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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활쏘기와 술
김성인
1.들어가며
요즈음 대부분의 활터에서는 음주(飮酒)를 금하고 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활을 잡지 말라고 하는 것이 대체적인 활터의 추세이며, 활쏘기 대회장에서는 음주 측정을 실시하여 음주 상태에서 시합에 참여하려 할 경우 선수자격을 박탈하기도 한다. “활”이라는 것이 사고로 이어지면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음주 후 습사를 금하는 것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
옛 선인들에게 있어서 활쏘기와 술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그 대답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조선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역사서로 개인이 쓴 사집(私集)이 아닌 분명한 국가의 공적인 기록물이며, 긴 세월을 기록함에 따라 1,893권 888책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실록에는 활터, 활쏘기와 술〔酒〕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풍부하다. 본문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실록에 관련된 모든 원문과 해석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1)활쏘기와 술에 대한 인식
실록을 통해 살펴본 활쏘기(이하 활쏘기, 활터, 활 쏘는 경우는 혼용한다.)와 술에 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식은 대체로 활을 쏘는 경우에는 당연히 술이 있고, 또한 술이 있어야만 한다고 인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태종 17년 4월 3일 1번째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금이 상왕을 봉영(奉迎)하여 술자리를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마련하고 활쏘기를 하니, 종친(宗親)이 시연(侍宴)하였다.
여기서 상왕은 태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난 정종(定宗)을 말한다. 태종이 상왕인 정종을 비롯한 종친들과 경복궁 경회루 아래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활쏘기를 했다는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종친들과 활을 쏜다고 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같은 해 윤5월 22일 3번째기사를 보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활을 쏘는 것은 왕 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부사(府使) 박강생(朴剛生)이 정여와 원욱을 연정(蓮亭)으로 맞이하여, 염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하고 활시위를 벌여 놓고 과녁을 세우고는 기생(妓生)을 불러 가무(歌舞)하면서 명중(命中)하는 것으로써 재능을 겨루었다.
정여와 원욱은 지방에 파견된 사헌부 감찰인 행대(行臺)였다. 지방관인 부사 박강생을 감찰해야 하는 사람들이 감찰 대상인 관리가 마련한 술자리에서 활을 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즐긴 것이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정여와 원욱은 파직되었지만 정작 이 자리를 마련한 박강생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몇 개의 기록을 더 살펴보자. 성종 9년 4월 21일 4번째 기사와 7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 날마다 관사(觀射)가 있는데 술이 없으면 옳겠습니까?
......활을 쏘는 것은 술의 힘을 빌리는 것이므로 술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두 기록 모두 이 전에 사헌부에서 술을 금하는 것과 활쏘기를 금하는 것을 성종에게 간언하자 임사홍(당시 정3품 도승지)이 이에 반대하는 연유를 밝히는 내용으로 임사홍은 활쏘기는 당연히 술이 있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날인 성종 9년 4월 22일 2번째 기사를 보자.
임금이 승정원에 묻기를 "내가 보건대, 재상들이 활을 잘 쏘지 못하니, 반드시 술기운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무릇 활 쏘는 것은 모름지기 술기운이 있어야 능히 잘 쏘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성종 또한 임사홍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종은 재상들이 활을 잘 못 쏘는 것은 술기운이 없어서 그런다고 하면서 활을 잘 쏘려면 술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즉 활은 술을 마시고 쏘아야 잘 쏘게 된다는 것이다. 성종 25년 2월23일 2번째 기사를 통해 하급관료의 활쏘기와 술에 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김수동(金壽童)이 아뢰기를 "옛 사람이 술을 만들어 낸 것은 제사에 쓰기 위한 것이었지, 술 마시는 것을 숭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늙은 자와 질병을 앓는 자와 활 쏘는 자는 오히려 마실 수 있겠지만......
김수동은 당시 종9품인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의 하급관료였다. 그 역시 활 쏘는 사람은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종9품의 하급관료로부터 정3품 당상관인 고위관료와 임금까지 활쏘기에는 당연히 술이 있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한걸음 더 나가 술을 마셔야 활을 잘 쏜다고 한 말로 미루어 당대의 활쏘기와 술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2)군신(君臣)의 활쏘기와 술
실록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활쏘기를 한 신하에게 술을 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술을 마시게 한 후 활을 쏘게 하기도 하였다. 세조 12년 윤3월 3일 1번째 기사를 보자.
