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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막1:35,36)
35 Very early the next morning, long before daylight, Jesus got up and left the house. He went out of town to a lonely place, where he prayed. 36 But Simon and his companions went out searching for him,
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35 Very early the next morning, long before daylight, Jesus got up and left the house. He went out of town to a lonely place, where he prayed.
* 아주 이른 새벽
아주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깊게 잠들어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때에 일어나셔서 서두르신 것입니다.
지난 밤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베드로의 장모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마을 사람이 모두 오전에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녀를 병 걸린 부모를 예수님께 모시고 온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이 궁금해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정이 넘어서야 잠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도 돌아가지 않으려는 사람을 억지로 해산시켰습니다.
*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한두 시간 겨우 눈을 붙이셨을지 모릅니다.
일어나시기 어려우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일어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체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여지없이 몰려들 것입니다.
주님은 전혀 다른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주님은 홀로 계실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잠든 시간에 또 제자들조차 모르는 곳을 찾으신 것입니다.
사람들 중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께 하루 밤 새는 것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하필 인자라고 표현하는지에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주님을 굳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까?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이를 것입니다.
그와 상대적으로 사람의 아들이란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육적 요소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을 알리는 알람 소리를 들을 때 여러분들은 벌떡벌떡 일어납니까?
혹시 이불 위를 이리저리 뒹굴다가 그만 잠든 적은 없습니까?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도 우리와 마찬가지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 병정의 회초리질에 주님의 살점이 튕겨 나갈 때 주님은 비명을 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인성을 가지시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육체적인 문제뿐 아니라 정신적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셨을 것입니다.
전날 밤에도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전혀 예수님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나셨을 것입니다.
그 내막의 동기까지 훤히 읽으시는 주님은 더 그러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인내하신 것입니다.
* 기도하셨다.
주님은 닥칠 일을 두고 기도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기도의 응답이 마치 복권 당첨같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여쭤봐야 알 수 있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알 수 없는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이란 철저히 오늘의 내 삶을 근거로 두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근거를 중심으로 우리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점쟁이가 동전을 하늘에 던지고 그것이 어떻게 뒤집어지고 엎어지는지 예측할 수 없는 그것이 사람 일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걱턱은 대머리와 궁합이 맞는다는 도무지 밑도 끝도 없는 그런 것이 응답이 아닙니다.
내일 일이란 오늘 일을 근거로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계시는 오늘의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내일 일을 말하는 일입니다.
오늘 금단의 열매를 먹었으니 내일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가는 것입니다.
산상 수훈을 보십시오.
오늘 가난하니 내일 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애통하니 내일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 의에 주렸으니 내일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을 평가함으로 내일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회당과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서 일어난 일로 많은 사람이 주께 모여들었습니다.
이제 또다시 해 뜨면 사람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과연 어제의 그 일들의 의미가 무엇이며 오늘을 무슨 일을 감당해야할 것인가?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오늘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내일 그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일은 무엇으로 평가될 것인가?
예수님께서 가장 치열하게 기도하셨던 것은 겟네마네였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무엇을 두고 기도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의 여부입니다.
내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나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을 적대하는 것입니다.
어제 사람들이 회당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들었습니다.
열병에 드러누웠던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더니 예수님을 시중들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예수님을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격했습니다.
이 일들을 주님은 아주 한적한 곳에 아주 이른 새벽에 하나 하나 정검하신 것입니다.
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님은 누구이신가?
우리 아들에게서 귀신 쫓아내신 분
이웃 마을에 사시는 외삼촌 말기암을 고치실 분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예수님은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시는 일이 하나님의 전도에 도움을 주는 일이 아니라고 기도를 통해 정리하신 것입니다.
과연 예측대로 였습니다.
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막1:37)
그리고 주님은 기도하시면서 정하신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37,38)
주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피해가기로 하신 것입니다.
다른 마을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 길로 갈 것인가?
이 길을 부정할 것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기도란 오늘을 근거로 내일의 바로 그 길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육적 존재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영적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오직 멸망하는 육의 세상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3:6)
그런데 그 영적 답을 얻는 통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자동차 기름통에 수도를 틀고 물을 채워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워야지!
이 영적인 사건에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영적인 충전을 받아야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핸드폰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사용하다 보면 잠자리에 들 때면 충전기에 몇 시간을 연결해두어야 합니다.
