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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 같은 성도(1805.2017.6.18)
행 9:26-30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절대로 포기하지도,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주시고 살게 해주시는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가운데 바로 이름없이 그런 큰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받으면서도 그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배후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잘 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다가 조용히 사라져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을 것이며, 13편의 바울서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라는 인물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있었고, 13편의 바울서신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선교의 업적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바나바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서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1. 바나바는 본명보다는 별명이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행9:26절‘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사울이 분명히 개종을 했고 거듭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긍정적인 사람입니까? 부정적인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사람들의 좋은 점만 바라봅니까? 나쁜점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긍정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지어준 이름이고 그 사람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여기보면 바나바는 구브로라고 하는 지중해에 있는 섬에서 태어나서 유대인의 레위 지파속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지역에서 많은 농장을 소유한 대지주였는데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추측컨대 예루살렘에 와서 명절을 지키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아래 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맡겨서 당시의 교회에 필요한대로 쓰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요셉에게 ‘바나바’라는 이름을 지어주는데 ‘바나바’는 ‘바르나비스’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권위자’라는 말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본 이름은 없어지고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나바라는 이름은 개인적인 이름이 아니고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살려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은 바나바가 될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평신도였지만 사도라는 칭호를 갖게 됩니다. 행14:14절‘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 여기까지는 ‘바나바’라는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후에는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이와같이 바나바는 평신도입니다.
바나바가 왜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 되었느냐? 그것은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의 성품이나 성격 때문에 된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과 믿음에 따라서 착한 사람이 되었고 결국 그는 바나바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말은 ‘바나바’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바나바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합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옆에서 돕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보혜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도와주셨으니까요.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쓰신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요셉이라는 사람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서 그의 생애가 바나바 생애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를 누가 썼느냐? 하나님께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쓰시려고 예정하실 때 바나바를 먼저 세웁니다. 사도 바울이 있기 위해서는 바나바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어서 바나바가 되게 하십니다. ‘네가 바나바가 되어라 그래야 바울같은 위대한 사도가 너 때문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되었느냐? 이것이 신비한 비밀입니다. 행9:27절‘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스데반이 죽을 때 옆에서 증인들의 옷을 들고 서서 스데반을 죽인 자들과 함께 살기등등하게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예수 믿는 자들을 처단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려고 했던 악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사도 바울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본질적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이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래서 상대를 안하려고 합니다. 그가 은혜를 받았지만 주위에서 그가 은혜받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 그 먼 길을 걸어서 사도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이 분은 이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하면서 신원을 보증합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소개하는 내용은 첫째로 사울은 기적적으로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확실히 회개했다는 것과 둘째로 사울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한 사실과(행 9:20) 셋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과(행 9:22) 넷째는 복음전파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던 것을 증거하였습니다(행 9:23-25).
바나바가 사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나바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에게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를 인정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므로 바나바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줍니다. 그래서 사울이 드디어 제자들과 교제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런 변화가 있게 됩니다. 그는 그후부터 제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예루살렘을 출입하게 되었습니다(행 9:28). 바나바의 증거로 인하여 사울은 원사도들로부터 예수의 행적과 교훈에 대하여 들었고(갈 1:18) 그 후로는 사도들과 대립하거나 다투지 아니하고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려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복음이 전파되려면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의 진실과 신앙인격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오해 같은 것이나 전파자에 대한 선입관은 금물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마는 어떤 이들은 지도자가 넘어지고 잘못되는 것을 기대하고 취미로 삼는 사람도 없지 아니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사람들은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사람은 정의롭고, 지도자의 진실을 옹호하고 변호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자는 오히려 아부하는 사람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리와 아부를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이고 편엽된 사고방식이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믿음에 관해서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함께 출입할 때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인정하게 됩니다. 행9:29절‘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했습니다. 본토 유대인이 있고 헬라파 유대인이 있는데 이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을 누가 했느냐? 배후에서 바나바가 다 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없었다고 한다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사도적 사역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5-26절‘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목사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가 얼마든지 선교적 사건을 놀랍게 이루어서 영적 사역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생각합니다. ‘나 보다도 바울이 와서 하면 더 좋겠지’ 그래서 바울을 초청해서 세웁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바나바는 함께 일하면서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저는 제 생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제가 바나바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바울적 목회를 집중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께서 ‘너도 바나바와 같이 일하라’ 하시므로 ‘내가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바나바 목사가 되어야지’ 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생각해보면 성도는 바나바 성도가 되어야 하고, 목사는 바나바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문제, 교회의 문제는 서로 높아지려는 사람만 있지 배후에서 남을 높이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반장만 하려고 합니다. 무서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반장 아이가 병이 들어서 입원했습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같이 병문안 가자고 하니까 안간다고 그러더랍니다. 왜 안가려고 하느냐고 하니까 ‘그가 죽어야 내가 반장하지’ 하더랍니다. 전부 대통령, 반장하려는 사람만 있지 밑에서 보좌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동업을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세워주는 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고, 성령께서 하신 일이고, 성령께서 요셉을 변화시켜 바나바를 만들어 하신 일이고, 지금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바나바를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평안히 든든히 세워가는 교회가 되고자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가정, 직장, 사회 어느 곳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들은 ‘내가 남편을 격려해주는 바나바 아내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남편들도 ‘내가 아내를 격려해주는 남편이 되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사에 가서도 ‘내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바나바가 되어야지’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가장 좋은 어머니는 바나바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살려주는 일로 일생을 삽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역이 보혜사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어머니는 일생동안 자녀를 낳아서 길러주고, 보호하고, 도와주면서 일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성령이 하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다 바나바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을 잘 격려해서 살려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전 성도가 다 바나바가 되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사도도 아니고 교회의 집사도 아니고 초대교화의 한 평신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우리교회 성도들은 바나바와 같은 역활을 교회에서 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 바나바는 인격적으로 교회에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위로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사도들에 의해 권위자라고 불렸습니다(행4:36). 평신도인 그에게 사도들이 이런 별명을 붙여준 것은 그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행 4:36-37‘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했습니다.
