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삼보 하옵고......
사람들은 고해(苦海)의 사바세계를 살아가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모두 염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뜻하는 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저마다 타고난 업보(業報) 때문이다. ‘삶’이란 자체가 욕망을 근거(根據)로 날로 새로운 변화를 추구(追求)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는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생명체를 불교에서는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중생을 유정(有情) 무정(無情)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모두 다 소중하고 존귀(尊貴)하다고 본다. 특히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더욱 소중히 여겨 서로서로가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도 제일의 가르침이 ‘살생하지 말라!’이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중생들의 먹이사슬에서 다른 생명체 중생들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구해주라고 가르치고 있다. 바로 방생(放生)을 가르치는 것이다. 극한 생존경쟁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물고기 방생, 조류 방생’ 운운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웃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이는 방생의 참된 의미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방생의 참된 의미는 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심(慈悲心)을 회복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행하게 되어있는 죄악을 참회하도록 하는데 있다.
사바세계 중생들의 괴로운 삶이 업보의 장애, 즉, 업장(業障) 때문이라면 업장을 멸(滅)하는 방법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참회이다. 생존경쟁 자체가 중생의 삶이라면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법기도 도량으로 이름난 능엄정사는 20년 세월을 하루도 기도를 쉬어본 적이 없는 기도 도량이다. 그동안 반야심경 100만(萬)독을 5년 세월에 거쳐 성취했고 신묘장구대다라니 100만(萬)독을 8년 반 세월에 원만히 마무리하고 회향했다. 이와 병행하여 동안거(冬安居) 6개월은 나무묘법연화경 독송기도를 하고 하안거(夏安居) 6개월은 지장본원경 독송기도를 봉행해오고 있다. 원활한 독송기도를 위해서 경전들을 자체 편집 제작해서 기도에 임하고 있다. 기존 경전들의 활자(活字) 크기가 작아 불편해하시는 불자님들을 고려해서 나무묘법연화경과 지장본원경의 활자를 확대(擴大) 편찬(編纂)하는 불사(佛事)를 원만히 마무리하여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 편찬 불사에는 안타깝게도 항상 경비문제가 뒤따른다. 경비 확보가 힘들어 경전 편찬 불사가 뒤로 미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생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고자하는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인 대(大)자비(慈悲)의 지장방생기도의례집(地藏放生祈禱儀禮輯)을 진즉에 편집(編輯)하고도 그동안 원고를 복사해서 기도를 올려왔던 애석함도 경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함 속에서도 매달 18일 지장재일 방생기도를 5년 세월을 꾸준히 봉행해 온 능엄정사 지장회(地藏會)라는 신행단체가 있다. 능엄정사 지장회는 열악한 능엄정사의 재정을 도맡아서 크고 작은 불사를 지원해오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지장회방생 기도집은 아직도 복사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동안 미루어 왔던 방생기도 의례집(儀禮輯)을 만시지탄(晩時之歎)의 아쉬움을 안고 드디어 발간 불사를 서두르게 된 것이다. 내친김에 그동안 생각해왔던 지장보살본원경 약찬게와 민간신앙인 용왕(龍王)기도의례와 산왕(山)기도의식등과 가정에서도 쉽게 불교제례의식으로 조상님을 모실 수 있는 가정불교제례집도 편집해서 제작하기로 했다. 지장보살님은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남염부제(南閻浮提) 중생들을 교화하시는 대원본존(大願本尊)의 보살님이시다. 지장보살은 고해(苦海)에 빠져 고통 속을 헤매는 사바세계 중생들에게 대비대사(大悲大捨)의 원력으로 고난(苦難)을 극복하고 열반락(涅槃樂)을 얻게 하시는 대원본존(大願本尊) 구원의 보살님이다. 또한 지장방생기도는 탐 진 치 삼독(三毒)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어 불성(佛性)의 지혜광명을 잃어버리고 신음하는 약육강식의 중생들에게 구원의 손길로 안내하는 화택(火宅)의 감로(甘露)인 것이다. 방생기도는 글자 그대로 생명을 살려주고 자유를 베풀어주는 기도인 것이다. 뭇 중생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병마의 고통에서, 천재지변의 고난에서 건져주고 풀어주는 것이 방생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사는 불자들이 방생 하나만 제대로 행해도 무량무수한 성불의 인연을 쌓는다고 한다. 축생과 미물을 볼 때마다 “어서 그 축생미물의 탈을 벗고 좋은 세상으로 환생하라”고 축원 한마디 해 주는 것만으로도 방생이 되는 것이다.
방생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수행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방생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중생은 육도를 윤회하는 자신의 업장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있다. 중생들은 이 긴 윤회의 굴레에서 수많은 업을 지으며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얽어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생(衆生) 삶의 고(苦)의 사슬은 질기고 길기만 한 것이다. 다른 중생의 생명을 해방시켜주는 공덕으로 자기 자신도 이 중생의 사슬을 벗는 지혜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중생 삶의 사슬을 벗어나는 일은 하루 이틀 만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수행과 선업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수(必修)인데 선업수행 중에는 방생이 제일 수승한 공덕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자들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이웃(중생)의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돌보는 대자대비의 큰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 대자대비의 큰마음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다. 사바세계 중생들의 삶에서 대자대비의 보살마음을 내기란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다사다난한 중생들의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중생업장의 사슬을 풀어내는 지혜를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자라면 이런 어려운 일을 능히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살이 되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보살의 마음을 구족하길 간절히 서원하면 된다. 물론 실천도 따라야 한다. 생명존중 참회(懺悔) 행원(行願)의 원대한 서원을 실어 지장방생기도의례집을 발간한다.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