콘센트는 또 전봇대를 통해 발전소에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발전소 안에는 기름을 태워서 물을 끓이는 곳이 있습니다.
터빈을 돌려서 그것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전선이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연결된 선을 통해서 전기가 흐르고 그 것이 내 전화기에 충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기가 떨어지면 전화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연결선입니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께 힘을 얻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그 분의 영적인 능력을 충전 받으신 것입니다.
*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를 위해서 주님은 사람들이 자는 시간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올 수 없는 장소를 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조차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수 많은 사람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군중과의 관계를 등지신 것입니다.
다른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다른 관계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신앙은 관계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더 근원적 관계를 요구합니다.
돈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창고 다섯을 짓고 돈과의 관계를 고백했다가 큰 일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족 간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관계 앞에서 검증을 받아야합니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10:37)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 관계를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고 하나님 과의 관계만을 남기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족의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길을 떠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구도 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 것입니다.
기존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입니다.
딸과 아들의 관계
아내와 남편의 관계
모조리 검증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남겨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가 분주하게 일했던 그 하루를 반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의 동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깨달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서 자기에게 닦친 세상 불을 끄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그 곳에서 기적을 베푸는 일은 사람들에게 혼선만 줄 뿐입니다.
현대인이라면 대부분 신뢰하는 진화론은 터무니없는 전제를 합니다.
만물이 그 필요에 의해 긍정적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단백질이 인간까지 진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장 필요로하고 요구하는 것을 무엇일까요?
전쟁 무기일 것입니다.
진화론대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켰더라면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건전한 소망을 원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전한 진화가 가능했다면 오직 그 분 덕입니다.
사람의 소원대로 발전했다면 훨씬 전에 세상이 산산조각이 났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분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신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이것입니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6 “Happy are those whose greatest desire is to do what God requires;
God will satisfy them fully!
그래서 영어 성경(GNT)를 보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to do what God requires)이 그 사람의 가장 간절한 요구(whose greatest desire)와 합치 되는 그 사람이 행복하다고 되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에 대한 요구가 불일치 하는 사람을 불행합니다.
그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심을 채우려는 것에 혈안 된 나에게 어떻게 그 일치가 가능할까?
소망의 무게 중심이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옮겨지는 일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일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그 이기적인 사람들을 피하셔서 홀로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위해 홀로 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홀로됨을 더 적극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리 안에서의 나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또 홀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무리 안에서 나를 감당해야 합니다.
또 홀로 있을 때에 나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 두 현실이 모든 사람들의 당면한 문제입니다.
요한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위하는 것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눅3:8)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선민의식에 안주하며 거짓 구원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지적에 의하면 그런 집단의식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홀로 감당해야 할 책임 영역을 묵과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죄인의 무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삭개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이런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눅19:8-10)
죄인의 무리였던 세리는 그의 한 행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의 반열에 든 것입니다.
집단이 우리는 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자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무리 속에서 두 손을 들고 안정감을 노래하다가 교회문을 나서는 순간입니다.
홀로 된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며 쓰러지는 경우를 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홀로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그들의 함께 연합하여서 한 분이시지만 그들 한 분들이 모두 완전한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삼위의 모든 위가 완전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홀로도 완전한 사랑이신가?
그 홀로 의로운신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성부로부터의 소외를 고백하신 것입니다.
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막15:34)
하지만 그 현장에서 성자 홀로 십자가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성자 홀로 성부와 부조리가 없는 완전한 사랑과 정의를 보이신 것입니다.
홀로 되셨을 때에도 그 분의 독립된 완전한 인격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박정희가 죽자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화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군인 세력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민주주의 요구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군인 세력들은 국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양민을 탄압하도록 지시를 받은 당시 전남지방경찰국장이었던 안병하 국장은 광주 전남지역 경찰서에 "시민들 안전보장을 위해 경찰들은 무장하지 말것"을 명령했습니다.
또 목포 경찰들은 이준규 서장 지시로 최루탄조차도 쓰지 않았습니다.
시민들 안전보장 우선 원칙으로 경찰 총기와 방아쇠를 분리시켜 배에 실은 후 목포 내에 있는 섬인 고하도로 운반했습니다.
