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음 (碑 陰)
비(碑)의 뒷면에 기(記)가 있음은 옛적부터였으니 앞면에 미진한 것을 상세히 갖추자는 것이며 또
한 존중하고 우러르는 마음에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때문이다. 아! 문효공의 독실한
행적에 있어 그 문장이 전할 수 있는 것은 태상(太常)의 시이며,또한 시(諡)로는 박공간공(朴恭簡
公)의 장(狀)이 있고 광중(壙中)의 지(誌)로는 성문대공(成文戴公)의 문(文)이 있고 신도비로는 신문
경공(申文景公)공의 명(銘)이 있으니 가출대로 다 가추었다고 하겠다. 어찌 한마디 말이라도 덧붙
일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사국(史局)에 있어 성종실록을 편수 할 적에 행(荇)이 요속(僚屬)으로서 받들어 모셧는
데 헤아려보면 지금 벌써 삼십 여 년이 지났으나 경앙(景仰)하는 마음이 일찌기 조금도 헤이하지
않으니 아!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 가도 잊지 않게 하는 것은 진실로 그 얻은 바가 따로 있었던
까닭이라 할 것이다.
내가 평소 항상 공의 덕에 감복한 것은 자기에 대하여는 간소하고 그 어버이 섬김에 있어서는 효하
고 공무를 받듦은 부지런하고 사람을 대우함은 진실함이었다. 지금 제공들이 칭송하는 바도 역시
나와 같았으니 더욱 내 마음속에 믿었던 것이 헛됨이 아니었음을징험할 수 있다.
나는 공의 아들 부윤공(府尹公) 과 서로 친한 처지인데 그가 능히 그 대를 잘 계승하니 이역시 공의
순효(純孝)를 이어가는 것이라 하겠다. 공께서 전주 부윤으로 나갈적에 사람들이 좌천이라 이르지
않는자 없었는데 자신은 고향과 가까운 곳이라 하여 행(幸)으로 여기어 더욱 선덕(先德)을 드날려
길이 무궁토록 전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가위 죽은 이 섬기기를 산이 섬김과 같이 했다고 할 만하다.
저 시경(詩經)의 『효자가 끊어지지 아니하여 길이 너에게 선(善)을 준다.(孝子不匱 永錫爾
類)』는것이 이에 있지 아니한가? 부윤공(府尹公)은 전비(前碑)에 나타난 정랑군 인데 아들 생원
충(冲)을 보내와 표문을 청하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서하고 다음과 같이 잇는다.
둔산령 북에 있고, 지리산은 남에 있어
문효공의 행적이 이와서로 가지런하고
원천수(源川水) 근원있어
그 흐름 넘실 넘실
문효공의 경복이
이와 함께 장원하리
무엇을 증명할고
선정의 글월이 있네
후면에 내글 새기니
훗날에 이지러질소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錄大父) 의정부 우의정 겸 경연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이행(李荇) 찬(撰)
첫댓글 남원8세 문효공(윤효손) 신도비 비음입니다.
대종회(길호)회장님께서 원문 한문2427자를 직접 컴퓨터 작업을 하셔서 자료를 넘겨주어 올렸습니다. 대종회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