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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소 그림동화 10장 발제/이수형/20210828
세상과의 대면-이야기로 투시하는 냉혹한 현실, 어떻게 볼 것인가?
연일 뉴스에서 들리는 말이 심각하다, 아이를 쓰레기 봉투에 버리는 엄마며 할머니에게 담배셔틀하는 고딩이며 연쇄살인하는 성폭행범이며 땅투기에 횡령하는 진보 정치인이며 세상이 왜 이렇게 됐냐는 한탄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주변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며 그렁저렁 살아가고 있으니 그런 한탄은 뉴스 들을 때만 하는 것 같다. 미담도 다루지만 뉴스의 속성은 인류가 살아남고자 강화됐다는 두려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옛이야기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이것만은 알아야 해 하는 두려운 이야기들이 잔뜩이다. 뉴스 보다 더 심한 엽기적인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사건의 단면을 부각시키는 뉴스와 달리 옛이야기는 인생을 통해 인과관계를 생각해보게 하니 우리 삶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몸 조심해, 정신 똑바로 차려에서 나아가 나는 저런 면이 없나?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큰 틀에서 통찰하게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함께 살게 된 고양이와 쥐> 는 고양이가 먼저 적극적인 구애를 해서 쥐와 함께 살게 된 이야기다, 고양이는 쥐에게 덫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라 하고 쥐는 이 말을 애정 어린 충고로 받아들여 나다니지 않을 만큼 이들 사이는 돈독했다. 그랬던 그들의 동거는 다툼 끝에 결국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히게 되는 불행한 결말로 끝이 난다. 먼저 구애하고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고양이, 그는 쥐에게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하며 외출하고 나가 그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교회 제단 밑에 숨겨 놨던 굳기름을 혼자 다 쳐먹는다. 그래놓고 진실을 알게 된 쥐가 그의 거짓말을 낱낱이 까발리자 분노해서 덥석 쥐를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쥐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고양이가 친척 아이들의 대부가 돼야 한다며 나가선 꼭 필요할 때만 먹자고 자기가 먼저 제안한 약속을 어기고 혼자서만 굳기를을 다 먹어버렸으니, 그래놓고 오히려 화를 내며 막말을 퍼부으니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입 닥쳐! 한 마디 더하면 죽는다!” 고양이의 이런 뻔뻔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신동흔 선생은 이들을 강자와 약자로 보고 세상은 이런 식으로 강자가 약자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니 정신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를 잘 고르고 계약사항을 꼼꼼히 챙기라고. 그러면서 독일어로 된 원제가 이익사회 속의 고양이와 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동거는 공동사회가 아니라 이익사회라고. 사랑해서 결혼까지 간 남녀도 어쩌면 자기 이익을 위해 한것이 아닐까? 이익사회에서 공동사회로 나아가는 것, 이것은 우리가 관계속에서 끊임없이 도모해 가야할 일인 것 같다.
나는 고양이의 저 뻔뻔함은 쥐와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늘 내 말을 잘 듣고 고분고분했던 네가 감히 내가 숨겨왔던 과오를 내 앞에서 겁도 없이 까발리다니... 그런 마음이 닥쳐, 죽는다로 나온 것이 아닐까?싶다. 고양이를 강자로 만든 것은 쥐가 아닐까? 고양이와의 동거는 쥐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쥐도 좋은 것이 있으니까 함께 살았을 것이다. 덫에 걸릴 수 있으니 함부로 나다니지 말라는 고양이의 충고는 얼마든지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말을 믿고 외출하지 않는 쥐의 태도는 과연 스스로가 자기 주인으로서 행동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고양이가 마음대로 나가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하면서 굳기름을 파먹게 한 데에는 쥐의 순종적이고 자기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태도에도 원인이 있지 않을까? 니가 나한테 구애해서가 아니라, 니가 그런 충고를 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도 중요한 너의 어떠한 점이 있어서 동거를 한 것이고, 그 충고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갈지 안 나갈지는 상황에 따라 내가 하는 것이고 이렇게 그 선택의 주체를 자신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면 고양이가 쥐에게서 받는 에너지는 달랐을 것이다. 