘히 영글고 있는 해바라기 씨앗을 따가지고 와서, 잘 간수하며 그 상자 속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어 넣었다. 해바라기 꽃은 설상화와 관상화로 나누어진다. 혀 모양으로 생긴 갸름한 꽃잎은 설상화, 그 안쪽의 대롱처럼 생긴 작은 알갱이 같은 꽃은 관상화라고 한다. 해바라기의 설상화는 아름다운 꽃잎이 있을 뿐, 암꽃술도 수꽃술도 없는 겉치레만의 꽃이지만, 관상화는 암꽃술과 수꽃술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열매를 맺는다.
첫댓글 소설적, 자전적 냄새가 묻어나는 수필이다. 나는 이런 작품을 예술적 수필이라 칭한다.
최근 불고 있는 창작수필의 한 전형을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