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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학논단 제 89 집 / KCI등재 2017. 09
종교개혁 정신과 선교적 교회론 정립에 대한 연구* 1)
2) 계 재 광 **
I. 들어가는 말
선교초기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변동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민족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봉건사회 타파와 민족의 독립에 선봉에 섰으며 의료, 교육의 체계를 세우는 일을 비롯하여 한글보급과 출판, 나아가 사회 구습과 미신타파, 그리고 여성평등과 인권 의식을 마련하는 사회개혁에 한국교회가 함께 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이게 나라냐?’라는 국민들의 분노가 만든 조기 대선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는 후보가 당선되었다. 필자는 이런 일련의 일과 한국사회의 교회에 대한 신뢰도 1) 를 보면서 ‘이게 교회냐?’라는 탄식과 분노의 대상으로서 한국교회가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을 하게 된다. 1517년. 정확히 500년 전 ‘이것도 교회인가?’라는 동일한 탄식과 분노가 유럽에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교황청의 사치와 부패, 교인들의 미신 횡행, 성직자들의 타락한 현실 앞에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신학교수였던 마틴 루터( Martin Luther) 가 교회를 향하여 95개조 반박문을 성당 문 앞에 붙임으로써 시작된 종교개혁의 촛불은 한 세대만에 들불이 되어 전유럽과 세계로 번지면서 오늘의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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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7학년도 한남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또한 이 논문은 2017년 5월 27일 제64차 한국실천신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일부 수정, 보안한 것임.
** 한남대학교 부교수, 기독교 리더십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종교개혁이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본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교회가 어떠한 비판적 입장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세를 지니도록 만드는 관성을 가졌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 맥그라스의 이러한 주장에 한국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종교개혁의 뿌리로부터 도전을 받아 그 정신을 살펴봄으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바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맥그래스의 말처럼 종교개혁은 그 근본을 놓고 본다면, ‘기독교의 정체성과 순전성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다. 3)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과 현재 한국교회에서 ‘선교적교회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선교적 교회 또한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의 문제에 관한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의 핵심되는 논의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 교회의 교회됨과 신앙인의 신앙인됨을 회복하기 원하는 한국교회에 필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 소고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때 한국교회가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계승함으로 교회의 교회됨과 신앙인의 신앙인됨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선교적 교회론의 정립을 위해서 논의해야 할 신학적 부분에 대한 방향성 제시를 하고자 한다. 즉 한국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하고자 할 때 핵심 논점에 해당되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론, 하나님 나라(통치),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아직까지 통합되지 않은 견해들을 논의함으로 한국적 선교적 교회론의 정립을 위한 바람직한 방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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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교회가 신뢰를 상실하게 된 이유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가장 많은 응답은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서”(24.8%)였고, 다음은 “교회가 내부적 비리/부정부패가 많아서”(21.4%)였다. 신뢰상실의 이유로 한국교회(목회자, 교인)의 부도덕성 혹은 윤리성 부재와 관련된 응답 비율은 모두 합하면 65.6%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13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조사결과 기초보고서 (서울: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14), 13.
2) 알리스터 맥그라스/박규태 옮김,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서울: 좋은씨앗, 2005), 25-32.
3) 앞의 책, 32.
II. 한국교회의 현실과 종교개혁 정신
1. 한국교회의 현실
1) 교회와 신앙인의 본질에 대한 의미 상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고 또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의 존재 이유는 부르신 분의 목적을 제대로 실천할 때 비로서 충족될 것이 다. 사도행전에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숫자의 증가가 주목되었지만(행 2:41, 5:41) 후에는 주의 말씀이 온 땅에 퍼져 나가는 영향력이 강조됨(행 13:49, 19:20)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닐 콜(Nile Cole)의 주장처럼 교회의 영향력은 ‘교회좌석의 숫자로 따지기 보다는 그 사회의 길거리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처럼 교인들의 숫자와 교회의 제도적인 관점보다는 영향력의 관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4)
21세기 한국교회는 안팎의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론에 대한 비적합성의 문제, 교회 외부적으로는 교회의 사명 망각과 한국 사회로부터 게토(getto)화 되는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한국사회는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졌을 때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는 현실참여적인 교회를 사랑했고, 희생하고 섬기는 목회자들을 존중 했으며,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 사람의 인격을 믿어줌으로 신뢰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회자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교인들의 생활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고, 교회가 이웃을 고려하기 보다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동시에 내부적으로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은 있으나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으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아다니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5)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가치와 바른 교회론을 상실한 한국 기독교는 이 사회에서 더욱더 주변화 되어가고 있고,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신앙인은 신앙인됨을 잃어가고 교회는 교회됨의 본질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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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Nile Cole, Church 3.0: Upgrades for the Future of the Church (San Francisco, CA: Jossey-Bass,2010), 61.
5) 한국교회는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은 있으나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찾아 다녔듯이 새로운 교회를 찾아다니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나안 성도의 발생 원인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 지쳐서’(41.2%), ‘목회자의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에 실망해서’(21.4%), ‘교회가 개인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지 못해서’(20.2%),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해서’(16.2%)라고 대답하고 있다. 많은 평신도들은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하지만, 교회는 대부분 교회의 내부적인 유지 및 재정에 관한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사)한국기독교언론포럼, 2015 10대 이슈 및 사회의식조사 (서 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16), 64. 또한 가나안 성도들이 ‘앞으로 어떤 교회에 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상위 세 가지 요소는 ‘올바른 목회지가 있는 교회’(16.7%), ‘공동체성이 강조되는 교회’(15.6%), ‘부정부패 없는 건강한 교회’(11.1%)라고 답하고 있다. 양희송, 가나안 성도 교회밖 신앙 (서울: 포이에마, 2014), 38.
