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여하
아무리 둘러봐도 사막이다. 게다가 층층이 안개가 몰려다닌다. 여기가 동인가 서인가. 사하라인가. 고비인가.
길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서 걸음마를 뗄 무렵 길은 안방 안이 전부였다. 차차 자라면서 마루로, 마당으로 길어져 갔다. 가보니 길속에 길이 있었다. 길이 길을 낳고 또 길이 길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 길은 보리밭이랑 사이 오솔길 섶에 있었다.
욕심이 없어 근심이 없던 그 시절. 풀밭에 누우면 흘러가는 구름에게도 길이 있었다. 아무렇게나 떠가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규율과 질서가 있었다.
이십대의 길은 마구 휘저어버린 물감 같았다. 도대체 색깔이 무엇이 무언지 보이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냥 회색이었다. 무채색이었다.
삼십대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길을 헤맸다. 길은 더욱 막막해졌다. 아침에 일어나 한밤중 까지 길을 찾아 헤맸다.
불혹 때부터 길은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어졌다. 그냥 편하게 누워 있었다. 욕심을 놓으니 길도 평평해 지는 것인가. 어디에 가도 길이 있었다.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지천명이 넘자 길은 없어졌다. 어디든지 가면 길이요, 멈추면 벌판이었다. 누우면 요람이었다. 이제 길과 맨땅의 개념이 없어져버렸다.
어릴 적 해질녘이면 뒷산에 올라 그림을 그렸다.
하얀 신작로가 끝 간 곳 없이 펼쳐져 있었다.
들판은 초록색, 노을은 붉은색. 먼 산은 군청색. 오직 세 가지 색깔로만으로도 세상을 표현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혼나고 난 해질 무렵이었다. 먼 산을 청대독 색으로 수채화를 그리며 나는 푸른 포플러가 두 줄로 서있는 하얀 신작로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길을 따라 한없이 가고 싶었다.
하늘에도 길이 있어 비행기가 난다는 걸 어릴 때는 몰랐다. 온 하늘이 비행기의 길인 줄 알았다. 비행기는 밑에서 쳐다보는 이들의 선망어린 눈길을 모른다.
흰 비행운을 꼬리에 매달고 가는 제트기만 바라보았다.
모든 길에는 종착지가 있다.
꽃의 길은 잎이요, 종착점은 열매이다.
꽃은 열매 맺는 가을을 위하여 온몸으로 여름 땡볕이며 소나기, 우박, 가을 산들바람을 맞는다.
종종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다.
젊을 때는 자주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때로는 난달 길에서 어디로 가야하나 한참을 망설이기도 했다.
또 잘못 갈 때도 있었다.
그때는 가던 길을 되돌아서 가야하나. 왔던 에움길을 에돌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가다가 되짚어 오면 피로가 두 배로 누적된다.
길이 언제부터 생겼을까. 처음엔 다람쥐, 토끼, 노루가 지나다니다가 인간이 지나 다니며 생긴 것이 통길이 아닌가.
길을 가다보면 자꾸 옆길이 보인다. 그 길엔 붉은 사과도 열리고 향기로운 벼도 익는다. 그런데 내가 가는 길엔 안개만 무성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오줄없는 것일까.
때로 눈길을 걷기도 하고 빗속을 가기도 한다. 그래도 묵묵히 간다. 나에게 주어진 나의 길이기에. 떨쳐도 따라오는 그림자 같기에. 그래서 서산대사는 이런 선시를 남긴 것일까.
-눈 덮힌 들판에 서서-
눈 덮힌 들판을 걸을 때
모름지기 아무렇게나 걷지 마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은
반드시 뒤따라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이렇게 길은 한 걸음 떼기가 무서운 것인가? 나의 잘못된 한 걸음이 뒤따라 오는 이를 자칫 허방에 빠트릴 수 있단 말인가.
한때는 길은 무작정 치받이로 올라가야만 되는 것으로 알았다. 차차 길이란 꼭 올라가야만 되는 것인가 하고 회의가 생겼다. 굳이 정상을 정복해야만 되는가. 정상에서 보아야만 모두 보이는가. 산 중턱에서도 얼마든지 아래를 조망할 수 있지 않은가. 중도 포기자의 변명일까?
길을 간다. 때론 눈길을, 때로는 꽃길을.
때론 가풀막 진 자드락길을 때로는 논틀길을.
허방에 빠져 헤매기도 했으며 난달에 서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나 한참을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보리밭이랑 사이로 난 등굽이 길이면 충분한데 그것도 욕심인가?
어떻게 삶이 라일락 피는 향기로운 꽃길이기만을 기대하는 가 ? 얼어붙은 동토일수도 있고 끝없는 가시밭 길일수도 있지 않은가.다만 나에게 주어진 길이기에 보듬고 쓰다듬으며 묵묵히 갈 뿐이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어도 눈이 내리거나 고비사막처럼 햇살이 쨍쨍 내려 쬐어도. 그래서 낙타의 등을 베어 마른 목을 적셔도. 그것이 발부리 차이는 돌너덜길이든 발목을 잡는 푸서리 길이든.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2015. 712일
※난달:길이 여러 갈래로 통한 곳.
※에움길:빙 돌아서 가는 길. 우회로.
※자드락 길:나지막한 산기슭에 경사지게 있는 좁은 길.
※돌너덜 길:돌이 많이 깔린 비탈길.
※등굽잇길:등처럼 굽은 길
※푸서리 길:잡초가 무성하게 난 길.
※통길:본래 길이 없던 곳인데 많은 사람이 지나가 한 갈래로 난 길.
※허방:길 가운데 음푹 팬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