왕세자(王世子)가 명을 받아 위사(衛士)를 북문(北門)에 모아서 활쏘기를 구경하고 술을 먹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왕세자는 훗날 예종이 된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그가 아버지 세조의 명을 받아 궁궐을 지키던 무관을 모아서 활쏘기를 시킨 후 술을 마시게 한 것이다. 같은 해 8월 20일 1번째 기사를 보자.
임금이 충순당(忠順堂)에 나아가서 입번(入番)한 군사 중에 활 잘 쏘는 자 50여 인을 불러서 후원(後苑)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이어서 술을 접대하도록 명하였다.
충순당은 경복궁 밖에 있지만 조선의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세조가 직접 숙직 등으로 근무하고 있는 군사 중 활 잘 쏘는 자 50여명의 활쏘기를 구경하고 이들에게 술을 먹이도록〔饋:먹일 궤, 대접할 궤〕 하명한 것이다. 비슷한 내용은 성종 13년 1월 15일 2번째 기사에도 있다.
임금이 삼전(三殿)에 잔치를 올리고, 여러 승지(承旨)와 입직(入直)한 제장(諸將)과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에게 명하여 활쏘기를 하게하고 술과 안주를 하사(下賜)하였다.
사옹원제조(提調)는 임금의 식사나 대궐 내 음식을 총괄하는 사옹원에 있는 종1품이나 종2품의 관직이다. 성종이 자신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잔치를 베풀고 근무 중인 문관과 무관에게 활쏘기를 하게하고 술과 안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들은 활쏘기를 마친 후 술을 내렸다는 것으로 술을 마시고 활을 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임금이 근무 중인 문무관들에게 위로 차원에서 술을 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들을 보면 술을 마시며 활을 쏘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단종 1년 2월 26일 1번째 기사를 살펴보자.
세조가 종관(從官)들과 더불어 영측산(營側山) 위에서 술을 마시며 활쏘기를 하였는데, 초인(草人)을 1백 30보(步) 밖에 세워놓고 두건(頭巾)을 씌우고 말하기를,"야인(野人)의 두목을 맞힐 자가 없는가?"하였다. 세조가 혼자서 4발을 그 머리에 맞히고, 3발을 그 몸에 맞히니 이에 부사와 서장관 등이 축배를 들어 세조를 칭하하고...
단종실록에 단종의 다음 왕인 세조라는 묘호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할 바는 아니다. 단종 1년에 세조는 곧 수양대군이다. 세조가 자신을 따른 벼슬아치와 술을 마시고 활쏘기를 하였는데 술을 마신 상태에서도 세조의 활 솜씨가 보통은 아니었나보다. 수양대군 시절에 관리들과 술을 마시며 활쏘기를 한 세조는 왕위에 올라서도 종친과 신하들에게 술을 대접한 후 활쏘기 시합을 시킨다. 세조 12년 9월 30일 1번째 기사의 내용이다.
......병조 참판 박중선(朴仲善)과 여러 장수들을 불러 궐내(闕內)에 들어와서 술을 접대하게 하였다. 이어서 좌우(左右)로 나누어 작은 과녁을 쏘게 하여 이긴 사람에게 녹비(鹿皮) 각 1장(張)씩을 하사(下賜)하였다.
세조가 종친과 여러 관리들을 궐내로 불러들여 술을 접대하고 활쏘기 시합을 시켰다는 기록으로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효령대군 이보(李𥙷), 임영대군 이구(李璆), 영응대군 이염(李琰)등과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등을 비롯한 영의정 구치관(具致寬), 좌의정 황수신(黃守身)등등으로 왕가의 대군들과 당대의 고관대작들이 두루 참석하였으니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궐내에서 술을 마시고 활쏘기 시합을 벌인 것이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 역시 야간근무〔入直〕중인 관료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활쏘기 내기를 시킨 일이 있다. 왕과 고관대작들이 이렇게 술을 마시고 활쏘기로 내기를 했다는 것은 궐 밖의 일반인들에게서도 그러한 행동이 별 무리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유교에서는 위정자(爲政者)의 모범적인 행동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을 위정자들이 솔선수범 하였다. 궐 밖 민간에서 활 쏘며 술 마시는 것을 금했다면 당연히 위정자들도 그러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금주령(禁酒令) 속의 활쏘기와 술
(1) 금주령에서 제외 되었던 활터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금주령을 내리곤 하였다.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식량으로 사용되는 곡식으로 술을 빚어 마신다는 것은 곡식을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술을 빚는 자나 마시는 자나 술을 마시는 자나 공히 처벌을 하였다. 영조(英祖)는 금주령 속에서도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고, 효수(梟首)를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야말로 금주령 속에서 술을 마시려면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마셔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금주령을 내리더라도 예외조항이 있었고 그 중에는 사후(射侯)가 있었다. 성종 16년 9월 15일 3번째 기사를 보자.
