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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생년몰 |
특이사항 |
신광재(辛光在) |
1885~1922 |
만주에서 서로군정서 의용대장이 되어 많은 활동을하였다. |
배종철(裵鐘哲) |
1885~ ? |
조선청년연합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
이근복(李根復) |
1886~1964 |
병영 독립만세을 외치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
박채우(朴采佑) |
1881~ ? |
언양 삼일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았다. |
이종근(李鐘根) |
1897~1957 |
병영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1977년 대통령 표창,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최을택(崔乙澤) |
1925~1976 |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창원만세 사건을 주도하였다. |
방재구(方在矩) |
1900~1926 |
광복 60주년 기념식에서 울산시장을 통하여 가족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 |
이규장(李圭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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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급파, 언양 만세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을 은밀히 지참하고 돌아옴 |
최현구(崔鉉玖) |
1898~1941 |
외솔 최현배의 친동생으로 병영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
안병철(安秉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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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면 대안리 출신으로, 남창 4.8독립만세운동으로 피납되어 옥고를 치룸 |
허 황(許璜) |
1874~ |
언양읍 송대리 출신으로 46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언양 만세운동에 참여 |
이종용(李鍾龍) |
1899~1986 |
병영의거 시 사용할 태극기를 만든인물로 형제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
박 영 (朴英) |
1921~ ? |
울산읍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절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
이동개(李同介) |
1910~1955 |
언양청년단 간부로 활동하며 일본상품을 불매하자는 강연을 하다 체포 |
박종화(朴宗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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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참여, '한국인 면직원은 전원 사직하라'는 '협작적 격문'을 발송하였다. |
배봉수(裵鳳秀) |
1928.12.18~ |
동래중학교 재학중, 비밀결사 순국단을 조직, 선전책으로 활동하였다. |
장상준(張相俊) |
1918~ |
일본에서 독립운동 전위대인 애국청년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
박형관(朴炯관) |
1927~2001 |
비밀결사 독립운동청년회를 조직, 기관지를 제작하면서 항일운동을 모색하였다. |
이쾌경(李快慶) |
1899~1960 |
남창 삼일운동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현장에서 피체되었다. |
김인석(金仁錫) |
1906~1919 |
온산면 당월리에서 삼일운동을 모의하다 일경에 피체되었다. |
이규린(李奎麟) |
1856~1937 |
울산 태생, 유림단의 일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적극 전개. |
박제민(朴濟敏) |
1919~1943 |
대구 사범학교 재학 당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전개. |
이종필(李鍾弼) |
1892~1968 |
태극기를 제작하여 하상면 병영의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
김원룡(金元龍) |
1900~ |
언양 출신으로 동래고등학교 재학시절, 동래장터에서 삼일운동을 주도하였다. |
김선일(金善日) |
1880~1910 |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일경에 피체,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
윤학이(尹學伊) |
1886~1945 |
병영삼일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일본경찰에 피체 되었다. |
손입분(孫粒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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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총탄에 피격되어 중상을 입음 |
이성영(李成榮) |
1878~1940 |
언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
안장원(安長遠) |
1924~1971 |
부산항일학생의거(노다이사건)에 활약 공적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
차영철(車永徹) |
1920~2002 |
한국광복군 현지 공작원으로 대일 공작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 옥고를 치룸. |
김덕남(金德男) |
1919~1945 |
일본에서 민족차별에 대항하여 민족독립운동 그룹을 결성 |
송근찬(宋根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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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삼일운동 당시 일경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중상, 크게 다침. |
김한준(金漢俊) |
1884~1956 |
언양의거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대통령표창 추서. |
이쾌덕(李快德 |
1900~1975 |
남창의거를 주도,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룸, 대통령표창 추서. |
서태식(徐泰植) |
1889~1973 |
언양의거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대통령표창 추서. |
최윤봉(崔允奉) |
1898~1934 |
언양읍 장날 태극기를흔들며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
이수락(李壽洛) |
1899~1981 |
남창의거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
이재락(李在洛) |
1886~1960 |
남창의거를 주도, 소유재산 헌납 등 군자금 모금활동,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이용락(李龍洛) |
1897~1972 |
남창의거를 주도, '삼일운동실록'을 저술, |
고기룡(高基龍) |
1878~1947 |
남창의거를 주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
손진인(孫晉仁) |
1869~1935 |
범서 출생으로 군자금 모집에 활동, 건국포장 추서. |
이현우(李鉉禹) |
1894~1959 |
병영삼일운동 주도하다 옥고를 치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김응룡(金應龍) |
1901~1919 |
병영의거를 주도하다 현장에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 |
김순곤(金順坤) |
1912~1966 |
북구 강동 출생으로 한국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약 |
황정달(黃丁達) |
1897~1971 |
병영의거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주사문(周士文) |
1890~1919 |
병영의거를 주도하다 현장에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 |
이무종(李武鍾) |
1893~1956 |
언양의거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강기형(姜祺馨) |
1876~1940 |
언양의거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대통령표창 추서. |
성세륭(成世隆) |
1904~1959 |
보성학교 교사로 항일운동가. 지방 언론 문화 발달에 힘씀 |
성세빈(成世斌) |
1893~1938 |
동구 보성학교 설립, 항일 운동가, 신간회 울산지회에서 맹활약, |
문성초(文星超) |
1887~1919 |
병영의거를 주도하다 현장에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 |
엄 준(嚴俊) |
1885~1919 |
병영의거를 주도하다 현장에서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 |
양석용(楊錫龍) |
1892~1942 |
병영 삼일만세운동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대통령표창 추서. |
김낙수(金洛綏) |
1880~1919 |
언양읍 장날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만세를 고창 |
송병홍(宋炳虹) |
1921~ |
언양 출생으로 일본에서 조국 독립운동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
이종욱(李鍾旭) |
1896~1966 |
병영 삼일만세운동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서병희(徐炳熙) |
1867~1909 |
의병부대와 함께 울산 수비대를 습격. |
이희계(李希季) |
1900~1931 |
온양출신으로 남창 의거를 주도 |
윤현진(尹顯振) |
1892~1921 |
상북 소호리 출생으로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을 역임. |
박상진(朴尙鎭) |
1884~1921 |
광복회 총사령관으로 독립운동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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