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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신춘문예 시,시조,동시 당선작 모음 (tistory.com)
[2015,신춘문예 詩 당선작 모음]
[2015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최은묵
키워드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 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 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심사평 / 죽음의 사건을 환기하며 시대의 음화 그려내
사회 전체가 죽음의 사건들에 침잠된 탓인지 올해 투고작들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몽환적이고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들도 많았다.
이 죽음의 시대에 시는 현실적인 응전이나 전망을 보여주기보다는 그 내상(內傷)을 깊이 앓으며 치러내는 제의적 행위에 가까운 것일까. 그러나 이런 현상이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패배의식의 반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당선작인 최은묵의 ‘키워드’ 역시 ‘죽은 우물’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는 세월호를 비롯해 죽음의 사건들을 환기하면서 그것을 상징화된 제의로 감싸안는다. 나머지 시들에서도 어딘가 깨지고 부서지고 불구화되고 불모화된 존재들이 그려내는 고통과 폐허의 풍경은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작품은 서진배의 ‘고립한다’였다. 이 시는 ‘고립’에 대한 사유를 ‘벽’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밀고나가 개성적인 존재론에 이르고 있는데, 특히 ‘고립되다’의 수동성을 ‘고립하다’의 능동성으로 전환해내는 인식의 힘이 좋았다. 하지만 산문적인 어투나 언어의 긴장을 잃어버린 대목들이 눈에 띄고 나머지 작품의 밀도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이 밖에도 유니크한 발상과 탄력적인 리듬을 보여준 김창훈의 ‘스핑크스의 그림자’, 대상의 기미를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잘 풀어낸 이정오의 ‘멀다’ 등도 좋게 읽었다. 당선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나머지 세 분에게는 격려와 기대의 마음을 전한다.
[2015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김성호
로로
나는 너에 대해 쓴다.
솟구침, 태양의 계단, 조약돌이 되는 섬; 깊은 수심에 가라앉은 이야기를 떠올리다가 나는 너를 잊곤 한다.
로로, 네 빛깔과 온도를 나는 안다. 네 얼굴이 오래도록 어둠을 우려내고 있는 것을 안다. 더 이상 깊지도 낮지도 않은 맨살 같은 나날을 로로, 나는 안다.
네가 생각에 잠길 때 조금씩 당겨지는 빛과 무관한 조도를 안다. 마음에 마음이 부딪혔다. 소리가 났다. 그쯤은 네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어서 내 망각은 너의 미래에서 쑥쑥 자란다.
마을은 물에 잠기고 고통은 가장 가볍다. 로로, 내 한 살 된 부엉이를 로로라 부를 때 날개에 대해 적고 싶은
두려움도 모른 채 쿵쾅이는 마음을 너는 알까? 여긴 쓸려갈 거야,
온 마을의 고양이가 낮 동안 밋밋하게 비상하는 것을, 환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너는 알까? 로로, 우리 모두는 네 내면과 살았다. 나는 그곳에서 눈에 띄지 않는 한 형상이었다. 우린 오래도록 있어도 고요한 줄 몰랐지. 나는 오늘 온통
상처투성이여서 내일도 빛을 삼키고 반짝일까 무섭다. 사지를 갖추고 내일이 지상에 엎드릴까 무섭다. 로로, 나는 널 부르면서 여전히 네가 고스란히 피어오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동안만은 날 잊곤 하는 걸까. 로로, 네가 들린다. 언제일까?
로로, 나는 너에 대해 쓴다.
내면에 내면이 쏟아졌다. 카스트라토
구름, 비틀림, 작은 의식, 이런 것들을 떠올리곤 하다가 나는 다시 너를 잊어버린다.
내면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 음악처럼 다가와
심사평/문정희·김사인
우리는 어떤 새 시인을 기다리는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동시에 매혹하는 시쓰기, 읽기 전과 후의 우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해방과 자유의 에너지를 내장한 시쓰기, 그러므로 쓰는 이뿐 아니라 읽는 이에게도 근원적 의미의 모험이어 마땅한 그런 시쓰기의 시인을 우리는 설레며 기다린다.