.....헌수(獻壽)·혼인(婚姻)·제사(祭祀)·양로(養老)·사후(射侯)·노병(老病)·복약(服藥)과 병술[甁酒]을 가진 자 외에는 이전대로 중외에서 술을 금하도록 하라.
성종이 흉년으로 인하여 예조에 금주령을 내릴 것을 명한 내용의 일부이다. 대궐 안팎으로 금주령을 내리되 예외 되는 경우 여덟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헌수(獻壽)는 환갑 등의 잔치에서 장수를 기원하며 술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혼인(婚姻)과 제사(祭祀), 노인을 봉양하는 경우〔養老〕, 활쏘기 하는 경우〔射侯〕, 나이 들어 병 든자〔老病〕,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服藥〕, 병술의 경우 등등에서는 술을 마셔도 된다. 대체적으로 잔치와 노인을 봉양하는 경우,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술을 마셔도 된다는 것이니 이것 또한 경로효친을 강조하는 유교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활쏘기 하면서 마시는 술은 금주령에서 제외한다고 명시를 하였다. 금주령이 내려질 때의 상황에 따라서 예외조항은 조금씩 변동은 있었다. 성종 18년 4월 25일 6번째 기사를 보면 예외조항이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인(婚姻)·제사(祭祀)·노병(老病)에 약(藥)으로 마시는 것과 무신(武臣)들이 활쏘기 할 때 마시는 것 이외에는 공사(公私)의 음주(飮酒)를 일체 엄하게 금지하도록 하라.
헌수와 양로 그리고 병술의 경우가 금주령에 포함되었다. 지나친 음주를 막되 한 병 정도의 술[甁酒]은 금지 시키지 않았더니 백성들이 손에 술병을 들고 다니며 마시자 병술까지도 제외시킨 것이다. 또한 활 쏘는 경우〔射侯〕가 무신들이 활쏘기 하는 경우〔武臣射侯〕로 바뀌었다. “射侯”를 활 쏘는 모든 경우라고 본다면 “武臣射侯”는 무신의 경우로 제한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중종은 이보다 더 예외조항을 축소하였다.
전교하였다. "근자에 금주(禁酒)를 명하였다. 그러나 활 쏘는 곳 및 노병(老病)으로 약을 복용하는 데에는 금하지 말도록 전에 이미 전교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중종은 노인이 병들어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와 활 쏘는 곳에서 마시는 경우만 제외하고 모든 경우에 금주령을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식량 상황이 한 병의 술이나 잔치 또는 노부모를 봉양하는 경우라도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정도로 나빴거나 또는 중종 자신이 극도로 술을 싫어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금주령 속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는 경우는 나이 들고 병이 들어 술을 마시는 경우와 활 쏘는 자리로 제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록을 살펴보면 상황에 따라 금주령의 예외조항이 조금씩 바뀌더라도 활터만은 금주령에서 제외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두 기록을 살펴보자.
(가)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금 비록 술을 금(禁)하오나, 활을 쏘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은 금하지 마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나) 헌부가 술을 금단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의 준례대로 하되, 활쏘기 하는 곳에서는 금단하지 말라."하였다.
(가)는 단종 3년 6월 1일 1번째기사다. 병조에서 상급기관인 의정부에 보낸 문서에 의거해서 단종에게 활을 쏘기 위해 마시는 술을 금하지 말아 달라고 아뢰자 단종이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마도 이전에 예외 없는 금주령을 내린 것 같다. 이에 군사관련 분야를 담당하는 병조에서 활 쏘는 사람들은 술을 마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이다. 무관이 활 쏘는 경우만 허락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활을 쏘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중종 17년 6월 6일 7번째기사다. 언론 활동이나 풍속 교정 관리들에 대한 규찰과 탄핵등을 담당했던 사헌부에서 금주령을 내릴 것을 요청한 것을 보면 당시 술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사헌부의 금주령 요청에 중종은 금주령을 내리면서도 활쏘기 하는 곳만큼은 금주령을 제외시킨 것이다.