2) 관성에서 벗어난 패러다임
그렇다면 신앙인됨과 교회됨의 회복에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 케빈 포드(Kevin G. Ford)는 교회가 사도행전 2:42-47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하고,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게 역기능(dysfunctions)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6) 그것은 소비문화(consumerism), 정체성 결여 (incongruence), 독재(autocracy), 은둔 생활(cloister), 관성 또는 무력 증(inertia)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7) 첫째, 소비문화는 교인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용어이다. 소비사회에서 교회는 소비자의 욕구에 맞추어서 끊임없이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만들고, 교인들은 그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소비하는 소비기계로 전락하는 모습을 띄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정체성 결여는 교회의 핵심 DNA에 대한 부분이다. 건강한 교회는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고, 교회의 사역과 문화도 그것에 맞춰서 함께 움직인다. 셋째, 독재는 교회 리더십에 대한 것으로, 건강한 교회는 독재적이거나 관료적 시스템이 아닌 교인들이 사역과 기능을 나누어 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넷째, 은둔생활은 교회와 지역 공동체와의 관계성에 대한 부분으로 건강한 교회는 그들의 미션에 집중하고 교회가 속한 지역과 연관을 맺는 외부 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이다.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교인들은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은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관성 또는 무력증은 미래에 대한 교인들의 생각을 나타내 주는 말로, 건강한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미래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록 아플지라도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8) 더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이전의 성공의 공식이 남겨준 유산이다. 모든 조직에는 기존의 습관을 따라 익숙한 방식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관성(inertia)”이 있다. 9) 변화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리더들로 말미암아 기존의 습관에 따라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경향성이 관성이다. 교회에도 오랜 경험을 통해 검증되어 관행처럼 굳어져 온 일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성은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한국 교회 안에 여전히 습관대로 일하는 경향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리더들로 인해 한국교회의 변화의 속도를 늦추며 실패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신앙인됨과 교회됨의 회복을 위해서 이제 틀 밖으로 나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해서는 이전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모방이 아니고 훨씬 근본적이고 때로는 급진적일 필요가 있다. 또한 예전의 성공했던 공식들을 내려놓고 우리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확신해 왔던 것들이 정말로 성경적인 것이었는지 점검해 볼 필요 가 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원한다면 교회는 과거 성공 요인의 관성과 교회 본질과 사명을 이루기 위한 일관성 사이에서 하나님 뜻에 맞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때에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사명에 초점을 맞추기 이전에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대한 확실한 그림을 가져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를 따라 자신의 존재방식을 결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 르네상스 문화의 부흥 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르네상스의 문화에 맞추기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성을 찾는 운동이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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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Kevin Graham Ford, Transforming Church: Bring Out the Good to Get to Great (Tyndale: SaltRiver, 2007), 9-13.
7) 앞의 책, 9.
8) 앞의 책.
9) 2010년 맥킨지(Mckinsey)조사에서 변화에 실패하는 원인 중 1위가 변화에 대한 구성원들의 저항(39%)으로 나타났다. 안정적인 상황에서는 이러한 관성이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검증된 습관에 따라 일하는 것만큼 안정되고 일관성 있는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황인경, “리더십 이너샤(Leadership Inertia) - 조직 변화를 가로막는 벽을 깨려면” LG Business Insight 2012(12) (서울: LG경제연구원), 16. http://www.lgeri.com/man- agement/organization/article.asp?grouping=01020200&seq=505 (2017년 6월 9일 접속).
2. 종교개혁 정신과 선교적 교회
교회는 문화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 문화가 거대한 변화를 겪을 때는 언제나 교회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되었고, 문화적 변화가 크면 클수록 교회 자체에 대한 개념도 더욱 철저히 변화되었다. 10) 프로스트와 허쉬는 15세기 르네상스 운동으로 촉발된 문화의 변화가 16세기초에 이뤄진 루터의 종교개혁을 추동했다고 주장한다. 11) 새로운 문화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교회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교회의 본질도 잃어버리게 될 뿐더러 생존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문화적 상황에서 어떤 존재가 되고,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는가?
1) 종교개혁의 배경
종교개혁의 배경은 첫째, 중세의 확고한 스콜라주의 신학이 영향을 잃어가면서 보편주의 철학보다는 인간을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으로가 아닌, 개별자로 보려는 인식이 강한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그 자리를 대신해 갔다. 12) 둘째, 인쇄술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원본과 같은 내용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식에 대한 판단을 누구나 직접 할 수 있었다. 또한 십자군 운동을 치루며 전쟁의 승리는 신의 뜻보다는 잘 숙련된 군대와 우수한 무기가 좌우한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새로운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13) 셋째, 지중해가 세계의 끝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종교와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남으로 인해 생긴 지리적 지평의 확대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14) 넷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변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고, 교황권의 쇠퇴와 더불어 가톨릭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고위 성직자에서부터 지방 교구의 하위 성직자에게 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때부터 미신화된 기독교의 모습으로 인해서 유럽의 종교적 양심 자체가 내부의 진통을 겪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모든 이유들이 광범위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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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지성근 옮김, 새로운 교회가 온다 (서울: IVP, 2009), 39.
11) 앞의 책, 39.
12) 김동건, 현대신학의 흐름: 계시와 응답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18-20.
13) 앞의 책, 22-25.
14) 앞의 책, 27-28.