사도들이 지어준 바나바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바나바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정치적으로 나라가 없는 로마의 통치아래에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고 더욱더 모세의 율법과 유전의 계율로 짖눌린 예루살렘의 유대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핍박과 위협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바나바는 눈과 마음을 주를 믿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칭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믿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새로오는 사람들, 현재 있는 사람들이건 위로하고 칭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행 11: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했습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행11:24a). 그는 관대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남의 잘못을 덮어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청년 사울을 교회에 들어오게 도와주고(행 9:26-27), 사역에 기용하였고(행11:25), 전도여행에는 그에게 지도력을 주어 세워주었던 사람입니다(행 13-14장).
1차 전도여행 때 중간에 돌아갔던 마가를 세워주는 일로 바울과 심히 다투기도 하였습니다(행15:36-41). 바나바가 바울을 세워주지 않았다면 13권의 바울서신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도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를 세워주지 않았다면 마가복음도 우리 손에 있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세워주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한 바나바의 착한 성품은 정말 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착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착한 사람으로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바나바 한 사람뿐일 것입니다. ‘착하다’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25: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왜 착해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착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엡2:10‘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했습니다.
착한 것은 빛의 자녀가 맺는 빛의 열매입니다. 엡5: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했습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5: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롬2: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했습니다.
3.어떻게 함으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면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딤전1:19‘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했습니다. 벧전3: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둔 증거판입니다. 사람에게만 양심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양심에 옳고 그름을 알게 했습니다.
착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는 양심의 악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10: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양심의 악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히9: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했습니다.
깨끗한 마음에서 착한 양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아야 합니다. 행23: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행24:16‘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말씀에 깨끗한 마음에서 착한 양심을 갖게 되고 착한 양심이 순결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종류의 양심이 있습니다.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 화인 맞은 양심, 더러운 양심이 있습니다.
마음에 선을 쌓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12: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쌓는다’는 말은 ‘저축하다, 저장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통하여서거나 환경을 통하여 일어나는 악한 생각과 뜻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자백하며 내버리고 마음에 계속하여 착한 생각과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자꾸만 쌓아야 합니다. 성경을 자주 읽거나 말씀을 자주듣고 좋은 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책이나 삶을 접하거나 기도하면서 자기를 살피는 생활은 선을 쌓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희생적인 봉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사람입니다(행4:37). 다른 성도 중에도 이런 헌금을 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가 특별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은 누구보다도 희생적인 섬김을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행11:24a),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를 뽑을 때는 뽑히지 못했던 평신도였습니다(행 6:5-6). 이로 보건대 그의 봉사는 다른 성도들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이루어진 봉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과 지위에 매이지 않고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섬김을 계속한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새로 교회에 들어온 청년 사울의 간증을 들어주고, 그 내용을 토대로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시켜주어서 그의 교회정착을 도와주었던 사람입니다(행 9:26-28). 행11:24절‘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이러한 칭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최고의 찬사며,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바나바의 신앙인격은 결과에 있어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26절‘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많은 무리들을 가르쳤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는데 결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안디옥 교회는 이방땅에 선교사를 통해서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아,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저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제자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이방 땅에서 제자가 나오는 것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안디옥에서 많은 무리를 가르쳤는데 그때 제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위대한 제자는 바나바에게서 나왔습니다. 위대한 제자의 모습을 바나바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바나바가 있는 곳마다 많은 사람을 살려놓는 위대한 사건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물질을 통해서 주는 자로서의 바나바였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들은 빈곤한 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에 예루살렘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오순절에 와가지고 은혜를 받고 고향에 안간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 은혜받고 예수 믿게 된 후에 고향 땅에서 핍박을 받고 실직자가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버림 당하고,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잃게 되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이것을 보고는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내놓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급식하시오’ 직장을 잃어버리고, 가정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모여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된다고 하면서 재산을 팔아서 제자들의 발 아래 놓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바나바야말로 진짜 바나바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의 손에 주어가면서 할 수 있는데도 발 앞에 갖다놓습니다. 자기 존재를 완전히 발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물질을 가지고 당시에 초대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바나바처럼 쓰여지기 바랍니다. 바나바라는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위로의 물질로 쓰라는 말입니다. 바나바가 되려고 하면 나의 물질이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을 봐야 합니다. 교회는 굶주리고 헐벗고 낙심되어서 위로를 기다리는 자에게 위로의 손을 펴주는 물질로 써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럽니다. ‘목사님, 밀알헌금 많이 해서 은행에 저축해가지고 이자로 결손가정을 도와주십시다’ 이것은 죽은 물질입니다. 이자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죽은 물질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담아줄 때 거기에서 사건이 나는 것입니다. ‘은행에 돈을 넣고 이자로 장학금을 준다.’ 그것도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돈은 죽은 돈입니다. 이자로 장학금을 주어서 공부한 사람중에서 인재가 나온 역사가 없습니다. 자기의 적은 것이라도 쏟아줄 때 거기에 정신이 들어가므로 인물이 나옵니다. 공부하는 것이야 국가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을 살려주어야 됩니다.