(2) 금주령 제외의 폐단
위에서 살펴보았듯 조선의 금주령 속에서도 활쏘기를 하는 경우에는 음주가 허락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 금주령 속에서 술을 마시려면 목숨을 걸고 마셔야 하는 상황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금주령 속에서도 당당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활 쏘는 곳뿐이니 폐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세 기록을 살펴보자.
(가) 근일에 법령으로 금주(禁酒)하게 하였으나, 사후자(射侯者)는 금(禁)하지 아니하매 저들이 반드시 인연(因緣)하여 취회(聚會)하고 유연(遊宴)의 바탕을 삼으니, 폐단이 다시 여전합니다......
(나)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서거정(徐居正)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전일 본부(本府)에서 흉년으로 말미암아 금주(禁酒)를 시행하기를 청하여 금령(禁令)이 처음 내렸을 때에는 사람들이 다 두려움을 알아서 금령을 범하는 자가 적었었는데, 곧 사후(射侯)하는 자에게는 금하지 말라고 명하시매, 이때부터 술 마시는 일이 시작되어, 한가히 노는 시정(市井)의 무리가 사후를 핑계 삼아 모여서 술을 마시므로, 본부에서 날마다 단속하기는 하나, 궁시(弓矢)를 지닌 자는 금할 수 없습니다. ....... 바라건대 추수 때까지는 무부(武夫)의 사후 때에도 모두 술을 금하여 하늘의 경계를 삼가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다) 금주(禁酒)의 승전(承傳)에 대한 초고(草稿)를 내리면서 일렀다."혼례(婚禮)·제사(祭祀)와 노병(老病)으로 약을 먹는 데 쓰는 경우와 활 쏘는 곳[射候處] 외에는, 병주(甁酒)를 일체 금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평소에 금주하던 예(例)와는 다르다. 금년은 재변과 흉황(凶荒)이 옛날에 비해 더욱 심하니, 마땅히 사례를 달리하여 금지해야 한다. 만일 활 쏘는 곳을 금하지 않으면 이 일을 빙자하여 멋대로 마시는 자가 많을 것이니, 사후처(射候處) 3자(字)는 삭제시키라."
(가)는 세조 4년 5월 4일 1번째기사다. 서거정이 가뭄이 극심하니 세조에게 근신할 것을 상소하는 내용 중 일부로 금주령에서 활쏘기하는 곳을 제외시키니 사람들이 활쏘기를 핑계로 놀려고 일부러 잔치를 벌인다는 것이다. (나)는 성종 4년 3월 6일 4번째기사로 역시 서거정이 상소한 내용이다. 금주령 속에서도 활 쏘는 곳에서의 음주는 허락하니 시정잡배들이 활쏘기를 핑계로 술을 마셔댄다는 것이다. 사헌부에서 술 마시는 자를 단속 하고자 해도 궁시(弓矢)를 지닌 자는 단속할 수 없으니 활 쏘는 곳에서도 금주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상소를 받은 성종이 활 쏘는 곳에서도 금주할 것을 명한 것을 보면 아마도 활을 쏘지 않는 시정잡배들이 궁시를 들고 다니면서 술을 마시며 일으킨 문제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다)는 중종 23년 3월 11일 3번째기사다. 흉년이 과거와 달리 심각하여 금주령 내리는 것을 이전과는 달리 해야 한다면서 금주령 제외 대상에 들어있는 사후처(射侯處)라는 세 글자를 삭제하라고 하였으니 곧 활 쏘는 곳에서도 음주를 금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종이 “활 쏘는 곳을 금하지 않으면 이 일을 빙자하여 멋대로 마시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금주령 속에서도 음주가 허락된 활 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문제를 일으킨 무리는 정작 활을 쏘는 사람들이 아닌 “이 일을 빙자하여 멋대로 마시는 자”라는 것이다.