시라는 이름의 관행적 작문방식에 갇혀 오히려 생과 세계의 피 흐르는 실상으로부터 시 자체가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돌파하는 패기의 글쓰기, 한국어의 갱신과 재구성이 그로부터 시발될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정당한가. 바로 이 오래된 물음을 또한 고통스럽게 치르는 가운데 일종의 시적 윤리성을 확보한 글쓰기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의 새로움이지 ‘새것 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시대 민중시풍의 단순 답습이 오늘의 문학적 대안일 수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유에서 안이하고 나태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최종환, 맹재범, 김성호로 최종 후보를 압축한 다음, 김성호를 이견 없이 당선자로 확정했다. 최종환이 적출해내고 있는 생의 비극적 아이러니들은 진지하고 시의성 있는 것이었지만, 관점과 시적 사유에서 어떤 투식이 느껴졌다. 더 자신을 던져넣어 돌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맹재범은 생의 구체와 형상화의 신선함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어설픈 점이 있었다.
김성호는 내면을 언어로 투시하는 힘, 나아가 그것을 시적 문장으로 조직하는 감각과 내공으로 우리를 움직였다. 그는 확보된 관념이나 느낌, 사실의 서술로 시를 삼지 않고, 참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언어적 형식으로 시가 기능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안이 비어있는 비인칭의 이름 ‘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마음과 언어의 섬세한 탄주에 귀를 기울이면, 윤곽이 모호한 듯하나 매우 진실하고 예민한 한 벌의 심미적 긴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김성호의 언어사용이 구현하는 미감과 아우라를, 처음 듣는 음악을 만나듯 체험해 보기를 독자들께 권한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견지되는 한에서만 이런 시는 유효하다는 것, 그렇지 않을 때 요령부득의 주관적 요설이나 겉멋의 함정에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일 수 있다는 우리의 우려가 기억되기를 바란다. 심사 또한 모험이다. 새 시인의 미래에 우리 자신을 걸고자 한다. 각고의 정진을 당부한다.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정현우
면(面)
면과 면이 뒤집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면들은 적다
금 간 천장에는 면들이 쉼표로 떨어지고
세숫대야는 면을 받아내고 위층에서 다시
아래층 사람이 면을 받아내는 층층의 면
면을 뒤집으면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복도에서, 우리의 면들이 뒤집어진다
발바닥을 옮기지 않는 담쟁이들의 면.
가끔 층층마다 떨어지는
발바닥의 면들을 면하고,
새 한 마리가 끼어든다.
부리가 서서히 거뭇해지는 앞면,
발버둥치는 뒷면이 엉겨 붙는다
앞면과 뒷면이 없는 죽음이
가끔씩 날선 바람으로 층계를 도려내고
접근금지 테이프가 각질처럼 붙어있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할 때 내 면을 볼 수 없고 네 면을 볼 수 있다 반복과 소음이
삐뚤하게 담쟁이 꽃으로 피어나고 균형을 유지하는 면, 과 면이 맞닿아 있다
어제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 같다고
사다리차가 담쟁이들을 베어버렸다
삐져나온 철근 줄이 담쟁이와 이어져 있고
밤마다 우리는 벽으로 발바닥을 악착같이 붙인다
맞닿은 곳으로 담쟁이의 발과 발
한 면으로 모여들고 있다
[심사평]
우리 시대 삶의 다양한 ‘면’을 성찰
시인 남진우(왼쪽), 정호승씨. /김연정 객원기자 본심에 오른 응모작 가운데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면(面)’(정현우), ‘우산 없는 혁명’(고원효), ‘야간개장 동물원’(박민서) 세 편이었다.
‘야간개장 동물원’은 지상의 거울로서 밤하늘의 별자리를 헤아리는 상상력의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낮에는 잠을 자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천상의 동물들을 통해 야성을 상실한 채 일상에 매몰돼 살아가는 현대인의 처지를 반어적으로 노래한 이 작품은 단아한 이미지의 직조가 인상적이었다.
‘우산 없는 혁명’은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올해 외신면을 달군 홍콩의 우산 혁명을 소재로 하고 있다. 쉽고 친근한 어조로 쓰였음에도 이런 유의 시가 빠져들기 쉬운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었고 우리 현실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재기와 사유의 깊이를 엿볼 수 있었다.