공동 사회는 각자가 선택으로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랬을 때 고양이 혼자 저 굳기름 한 단지를 다 파먹었다 해도, 아 그래 너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까지 나갔다 왔을까? 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너 왜 그랬어? 하고 비난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행동으로 실망했어 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다음 앞으로는 이렇게 해줘 하고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에 대한 고양이의 반응에 따라 쥐는 또 새로운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방적인 것은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본다. 내 권리를 스스로 못 찾아 먹고 있는 것은 없는가? 혹은 지금 주변과의 관계를 기꺼운 마음으로 맺어 가고 있는가? 지금 갈등이 있다면 상대가 변하길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내 손을 다르게 하면 손뼉은 소리 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맞추지 못하면 결혼한다는 전제조건을 내걸어 많은 남자들에게 수수께기를 내게 하고 결국은 죽여버리는 <수수께끼> 이야기의 영민한 공주는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주는 아름답다, 똑똑하다 칭송받으며 약자들의 세상을 모르며 살았을 것이다. 공주라는 위치에서 자신의 취약함을 볼 기회가 없었으리라. 늘 이기는, 시키는 존재였기에 술수까지 쓰면서 어떻게든 수수께끼를 풀고, 자신보다 똑똑하지 못하면 단칼에 목을 베라 명령한 것이다. 이런 공주의 존재, 과연 그녀만의 잘못일까? 세상 풍파를 겪어 지혜가 생긴 왕자가 그녀의 잘못을 짚어 주려고 도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공주의 미모에 마음이 빼앗겨 9명의 남자들이 죽어나갔는데도 또 목숨을 내걸고 수수께끼를 내는 저 왕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공주가 자신이 놓고간 망토로 술수가 들통나 결혼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결말, 과연 왕자는 공주와 결혼할 것인지? 어떤 결말이 우리에게 지혜를 줄까?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쥐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통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아무나 관계 맺지 말아야지 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보게 될까? 세상에 대한 경계가 지나쳐 철저히 대비하며 이익사회에 맞게 나를 무장한다면 <두 나그네>의 구두장이처럼 될 것 같다.
여행길에서 마주친 재봉사와 구두장이, 그들은 음양처럼 극적으로 달랐다. 재봉사는 작고 예쁜 생김새에 늘 명랑한 사람이고 구두장이는 식초를 마신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멱살을 잡는 사람이다. 예쁘고 쾌활한 재봉사는 누구와도 잘 어울려 음식이든 뭐든 잘 구했고 그것을 구두장이와 나눴다. 재봉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이었다. 내일 먹을 것은 내일 주시겠지 하는 낙천성, 어쩌면 그 낙천성을 구두장이는 질투했는지 모른다. 구두장이는 살아오면서 철저히 대비하지 않으면 잘못될 것이라는 내면의 강요가 박혀있는 사람이 아닐까? 자기는 겨우겨우 준비해야 하는데, 구두장이가 보기에 쉽게 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재봉사는 어디서 도움도 잘 얻고 명랑하니 미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재봉사의 그 대책없는 낙천성에 큰 코 닥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틀 걸릴지 이레 걸릴지 모르는 두 개의 갈림길에서 이레치의 식량을 챙긴 구두장이는 이틀치밖이 챙기지 않아 쫄쫄 굶게 된 재봉사를 철저히 짓밟아 버린다. 내가 괜히 대비를 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옳아! 하는 식으로. 눈 두 개를 구두장이의 식량과 맞바꾼 재봉사는 배고픔에 지친 봉사가 되어 결국 혼자 숲 들판 교수대에 남겨진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재봉사는 기적처럼 눈을 뜰 방법을 교수대의 시체들에게 듣게 되고 광명을 찾아 그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다시 길을 떠나게 된다. 배고픔보다 동물들의 사연에 공감한 재봉사는 잡아먹을 수 있었는데도 망아지며 황새며 오리 새끼들, 심지어 벌집의 꿀들마저도 그대로 남겨놓고 간다. 낙천적인 그, 광명을 찾아 감사함이 넘쳤기에 다른 생명에게도 베풀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에 대한 믿음만큼 세상은 반응을 하는지 재봉사는 곧 일을 하게 되고 솜씨가 좋아 궁정재단사가 된다. 그런데 하필 궁정 구두공이 바로 여행길에 만난 그다. 풀어야할 인연이 있기에 그들은 만난 것이다. 