4)활쏘기에서 술이 허락된 이유
조선 사회가 활을 쏘며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며 활을 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이유는 조선이 유교(儒敎) 국가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할 만큼 유교(이하 유가(儒家))를 숭상하여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으로 여겼는데 유가에서는 활쏘기를 수양의 방편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유가의 시조로 여기는 공자의 언행이 적힌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다툴 일이 없으나 (만약 다툴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활쏘기 시합하듯이 한다. 겸손하게 읍하고 사대에 오르며 내려와서 진 사람에게 벌주를 마시게 하니 그러한 경쟁 방식이 군자답다.”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은 『예기(禮記)』 제46 사의(射義)편에 그대로 실려 있다. 공자가 이미 활쏘기와 군자(君子)를 함께 언급하였고 동시에 술〔酒〕을 언급한 것이다. 『중용(中庸)』 14장에서는 “활쏘기는 군자와 유사한 면이 있다. 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 공손추 상편에서 “인(者)이라는 것은 활쏘기와 같다. 활쏘기는 자신을 바르게 한 이후에 쏜다. 쏘아서 맞추지 못해도 이긴자를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활터마다 거의 빠짐없이 적혀있는 “反求諸己”가 유가의 경전에 나오는 문구인 것이다. 군자는 유가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간형이며 인(仁)은 유가의 핵심사상이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유가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인 인(仁)이나 이상적 인간상을 모두 활쏘기에 빗대었다. 때문에 활쏘기는 유가에서 수양의 방편으로 여겨졌던 것이고, 유가의 문헌에 나오는 대로 활쏘기와 술이 자연스럽게 함께 갈 수 있었던 것이다. 1433년 세종이 내린 교지에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술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절도를 삼으며, 활을 쏘고 술 마시는 자리에서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는 내용으로 볼 때 세종도 『논어』의 문장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다. 물론 조선의 활터에서 『논어』 속의 말을 지켜 술을 다만 진 사람에게만 먹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군사(軍事)적 이유 때문이다. 활은 조선의 주력 무기였다. 조선시대 에 무관(武官)이 있었지만 전시(戰時)에는 무관뿐만이 아니라 백성을 동원하는 체계였기 때문에 활쏘기는 수양의 방편일 뿐 아니라 전시(戰時)에는 국가를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세종 29년 12월 16일 1번째기사를 보자.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외(京外) 군사의 활 쏘는 것을 익히는 절차와 진법(陣法)을 연습하는 조건을 마감하여 아래에 적습니다....경성(京城) 안팎에서 모이어 사사로 쏘는 것을 헌부(憲府)에서 금하기 때문에 쏘기를 익히는 것이 드물어졌으니, 금후로는 연음(宴飮) 이외의 금주(禁酒)하는 때가 아니면 사사로 쏘아 술을 마시는 자를 금하지 말고, 쏘는 장소도 정한 곳을 구애하지 말고 임의로 모여서 쏘게 할 것.....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양 밖 군사들의 활 쏘는 법과 진법(陣法)을 연습하는 것에 대해서 병조(兵曹)가 건의하는 내용 아홉 가지 중 다섯 번째 내용이다. 사사(私射)는 공식적인 활쏘기가 아닌 사적으로, 임의대로 쏘는 활쏘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심히 금주령을 내려야 할 때가 아니면 쏘는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임의대로 모여 활을 쏘며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세종은 이를 허락 하였다. 여기서는 아무데서나 모여 임의대로 활쏘기를 하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에 “군사(軍士)”라는 제한이 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을 보면 일반인들의 활쏘기에서 술을 허락하는 것이 군사적 이유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병조(兵曹)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금 양계(兩界)에서 경보(警報)가 있어 군무(軍務)가 바야흐로 바쁘니 공사간(公私間)에 활쏘기를 익히는 일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도성(都城)의 안팎에서 5, 6인 이상이 사사로이 모여서 활쏘기를 익히면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헌사(憲司)에서 으레 모여서 술 마시는 일[會飮]로써 추핵(推劾)하니 그런고로 대소 인원(大小人員)이 자유롭게 활 쏘는 것을 익히지 못하고 있으니 군국(軍國)의 군사를 훈련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연회를 베풀지 않고 다만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시고 활 쏘는 사람은 금지시키지 마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글은 문종 즉위년 9월 14일 2번째 기사다. 평안도와 함길도〔양계(兩界)〕에서 국경지대의 상황이 평범하지 않음을 파악하고 병조에서 올린 글이다. 도성 안팎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활을 쏘며 술을 마시는 것을 사헌부에서 단속 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 쏘는 것을 익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병조에서는 잔치를 베풀 듯 놀며 술 마시는 것이 아니고 다만 술과 안주(고기)를 가지고 와서 활 쏘는 것은 금지시키기 말 것을 건의하였고 문종은 이를 허가하였다. 금주령을 내리고 사헌부에서 단속을 한다면 술을 안마시며 활쏘기를 익히면 될 터이지만 당대 사람들은 술을 못 마시게 하면 활도 안 쏜 듯하다. 이는 다음의 두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가)원상(院相)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무사(武士)는 술을 마신 뒤에야 활을 잘 쏘는 것인데, 지금은 금주(禁酒) 때문에 사람들이 활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임금이 말하기를, “흉년에 소민(小民)이 금주(禁酒)를 범한 것으로 인하여 혹 죄를 결단(決斷)하거나 혹 납속(納贖)하는 것은 모두 가긍(可矜)하다. 또 듣건대 무사(武士)의 무리들이 금주(禁酒)를 두려워하여 사후(射侯)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예사(藝射)를 강(講)할 때에는 모름지기 술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니, 지금 이와 같이 업(業)을 폐하는 것 또한 미편(未便)하다.”