‘면’은 평면 측면 얼굴 경계선 바닥 방향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면이란 단어를 활용하여 우리 시대 삶의 다양한 ‘면’을 성찰한 작품이다. 인간이든 건물이든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면들의 만남과 어긋남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이 작품은 들려주고 있다. 이 시에 담긴 지혜는 통속적 잠언을 훌쩍 뛰어넘은 것으로서 오래 되새길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세 작품을 앞에 놓고 장시간 고민과 토론을 거듭하다 선자들은 ‘면’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다른 두 응모자의 경우 여타의 투고작들이 충분한 믿음을 주지 못한 반면 정현우의 작품은 모두 고른 수준과 밀도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본심에서 논의된 응모자로는 ‘바람의 혈관’의 김민구, ‘자백’의 김창훈 등이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기원한다.
정호승(시인)·남진우(시인)
[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지의 척후병 / 김복희
연속사방무늬 물이 부서져 날리고
구름은 재난을 다시 배운다
가스검침원이 밸브에 비누거품을 묻힌다
바닥을 밟는 게 너무 싫습니다
구름이 토한 것 같습니다
낮이
맨발로 흰색 슬리퍼를 끌면서 지나가고
뱀이 정수리부터 허물을 벗는다
구름은 발가락을 다 잘라냈을 겁니다
전쟁은 전쟁인거죠
그는 무너진 방설림 근처에 하숙하고
우리 집의 겨울을 측량하고 다른 집으로 간다
우리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나누었던가
폭발음이 들렸던가
팔꿈치로 배로 기어가 빙하를 밀고 가는 정수리
허물이 차갑게 빛난다 눈 밑에서 포복하던 생물들이 문을 찧는다
인질들이 일어선다
[201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방의 전개 / 윤종욱
밤새 발 밑에는 좁은 사막이 쌓였어요
새벽은 불투명하게 돌아왔고
매일매일 더 늙은 모습으로
우리는 입이 말라 버린 나무
조금씩 빠르게 허물어지는 어둠처럼
우리는 잎이 진 사람
침묵을 정확하게 발음해 보세요
턱 끝까지 숨이 막힐 만큼
우리가 창문이 없는 방이었을 때
내일을 열어 볼 수는 없었어요
우리가 방에서 갈라져 나온 뒤에
우리는 식탁의 높이에 맞춰 앉았어요
모래를 모두 쓸어 낸 몸으로
표백된 셔츠를 입고
찻잔의 깊이와 끓는 물의 부피를 재며
우리는 눈대중으로도 알고 있었어요
어둠이 얕은 곳에서는
언제 눈을 떠야 하는지를
어디에 눈을 둬야 하는지 말이에요
시계는 벽을 등지고 있었는데
시계는 무엇이든 가리키려 하고
우리는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해요
사막의 발단을 출발하여
가느다란 아가미가 발생하기까지
우리는 진화하는 걸까요
밖은 왜 여전히 어두운 거예요
우리의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보세요
분주한 아침이 지나고 나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문을 닫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어요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는, 잘 휘어지는 건축물을 짓고 싶습니다
심사평 / 발명과 발견, 색깔 다른 두 신인 서로의 장점 배웠으면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
최종적으로 두 편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발견인가, 발명인가. 한 작품은 습작기가 단단해 보였다. 방(가족)을 중심으로 대상을 장악하고 그것을 질서화하는 능력에 신뢰가 갔다. 동봉한 응모작 수준도 일정한 편이었다. 반면, 다른 한 작품은 앞의 작품과 대척점에 자리했다. 재난 상황이라는 대상을 넘어 낯선 이미지를 통해 이질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자는 발견의 시, 후자는 발명의 시에 가까웠다.
발견의 시가 윤종욱씨의 ‘방의 전개’였고, 발명의 시가 김희씨의 ‘백지의 척후병’이었다. 윤종욱씨의 경우 ‘방의 발단’이나 ‘숲’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고, 김희씨의 ‘토마토라 한다’도 인상적이었다. 윤씨는 안정감이 돋보였고, 김씨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두 신인을 동시에 문단에 내보내기로 했다. 서로 다른 개성이 발명을 아우르는 발견, 발견을 아우르는 발명의 길을 열어나가면서 우리 시의 풍요로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탄생 장소와 시간이 같은 두 신인에게 두 배의 축하를 보낸다.
최종심에 오른 나머지 두 편의 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유씨의 ‘성찬의 시간’이 갖고 있는 미덕은 가독성이었다. 일상적 언어를 능란하게 직조하는 능력이 깊이의 시학과 결합한다면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올라설 것이다. 고동식씨의 ‘금단’은 진술(아포리즘)이 묘사를 압도하는 대목이 못내 아쉬웠다. 진술과 묘사 사이의 균형을 찾아낸다면 조만간 우리 시의 전면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분발을 바란다.