2) 종교개혁의 정신
종교개혁의 발생에는 교황청의 타락과 성직자의 부패라는 윤리적인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신학적 이유’가 있었다.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의와 신학은 더 이상 당시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없었고, 하나님을 살아 있는 방법으로 매개해 주지 못했다. 즉 당시 교회의 가르침과 선포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15) 젊은 종교개혁가들의 고민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다. 변화된 시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살아 있는 방법으로 매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16) 그들의 이 고민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나타났다. 토마스 뮌처(Thomas M ü nzer, 1489-1525) 같은 경우는 자신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잡혀 처형당하는 순간까지도 이 역사를 새롭게 만들 종말론적 변화 와 성령의 임재를 믿었다. 바로 진리를 향한 열정, 자신의 삶과 개인의 앞날을 넘어서는 관심, 새로운 시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지에 대한 고민,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살아 있는 방법으로 매개해 줄 수 있는 신학을 찾기 위한 투쟁, 보다 근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기존 교회의 행태에 대한 분노, 이런 것들이 종교 개혁가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고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17)
종교개혁의 특징을 보면 이신칭의에 바탕을 둔 합리적 신앙과 성경연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한 직업소명설과 탁월한 직업윤리의 모색, 만 인제사장설을 통한 일상생활에서의 평등사회 실천으로 정리할 수 있다. 18) 그러나 맥그래스는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이미 존재하던 종교를 순결하고 새롭게 했다.’고 주장한다. 19) 종교개혁은 대중이 일으킨 도덕 개혁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핵심 자체에 던진 도전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이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와 세상을 바꿔놓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 못한 사건이었고, 그야말로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던지신 폭탄이었던 것이다. 20) 종교개혁은 신학이라는 옷을 입힌 정치, 사회, 도덕의 개혁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무엇보다 중요한 관건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 떻게 알 수 있는가? 구원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 백성은 누구이며 교회는 무엇인가? 같은 신학적 문제들이었다. 종교개혁은 개인의 삶을 바꾸는 일이었고, 외면을 개신교로 바꿀 뿐 아니라 내면의 중심을 복음에 합당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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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앞의 책, 31.
16) 앞의 책, 32.
17) 앞의 책, 30-33.
18) 이양호, 종교개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지향하며 (서울: 동연, 2016), 47-55.
19) 맥그라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 77.
20) 마이클 리브스/박규태 옮김, 꺼지지 않는 불길: 시대의 개혁자들 종교개혁의 심장을 발견하다 (서울: 복있는사람, 2015), 30.
21) 앞의 책, 240.
3) 종교개혁과 선교적 교회
중세교회가 가톨릭 교회 중심의 타율의 시대였다면,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자율을 강조하던 시대였고, 종교개혁은 하나님 중심의 신율을 강 조했다. 22) 즉 종교개혁이 지향한 것은 관점을 변화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 르는 인간과 사회가 되는 것이었다. 선교적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 또한 선교를 이해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관점의 근본적 변화가 선교적 교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3) 즉 선교를 ‘교회의 선교’ 로 이해하였던 관점에서,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나온다고 이해하는 관점으로의 변화이다.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 라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변화로 말미암아 선교의 근거를 삼위일 체 하나님에서 찾고, 선교의 동인을 교회의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 활동에서 찾는다. 24) 즉, 선교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이기 때문에 앞서가시는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계시는지가 중요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길 원하는지 분별할 수 있을 때 우리가 비로소 동참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종교개혁과 선교적 교회론이 지향하는 핵심이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기독교의 정체성과 순전성을 되찾으려는 시도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한 루터가 주창한 모든 신자들은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모두 사제의 직을 갖게 된다는 ‘만인사제론’은 모든 신자들이 선교적 삶을 복원해야 하는 당위성과도 맞닿는 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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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양호, 종교개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지향하며 , 12.
23) Alan J. Roxburgh and Scott M. Boren, Introducing the Missional Church: What It Is, Why It
Matters, How to Become One (Grand Rapids: Baker Books, 2009), 37-39.
24) 크레이그 밴 겔더, 드와이트 J. 샤일리/최동규 옮김,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 (서
울: CLC, 2015), 36.
선교적 교회론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기존의 교회론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교회론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00년전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관성에 젖어있을 때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의 회복을 위해 의연히 들고 일어났던 종교개혁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한 몸부림 가운데 하나로 선교적교회 운동이 있다.
III. 선교적 교회론의 태동과 확산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럽, 북미지역,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여러 가지 도전들 가운데서 성장을 멈추고 쇠퇴의 길로 향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안 중 하나로 새로운 교회의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운동이다. 선교 적 교회에 대하여 회중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적합성을 가지도록 돕는 또 다른 전략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선교적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근거하여 교회의 목적을 말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곧 선교적 교회는 새로운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략적 접근방식을 발전시키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25) 선교적 교회는 교회가 무엇을 행하느냐 보다는 교회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선교에 관한 성 경적, 신학적 이해에 근거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1. 선교적 교회의 정의
선교적 교회는 ‘교회는 무엇인가?’라는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새로운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부흥 전략이 아니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선교적 교회론을 통해 도움(부흥/성장)을 받기 위한 실용주의적 도구중 하나로 생각하면 그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선교적 교회는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 선교가 ‘교회의 선교(mission of the church)’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n of God)’라고 이해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를 요구한다. 26)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이 먼저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일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나눔을 통한 자기 비움의 마음으로 참여 할 수 있다. 선교의 주체로 여겨졌던 교회가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림 으로 교회가 선교사를 보내는 기관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기관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해는 선교를 하고 선교사를 보내는 주체가 교회가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이해를 갖게 한 다. 따라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관점을 갖게 함으로 지역교회로 하여금 선교에 대하여 겸손한 자세를 갖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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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앞의 책, 35.
26) Craig Van Gelder and Dwight J. Zscheile, The Missional Church in Perspective: Mapping Trend and Shaping the Conversation (Grand Rapids, MI: Baker Publishing Group, 2011), 8.
에디 깁스(Eddie Gibbs)와 라이언 볼저(Ryan Bolger)는 전통적인 교회는 교인들에게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복음을 증언하며 살아갈 것을 권고하지만 교회들은 교인들이 그와 같은 활동들 을 가능케 하기 위한 어떤 지원구조도 없음을 지적한다. 27) 선교적 교회에 서 리더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환경과 지원 구조를 조성하는 일에 있다. 28)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이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지역사회에 무엇을 하고 계신지 성령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분별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 것인지 함께 그 길을 찾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운동은 삶의 전 영역에서 모든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쫓고 마침내 실현해 나가야 할 것을 요구한다.