구두공은 자기가 한 짓에 찔려 선수를 쳐 재단사를 제거하려한다. 재단사가 구해준 동물들의 도움으로 왕이 내린 미션을 해결할 때마다 구두공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그는 벌써 지옥에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깨닫고 내가 잘못했다 했으면 좋았을 것을, 구두공이는 그런 세계를 모르는 것이다. 공동으로 함께 하는 세계를! 하늘이 도와야 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을 데려오는 미션 마저 재단사가 해결했을 때 구두공이는 자신의 설 자리를 잃고 스스로 떠난다. 하늘이 도와주는 재단사를 보며 자기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는 달라진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옛이야기는 이렇게 자기 이익만을 철처히 생각하고 대비하는 구두장이를 자연이 응징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까마귀에게 눈이 쪼여 미친 듯 숲속으로 달려간 구두장이, 필시 굶어죽었을 거란다. 내가 나만 생각하며 세상과 불통할 때 결국 세상에서 고립되어 세상 그대로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암흑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재봉사는 구두장이를 통해 냉정한 현실과 맞닥뜨리며 눈을 잃는 시련을 겪지만, 그의 타고난 낙천성으로 어둠 속에서도 세상으로 나갈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구두장이가 모함을 해도 반격을 하기는커녕 묵묵히 해결방법을 찾는 재봉사를 보며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하늘을 믿고 행운이 함께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지.” 미션을 해결하고 공주와 결혼까지 하게 된 재봉사는 이렇게 말한다. 옛이야기는 이렇듯 우리가 믿고 나가야할 방향, 세상은 내가 한 만큼 돌려받는다는 것을 하늘의 존재를 통해 말해주는 것 같다. 행운 또한 내가 짓는 것이라는 것도.
세상은 자기가 보는 대로 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재봉사와 구두장이를 통해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돌아볼 일이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구두장이에게도 다시 광명을 찾을 충분한 기회가 있다. 혹시 나에게 구두장이가 보인다면 그 기회가 무엇인지 살펴볼 일이다.
이렇듯 옛이야기를 통해 세상과 관계맺는 방법을 들여다 보니 뉴스의 사건 사고가 달리 보인다. 공동사회를 꿈꾼다면 그저 한탄하다 넘길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사고가 일어나게 된 맥락들, 그 안에 얽힌 인연들, 사회 구조적인 관계들을 종합하며 들여다 봐야할 것만 같다. 옛이야기 속 인물들을 통해 나를 비춰보듯이 그것들을 S-ray로 비춰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내 삶의, 이 사회의 성찰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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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샘의 지적대로 쥐에게도 문제가 있군요.쥐는 고양이에게 의존하고 있네요.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 순간 언제까지나 계속 사랑해줄 걸로 믿고 덥석 상대에게 의존해버리죠. 도파민 유통기한 2년이라고 했더니 다들 펼쩍. 너무 길다고 했던 게 생각나네요.^^
너 아니면 죽어버리겠다고 적극 구애해서 살려주는 셈치고 결혼했더니 온갖 괴롭히다가 나중엔 폭력까지 간 뒤 울고불고 하는 우리 현실을 보는 듯도 하고요.
당근 약속 안 지킨 고양이도 잘못이지만 쥐의 입장에선 왜 고양이이의 제안에 응했는지 봐야 하겠죠.
이 글이 그림동화의 두 번째인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개구리 왕자와 공주가 극과 시련의 관계를 통해 결혼을 나중에 하는 반면
고양이와 쥐는 결혼부터 먼저하고 언제나 행복할 줄 알다가 나중엔 언해피로 끝나네요.
재봉사의 모습에서 시비의 생각도 없고, 선악을 분별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모습은 장자에서 말하는 도인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관계의 설정과 맺음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로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적절하군요.
재봉사와 구두쟁이에서는 종교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재봉사의 말중에 '어머니는 하늘을 믿고 행운이 함께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지' 이 글이 마치 하느님을 믿고 생하면 행운이 온다로 읽혀지더군요. 그림동화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내용에 변화가 오는데, 특히 17세기 이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들었던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