심사 문학평론가 남진우 시인 황지우 이문재
[201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관용
선수들
전성기를 지난 저녁이 엘피판처럼 튄다
도착해보면 인저리타임
목공소를 지나 동사무소, 골목은 늘 복사된다
어둑해지는 판화 속에서 옆집이라는 이름을 골라낸다
옆집하고 발음하면 창문을 연기하는 배우 같다
보험하는 옛애인이 전화한 날의 저녁은
폭설과 허공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외하는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아침은
접시 위의 두부처럼 무심해진다
만약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만약은 수비수 두세 명은 쉽게 제쳤으며
늘 성적증명서보다 힘이 셌다
얇은 사전을 골라 가장 극적인 단어를 찾는다
아름다운 지진이란
지구의 맨 끝으로 달려가 구두를 잃어버리는 것
멀리 있는 산이 침을 삼킨다
하늘에선 땅을 잃은 문장들이 장작 대신 타고
원을 그리며 날던 새들의 깃털이 영하로 떨어진다
원점은 어딘가 빙점과 닮았다
양철 테두리를 한 깡통처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트랙처럼
잠시라도 폼을 잃어선 안 된다
전광판이 꺼지더라도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한다
[2015 경향 신춘문예]시 심사평 - “균열·의외성… 자본의 시대, 시가 필요한 이유 증명”
선자들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벚꽃은 지상에서 초속 5센티미터/ 속도로 떨어지고 있겠지”라는 빛나는 감성을 품은 ‘휠체어 드라이브’는 무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직관을 형상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조용히 응시하는 이 시편은 시인의 상상력이 뜻밖의 시적 전개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간밤 느티나무 찻상이 쩍/ 갈라졌다”는 직핍으로부터 출발한 ‘느티나무 찻상’은 사물의 갑작스러운 붕괴로부터 빛과 향을 흡입하는 착상이 신선하고 발랄했다. 그러나 이 시인 역시 예상 가능한 상상력의 구도에서 비약하지 못한 채 익숙한 은유로 생의 비의를 드러내는 데 안주했다. 어느 병동에서의 남녀의 갈등을 바둑에 빗대어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결심을 가진 백과/ 그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흑 사이”로 묘사하며 사뭇 긴장감을 자아내는 ‘직선을 이탈한 두 남녀가 모이는 점’ 역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아프게 드러냈으나 곳곳의 상투적인 시행들의 병렬로 인해 이른바 언어 자체가 살아있는 ‘물활’(物活)의 경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응모작들 중 가장 두드러진 작품은 ‘선수들’이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그러했지만, 이 시인은 무슨 제재를 다루든지 일거에 대상을 장악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리듬으로 시를 운산(運算)하는 범상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특히 표제작인 ‘선수들’은 언어와 언어가 충돌하며 파열하는 섬광 같은 것을 뿜어내면서 자기 시를 “전력을 다해 서 있는” 삶의 트랙으로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이 시는 시적인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다른 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 이 주밀한 자본의 세계에서 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균열과 의외성이다. 트랙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결말을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의 이 과감한 투신의 성과를 당선작으로 미는 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201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조창규
쌈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쌈장 개발의 기원〉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심사평] 황현산/ 김혜순
본심의 심사 대상이 된 작품을 읽으면서, 이 시들을 쓸 때 이 응모자들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간절한 욕구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경로로 시를 쓰는 과정에 입문하게 되어 습관처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고 싶었다. 그만큼 장식과 조립에 치중한 시들이 많았으며 재주나 재치에 기댄 시가 많았다. 응모작 전체가 고른 수준을 갖춘 예도 드물었다.
김태형의 ‘수상한 식인’ 외 3편은 일종의 은유 놀이로서 ‘노르웨이’라는 거처를 시에 등장시켜 자유자재로 그 거처의 경계를 입술이나 국경으로 늘려 잡으며 유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집을 은유해서 ‘노르웨이’ 같은 이름으로 비유해 불러야만 할 것 같지 않은가. 시가 재미있는 지점들을 품고 있었지만 함께 응모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같은 시들에는 이 시를 쓴 시인의 역량을 의심케 만드는 거친 일면이 있었다.