가난한 자에게 사랑의 손길로 빵을 먹여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혀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병든 자를 찾아보고,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것이 바나바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선 자리에서 ‘과연 내가 바나바처럼 살아야 되겠다’는 감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돈 벌어서 선한 사업 하거나 목돈 모아서 자선사업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모아서 은행에 저금해서 남을 구제하는 것 아닙니다. 현재 있는 작은 것을 가지고 사랑을 담아서 낙심되는 자를 찾아서 점심 한그릇이라도 나누면서 따뜻한 얘기를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객과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16:14-15‘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했습니다.
신24:19-21‘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신26:12절‘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객은 나그네요, 고아는 부모없는 아이들이요, 과부는 신랑없는 사람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사회적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바나바 물질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가 부흥될 때 예루살렘 모교회가 가물어 흉년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친히 헌금을 모아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합니다. 이런 위대한 정신이 우리속에 타올라야 됩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한 성도일 뿐 아니라 전 성도가 바나바가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있는 곳에 전도의 문이 열렸으며, 바나바가 있는 곳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왔으며, 바나바가 있는 곳의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모두 다 교회를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들어가는 곳마다 바나바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로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어느 직장, 어느 가정, 어느 사회든지 바나바가 들어가서 수많은 사람을 살려놓아야 합니다.
바나바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은 새신자 사울을 찾아서 먼저 사도 된 주님의 제자들에게 소개를 하듯이 교회에 처음 나온 새신자들에게 먼저 믿은 사람이 바나바로 그를 찾아가서 격려해주고 그에게 용기를 주면서 먼저 믿은 사람에게 가까이 하도록 만들어주어야 됩니다. 바나바는 새가족을 통해서 교인과 화목을 이루어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사울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를 데리고 가서 화목시켜 줍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사울에게 일을 맡깁니다.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가서 일을 하도록 맡겨줍니다. 우리의 생애에도 바나바와 같이 위대한 사역이 계속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전도를 통해 교회에 오는 사람이든, 다른 교회를 다니던 성도가 방문하였든 새 가족의 정착은 교회가 성도를 교회 내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중요한 일입니다. 전도를 아무리 많이 하여도 교회에 정착시키지 못하면 신앙의 성장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새 가족의 정착을 돕기 위해 이 일을 섬길 ‘바나바들’들이 되시되 제직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하시고, 일반 성도들도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은 누구나 다 바나바가 되어야 합니다.
새가족이 중심이 되는 교회입니다. 오래된 교회는 오래된 전통이 있기 마련이고, 이 전통은 새로운 문화에 대하여 수용적이기보다는 저항적입니다. 기존 신자들에게는 평안하게 느껴지는 전통이 새로 교회에 들어오는 새가족에게는 불편을 느끼게 하는 요소임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교회는 전통으로 닫힌 교회가 아니라 변화에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배타적인 태도와 자세가 새가족 정착에 가장 큰 장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존 신자 중심이 아니라 새가족의 입장을 이해하고 맞춰서 모든 것을 조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기존 신자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혼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교회도 변하여야합니다. 기존 신자가 새가족의 필요를 위하여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고 양보하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새가족에 대하여 특별한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합니다. 새가족을 기존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열린 태도로 도와야합니다. 새가족은 기존 신자보다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새가족이 소외감을 가지지 않도록 기존 교인들의 그룹 속으로 빨리 동화될 수 있게 도와야합니다. 새가족을 귀빈으로 친절하게 모셔야합니다. 주위에 새가족이 계신가 항상 민감하게 살피는 ‘바나바’가 되시고 우리교회에 ‘바나바’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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