2. 선교적 교회론의 태동과 확산
선교적 교회론의 기원과 태동은 1980년대 북미상황에 대한 선교학자들의 반성적 성찰에서 비롯된 학문적 작업에서 선교적 교회론이 비중있는 테마로 이슈화 된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하지만, 작업에 신학적 통찰력을 준 사람은 영국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29) 으로, 그는 35년간의 성공회 소속의 인도선교사로서의 활동을 마치고, 1974년 은퇴 후에 영국으로 돌아온 뉴비긴은 더 이상 영국에서 기독교사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세속화가 된 것에 충격을 받고 선교사의 시각으로 영국과 유럽을 새로운 선교 현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교회에 대한 반성과 사회변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교회와 선교의 관계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통해서, 복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의 선교본질과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30) 이러한 뉴비긴의 유럽사회와 교회에 대한 선교학적 반성과 성찰과 그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북미에서 지역교회 차원에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확인하고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 발전하여 확산될 수 있었다. 이 선교적 교회 운동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서구교회가 직면한 위기상 황에서 서구사회를 선교현장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지역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전 세계(Global)와 동시에 지역(Local)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의 선교적 본질과 운동을 회복하려는 데 있다.
뉴비긴의 열심은 영국의 GOC(복음과 우리 문화, Gospel and Our Culture)프로그램으로 연결되었고, 그것은 훗날 조지 헌스버거(George Hunsberger)가 이끄는 미국의 GOCN(복음과 우리문화 네트워크, Gospel and Our Culture Network)창립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GOCN은 네슬리 뉴비긴이 제안한 복음과 문화에 관한 질문에 우선적으로 집중하면서 1994년 선교학적 교회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을 시작해서 1998 년 드디어 프린스턴 신학교의 데럴 구더(Darrell Guder)를 편집책임자로 한 Missional Church 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렇게 GOCN을 통해서 선교적 교회에 대한 논의가 촉발된 또 다른 이유는 북미교회의 침체라는 원인이 있었다. 북미의 교회들은 계속해서 유입되는 이민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부흥되다가 60-70년대 유럽교회의 침체가 시작된 후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교회들의 침체를 시작으로 북미의 보수적인 교회들까지 침체를 경험 하게 되었고 90년대 초반이 되면서 교회의 새신자가 늘기보다는 기존 신자의 수평이동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상황은 본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선교현장으로 보고, 지역교회를 선교적 교회로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을 깨우쳐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영향들로 인하여 ‘선교적 교회’와 같이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확산되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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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에디 깁스, 라이언 볼저/김도훈 옮김, 이머징 교회 (서울: 쿰란출판사, 2008), 176.
28) 맥스 디프리(Max DePree)는 리더의 첫 번째 책임을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을 명확하게 알게 해주는 것(to define reality)이라고 했다.
29) 겔더,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 , 37. 뉴비긴은 1961년 IMC(국제선교협의 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lcil, 1921년 창설)와 WCC의 합병을 함으로 WCC안에 CWME(세계선교와 전도분과위원회,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를 탄생시키는 일을 주관했고, 1965년까지 사무총장직무를 감당함으로 여러 가지로 복음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주의자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였다.
30) 이미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라는 표현은 레슬리 뉴비긴도 참여하여 선교신학적 이해를 통해서 강한 영향을 끼쳤던 1952년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의 빌링엔 대회(Willingen conference)이후에 사용되어져 대중화 되었다. 그러나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church)의 논의와 더불어 대중적 파급력을 갖게 된 점에 는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영향력과 남아공의 선교신학자 데이비드 보쉬 (David Bosch), 구약학자로서 선교적 해석학을 주도하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등과 같은 학자들의 기여가 있었다.
IV. 한국적 선교적 교회론 정립을 위한 논의
한국교회가 새롭게 갱신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교회됨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위에 선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선교를 교회의 본질로 자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선교적 교회이다. 한국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교회 존재의 목적과 비전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핵심논점을 다룸에 있어서 통합되지 않은 견해들이 남아 있으며 교단과 신학적 지향점에 따라 강조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 논점에 해당되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론, 하나님 나라(통치),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 있어 아직까지 통합되지 않은 견해들을 논의해 보면서, 한국적 선교적 교회론의 정립을 위해서 생각해봐야 할 논의점 과 바람직한 방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31)
1. 삼위일체론적 교회론
선교적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주와 활동의 관점에서 교회와 세상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삼위일체론과 관계되어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니케아 공의 회를 통해서 확립된 것과 같이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 ousia , one being)이면서 세 위격( hypostasis , three persons)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가 존재하는데, 이 삼위는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고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세계가 모두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세계와 맺는 관계 역시 상호내주로 특징 지워진다고 주장한다. 32) 따라서 성자는 성부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할 때만 성자가 되고, 성부와 성령의 내주함이 없이 성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러한 관계는 성부와 성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33) 더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사회에 적용하려고 할 때 사람의 죄로 인하여 왜곡된 사회의 현실을 고려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회의 상응에 내재된 한계를 고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교회와 사회를 희망하고 목표로 삼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사회적 비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선교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와 관련이 있고, 교회의 선교가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라는 관점의 변화는 선교적 교회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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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특별히 종교개혁 3대 모토인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선교적 교회론의 주요 논점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gratia는 하 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하나님 나라)로 연결하고, fide는 성령의 교통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이기에 삼위일체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고, scriptura는 말씀에 입각하여 신앙과 삶을 개혁하고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실현하는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와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2) 리처드 버캠/김도훈, 김정형 옮김, 몰트만의 신학 (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8), 310.
33) 미로슬라브 볼프/황은영 옮김, 삼위일체와 교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350.