그 후 그는 전두환의 지시로 90일간의 고문, 감금 후 경찰 파면되어서 고문 후유증으로 5년 후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경찰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경찰인데 또다시 독재의 도구로 전락할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개인의 양심의 행위를 제도적으로 통제하려는 사탄적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36 But Simon and his companions went out searching for him,
* 그 때
그 때란 귀신들리고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바라며 모여든 때를 이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귀신 들린 제 아들이 제 정신을 찾을 일이 중요할 뿐입니다.
또 그 때란 예수님께서 무리를 피해서 숨으셨을 때입니다.
그 때란 어부 몇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불리움을 받았던 때입니다.
이 어부들은 주님과 같은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소명감을 가지고 주님을 봉사한 것입니다.
땀 흘리면서 그들은 그들의 일에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지난 밤에 예수님께서 녹초가 되시도록 귀신을 몰아내셨습니다.
병자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백성의 요구대로 그 일이 다시 일어나도록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면 OK라는 것입니다.
고치기만 하면 OK
그런데 큰 일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다닌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이상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제 했던 일이니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했던 일을 반복하는 일!
병나았으니 감격스러운 일!
할렐루야를 외치는 일!
피곤해도 소명감으로 감당하는 일!
교회에 카페를 차리고 커피 끓이는 일!
체육관을 세우고 알통 만드는 일!
주님은 이제 그 마을을 떠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5.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6. 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을 내가 없애 버리겠다."(습1:
일단 노골적으로 주님은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을 섬기는 자들,
주를 등지고 돌아선 자들,
주를 찾지도 않고 아무것도 여쭙지 않는 자들
그런데 혼란스러운 자들이 있습니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말감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지만 실은 주님의 내용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혼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을 혼란에 빠뜨린 사람들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주여 주여하며 목이 다 쉬도록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병도 낫게 한 것입니다.
예언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봉사는 도무지 구원에 의미가 없는 봉사였던 것입니다.
그 봉사의 치명성은 자신을 속이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은 구원을 확신하고 소명감을 가지고 그 종교행위를 하지만 그것이 전혀 그의 구원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친분이 있던 교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장모님이 권사님이셨는데 장모님이 사위에게 교회 숙제를 맡기고는 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은근히 사위를 전도하실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저에게 노발대발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 중에 교회 성장의 3p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답은 pray, preach, 여기에 왜 parking lot이 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논리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입니다.
주에게 맹세하고 주를 섬기면서도 맘몬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쉬운 일을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요1:32-34)
이렇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한 요한은 정말 강직한 사람입니다.
지금 정권을 보세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 목날아갈까 보아서 빌붙어 아부하며 제 권력을 챙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을 정면으로 헤롯 왕의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옥에 갇힌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의를 외치며 옥에 갇혔는데 그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어떤 구원의 손길도 내밀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2,3)
자신의 고통당하는 처지를 염두해 두면서 예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런 답을 하신 것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예수님의 귀신을 몰아내며 치유하신 행위는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그 기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입증하는 것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증거 하다가 혹은 정의를 실천하다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쪽에서는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나병을 치료받은 것입니다.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될 것입니다.
* 예수님의 피하심
성자 예수님을 찾아서 베드로의 장모님 집에 몰려든 사람들!
성부를 찾아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신 예수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물리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 만이 대수가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주여주여 그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만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물리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함이 아닙니다.
실은 예수님께서 몸을 떠나 있을지라도 그 내용에서 예수님과 일치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참으로 기이한 시간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을 잃고 홀로 홀로 남겨질 것입니다.
7. "칼아, 깨어 일어나서, 내 목자를 쳐라. 나와 사이가 가까운 그 사람을 쳐라.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나 또한 그 어린 것들을 칠 것이다.
8. 내가 온 땅을 치면, 삼분의 이가 멸망하여 죽고, 삼분의 일만이 살아 남게 될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9. 그 삼분의 일은 내가 불 속에 집어 넣어서 은을 단련하듯이 단련하고, 금을 시험하듯이 시험하겠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고, 나는 그들에게 응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그들은 나 주를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슥13:7-9)
그리스도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분이 적군에게 패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온갖 조롱을 당하시며 피흘리신 것입니다.
그 일을 보고 2/3가 떠날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보장을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1/3은 그 분의 죽음 속에서 자신들의 대속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죽음 뒤에 영생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그 1/3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움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