(나)에서 성종이 말한 금주령을 두려워하여 사후(射侯)를 못한다고 한 것은 무사(武士)의 무리였지만 (가)에서 한명회가 한 말을 보면 비록 시작은 무사는 술을 마셔야 활을 잘 쏜다고는 했지만 금주령 때문에 활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대상은 무사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人〕이었다. 무관(武官)들이나 평민이나 활쏘기에는 술이 있어야 했고, 활쏘기는 결국 군무(軍務)에 관련되는 것이었다.
2.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조선시대 활쏘기에는 의래 술이 함께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흉년이 들었을 경우 내렸던 많은 금주령(禁酒令) 속에서도 활터는 예외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허락 하였다. 물론 무뢰배들이 이를 핑계 삼아 활과 화살을 들고 술을 마셔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기에 활터도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유가는 경전(經典)에서 활을 군자와 인(仁)에 빗대어 말하였기에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에서는 유가의 이상적 인간인 군자(君子)가 되기 위한 수양의 방편으로 활을 쏘았다. 그 활쏘기에서 겸손의 인덕을 닦고 진 사람에게는 벌주를 주었다. 그 벌주는 술기운으로 두려움과 우유부단함을 이겨내고 좀 더 잘 쏘라는 격려의 의미였을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당대의 주력 무기인 활을 평상시 연습을 해야 하는데 금주령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니 병조에서 나서서 활을 쏘면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지 말아 달라고 상소를 하고 임금은 이를 허락하였다. 조선의 활 쏘는 곳, 조선의 활터는 당연히 술이 있어야 하는 곳이었고 술을 마시며 활을 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성종의 말을 살펴보자.
내가 보건대, 재상들이 활을 잘 쏘지 못하니, 반드시 술기운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무릇 활 쏘는 것은 모름지기 술기운이 있어야 능히 잘 쏘게 되는 것인데, 술을 금한 것은 소비가 많기 때문이다. 활을 쏘고 술을 마시되, 기운에 적당하도록 하고 그치면 무엇이 해롭겠는가?”
성종은 “무릇 활 쏘는 것은 모름지기 술기운이 있어야 능히 잘 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고 더불어 “기운에 적당하도록 하고 그치면 무엇이 해롭겠는가?”라고 하였다. 활을 잘 쏘려면 술을 마셔야 하고,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한다.
생각건대 활쏘기를 수양(修養)과 양생(養生)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한량이라면 활을 쏘면서도 자신을 절제하여 대취(大醉)하지 않고 적당히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잔 술을 마시고 호기(豪氣)롭게 날려 보낸 화살이 홍심에 적중하는 것을 경험해본 한량이라면 “무릇 활 쏘는 것은 모름지기 술기운이 있어야 능히 잘 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은 기억하며 높이 칭송할지언정 “기운에 적당하도록 하고 그치면 무엇이 해롭겠는가?”라는 성종의 이 말은 기억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첫댓글 역시 활이랑 술은 잘 어울립니다. 과하지만 않으면.
하~ 뭐든지 적당히가 중요한가 봅니다. 맺음말이 정말 마음에 와 닫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요즘은 활터에서 술 마시지 못하도록 공문을 내려보내고, 지역 대회 때는 감독까지 내려보내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