1) 논의점: 하나님의 삶과 선교를 보는 관점의 문제
거의 100여 년 동안 근대선교운동의 가장 보편적인 선교신학은 대위임령(마28:18-20)을 성취하기 위해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한다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rey)의 논증을 따랐다. 마태복음 28:18-20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명령(Great Commission)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입장은 교회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책임을 진 일차적 행위주체로 생각하게 된 ‘교회중심적(church-centric)’선교관으로 연결된다. 34) 한국교회는 특별히 교회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는 교회중심적인 신앙관에 바탕을 둔 선교패턴을 형성해 왔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강조하게 된 이유는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면 많은 반대와 핍박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상 생활 속에서 분리되어 기독교에 소속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러한 새로운 신앙의 관심을 교회 안으로 집중하는 과정에서 교회중심적인 신앙은 교회절대주의를 낳고,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적 이해를 갖도록 했다. 교회 밖의 공간과 시간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게 되었고, 사회로부터 고립된 교회안에 갖혀 있는 신앙형태를 갖게 만들어서 ‘구원의 방주’와 ‘도피처’의 교회관을 갖게 되었다. 35) 중세에 이미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는 인식을 갖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일이 있었다. 중세의 독일의 도메니코 수도회 사제 요한 테첼(Johann Tetzel)은 면죄부 장사를 했는데, 그는 사람들에게 죄를 고백하라는 요구도 하지 않고 돈만 내면 면죄부를 주었다. 당시 테첼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사람들이 연옥에서 벗어나는 동안 교황은 거둬들인 돈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중건했다. 36) 면죄부의 판매는 연옥에서의 해방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통한 단순한 신앙형태를 구조화시켰으며, 교회는 면죄부를 발행하는 유일한 기관이기에 성도로 하여금 교회절대주의를 자연스럽게 낳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의 방주와 도피처의 교회관을 갖게 만들고, 내부적으로는 교회의 건립, 유지를 위한 열심만을 내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은 선교에 대한 근거와 동인을 교회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으로 옮김으로써 선교에 관한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선교에 관한 생각의 출발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선교의 출발이 아니고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37) 그런데 선교적 교회론에서 교회와 선교에 대한 논의는 기독론 중심적인 접근법과 삼위일체적 접근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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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Gelder and Zscheile, The Missional Church in Perspective, 24.
35) 한국일, 선교적 교회의 이론과 실제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6), 19.
36) 리브스, 꺼지지 않는 불길 , 61.
37) 겔더,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 , 65.
기독론 중심적인 접근법은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와 앨런 허쉬(Alan Hirsch) 주장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선교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이다. 즉 기독론이 선교론(이 세상에서 우리의 목적과 역할)을 결정하며, 선교론이 교회론(교회의 문화적 형태와 표현)을 결정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38) 이것은 기독론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선교, 그리고 그 참여로 말미암는 교회와 사역의 형태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39) 즉, 예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꿈꾸며 ‘작은 예수’가 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화의 삶을 살게 해주실 때 비로서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다. 즉, 작은 예수의 핵심은 성화이고, 그 핵심은 성령의 내주이다. 하지만 기독론 중심적인 접근법은 실천적 방향성에 있어서 교회 지상주의의 모습을 띄고 있다. 교회가 교리우선주의, 교회절대주의, 문화적 배타주의의 모습을 나타냄으로 세상과 유리된 교회의 모습을 띄고 있다. 그 극명한 예는 중세기독교로서, 말구유가 아닌 성곽 안에 안주한 기독교의 모습으로 교회 절대주의가 강조되어 세상에 군림하였다. 그러한 교회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힘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교회와 선교에 대한 논의에서 기독론 중심적인 접근법은 ‘인간적 동인(agent)’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인간적 동인의 문제라 함은 인간이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인간과 교회가 행하는 것에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40) 선교적 교회의 기독론중심적 접근법은 대위임령에 대한 순종이든, 선교를 감당해야 할 책임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실현해야 할 책임을 인간과 교회에게서 찾게 됨으로 하나님 활동에 대한 이해를 감소시키고 선교의 주체와 동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기독론 중심적인 접근법은 하나님의 명하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세상에서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경시하고 인간적 활동의 역할과 주도권을 강조함으로 인간과 교회의 역할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선교적 교회의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하지만 삼위일체 세 위격은 서로 분리된 채로 이해될 수 없다. 삼위일체적 접근법은 교회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과 관련된, 그리고 좀더 넓은 세상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 성령의 능동적인 참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참여적 이해는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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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프로스트와 허쉬는 기독론(Christology)이 선교학(Missiology)을 결정하고 이어서 선교학이 교회론(Ecclesiology)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지 성근 옮김, 새로운 교회가 온다 (서울: IVP, 2009), 40, 370-371.
39) Nile Cole, Church 3.0 , 58.
40) 겔더,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 , 211.
2) 방향성: 세상까지 품는 상호거주의 패러다임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 개념은 하나님, 세상, 교회의 관계를 상호적으로 생각하는 참여의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41)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 호성(reciprocity)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역동적 순환운동을 통한 세 위격의 상호거주와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으로 삼위가 항상 상호 관계적이며 영원한 연합가운데 존재한다는 포함의 신비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신앙인과 교회됨의 회복에 혜안을 준다. 삼위일체 하 나님의 내적인 삶은 서로를 위하여 상대방에게 완전히 역사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시는 상호거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과 상호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개방성을 보여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신적 위격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자신을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내어주고, 동시에 다른 두 위 격의 충만한 사랑과 사귐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스적 관계의 표본을 따른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서로에게 개방시키며 상대방을 알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타인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개별성이 존중되는 사귐을 통해서, 그리고 서로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영속하는 관계 가운데 살라고 사람들과 교회를 초대한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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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앞의 책, 210.
42) Leonardo Boff, Trinity and Society , trans. Paul Burns (New York: Orbis Books, 1988), 149.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내적 삶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이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내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한국 교회가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관점과 자신의 삶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계속적 창조와 구속적 선교에 충실하게 참여하도록 부르신다는 관점을 가진다면 선교의 의미가 분명해질 뿐 아니라 교회가 함께 꿈꾸고 지향해야 할 비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43) 한국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를 확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회개하고 끊임없이 갱신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통치(나라)
선교적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를 넘어 이 세상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에 충실하게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의 삶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의 관점에서 교회와 세상을 보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관점의 회복 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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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갤더와 샤일리는 삼위일체론적 접근방식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역을 연결하는 방식을 2004년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일어난 선교형교회(misssion-shaped church)를 소개함으로 시도하고 있다. “창조와 구속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의 흘러넘침이다. [···]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피조물의 삶을 유지시키고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선교는 타락한 피조물을 회복하고 화해시키는 것이다.” 겔더,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 의 동향과 발전 , 178.