김상도의 ‘졸립다가 마른’ 외 4편은 거미줄에 걸린 줄도 모르는 곤충처럼, 우리의 일요일 같은 휴식이나 평화, 그 뒤에 도사린 위태로움을 슬며시 혹은 경쾌하게 던지는 솜씨가 좋았다. 그런 상황을 ‘졸립다가 마르는’ 같은 형용어귀로 눙쳐버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뒤에 붙은 4편의 언어 실험적인 시들이나 나열, 조립의 시들이 이 시의 감동을 반감시켰다.
‘쌈’ 외 4편은 ‘쌈’을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 ‘달의 뒷장’, ‘긴혀’, ‘보쌈’으로 비유하고, 이 비유에 어울리는 쌈장을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으로 만들고 난 다음 이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을 흡입하는 나를 내세워 자연의 아름다운 변화와 삼투, 세월과 일식을 파노라마처럼 전개하고 있었다. 유쾌한 유머가 있고, 축소와 확장이 화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 속의 ‘나’는 쌈을 멋지게 비유해낼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쌈’의 현상들이 시적 화자의 감각들을 통과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응모작들이 각각 다른 경향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5편 모두가 나름의 탐구가 있는 점을 높이 사서 ‘쌈’을 당선작으로 선하는 데 합의했다.
[2015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최영랑
어머니의 계절
빈집엔 봄이 오지 않고 여름도 오지 않고 빈집의 계절만이 서성거린다
빈집은 쉽게 들어갈 수 없고 대문 안에 들어서도 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끄럽고 어스름한 저녁 누구라도 거부하는 빈집만의 습관이 있다
그림자 없는 대문에서 빈집의 툇마루를 바라보면 그곳은 포근했던 무릎, 포근한 미소가 떠올라 헐렁한 하루가 부풀었다 사라진다 눈을 감고 나는 경직된 다리를 뻗는다
가끔 무릎을 내어주는 거기, 정류장처럼 너그럽다 잡초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영역 다툼에 휘말려도 장독대의 도깨비풀이 항아리 속을 욕심내어도 그냥 말줄임표만 사용할 뿐이다
빈집은 기다린다 밤나무가 뒷마당에 밤톨을 툭 툭 던지고 바람이 기왓장을 와장창 깨뜨릴 때도 빈집은 그냥 “좋은 날이야”라고 말한다 빈집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집이 자꾸만 멀어져 간다 그 집에 가까이 가야 한다 들어가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가서 닳은 무릎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심사평]모성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 깨달아
신춘문예는 한국 문학의 축제다. 새로운 시인이 탄생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이 축제에 참여한 이는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오랜만에 배도 좀 불러야 한다. 그러나 이번 축제의 상에 놓인 음식들은 숙성과 발효가 되지 않은 겉절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시는 겉절이보다 오래 숙성되고 발효된 맛의 깊이를 요구한다. 그릇에 담긴 음식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면 그릇 또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모순과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시라 하더라도 부조리하다는 메시지밖에 없다면 그 또한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박현영의 <유형에 대한 탐구>, 박민서의 <실록>, 김재인의 <오늘의 만남>, 최영은의 <어머니의 계절> 등 4편이었다. <유형에 대한 탐구>는 유형에 대한 구체성이 모호했다. 제목이라는 그릇만 크고 그릇에 담긴 내용은 “유형에 대해 날마다 간구했지만/ 질문은 의문으로 남아/ 이곳을 비추는 하나의 불빛이 된다”처럼 모호했다. <실록> 또한 “무화과 묘목을 심으려고 판/ 마당 한 귀퉁이에서 녹슨 자물통이 나왔다”고 했으나, ‘녹슨 자물통’이 시의 내용물로 제시만 되고 그 의미에 대한 추구가 결여되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수사는 화려하나 ‘만남’의 내용이 빈약하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모성을 ‘빈집’에 비유한 <어머니의 계절>은 비교적 완성도가 높았다. 모성을 통해 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는 점 또한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시를 쓰는 일도 노력하는 일이다. 당선자는 더욱 노력함으로써 한국 시단의 밑거름이 되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 황동규·정호승
[2015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은석
탕제원
탕제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무릎의 냄새가 난다
용수철 같은 고양이의 무릎이 풀어지고 있던 탕제원 약탕기 속 할머니는 자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었다 할머니의 무릎에는 몇 십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 있었다. 가늘고 예민한 수염을 달인 마지막 약, 잘못 쓰면 고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난다.