1) 논의점: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는 관점의 문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나타내기 위해 가장 즐겨 사용한 표현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중심 주제이며 비전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을 관통해 흐르면서, 그 사역에 일관성과 명료성을 제공해 준다. 44) 그리고 대체로 성경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 또는 다스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역동적인 것으로 영토나 특정 장소를 뜻하지 않으며, 항상 변하며, 퍼져 나가고 자란다. 하나님 나라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행위다. 그 나라는 하늘 위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나라, 곧 지금 여기서 번성하는 나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 45) 선교적 교회론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는 방식이 통합되지 않고 있다. 첫 번째 견해는 선교적 교회가 일차적으로 예수의 메시지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예수가 사셨 던 삶을 구체화하고 모방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모방의 문제는 선교를 예수의 삶에 대한 모방으로 보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현재 행하고 계신것과 미래 계속해서 행하실 것이 아니라 과거 행하신 것에 많은 초점을 두고 있는 경향이 있다. 46) 즉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에 초점을 두고 그 삶을 모방하려는 접근법은 성부, 성자, 성령의 균형과 통합에 의한 세 위격에 대한 이해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창조주 된 성부의 관계와 상관없이 또는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능력을 받는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이해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다. 47) 이러한 접근법은 세상과 관련된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개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 역에만 초점을 맞추게 만든다. 대럴 구더(Darrel L. Guder)는 이러한 교회의 복음에 대한 축소지향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48) 결국 예수의 삶을 재현할 책임을 우리자신에게 두게 됨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려는 인 간적인 노력과 열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온전하게 누리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보다 예수의 사례를 모방해야 할 책임성을 강조하 게 된다. 또한 이와 같은 접근법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축소하고, 때로는 권위와 의사결정의 위계질서적 패턴을 강화하고 교회의 본질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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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도널드 크레이빌/김기철 옮김,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 (서울: 복있는사람, 2010), 25. 신약성경 학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라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45) 앞의 책, 28.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already but not yet’의 견해를 동시에 받아들이면서 ‘지금 여기’를 강조하고자 한다.
46) 앞의 책, 211-212. 47) 앞의 책, 211.
48) 데럴 L. 구더/정승현 옮김, 선교적 교회로 (인천: 주안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13),228-229.
다른 견해는 선교적 교회는 창조하시고 능력을 부여하시고 일련의 실천에 참여하도록 교회를 이끄시는 성령의 능력과 현존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49) 갤더와 샤일리는 선교적 교회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내에서 아직도 성자의 사역, 성령의 사역에 대한 통합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이 야기하는데, 이것은 자칫 하나님의 세 위격의 사역을 서로 분리시키는 기능적 양태론(a functional modalism)의 위험성이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50) 앞에서 다루었듯이 관계적 삼위일체론과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은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신적 공동체의 세 위격은 그들 고유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일정한 관계적 통일성안에 상호 거주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현존하시며 교회 너머 넓은 세상 안에서 통치하신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일에 좀더 충실하게 참여하도록 부른다는 것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에 겸손히 참여해야 할 것이다.
2) 방향성: 뒤집히고 거꾸로 되어 있는(Upside-down)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신앙과 선교의 궁극적 목표이다. 따라서 선교의 목적은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그 복음이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 예수님이 증거한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 측면, 곧 문화적 형식성으로서의 ‘나라’와 계시적 실체성으로서의 ‘하나님의’라는 측면을 지니며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51) ‘나라’가 인간 문화에 대한 연대성의 표식으로서 선교적 교회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일상의 삶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는 계시의 실체로서 인간 문화에 대한 변혁성의 표식으로서 삶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문화적 형식성을 통한 공감적 자리의 확장과 동시에 계시적 자기 정체성을 통한 실존적이고 사회 변혁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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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앞의 책, 111.
50) 앞의 책, 111-112.
51) 김지철, 조성노, 복음과 문화 (서울: 현대신학연구소, 1992), 101-102.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복음이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이고,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나라는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특별한 일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 라”(눅17:20-21)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믿었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제자들이 매일의 삶 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 천국에서 살기를 기대하셨다. 52) 하나님 나라는 역설의 나라이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1세기 팔레스타인 문화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새로운 질서였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비전, 즉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은 뒤집히고 거꾸로 되어 있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도전이 되는 일이었다. 우리의 비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삶으로서 세상을 소란하게 한 사람들(행 17:6)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운동은 한 사람이 홀로 펼친 개혁운동이 아니었다. 많은 제자와 군중들이 힘을 합한 운동이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윤리적 탁월성을 통한 거룩한 삶의 회복을 통해 세상의 빛이 되는 모습이 필요하다. 하나님 백성의 구별되고 윤리적인 삶의 모습은 종교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 나타남으로 기존의 사회 질서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필요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선교적 교회는 사회의 기득권층의 모습이 아닌 주변부의 존재로서 나약하고 겸손한 증인이 될 준비를 하면서 타인중심의 삶을 사는 존재가 될 때 세상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자신의 이웃과 교류하고 그들의 이웃이 되면서 교회의 본질을 선교적 존재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인을 선교적 그리스도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케 하는 것이다. 선교의 목적은 교회의 자체존립이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증거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구원과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발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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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스캇 맥나이트/김창동 옮김, 예수신경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 180.
3.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
선교적 교회의 세 번째 특징은 교회의 성육신적 사명이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참여적 현존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상과의 상호관계성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성육신이다. 성육신을 통하여 나타난 것과 같이 하 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 다가오신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이웃과 동일한 사랑을 나누는 성육신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1) 논의점: 교회가 문화와 세상을 보는 관점에 대한 문제
선교적 교회는 문화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뿌리내리고 문화 와 의미있는 상호 관련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한국의 주류 문화가 영적유산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소통불능이 되어 가고 있고, 한국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상실하고 있으며, 교인들의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문화와 복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교회가 문화와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을 어떠한 관점을 통해 형성했는가에 따라서 선교적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방향이 달라진다. 첫 번째 방식은 ‘복음과 교회’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주로 교회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는 관점으로 교회가 대안공동체(an alternative community)가 됨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문화와 세상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기독교적 삶의 독특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로서 공동체적 제자도의 회복과 깊은 실천은 교회가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파주의적 접근은 하나님, 교회, 세상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고, 문화와 세상의 상호작용과 교회가 세상에 관여하는 선교적 차원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저 멀리에 있는 선교의 표적(target)으로 삼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교회중심적 신앙생활과 개교회 중심의 신앙전통이 자리하게 된다.
두 번째 방식은 ‘복음과 문화’의 관계성에 초점을 두는 방식이다. 이 관점은 복음은 한 가지 문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항상 특정한 문화형식에 내재함을 전제한다. 이 관점은 문화와 세상을 하나님의 선교적 활동이 이뤄지는 주된 영역으로,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의 장소로 여기고 성령께서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긍정적인 입장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이미 행하고 계신 일에 온전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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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겔더,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 , 122-123.
선교적 교회는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한 참여의 모습이 필요하다. 즉 교회를 넘어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구속받은 공동체를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이끄신다는 견해이다. 선교적 교회는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문화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세상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선교적 교회는 문화에 대해 의도적으로 상호적이고 개방적이며 변혁적인 방식으로 참여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사역을 감당해야하고 동일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증명함으로서 구속적 선교에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육신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문화와 세상, 하나님의 구속활동에 동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54)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테일러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복음과 문화를 변혁 적으로 리믹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5)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가운 데 문화의 옷을 입고 오신 것과 같이 우리도 처한 일상의 상황속으로 깊숙 이 들어가는, 레오나르도 스위트(Leonard I. Sweet)의 말처럼 교회는 ‘복음의 문화화’가 필요하고, 56) 뉴비긴의 말처럼 교회는 진정으로 ‘복음의 해석’이 되어야 한다. 57)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과 같 이 58)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인간됨만을 의미하지 않고,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대립이나 무관심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반문화적인 자세도 아니고, 교회가 문화의 연장이 되어 예속되는 문화 지향적 자세도 아닌, 문화를 개혁하며 하나님 나라 문화로 만들어 가신 성육신적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심으로 우리들 가운데 사심으로써 자신을 삶의 구조속에 기꺼이 맡기셨으나. 악의 영향력과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부터는 분리하심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으로써 이 세상의 변혁을 분명히 하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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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앞의 책, 261.
55) 스티브 테일러/성석환 옮김, 교회의 경계를 넘어 다시 교회로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8), 194.
56) 레오나르도 스위트/김영래 옮김, 모던 시대의 교회는 가라.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리더십 기술 (서울: 좋은씨앗, 2007), 114.
57) Les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Grand Rapids, MI: Eerdmans, 1989),222-233.
58) 요1:14, 거하시매는 문자적으로 ‘천막을 치다’라는 의미이다.
2) 방향성: 이웃의 짐을 지는 사역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문화 속으로 들어왔고, 문화를 구조적으로 새롭게 한다. 복음은 사 람들과 그 문화 속에서 성육되어 실현되는 일종의 지속적인 성육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59) 신앙인의 삶이란 그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성육신을 통해서 인간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시고, 피조세계가 온전해지도록 새롭게 하시고, 질책하시고 화해케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실현 될 수 있도록 그 사역에 참여하는 삶의 모습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는 선교적 소명과 그 소명이 의도했던 공동체의 집단적인 소명을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구더의 표현처럼 “복음의 환원주의는 나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가져야 하는 급진적 타자성에 대한 헌신을 희석시킨다.” 60) 성숙한 신앙은 영적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삶의 차원에서 표출됨으로써 하나님의 현존과 주권을 증언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십자가의 주권으로 타인의 삶에 희생적으로 들어가셔서 섬기고 화해시키고 자유케 하시는 주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여 자유롭게 됨으로 타인들의 삶을 공유하고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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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데이빗 보쉬/김병길, 장훈태 옮김, 변화하고 있는 선교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670.
60) 대럴 L. 구더/허성식 옮김, 증인으로의 부르심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233-234.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하나다. 곧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연합된 그리스도 현실이라는 하나의 영역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선교적 공동체가 이 하나의 현실 속에서 온전한 자발성으로 이웃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온전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달리 인간존재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한에서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61) 따라서 교회의 성육신 사역 또한 예수가 행하신 사역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인공으로 활동하시는 큰 역사적 운동에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세계 모든 만민에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교회가 부름 받은 모든 영역인 가정, 이웃, 일터뿐 아니라 경제, 정치 환경 분야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수행하는 생활방식을 이루도록 부르심 받은 공동체이다. 구더는 빌립보서 1:27의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에서 쓰인 동사 ‘폴리튜에인’(politeuein) 의 의미는 ‘정치적’이라는 의미로서 그 의미를 해석하면 ‘공동체적 삶의 공 적인 성격’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62) 따라서, 선교적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 있지 않을 때 사도적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구비시켜야 한다. 그래서 구더는 선교적 공동체가 평신도의 사도적 직분을 세워나가는 방법은 이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준 사람으로 알고, 부단히 우리의 관심을 우리의 이웃에게 집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63) 선교적 교회 공동 체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적 운동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며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산상수훈에 있는 것처럼 성육신적 관점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변 문화와 정치적, 사회적 상황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뉴비긴은 “이 시대의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는 복음을 믿는 회중의 삶”이라고 주장한다. 64) 하지만 한국교회의 모습은 지역사회에서 전도는 하지만, 지역사회에는 무관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교인들은 교회안 의 생활을 신앙생활도 간주하고, 교회 밖 세상 속에서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는 매우 서툴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자신의 의를 우리와 공유하심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신 것처럼 교회는 지역 사회로 침투해 들어가고 신앙인의 삶은 이웃의 짐을 대신지는 삶에 동참해야 한다. 65)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동일집단의 원리에 대한 맹 목적인 헌신으로 인해 교회가 다양성속의 통일성,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 하는 것, 형제 사랑과 같은 성경적 원리에서 떠나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 버린다고 믿는다. 66) 성육신은 문화와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관계적 공감을 통하여 그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요구한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찬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교회다.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공동체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교회가 필요하다.