밤이면 살금살금, 앙갚음이 무서웠다. 고양이를 쓰다듬듯 할머니의 무릎을 만졌다 몇 마리의 고양이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할머니들이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빗줄기가 들어간 무릎의 통증 등에 업힌 밭고랑 한가득 들어 있는 무릎
탕제원 오후는 화투패가 섞인다. 화투 패는 오래 달일 수가 없다 약탕기 안에 판 판의 끗발들이 성급하게 달여지고 있지만 가끔은 불법의 처방이 멱살을 잡기도 한다.
약탕기 속엔 팔짝팔짝 뛰던 용수철 몇 개 푹 고아지고 있는 탕제원, 가을 햇살은 탕제원 주인의 머리에서 반짝 빛난다. 무릎들이 무릎을 맞대고 팔월 지나 단풍을 뒤집고 있다.
[2015 신춘문예-시·시조 심사평] '탕제원' 대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잔잔한 감동 '소금꽃' 바다와 사람 생애 상징화하는 솜씨 탁월
올해 투고된 작품은 많았으나 전체적으로 그 수준은 평이했다.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은 시 부분에서는 '대장장이 아버지' '피아노는 왜 뿔을 숨겼나' '최신버전 백신 다운로드하기' '탕제원' 4편이고, 시조 부분에서는 '겨울 꽃밭' '블랙커피를 읽다' '소금꽃' 3편이다.
'대장장이 아버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성찰과 표현의 아름다움은 돋보였으나, 당대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측면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피아노는 왜 뿔을 숨겼나'는 피아노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현대적 삶의 고단함과 삭막함에 대해 재치 있고 도전적 자세로 표현해내고 있는 점은 주목되었으나 너무 표현의 신기성에 치우친 점, 이해불가의 내용이 상당수 끼어들어 있는 점 등이 지적됐다. '최신버전 백신 다운로드하기'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로 당대 사회적 특성을 담아내고 있고 표현의 참신성이 돋보였으나, 시적 표현의 형식들이 역시 신기성에 머물러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에 비해 당선작 '탕제원'은 표현의 묘미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점이 주목을 끌었으며 무엇보다 대상을 참신하게 바라봄으로써 신선미와 함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점이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 강은교·이우걸·김경복
[2015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박예신
새벽낚시
물상들이 번져가는 어슬한 하늘 움켜쥔 새벽. 틈으로 푸른빛 스치더니 이내 어둠은
바다를 기억으로 길게 풀어놓는다. 꽤 괜찮은 미끼를 산 낚시꾼이라면 으레 찾는 그 곳.
긴 장대 쥔 어둑한 손들이 끊임없이 베어대는 채찍소리.
벌어진 암흑 사이로는 가늠키 어려운 뭔가가 일렁이는 듯.
침묵은 침묵을 질러대고 산전수전이 무언으로 공간에 쟁쟁한 순간.
뇌리에 깊이 묻어둔 별 몇 개는 음파에 부딪혀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고 은빛으로 부서진다.
하얀 포말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은빛 조각들이
꾼들의 주린 눈동자 위에 가득 들어찰 때까지.
한 살배기의 미소가 언뜻 지평선에 걸쳐있다. 하지만,
아이가 휩쓸린 별과 아버지가 뿌려진 달은 슬프다.
혹은 애상을, 혹은 사라진 순간을 건진다고 하는
이른 새벽이 연주하는 푸른빛 안개.
감정이 씨줄과 날줄로 낚싯줄에 엉키거나
그물로 한 움큼 건져지는 민생의 곳.
내일도 이곳을 지배할 만감의 울림은
태양의 저쪽 편으로부터 타오르다가
서서히 붉게 사그라든다.
심사평 시적 형상성에 재능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가능성에 기대 걸어볼 만
예심을 거쳐 선자에게 의뢰된 작품들은 시심으로 보면 공들여 가다듬은 흔적이 역력하지만 감각이나 인식으로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는 그만그만한 수준의 성취였다. 모름지기 신인이라면 참신함은 물론이지만, 시로써 자신에게 되물으려는 질문 또한 절절해야 할 것이다. 투고된 시편들의 스펙트럼이 연륜의 다채로움만큼 넓지 않았다는 것도 심사자에겐 유감이었다. 마지막까지 논의로 남았던 작품은 김태인 씨의 「안개 서식지」, 김정윤 씨의 「캥거루주머니 속으로」, 박예신 씨의 「새벽 낚시」, 이윤정 씨의 「모자는 만년필을 써본 적이 없다」 등이었다.
김태인 씨의 시편은 집요한 비유의 힘이 습작의 공력을 느끼게 하지만, 체화되지 못한 관념이 시를 유연하게 끌고 가려는 동력을 어딘지 모르게 경색되게 한다. 각박한 의욕보다 비약이 가능하도록 여백을 남겨놓는 지혜가 때로는 소중한 것이다. 김정윤 씨의 시편은 정감이나 의식이 가 닿는 지향에서 어느 정도 견고한 시의 토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응시의 대상과 시적 의도가 각각 다른 주파수를 갖고 있는 듯, 일체화되지 못하는 어색함이 화려한 수사를 공허한 독후에 빠지게 만든다.
이윤정 씨의 시편에서는 서로 무관한 사물들이 포개지며 자아내는 맥락의 삼투가 돋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 언급한 분들에 비해 당선의 수준에 훨씬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사변적인 주제조차 사물의 구체성에 풀어 넣으려는 주체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판단을 기우뚱거리게 했다. 그러나 시의 대상들이 제 본분을 지켜내도록 비유의 상호성을 끈기 있게 살폈으면 하는 아쉬움을 안게 하는 것이 흠이었다.
박예신 씨의 시편은 시의 미학을 의식하는 문제적 시선이 옅은 대신 해맑고 풋풋한 정감이 잔뜩 묻어나는 시편을 선보인다. 이는 노력해서 얻어낸 습작의 결과가 아니라 그 나름의 재능이 시적 형상성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경우가 아닐까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이 응모자의 세계는 이즈음 신인들이 보여주는 장황하고 난삽한 수사적 중첩에서 한 걸음 비켜선다. 아쉽다면 수사적 평면성을 떨치고 저만의 개성으로 부피가 부조되는 시의 구상력을 함께 건사하는 일이다.
숙고 끝에 박예신 씨의 「새벽 낚시」를 당선작으로 밀어올린다. 습작의 연조로 보아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보려는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각고의 정진을 당부한다.
김주연(문학평론가)`김명인(시인)
2015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비커의 샤머니즘/ 김민율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 심사평 우물과 비커 … 새로운 상상력으로 접목한 ‘이종교배’
시 부문 심사를 맡은 김기택(왼쪽부터), 이원, 권혁웅 시인.
한국경제신문만의 특징인 ‘청년 신춘문예’라는 타이틀답게 푸르고 뜨거운 청년정신이 깃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청년의 언어에서 보고 싶은 것은 ‘두려움’이라는 불가능을 ‘열정’이라는 가능으로 바꾸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응모자들은 이 점을 한번 뒤척여보면 좋겠다.
김솔, 김민율, 배지영, 장우석의 작품을 두고 논의했고 최종적으로는 김민율과 배지영으로 좁혀 여러 논의를 거듭했다. 김솔의 ‘바오밥 씨 이야기’ 외 4편은 일상을 유머러스한 서사 구조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언어의 탄력이 약하다. 시적 긴장을 확보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해 본다면 좋겠다.
장우석의 ‘이태리타월’ 외 4편은 삶과 현실의 비루함을 과장 없이 풀어내는 면이 돋보였다. 심각한 진술을 언어유희를 통해 극복하는 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다. 후반의 폭발력을 보강하면 좋겠다.
배지영의 ‘크림’ 외 5편은 상상력이 신선했다.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진술에 그치는 아포리즘이 걸렸다. 솔직한 언어와 솔직한 시적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김민율의 ‘비커의 샤머니즘’ 외 4편은 응모작 전반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집중하고 있는 세계가 보였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성실한 습작 기간을 거쳤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인 ‘비커의 샤머니즘’은 구조가 튼실한 작품이다. 우물과 비커의 ‘이종교배 상상력’이 신선했다. 이 점이 새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게 했다. 우물-비커, 돌-눈금, 기억-개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한 전개가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했다. 절제된 감정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시적 탐험을 시도해 보아도 좋겠다. 시인으로서 첫 호명을 축하한다.
김기택·권혁웅·이원