선교적 교회는 다문화사회인 한국사회 속에서 단일민족교회로 남으려고 하기 보다는 소금과 빛, 누룩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한국사회 안으로 스며들어가서 섬기는 공동체이다. 진정한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의 모습이 되기 위한 출발점은 한국교회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지역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삶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지역사회에 의도적으로 뿌리 내리고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이고, 교회가 지역의 특정 장소에 신실하게 현존하는 이웃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또한, 선교적 교회는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예수의 길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복음의 해석자로서 이 세상가운데 새로운 화해의 삶인 섬김의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이다. 성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선교적으로 개입하시듯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육신적 사역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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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볼프, 삼위일체와 교회 , 395.
62) 대럴 L. 구더/허성식 옮김, 증인으로의 부르심 , 248.
63) 앞의 책, 249.
64)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 431-432.
65) 겔더, 샤일리, 선교적 교회론의 동향과 발전 , 219.
66) 1970년대 풀러 신학교 세계선교학부 출신의 선교사들이 고안한 것으로 동일집단원리는 사람들은 같은 언어와 관습과 문화와 신념을 가진 집단에서 복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프로스트, 허쉬, 새로운 교회가 온다 , 105.
V. 나가는 말
종교개혁의 정신은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간과 사회의 회복에 있었다. 교회의 성공은 교회의 본질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교회의 사명을 올바르게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계승한 한국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숲을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도록 하기 보다는 욕심을 채워 거목이 되기에 급급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고 올바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선교적 교회운동의 모습이 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론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로서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아닌 성삼위 하나님께 선교의 근거를 둔다.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핵심논점인 삼위일체론적 교회론, 하나님 나라(통치),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 있어 아직까지 통합되지 않은 견해들이 있다. 신학적 지향점이 달라질 때 그 행함과 실천도 다르게 표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선교적 교회론의 세 가지 중요 논점에 대해서 필자는 각각의 지향점을 가져볼 것을 제안 한다. 첫째,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까지 품는 상호거주의 패러다임을 가질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 시스적 관계의 표본을 따른다는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 해 서로에게 개방시키며 상대방을 알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타인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통치와 나라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뒤집히고 거꾸로 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은 기존의 사회질서에 도전 함으로 세상을 소란케하는 뒤집히고 거꾸로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셋째,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이웃의 짐을 지는 사역을 감당할 의무가 있음을 확인했다. 성육신은 문화와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관계적 공감을 통하여 그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요구한다. 교회는 의도적으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 이웃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에디깁스와 라이언 볼저는 전통적인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구성원들에게 직장에서나 공동체에서나 다른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복음을 증언하며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그런 활동들을 가능케 하기 위한 어떤 지원구조도 없다.”고 말한다. 67)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이 주장했던 것처럼, 일상에서 선교적 교회가 강조하는 모습으로 교인들이 살기를 원하지만 정작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숲이 아니라 거목일 때가 많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더해가기 보다는 교회 자체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제 우리 숲이 되어 함께 어루러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세상 속에 침투하는 것이고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받아들 수 없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며 성육신하신 예수의 온전한 사랑이 삶에서 온전히 표출되어 하나님 나라를 일구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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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깁스, 볼저, 이머징 교회 , 176.
주제어 Keywords
종교개혁, 선교적 교회, 리더십, 삼위일체론적 교회론, 하나님의 나라, 성육신적 삶과 공동체
Protestant Reformation, Missional Church, Leadership, Trinitarian Ecclesiology, The Kingdom of God, The Incarnational Life and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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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Spirit of Protestant Reformation and the Establishment of Missional Ecclesiology
Jae-Kwang Kye , Ph. D.
Associate Professor, Christian Leadership
Hannam University
This paper focuses on the actualities of the Korean Church which has met its 500th anniversary, compares missional ecclesiology, the subject of active discussion today, with the spirit of Protestant Reformation, and discusses an ecclesiology adept to Korea’s situation. This study applies the spirit of Protestant Reformation, missional ec- clesiology, and especially Trinitarian theology to the Korean Church in an attempt to propose fundamental concepts and the directional nature suited to Christian theology. However, because Protestant Reformation, missional ecclesiology, and Trinitarian theology are vast domains of theological study, it was not an uncomplicated task to connect them all in one thread.
The core ideas that Protestant Reformation and missional ecclesiol- ogy aim for are similar in their attempts to retrieve the identity and pu- rity of Christianity by following God’s will. 500 years ago, the church had lost itself and was indulged in its inertia. Just as the Protestant Reformation broke out to recover the church’s identity and true nature, among the struggles to recover the identity of the church today is the missional church movement.
The paper suggests topics to be discussed regarding Korea’s mis- sional ecclesiology and its directional nature. The question at the is- sue for missional ecclesiology so far is its unintegrated view regarding Trinitarian ecclesiology, the Kingdom of God, and the incarnational life and community. Because practice must be expressed differently when the theological directing points shift, the writer suggests an ob- jective for each of the three main points of missional ecclesiology. Accordingly, the first notable characteristic of the missional church is its perspective towards missions which aims for a worldly paradigm of indwelling concerning Trinitarian theology. Following the Perichoresis relationship of the Trinity involves one human opening up to another by forming a relationship and consequently learning about them- selves and participating in said other person’s life. Second, the way of God’s Kingdom challenges existing social orders. Through discussion regarding the reign of God we may reflect upon how His Kingdom is flipped inside out and upside down. Third, it is confirmed that we have a responsibility to share in our neighbor’s burdens through con- versation about the incarnational life and community. The incarna- tional life requests us to overcome cultures, generations, and social hierarchies to approach our neighbors through relational empathy. The church must deliberately take root in the local community to be- come a community in togetherness for its neighbors.
The missional church of Korea that we envision is one in which the relationship of the Trinity permeates deeply into society. It is a church that participates in the movement for the Kingdom of Christ that we are unable to understand by common knowledge, and it is one that lives to cultivate the Kingdom of God by displaying the love of Jesus Ch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